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漢詩/도연명陶淵明

도연명陶淵明 4言詩의 특색과 그 지위

도연명陶淵明 4言詩의 특색과 그 지위

/최우석 우송대학교 중국유학과 초빙교수

 

1. 머리말

陶淵明(365-427)이 시 창작을 하던 시기는 중국 시단에서 五言詩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당시의 대다수 시인들은 建安시기 이후 비약적으로 발달하여

이미 시단의 가장 중요한 형식이 된 오언시 창작에 보다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도연명 역시 4言詩 보다는 5언시를 더욱 선호한 까닭에 현존하는 그의 詩作 대부분은 5언시이다.

따라서 도연명에 대한 후세의 호평은 주로 그의 5언시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에 반해 도연명의 4언시는 역대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혹자는 그의 4언시에 대해 그다지 좋지 못한 평가까지 내리기도 했다.

 

예를 들어 육간여陸侃如 풍원군馮沅君이

“도연명의 사언시는 심히 많으나, 그러나 훌륭한 것은 매우 적으니 이 열 수 역시 빼어나지 못하다. ···

따라서 도연명은 5언시에는 뛰어났지만 4언시에는 부족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라고 언급한 바와 같다.

 

일반적으로 도연명의 4언시는 그의 5언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예술적 성취가 떨어지는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위와 같은 평가는 도연명의 4언시를 그의 5언시의 예술 성취와 비교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중국 고대 詩歌史에서 4言詩만을 따로 떼어 놓고 4言詩史라는 큰 틀에서

다시 도연명의 사언시를 조명해 본다면 그가 이룩한 예술적 성취가 결코 작지 않음을 살필 수 있다.

 

4言體는 先秦시대 <詩三百>의 가장 중요한 시가 형식이었다.

<詩三百>은 이후 漢代에 이르러 經典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고

이에 따라 4언의 형식 또한 시가에서의 ‘正體’ 지위를 얻게 된다.

 

이러한 상황 아래 한대 이후의 문인들은 4言詩를 창작할 때 <詩經>을 전범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建安시기에 曹操가 樂府의 형식을 이용해 새로운 4언시의 경지를 개척하거나

혹은 正始시기에 혜강嵇康이 ‘청준淸峻’한 풍격의 사언시를 창작하는 등

몇몇 작가를 제외하고는 큰 변화 없이 유지 되었다.

특히 西晉시기에는 4언시가 ‘中興’하기도 했으나 <시경>으로의 복귀는 더욱 두드러졌다.

 

즉 이 시기의 4언시는 주로 <시경>을 모방하거나 답습하는 수준에만 머물렀던 것이다.

그런데 東晉에 이르러 도연명은 <시경>의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자신의 뜻과 감정을 보다 자유롭게 펼쳐 보이는 수준 높은 4언시를 창작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도연명 이후 이렇다 할 4言詩作이 거의 전무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본고는 바로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먼저 도연명 이전의 4언시가 어떻게 전변轉變해 왔는가를 간략히 살펴 본 뒤

도연명의 사언시가 어떠한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나를 고찰하고

나아가 중국 4언시사에서 이것이 갖는 의의를 거시적인 안목에서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2. 陶淵明 이전의 4言詩 전변轉變 추이

일반적으로 4言體詩는 2言句가 중복되면서 탄생한 것으로 본다.

이 4언의 형식은 일찍부터 중국 초기 문단에 가장 주요한 형식으로 자리 잡았으니

대략 西周부터 春秋시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최고의 번성기를 누린다.

 

이 시기의 시가를 대표하는 <詩三百>이 4言句를 가장 주요한 형식으로 삼고 있는 점은 그러한 사실을 대변한다.

그런데 孔子는 이 <시삼백>을 제자를 가리키는 가장 주요한 과목중의 하나로 삼았으니

이후 儒家의 門下에 든 문인이라면 모두 시를 창작할 때 이 <시삼백>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사언시 창작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시삼백>이 후세 4언시의 창작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특히 공자가 <시경>을 ‘아언雅言’으로 여겼으며 또한 단순히 문예작품으로만 보지 않고

그 실용성을 강조했으며 더군다나 이를 통해 ‘온유돈후溫柔敦厚’한 인격을 수양하는

도구로 삼았던 점은 후세 4언시의 창작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즉 ‘아언雅言’이 필요한 공개적인 장소인 궁중에서 실용적인 목적으로 시가를 사용하는 제례祭禮나

혹은 공식적인 사교활동인 증답창화의 활동에서나 혹은 ‘詩敎’를 발휘하여 풍간諷諫이나 송미頌美를

하려는 장소에서는 <시경>의 주요 형식이었던 4言이 가장 선호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유가독존儒家獨尊’ 시대였던 漢代의 시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한대의 4言詩를 그 내용으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종묘제사宗廟祭祀의 내용.

漢初의 <안세방중가安世房中歌>19首 중 13수, 漢武帝 때의 <교사가郊祀歌>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술지述志의 내용.

위현성韋玄成의 <자핵시自劾詩> <계자손시戒子孫詩> 부의傅毅의 <술지시述志詩> 등이 이에 속한다.

 

셋째, 풍간諷諫의 내용.

위맹韋孟의 <풍간시諷諫詩> <재추시在鄒詩> 중장통仲長統의 <견지시見志詩> 등이 이에 속한다.

 

넷째, 유가사상儒家思想을 선양하는 내용.

반고班固의 <명당시明堂詩>

백랑왕당추白狼王唐菆의 <원이락덕가遠夷樂德歌> <원이모덕가遠夷慕德歌> 등이 이에 속한다.

 

다섯째, 人品과 才德을 찬미하는 내용.

환린桓麟의 <답객시答客詩> 응계선應季先의 <미엄왕사시美嚴王思詩>

채옹蔡邕의 <답대원식시答對元式詩> 등이 이에 속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漢代의 4언시는 <시경 頌>의 전통을 계승하는 종묘제사의 내용이거나

혹은 송미頌美 풍간諷諫의 詩敎를 발휘하거나 혹은 유가 사상을 선양하는 내용이 그 주를 이루었던 것이다.

 

물론 東漢末에 이르러 장형張衡의 <원시怨詩> 진가秦嘉의 <증부시贈婦詩>가 출현하여

서정抒情의 색채를 잠시 회복하기는 했지만 漢代의 4언시는 이 같은 내용이 주된 기조를 이룬다.

