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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도연명陶淵明

도연명의 삶

도연명의 삶

도연명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은거에 대한 염원을 밝혔다.

그는 작품 서문에서 시집간 여동생의 죽음으로 관직을 버린다고 했지만

“돌아가리라. 전원이 장차 거칠어져 가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라는 문구로 은둔을 선언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도연명은 다시 저작랑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는 이후 20여 년간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산수와 시와 술을 벗 삼아 전원생활을 했다.

 

은거는 개인적인 성향과 현실에 대한 소극적 도피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동진 왕조에 대한 충성심과 송나라 왕조에 대한 저항이 내포되어 있었다.

 

도연명이 은둔생활을 시작할 무렵 동진 왕조는 멸망의 기운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진 시대의 혼란은 훨씬 전인 4세기 중엽부터 시작되었다.

 

347년에는 명제明帝의 사위로 형주자사荊州刺史를 지냈던 환온桓溫(312-373)이 반란을 일으켰고

402년에는 손은孫恩(?-402)이 오두미도五斗米道 교단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동진의 명장 환온桓溫의 아들 환현桓玄(369-404, 환초桓楚)이 반란 진압을 핑계로 제위에 올랐으나

장군 유유劉裕가 이 두 난을 진압하고 420년에 남조 송나라를 세웠다.

도연명이 은둔한 지 15년이 지난 해였다.

 

421년 도연명은 송나라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농사에만 전념했다.

한 때 그는 생활이 궁핍하다 못해 걸식 행각까지 할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생활은 그의 사상에 변화를 가져왔다.

 

도연명은 백성들이 빈곤한 원인을 세상의 혼란스러움에서 찾았고

더 나아가 수탈과 억압이 없는 이상 세계를 꿈꾸게 되었다.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는 이런 사상적 변화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중국을 대표하는 시인들 중에는 술을 사랑했던 시인들이 많다.

술을 좋아한다는 데서 유래한 별명도 부지기수이다.

 

이백李白은 술의 신선神仙,

소식蘇軾은 술의 친구,

육방옹陸放翁은 술 미치광이,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유령劉伶은 술의 귀신으로 불렸다.

 

마지막으로 술로 평가된 시인이 있었으니 바로 중국의 대표적 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 자는 원량元亮)으로 그는 술의 성인聖人으로 표현한다.

 

그는 술을 열렬히 칭송했는데 그가 남긴 약 130여 수의 시 가운데 정반 정도에는 술에 관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도연명은 중국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은둔자, 전원시인의 최고로 꼽히는 인물이다.

 

술의 성인聖人으로 불리는 도연명陶淵明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남북조 시대라는 중국사 대분열기에 남조의 동진東晋과 송宋나라가 교체되는 시기를 살았다.

 

동진의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가 왕씨 형제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하자 이에 노한 왕돈王敦이

군대를 휘몰아 건강으로 쳐들어와서는 그를 반대하는 대신들을 죽였다.

 

원제의 아들 명제明帝가 즉위한 후에도 왕돈은 또다시 건강을 공격했는데 결국에는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돈은 병들어 죽었다.

 

그 후 명제의 아들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역양歷陽(안휘성 화현)을 지키던 장수 소준蘇俊이 반란을 일으키고 건강으로 쳐들어왔다.

동진 조정에서는 형주자사 도간陶侃을 파견해 소준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2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도간은 도연명의 증조부다.

도간은 원래 왕돈의 부하였으나 후에 공을 세워 형주자사가 되었다.

 

그런데 도간을 시기하는 자가 왕돈 앞에서 그를 헐뜯었고 왕돈은 그 말을 믿고 그를 광주로 보냈다.

당시 광주는 아주 외진 곳이었고 광주로 보낸다는 것은 강직을 의미했다.

 

도간은 광주로 좌천되었지만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 아침마다 벽돌 1백 장을 서재에서 마당으로 옮기고

저녁이 되면 그 벽돌 1백 장을 다시 서재로 옮겼다.

 

하루도 빠짐없이 그런 일을 반복하자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그 연유를 물었다.

이에 도간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 비록 지금 몸은 남방에 있지만 중원을 수복하는 일을 한시라도 잊은 적이 없네.

한가하게 지낸다면 앞으로 유사시에 나라가 부를 때 어떻게 그 중임을 떠맡을 수 있겠는가?”

 

왕돈이 죽은 후 진나라 조정에서는 도간을 정서대장군 겸 형주자사로 승격시켰다.

도간이 다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형주의 백성들은 앞 다투어 성 밖으로 나와 도간을 환영했다.

 

관직이 승격된 뒤에도 도간은 매사에 신중하며 공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형주 관아의 대소사를 모두 자신이 직접 처리했다.

 

그런 그의 수하에 있는 관리들 중 몇몇이 술 먹고 도박을 해서 공무를 그르쳤다.

도간은 그 말을 듣고 성이 나서 술그릇과 도박 도구를 모두 몰수하여 부숴버리고 장본인들은 매로 다스렸다.

그 후부터는 다시는 술과 도박으로 공무를 그르치는 일이 없었다.

 

어느 날 도간이 교외에 나가 순시를 하는데

어느 행인이 아직 익지도 않은 벼이삭을 뜯어 장난질을 하고 있었다.

도간은 그 사람을 당장 결박하고 매를 치게 했다.

 

자사가 그렇게 곡식을 애지중지한다는 말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더욱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형주 지방은 점점 더 풍족해졌다.

 

도간은 41년 동안 군대를 거느렸는데 군기를 엄명하게 집행하고 공정 무사해서 모두들 그를 존경했다.

그가 관장하는 지역은 사회 질서가 정연하고 도적이 없어서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고 편한 잠을 잤다고 한다.

/행복을 선사하는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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