 

<詩經>을 그 字句數 대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總句數 1字句 2字句 3字句 4字句 5字句 6字句 7字句 8字句 9字句
송頌 734 0 0 14 685 32 2 0 0 1
대아大雅 1617 1 0 8 1492 97 15 1 0 0
소아小雅 2316 0 6 12 2211 68 16 2 1 0
국풍國風 2612 6 8 124 2236 172 52 16 4 0
7284 7 14 158 6724 369 65 19 5 1

 

이 통계는 하전재夏傳才 <시경어언예술詩經語言藝術>(北京, 語文出版社, 1985, p11)참조했음.

 

사실 <시경>뿐만 아니라 <시경>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尙書尙書 반경盤庚>

또한 4言句가 112구나 있어 전체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

(이 통계는 손건군孫建軍 <한어사언구식漢語四言句式> <西北民族學院學報>1991年 第3期 p.38를 참조했음)

 

建安시기에 이르러 중국 시단에서는 5言詩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東漢시기에 이미 성숙기를 거친 5언시가 마침내

“建安初에 이르러 비약적으로 왕성해져” 시단의 가장 주요한 詩體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4언시가 5언시에게 시단의 주도권을 넘겨주었다고 하더라도 4언시는

南朝시기까지 여전히 ‘正體’로서의 지위를 지켰으며 실제 시가 창작 면에서도 여전히 중시 되었다는 사실이다.

 

먼저 建安시기의 사언시를 살펴보면 이 시기의 4언시는 크게 둘로 분류할 수 있다.

그 하나는 漢初 樂府 4언시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시경>의 구속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내용과 풍격을 읊은 부류이다.

 

조조曹操의 <단가행短歌行><보출하문행步出夏門行> 조비曹丕의 <추호행秋胡行><선재행善哉行>

조예曹叡의 <월출륜행月出輪行> 등이 이에 속한다.

 

특히 조조의 4언시는 <시경>의 구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4언시의 세계를 개척하였기에 심덕잠沈德潛으로부터

“<三百篇> 외에 스스로 기이한 소리를 열었다.”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시경> 이래로 정치 교화를 강조하는 詩敎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왕찬王粲의 <증문숙량贈文叔良> 번흠繁欽의 <원술권계시遠戌勸戒詩> 조식曹植의 <책궁責躬> 등이 이에 속한다.

 

正始시기의 4언시는 완적阮籍과 혜강嵇康의 시가 대표적이다.

완적에게는 13首의 4언시가 있는데 시 속에 비록 당시 유행하던

玄學의 내용이 담겨있더라도 대체로 詩敎의 전통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혜강嵇康의 4언시는 4언시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혜강의 현존하는 시 31수 가운데 과반수가 넘는 16수가

4언시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혜강은 4언시 창작을 선호했다.

 

그는 사언시의 大家답게 <시경>의 전통에서 벗어나 이른바 ‘청준‘淸峻’한 풍격을 개척하였으며

특히 노장사상과 산수를 그리는 내용을 적지 않게 읊어 晉代 4언시의 선하先河가 되었다.

 

심덕잠沈德潛이 그의 사언시에 대해

“혜강의 사언시에는 때때로 뛰어난 시어가 많으며

<三百篇>을 모방하지 않았고 더욱이 晉代의 선성先聲이 되었다.”라고 평한 바와 같다.

 

건안초建安初 5언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쇠퇴하는 양상을 보이던 4언시는 西晉에 이르러 ‘中興’의 국면을 맞게 된다.

 

록흠립逯欽立의 <선진한위진남북조시先秦漢魏晉南北朝詩>에는 70여명의 서진 시인의 詩作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50여명의 시인이 4언시를 창작했고 그 수량 또한 西晉 전체 詩作 가운데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당시의 부함傅咸 육운陸雲 응정應貞 손증孫拯 등과 같은 시인은 시 창작에 있어서

4언시를 5언시 보다 선호했었으니 이러한 모든 점은 서진의 4언시가 어느 정도 ‘中興’했었나를 대변해주고 있다.

 

서진에 이르러 4언시가 어느 정도 다시 ‘중흥’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崇儒’ 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즉 유가를 숭상하던 당시의 사회정치 분위기 속에서

詩敎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인 4언시가 나름대로 환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서진의 詩作은 주로 <시경>의 <雅><頌> 정신을 발양하는 작품이 주를 이루는데

속석束皙의 <보망시補亡詩> 부함傅咸의 <육경시六經詩> 순욱荀勗의 <종무제화림원연시從武帝華林園宴詩>

부현傅玄의 <명당향신가明堂饗神歌> 등이 그 좋은 예이다.

 

東晉에 이르러 4언시는 당시 풍미하던 玄學의 영향을 받아 玄言의 내용이 그 대세를 이루게 된다.

물론 西晉시기에도 4言의 玄言詩는 창작되기는 했다.

그러나 서진시기의 玄言 4언시는 詩敎의 전통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반면 東晋시기의

현언 4언시는 <易經>과 老莊의 사상을 발휘하는 이른바 玄理를 시속에서 본격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이처럼 東晋시기의 4언시가 玄理의 내용을 대폭 수용하게 된 것은 玄學家들이 추구하였던

‘간약簡約‘의 특색이 4언시의 간결함과 서로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東晋의 대표적인 玄言詩人인 손작孫綽의 詩作 대부분이 4言詩이며 다른 현언 시인인 왕호지王胡之 사안謝安

왕풍지王豐之 서광徐廣 등의 詩作도 5언시 보다 4언시가 많은 점은 그러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 준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도연명은 玄言詩의 풍상風尙에서 벗어나

<시경> 전통의 4언시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또한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보여 주게 된다.

아울러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4언시를 적지 않게 창작함으로써 중국 4언시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

 

3. 陶淵明 4言詩의 특색과 지위

 

(1) <詩經>의 전통 계승

현존하는 도연명의 4언시는 모두 9수가 있다.

비록 그 수량은 많지 않지만 東晋시기의 4언시가 총 80여수에 불과 한 것을 염두에 두면

한 시인의 작품으로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도연명의 4言詩作은 모두 그 만의 독특한 색채를 갖추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아마도 그의 詩作이 <詩經>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4언시의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엿볼 수 있다.

아래에서 도연명의 <영목榮木>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榮木 무궁화>

영목榮木 념장로야念將老也 <무궁화>는 늙어가는 것을 염려한 시다.

일월추천日月推遷 이복구하已復九夏 날과 달이 지나가 벌써 다시 늦여름이 되었다.

총각문도總角聞道 백수무성白首無成 총각 때 도를 들었건만 흰머리가 되었는데도 성취한 것이 없다.

1

채채영목采采榮木 결근우자結根于茲 무성한 무궁화, 뿌리를 여기에 맺어

신요기화晨耀其華 석이상지夕已喪之 아침에 꽃을 빛나게 피었다가, 저녁에는 이미 잃어버린다

인생약기人生若寄 초췌유시憔悴有時 인생이란 기탁하여 사는 것 같아, 때가 되면 초췌해진다

정언공념靜言孔念 중심창이中心悵而 조용하게 곰곰이 생각하자니, 마음속이 슬퍼진다

2

채채영목采采榮木 우자탁근于茲託根 무성한 무궁화, 여기에 뿌리 부쳐

번화조기繁華朝起 개모부존慨暮不存 많은 꽃 아침에 피나, 슬프게도 저녁에는 지네

정취유인貞脆由人 화복무문禍福無門 굳고 여림은 사람에 달렸으나, 화와 복은 문이 없다

비도갈의匪道曷依 비선해돈匪善奚敦 도가 아니면 무엇에 의지하며, 선이 아니면 무엇에 힘쓰겠나

3

차여소자嗟予小子 품자고루稟茲固陋 슬퍼라 나 하찮은 것, 이토록 고루하게 태어나

조년기류徂年既流 업부증구業不增舊 가는 세월 이미 흘러도, 공부는 절대로 늘지 않았다

지피불사志彼不舍 안차일부安此日富 뜻이 비록 학문에 있으나, 이 나날이 마시는 일 편안히 여기고 있다.

아지회의我之懷矣 달언내구怛焉內疚 나는 이 일 생각하거니와, 두렵도록 마음 아프다

4

선사유훈先師遺訓 여기운추余豈云墜 선대의 스승께서 남기신 교훈, 내 어찌 져버리랴

사십무문四十無聞 사부족외斯不足畏 사십이 되어서도 알려지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두렵지 않다

지아명차脂我名車 책아명기策我名驥 내 좋은 수레에 기름을 치고, 내 좋은 말에 채찍질 하여

천리수요千里雖遙 숙감부지孰敢不至 천리 길 비록 머나, 어찌 감히 가지 않으랴

 

이 시는 시인이 약 40세가 되는 해에 무궁화가 시들게 되는 것에 기탁해 세월은 덧없이 흘러가나

스스로 이룬 것은 없음을 한탄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면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이 시의 마지막 장에서 선대의 스승인 공자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천리 길도 마다않고

수레에 기름 치고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밝힌 부분은

<시경>에서 비롯된 詩敎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려인勵人 자려自勵(다른 사람을 면려하고 자기 자신을 면려한다)”의 내용은

“가공송덕歌功頌德”과 더불어 漢代 문인들이 가장 중시한 <詩經>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앞 절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漢代 시인들은 <시경>의 형식인 4언시를 창작할 때 주로

‘풍간諷諫’ 혹은 ‘면려勉勵’나 ‘송덕頌德’이라는 내용을 읊어 <시경>의 정신을 발휘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儒家 사상을 깊이 간직하고 있던 도연명 역시

4언시를 창작할 때 詩敎의 정신을 잊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 외에 아들들에게 면려의 뜻을 보인 <명자命子>

농사에 힘쓸 것을 면려하는 <권농勸農>은 모두 그러한 詩敎의 정신을 발휘한 것이다.

 

위 시는 詩語의 사용에서도 <시경>을 전승하고 있는 점을 역력히 찾아 볼 수 있다.

즉 1장과 2장의 첫 구는 “채채영목采采榮木 무성한 무궁화”로 시작하고 있어

<시경>의 주된 수사기법인 ‘비比 興興’을 채용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비比 흥興’은 도연명이 4언시에서 즐겨 사용한 수사기법이다.

<정운停雲>이 “애애정운靄靄停雲 잔뜩 낀 먹장구름”으로

<귀조歸鳥>가 “익익귀조翼翼歸鳥 훨훨 돌아오는 새”로 시작하는 것 등은 모두 그 좋은 예이다.

또한 도연명의 4언시에는 유별나게 <시경>식의 시어가 눈에 많이 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매매시운邁邁時運 목목량조穆穆良朝 습아춘복襲我春服 박언동교薄言東郊/<시운時運>

유객유객有客有客 원래원지爰來爰止 병직사총秉直司聰 우혜백리于惠百里/<증정시상贈丁柴桑>

형문지하衡門之下 유금유서有琴有書 재탄재영載彈載詠 원득아오爰得我娛/<답방참군答龐參軍>

유유상고悠悠上古 궐초생민厥初生民 오연자족傲然自足 포박함진抱朴含眞/<권농勸農>

 

또한 위의 <榮木>은 시의 구조,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시경>의 흔적이 보인다.

먼저 위 시는 序文에서 시의 주지를 밝혀주었고

이어서 총 4章의 聯章 형식으로 시를 전개하고 있는 점이 바로 그러하다.

 

4언시의 전범인 <시경>은 漢代에 이르러 <詩小序>가 가미된 <毛詩>가 널리 유행하였고 또한 <詩經> 속의

민간가요라 할 수 있는 <국풍國風>의 형식이 章과 章이 반복되는 聯章의 형식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4언시의 창작에서 序文을 도입한 것은 도연명이 처음은 아니다.

예를 들어 東漢 장형張衡의 <원시怨詩> 서진西晋 육운陸雲의 <증정만계시贈鄭曼季詩> 정만계鄭曼季의

<답육사룡시答陸士龍詩>4首 중 <원앙鴛鴦><란림蘭林><남산南山> 3首 등의 4언시는 모두 序文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듯 서문을 사용한 4언시는 전체 4언시에서 극히 일부만 차지할 뿐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연명은 <영목榮木> 외의 <정운停雲><증장사공贈長沙公> 등

5수에서도 서문을 사용하고 있어 보다 본격적인 면모를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선 다른 4언시의 서문들 보다 더욱 정제整齊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래에서 예를 들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운時運>序

시운時運 유모춘야游暮春也 시운은 늦봄에 노니는 시이다.

 

춘복기성春服既成 봄옷도 이미 지어졌고

경물사화景物斯和 경치는 아름답지만

우영독유偶影獨游 내 그림자와 같이 홀로 노니는데

흔개교심欣慨交心 기쁨과 슬픔이 서로 엇갈린다.

 

<정운停雲>序

정운停雲 사친우야思親友也 <멈추어 선 구름>은 친한 벗을 그리워하는 4수의 시다.

 

준담신료罇湛新醪 술통에 새로 빚은 막걸리가 괴어 있고

원렬초영園列初榮 뜰에는 갓 피어난 꽃이 늘어서 있는데

원언부종願言不從 친구가 생각나도 만날 수 없어

탄식미금歎息彌襟 가슴에 탄식이 가득하다

 

차주환은 이러한 양식에 대해 “<毛詩>의 경우에는 대부분 그 시의 연기緣起 내지 비평을 시도하였음에 반해

도연명은 自作詩인 만큼 그 시의 詩想 내지 그 시를 쓴 심경을 피력했고 文章은 극히 성정省淨하다. ···

그 자체를 정미精美한 무운단시無韻短詩라고 하여도 무방할 정도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결국 이러한 모습을 통해 도연명은 의도적으로 <시경>의 형식을 따르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를 뛰어 넘어 참신한 자신만의 형식을 강구했음을 알 수 있다.

 

도연명의 4언시는 <영목榮木>을 비롯해 <답방참군答龐參軍> 6章 <권농勸農> 6장 <명자命子> 10장 등 9首 모두

聯章 형식을 갖추고 있는 점과 매 장마다 ‘중첩重疊’의 수사 기교를 즐겨 사용하고 있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聯章 형식과 ‘중첩重疊’ 방식은 <시경>의 주요한 수사기법임은 물론인데

도연명은 이러한 수사 양식을 잘 운용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위의 <영목>의 1, 2장에서는 “采采榮木 結根于茲” “采采榮木 于茲託根”이라고 읊었고

<停雲>의 1, 2장에서는 “八表同昏 平路伊阻” “八表同昏 平路成江”이라고 하여 이른바

‘글자를 바꾸어 가는 중첩법[換字重疊法]’을 사용한 것이 그러하다.

또한 <귀조歸鳥>에서는 매장이 모두 “익익귀조翼翼歸鳥”의 구절로 시작하고 있는 점 역시 그 좋은 예이다.

 

이 밖에 도연명의 4언시는 편폭篇幅이 짧은 것이 인상적이다.

<命子> 한 首가 80句인 것을 제외하고 <수정시상酬丁柴桑>은 14구

<停雲><時運><榮木><歸鳥><贈長沙公>은 모두 32구 <答龐參軍><勸農>은 48구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경>의 <風>은 그 편폭이 대개 12句에서 24句 이내의 것이 일반적이고

<小雅>는 32句에서 48구 사이의 것이 대부분인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편폭篇幅 역시 <시경>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만하다.

사실상 漢初 이후로 4언시는 장편의 것이 한 유파를 이루며 발전해 왔었다.

 

“4言 長篇詩의 鼻祖”인 漢初의 위맹韋孟의 <풍간諷諫>詩가 118句인 것을 비롯해

東漢 부의傅毅의 <적지시迪志詩>는 64句이며

建安 왕찬王粲의 <증문숙량贈文叔良>은 單章 46句이며

조식曹植의 <책궁責躬>은 單章 96句이다.

 

이러한 장편 4언시의 전통은 西晉 시기에도 계속 이어져 반악潘岳은 총 128구의 <관중시關中詩>를 창작했으며

육운陸雲은 무려 242구의 <답형평원시答兄平原詩>를 짓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도연명은 <시경>의 형식을 4언시의 전범으로 삼아

<風><雅>와 거의 비슷한 편폭篇幅의 4언시를 창작했던 것이다.

 

사실 도연명의 시집 속에는 4언시, 5언시를 막론하고 장편의 시작이 드문데

이는 도연명이 간명하고 깔끔한 문장을 선호했던 사실과도 관련이 있겠다.

 

종영鍾嶸이 도연명의 시를 평하여 “문체가 간결하고 깔끔하니, 거의 긴 말이 없다.”라고 한 점은

단순히 5언시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위의 사실을 모두 종합하면 도연명의 4언시는

그 내용과 형식면에서 모두 <시경>을 본받으며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도연명이 비록 <시경>을 4언시 창작의 典範으로 삼았을지라도

그의 4언시는 <시경>을 단순히 모방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자기 자신만의 특색을 확연히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2) 개인적인 뜻과 감정을 표현

도연명의 4언시 9수를 내용과 제재로 분류하면 대체로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서정술회抒情述懷의 내용으로 <停雲><時運><榮木><歸鳥>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증답창화시贈答唱和詩로 <酬丁柴桑><贈長沙公><答龐參軍> 등이 이에 속한다.

셋째는 술조계자述祖戒子의 내용으로 <命子>가 이에 속하며

넷째는 설리논도說理論道의 내용으로 <勸農>이 이에 속한다.

 

그런데 증답시贈答詩나 계지시戒志詩의 내용은 漢初이래 4언시의 가장 주요한 제재였던 점,

그리고 東晋 시기는 玄理 4언시가 환영받던 시기였다는 점을 함께 생각해 보면

도연명의 4언시도 결국 판에 박힌 중국 4언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도연명의 4언시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시는 <시경>과 한대 이후의 4언시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그 자신만의 독특한 경지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도연명의 4언시에는 그만이 갖는 독특한 抒情의 색채가 농후한 작품이 적지 않으며

또한 그 밖의 작품도 詩敎의 ‘勸勉’이나 ‘頌美’의 내용을 잊지 않는 가운데 그 자신이 일상생활 속에서

체득한 진실한 감정이나 뜻을 여실히 노래하였던 것이다.

 

먼저 서정술회抒情述懷의 내용으로 시인의 개성을 잘 드러낸 <時運>을 살펴보자.

 

시운時運 유모춘야游暮春也 <계절의 운행>은 늦봄에 노니는 시다.

 

춘복기성春服既成 경물사화景物斯和 봄철 옷은 다 되었고 경치는 화창하다.

우영독유偶影獨游 그림자와 짝이 되어 혼자서 노니자니

흔개교심欣慨交心 기꺼움과 감개가 마음에 뒤 섞인다.

 

매매시운邁邁時運 목목량조穆穆良朝 가고 가는 계절의 운행, 부드럽고 부드러운 좋은 아침

습아춘복襲我春服 박언동교薄言東郊 나는 봄 옷 입고, 동쪽 교외에 나가 본다

산척여애山滌餘靄 우애미소宇曖微霄 산에는 남은 안개 깨끗이 거치고, 하늘엔 엷은 구름 가리워있다

유풍자남有風自南 익피신묘翼彼新苗 바람은 남쪽에서 불어와, 저 새싹들을 흔들어댄다

 

유풍자남有風自南 익피신묘翼彼新苗 넓고 넓은 평탄한 못에서, 양치질하고 손발 씻고

막막하경邈邈遐景 재흔재촉載欣載矚 아득한 먼 경치 기꺼이 바라본다

칭심이언稱心而言 인역이족人亦易足 마음에 맞는 걸로 말하자면, 사람들은 역시 만족하기 쉽다

휘자일상揮茲一觴 도연자락陶然自樂 이 술 한잔 걸치고 나니, 신이 나 즐거워진다

 

연목중류延目中流 유유청기悠悠清沂 흐르는 강 한복판을 멀리 바라보며, 맑은 기수를 아득히 생각한다

동관제업童冠齊業 한영이귀閒詠以歸 아이와 어른 다 함께 공부하고, 한가로이 읊조리며 돌아온다

아애기정我愛其静 오매교휘寤寐交揮 나는 그 조용함을 사랑하여, 자나 깨나 안 잊혀진다

단한수세但恨殊世 막불가추邈不可追 다만 한스럽기는 시대가 달라, 멀어서 좇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신사석斯晨斯夕 언식기려言息其廬 아침이나 저녁이고 내 집에서 쉬거니와

화약분렬花藥分列 림죽예여林竹翳如 꽃과 약초는 제각기 줄지어 있고, 수풀의 대나무 무성하다

청금횡상清琴横床 탁주반호濁酒半壺 맑은 거문고 평상에 가로 놓이고, 탁주는 반병이 있다

황당막체黄唐莫逮 개독재여慨獨在余 황제와 요임금 따라갈 수 없으니, 감개는 유독 나에게 있다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늦봄에 노니는 감회를 읊은 시이다.

1장과 2장에서는 화창한 동쪽 교외를 노니는 즐거움을 노래했고

3장과 4장은 그러한 즐거움 가운데서 고인을 좇을 수 없는 회한과 감개를 읊었다.

그런데 이렇듯 회한과 감개를 느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면려하고자 하는 뜻이 숨어 있다고 볼 수 있으니

이는 詩敎의 ‘勸勉’ 전통을 잊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시는 4언시의 그러한 전통을 잇는 가운데

도연명 자신만의 특색을 유감없이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 시는 전반적으로 온화溫和한 풍격을 유지하고 있지만 序文에서

“우영독유偶影獨游 그림자와 짝이 되어 혼자서 노니자니”라고 하거나 마지막 구에서

“개독재여慨獨在余 감개는 유독 나에게 있다”라고 하는 등 그 내면에는 도연명 특유의 고독이 깔려 있다.

 

시의 후반부에서 古人을 좇고자 하는 것 역시 隱者로서 높은 理想을 가졌으나

현실의 삶에서는 그 뜻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벗이 없기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이러한 고독의 이미지는 도연명의 다른 5言詩作인 <飮酒>其四

<신축세칠월부가환강릉야행도중辛丑歲七月赴假還江陵夜行塗中>

<경자세오월중종도환조풍어규림庚子歲五月中從都還阻風於規林> 등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그 만의 독특한 형상이었던 것이다.

 

또한 시 곳곳에서 보이는 隱者의 형상과 술, 거문고 등의 이미지

역시 도연명 특유의 성정과 인격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결국 위 시는 중국 4언시의 전통을 잊지 않는 가운데

도연명만의 특유한 개성을 잘 드러내며 비교적 농후한 서정의 색채를 보여준 작품이라 하겠다.

 

이 시 외에도 <歸鳥><停雲> 등의 4언시 역시

비교적 농후한 서정의 색채를 띠며 도연명의 특유한 개성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東晋 시기의 4언시가 대부분이 판에 박힌 듯이 ‘頌美’하거나

혹은 ‘玄理’를 읊는 내용이었고 개인의 抒情을 다룬 것은 東晋 약 80여수의 4언시 가운데

유곤劉琨의 <답노심시答盧諶詩> 손작孫綽의 <표애시表哀詩> 등

불과 몇 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하면 매우 의미심장해 진다.

 

즉 도연명은 ‘몰개성’한 동진의 4언시 창작 환경 속에서

그만의 독특한 개성과 서정의 세계를 4언시로 표현했던 것이다.

 

도연명의 증답贈答 4언시인 <酬丁柴桑><贈長沙公><答龐參軍> 등에서도

역시 그의 개성과 서정 색채는 잘 드러나 있다.

 

본래 贈答唱和는 漢初 이래 4언시의 가장 주요한 제재 가운데 하나였는데

‘온유돈후’한 풍격 속에서 ‘頌美’나 ‘勸勉’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이러한 4언시 속에서 시인의 개성은 찾아보기가 극히 어려웠다.

그러나 도연명의 증답 4언시는 이러한 전통을 잇는 가운데 그만의 개성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수정시상酬丁柴桑>를 살펴보자.

 

유객유객有客有客 원래원지爰來爰止 손님 있어 손님 있어, 이곳에 와 머무네

병직사총秉直司聰 우혜백리于惠百里 곧은 마음으로 똑똑히 살펴, 백리에 은혜 베푸네

 

손승여귀飡勝如歸 명승지 좋아함이 제 곳으로 돌아가는 것 같고

령선약시聆善若始 선한 일 듣는 것을 처음인 듯이 하네.

비유해야匪惟諧也 루유량유屢有良由 마음이 오로지 잘 맞고, 자주 좋은 놀이 가졌네

 

재언재조載言載眺 이사아우以寫我憂 이야기 하며 바라보며, 근심을 씻네

방환일우放歡一遇 기취환휴既醉還休 한껏 기뻐 한번 만나면, 흠뻑 취한 후에나 그만두네

실흔심기實欣心期 방종아유方從我遊 실은 마음속의 기대 기뻐해, 그래서 나를 따라 노는 거라네

 

먼저 처음 6구에서는 <詩經>式의 시어를 구사하며

정시상丁柴桑의 덕을 ‘頌美’하고 있어 이전의 여느 4언시와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어서 도연명은 자신과 상대방이 나누었던 끈끈한 정을 유감없이 토로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껏 기뻐 한번 만나면, 흠뻑 취한 후에나 그만두네”처럼

도연명 특유의 형상을 각인시키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도연명은 증답시에서도 자신만의 감정과 개성을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도연명의 또 다른 4언시인 <命子> 역시

‘미자美刺’의 詩敎 정신을 발휘하는 가운데 그만의 개성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이 시는 도연명이 약 27세 되던 해에 長子인 엄儼을 낳고 나서 지은 것인데

총 10章 80句의 장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내용에 따라 前半 6章과 後半 4章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주로 자신의 조상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유유아조悠悠我祖 원자도당爰自陶唐 멀고 먼 우리의 조상은, 도당씨부터 시작했네

막위우빈邈為虞賓 력세중광歴世重光 아득한 옛날 우빈이 되어, 요순시대 지내왔네

어룡근하御龍勤夏 시위익상豕韋翼商 어룡씨는 하를 힘써 섬겼고, 시위씨는 상을 도왔네

목목사도穆穆司徒 궐족이창厥族以昌 훤칠한 사도로 우리 종족 번창했구나

……

……

환환장사桓桓長沙 이훈이덕伊勲伊徳 씩씩한 장사공, 공훈 세우고 덕을 세웠네

천자주아天子疇我 전정남국専征南國 천자가 함께 계획하여, 오직 남국을 정벌케 했네

공수사귀功遂辭歸 림총불특臨寵不忒 공을 이룩하고 하직하고 돌아와, 은총 받으나 어긋남 없었네

숙위사심孰謂斯心 이근가득而近可得 누가 말하랴 이 마음을, 요즘에 얻을 수 있다고

 

숙의아조肅矣我祖 신종여시慎終如始 엄숙한 내 조부는, 끝까지 신중함을 처음같이 하여

직방이대直方二臺 혜화천리惠和千里 이대의 벼슬 곧고 바르게 살아, 천리에 은혜를 베풀었네

어황인고於皇仁考 담언허지淡焉虛止 아아 대단했네 어질던 선고, 담담하고 허심하게 살았네

기적풍운寄迹風雲 치자온희寘茲慍喜 자취는 바람과 구름에 맡기고, 성냄과 기쁨 나타내지 않았네

 

조상의 덕을 서술하고 찬미하는 내용은 일찍이 <詩經 大雅>의 <大明><綿>과

漢初 위맹韋孟의 <풍간시諷諫詩> 등의 4言詩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게다가 전아典雅한 풍격 속에서 조상의 덕을 頌美하는 모습은 이전의 4언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도연명 특유의 개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차여과루嗟余寡陋 첨망불급瞻望不及 슬프다 나는 덕 없고 비루하여, 바라보아도 미치지 못하네

고참화빈顧慚華鬢 부영척립負影隻立 다만 백발의 귀밑머리 부끄럽고, 그림자 지고 홀로 섰네

삼천지죄三千之罪 무후위급無後為急 삼천 가지 죄 중에서, 후사 없음이 급했으니

아성념재我誠念哉 고문이읍呱聞爾泣 난 정녕 염려하였건만, 너의 울음소리 듣게 되었구나

 

복운가일卜云嘉日 점역량시占亦良時 점치니 생일이 좋고, 점괘에 생시도 좋네

명여왈엄名汝曰儼 자여구사字汝求思 너를 엄이라 이름 짓고, 너를 구사라고 자를 짓네

온공조석溫恭朝夕 념자재자念茲在茲 아침저녁으로 온화하고 공손할지니, 언제나 이를 생각하여라

상상공급尚想孔伋 서기기이庶其企而 멀리 공급을 생각하니, 그 분 따르기 바라네

 

려야생자厲夜生子 거이구화遽而求火 문둥이도 밤중에 아들 낳으면, 서둘러서 불을 찾네

범백유심凡百有心 해특어아奚特於我 모든 사람들 마음이 그런 것이지, 어찌 나만이 그렇겠나

기견기생既見其生 실욕기가實欲其可 자식 난 것 보고서는, 실로 그가 옳게 되길 바라네

인역유언人亦有言 사정무가斯情無假 사람들도 말했거니와, 이 마음엔 거짓이 없네

 

일거월제日居月諸 점면우해漸免于孩 하루가고 한 달 가는 동안, 점차 아이티를 벗겠지

복불허지福不虛至 화역이래禍亦易來 복은 거저 오지 않고, 화는 또한 쉽게 오네

숙흥야매夙興夜寐 원이사재願爾斯才 일찍 깨고 밤에는 자, 그러한 인재 되기를 원하네

이지부재爾之不才 역이언재亦已焉哉 네가 인재 되지 못해도, 그 또한 어쩔 수 없네

 

자식을 낳기 바라는 간절한 마음, 아들이 태어나 서둘러 불을 찾는 모습 그리고 그 아들이 장성하여

옳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등을 통해 한 아버지로서의 진솔한 모습을 후련하게 보여 주고 있다.

 

‘진솔함(眞)’을 本色을 삼는 도연명 시의 특색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라 할 만 하다.

특히 마지막 구절에서 인재가 되기를 원하지만 인재가 되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고 한 부분은 도연명의 이른바

“위운승화委運乘化 하늘의 운에 따르고 自然을 따르는” 사상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淸代 진조명陳祚明이 이 시에 대해

“전반부는 平安하고 典雅하게 서술했고 후반부는 호쾌하게 묘사했다.

평안하고 전아한 것은 4言 古詩의 일반적인 격식이지만 그 호쾌한 곳은 붓이 하늘을 나는 듯 하여

한漢 위魏 이래로 능히 모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라고 한 바와 같이 이 시의 후반부는

이른바 4언시의 ‘常格’에서 벗어나 日常의 소재를 진솔하며 호쾌한 필치로 잘 그려내었던 것이다.

 

도연명의 <勸農> 역시 사언시의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도연명만의 개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이 시는 먼저 총 6장 48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도연명 사언시 가운데 가장 說理的인 작품이다.

1章부터 4章까지는 농경農耕의 기원 및 農事의 즐거움을 노래했고 마지막 두 장에서 다음과 같이 읊는다.

 

민생재근民生在勤 근즉불궤勤則不匱 사람의 삶은 근면한데 있으니, 근면하면 모자람이 없다

연안자일宴安自逸 세모해기歲暮奚冀 편안히 스스로 안일하게 보내고, 한해 저물 때 무엇을 바라나

담석불저儋石不儲 기한교지飢寒交至 곡식섬 모아두지 않았으니, 굶주림 추위 몰려든다

고이주렬 顧爾儔列 능불회괴不懷愧 그러니 나 같은 무리는, 부끄러움 품지 않을 수 있나

 

공탐도덕孔耽道徳 번수시비樊須是鄙 공자는 도덕에 열중하여, 번수를 비루하게 여겼고

동악금서董樂琴書 전원불리田園不履 동중서는 거문고와 책을 즐겨, 전원을 밟지 않았다

약능초연若能超然 투적고궤投迹高軌 만일 능히 초연할 수 있어, 고상한 길에 자취를 던진다면

감불감임敢不歛袵 경찬덕미敬讚徳美 어찌 감히 옷 깃 여미며, 덕의 아름다움 찬미 하지 않겠는가

 

제5장에서는 농사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스스로에게 열심히 농사지을 것을 권면하고 있다.

마지막장에서는 만일 의식주에 초연할 수 있어 고상한 도덕의 길을 걸을 수 있다면 비록 농사를 짓지 않아도

그를 흠모하겠다고 말해 반어의 수법으로 농사를 권유하고 있다.

 

원행패袁行霈가

“5章은 농사를 권면하는 것으로 正面으로 말했고

6章은 농사를 권면하는 것으로 反面으로 말했다.”라고 한 바와 같다.

 

중요한 것은 역대 4언시가 ‘미자美刺’의 詩敎 정신을 발휘하는 것을 그 주요 내용으로 삼았다고 할지라도

이렇듯 농사를 지을 것을 권면하는 것처럼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當時는 추상적인 玄理의 내용으로 4언시를 짓는 경우가 많았으니 위의 시는 주로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택해 자신의 진솔한 뜻을 읊었던 도연명 시의 한 특색이 그대로 나타난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도연명의 4언시는 그것이 說理詩이던 贈答詩이던 혹은 抒情詩이던 간에 모두

<詩經>과 詩敎의 전통을 잊지 않는 가운데, 시인이 일상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과 뜻을

진솔한 어조로 표현해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허학이許學夷가 <시원변체詩源辯體>에서

“도연명의 4언시는 章法에서 비록 <風><雅>를 본받고 있어도 그 말은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다.”

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대변한다.

 

그런데 漢初 이래로 4언시는 비교적 엄숙한 분위기에서 어떤 대상을 ‘몰개성’한 시어로 ‘頌美’하거나

‘勸勉’하는 천편일률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던 점을 상기하면

이 같은 사실은 도연명 4언시의 큰 특색으로 평가할 수 있다.

 

(3) 4言詩史에서의 마지막 절창絶唱

漢初 이래로 중국의 4언시는 기본적으로 <詩經>의 절대적인 영향아래 놓이게 된다.

풍격風格면에서는 전아典雅함을 잃어서는 안 되며 詩敎의 가르침은 그 주요 내용이 되었으며

시어의 사용조차 <시경>을 모방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국면 속에서 조조曹操와 혜강嵇康은

<시경>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 세계를 구축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조, 혜강 이후로 이들의 4언시 창작성과는 다시 계승되지 못했다.

오히려 중국의 4언시는 다시 <시경>을 모방하는 단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그 가운데에 佳作이 없지는 않았지만 西晉의 4언시는 대개가 그러했다.

더군다나 東晉 시기의 4언시는 玄理詩가 대세를 이루었으니

이때에 이르러 4언시의 발전은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면 속에서 도연명은 <시경>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며

동시에 자신만의 개성을 힘껏 발휘하며 수준 높은 사언시를 창작했던 것이다.

먼저 아래에서 <停雲>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정운停雲 사친우야思親友也 <먹장구름>은 친한 친구를 생각한 시다.

준주신담罇酒新湛 두루미에는 새로 담은 술이 맑게 고여 있고

원렬초영園列初榮 정원의 나무들에는 꽃이 갓 피어났다.

원언부종願言不從 생각을 하나 이룰 길이 없어

탄식미금歎息彌襟 한숨으로 가슴이 가득 찬다.

 

애애정운靄靄停雲 몽몽시우濛濛時雨 잔뜩 낀 먹장구름, 억수 같은 시절 비

팔표동혼八表同昏 평로이조平路伊阻 사방이 다 어둡고, 평탄한 길이 막혔다.

정기동헌静寄東軒 춘료독무春醪獨撫 조용히 동쪽 창에 기대어, 봄 술을 혼자서 잡고 있다.

량붕유막良朋悠邈 소수연저搔首延佇 좋은 벗 멀리 떨어져 있어, 머리 긁으며 우두커니 기다린다.

 

정운애애停雲靄靄 시우몽몽時雨濛濛 먹장구름 잔뜩 끼고, 시절 비 억수 같다.

팔표동혼八表同昏 평륙성강平陸成江 사방이 다 어둡고, 평탄한 길이 강이 되었다.

유주유주有酒有酒 한음동창閒飲東窻 술이 있네, 술이 있네, 동쪽 창에서 한가히 마시고 있다.

원언회인願言懷人 주차미종舟車靡從 그리운 사람 생각하지만, 배도 수레도 갈 길이 없다.

 

동원지수東園之樹 지조재영枝條載榮 동쪽 정원 나무들, 가지에 꽃 피웠다.

경용신호競用新好 이초여정以招余情 다투어 새로운 아양 피워, 내 마음 기쁘게 한다.

인역유언人亦有言 일월우정日月于征 남들 역시 말했지마는, 해와 달은 가고 있다.

안득촉석安得促席 설피평생說彼平生 어떻게 하면 다가앉아서, 지난날을 이야기하게 될까.

 

편편비조翩翩飛鳥 식아정가息我庭柯 훨훨 날던 새들, 내 뜰 나뭇가지에 내려

감핵한지歛翮閒止 호성상화好聲相和 날개를 오므리고 한가히 앉아, 좋은 소리를 주고받는다.

기무타인豈無他人 념자실다念子實多 어찌 다른 사람 없으랴마는, 그대 생각이 실로 많구나.

원언불획願言不獲 포한여하抱恨如何 생각하나 이룰 길 없으니, 한스러운 내 마음 어찌하겠나.

 

<序文>에서도 밝혔듯이 친한 친구를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서문>을 사용하고 반복되는 聯章體를 구사하며

<시경>식의 어투가 많이 보여 확연히 <시경>을 모방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그 시 곳곳에는 도연명 특유의 진솔한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1, 2장에서는 비에 길이 끊겨 친구를 만날 수 없음을 읊었고

3장에선 세월 흐르는 것을 느끼며 친구와 지난날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4장에선 친구와 함께 어울리고자 하나 그렇게 할 수 없는 고독을 안타까워한다.

 

전반적으로 古雅하며 유창한 풍격 속에서 도연명 특유의 그윽한 정감이 잘 드러나고 있어

확실히 사언시의 佳作이라 할 만하다.

 

심덕잠沈德潛이

“도연명의 <停雲><時運> 등은 맑고 비옥하며 簡明하고 深遠하여 또 다른 격조를 이루었다.”

라고 한 것은 충분히 수긍이 간다.

 

도연명의 <歸鳥> 역시 佳作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익익귀조翼翼歸鳥 신거우림晨去于林 훨훨 돌아오는 새, 새벽에 숲을 떠났네

원지팔표遠之八表 근게운잠近憇雲岑 멀리 하늘 끝까지 갔고, 가까이 구름 봉우리에서 쉬었네

화풍불흡和風不洽 번핵구심翻翮求心 부드러운 바람 부족해, 날개 돌려 본 마음 되찾네

고주상명顧儔相鳴 경비청음景庇清陰 짝들을 돌아보며 우짖으며, 그림자를 맑은 그늘에 숨기네

 

익익귀조翼翼歸鳥 재상재비載翔載飛 훨훨 돌아오는 새, 치솟다가 앞으로 날았네

수불회유雖不懷游 견림정의見林情依 거기서 놀기 생각하지 않지만, 숲 보면 마음 끌리네

우운힐항遇雲頡頏 상명이귀相鳴而歸 구름 만나 아래위로 날다가, 서로 울며 돌아왔네

하로성유遐路誠悠 성애무유性愛無遺 먼 길 실로 아득하나, 본성이 좋아 하여 버리지 못하네

 

익익귀조翼翼歸鳥 순림배회馴林徘徊 훨훨 돌아오는 새, 숲을 보고 배회하네

기사천로豈思天路 흔급구서欣及舊棲 어찌 하늘 길 생각하랴, 기쁘게 옛 집에 이르렀네

수무석려雖無昔侣 중성매해衆聲毎諧 비록 옛날의 벗은 없으나, 모든 소리가 함께 어울리네

일석기청日夕氣清 유연기회悠然其懷 저녁 무렵 공기는 맑은데, 그 감회는 아득해 지네

 

익익귀조翼翼歸鳥 집우한조戢羽寒條 훨훨 돌아오는 새, 차가운 가지에서 날개를 접네

유불광림遊不曠林 숙즉삼표宿則森標 놀아도 숲을 버리지 않고, 잠들어도 숲의 꼭대기네

신풍청흥晨風清興 호음시교好音時交 새벽바람 맑게 일고, 좋은 소리 때때로 어울리네

증격해공矰繳奚功 주살이 어찌 공을 세우랴,

이권안로已巻安勞 이미 날기 지쳐 숨었으니 어찌 주살 신경에 애쓰랴

 

이 시는 도연명이 팽택령彭澤令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은거하던 약 55세 되던 해에 지은 것으로

詩題인 歸鳥는 시인 자신의 歸隱을 상징한다.

 

1장에선 멀리 날다가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 새를 묘사했고, 2장에선 돌아오는 길에서의 감회를,

3장에선 옛 숲에 돌아온 즐거움을, 4장에선 돌아온 이후의 감회를 읊고 있다.

 

시는 곳곳에서 比喩의 수법을 쓰고 있는데 예를 들어

“화풍불흡和風不洽 부드러운 바람 부족해”라고 한 것은 뜻만 같지 않은 당시의 현실을 가리키며,

“숙칙삼표宿則森標 잠들어도 숲의 꼭대기네”라는 부분은 시인의 고결한 이상을 암시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증격해공矰繳奚功 주살이 어찌 공을 세우랴”

라고 한 것은 당시의 험악했던 정치 상황을 비유한다.

 

이렇듯 절묘한 비유 수법을 사용하며 <歸去來兮辭><歸園田居><感士不遇賦> 등 도연명의 다른 작품에서도

접할 수 있는 ‘귀은歸隱’에 관한 복잡한 심경을 훌륭하게 형상화 시켰기에 왕부지王夫之는 이 시를 앞의

<정운停雲>과 더불어 “4言詩의 가창佳唱이며 또한 도연명의 절창絶唱”이라고 추켜세웠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도연명은 4언시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자신만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훌륭한 4언시를 다수 창작했다.

 

그런데 도연명 이후 중국의 4언시는 언급할만한 작품 한 수 없이 급속도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록흠립逯欽立의 <선진한위진남북조시先秦漢魏晉南北朝詩>에 수록된 4언시 현황을 살펴보면

유송劉宋시기의 총 460여수의 詩作 가운데 4언시는 30여수에 불과 했고

제조齊朝시기의 약 240여수의 시작 가운데 4언시는 겨우 20여수를 차지할 뿐이었으며 특히 양조梁朝시기에는

전체 약 1700여수의 시작 가운데 4언시는 약 30여수 밖에 안 되어 그 점유율이 겨우 2%에 불과했다.

 

더욱이 唐代에 이르러 새로운 시가 양식인 율시律詩가

시단의 주도권을 쥐게 된 이후에는 4언시는 거의 그 생명력을 잃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거시적인 안목에서 비쳐보면 도연명의 사언시는

중국 4言詩史의 마지막을 장식한 최후의 絶唱이었던 셈이다.

 

4. 맺음말

왕부지王夫之는 “4언시는 <三百篇>이 앞서 있었기에 따르고

계승 하지 않으면 이것의 구속을 받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실제로 漢初 이래의 중국 사언시는 <시경>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놓여 있었다.

즉 사언시 창작에 있어서 온유돈후溫柔敦厚한 풍격은 말할 것도 없고

詩敎의 가르침은 거의 필수적으로 따라야 했던 것이다.

 

실제로 한위진漢魏晉의 4언시는 때때로 <시경>의 예술창작을 잘 흡수하여 나름대로 좋은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으나 그 대부분은 단지 <시경>을 모방하거나 흉내 내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시경>의 굴레에서 능히 벗어나 나름대로의 영역을 개척한

조조曹操와 혜강嵇康의 4언시가 4言詩史에서 중요하게 손꼽혔던 것이다.

 

이에 반해 도연명은 <시경>의 훌륭한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조조나 혜강의 4언시에 필적할 만한 훌륭한 사언시를 창작해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도연명은 <시경>의 우수한 예술 기교를 잘 활용하는 가운데

때로는 농후한 서정의 색채로 자신의 흉금을 토로하였고

때로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느끼고 체득한 道理를 읊는 등,

5언시 뿐 만 아니라 4언시에서 까지도 개인의 감정이나 뜻을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이러한 점은 엄숙한 어조로 비교적 공식적인 장소에서 ‘미자美刺’의 내용을 주로

읊던 전통적인 사언시와는 확연히 구별시켜주는 그 만의 특색이라 할 만하다.

 

게다가 도연명은 4언시 곳곳에서 그의 다른 詩文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술, 고독, 隱者 등

그만의 독특한 형상을 교묘한 예술기교로 표현해 내었다.

 

결국 도연명은 중국 4언시의 전통을 잊지 않는 가운데

수준 높은 예술 기교로 그만의 개성을 4언시 속에서 충분히 발휘해 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연명 이후로 4언시는 빠른 속도로 쇠퇴하여

마침내 4언시는 중국 시단에서 다시는 설 자리를 얻지 못했다.

 

결국 도연명의 4언시는 중국 4言詩史에서 마지막 絶唱으로 남게 되었으니

이러한 점을 결코 소홀히 여길 수는 없다.

 

'漢詩 > 도연명陶淵明' 카테고리의 다른 글

5言詩 2. 구일한거九日閒居  (0) 2025.02.11
5言詩 1. 형영신形影神  (0) 2025.02.11
4言詩 9 귀조歸鳥  (0) 2025.02.10
4言詩 8 명자命子  (0) 2025.02.10
4言詩 6 답방참군答龐參軍  (1) 2025.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