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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도연명陶淵明

부賦 사辭

 

►부賦

작자의 생각이나 눈앞의 경치 같은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한문문체.

 

1. <시경詩經>에서 이르는 시의 6義 가운데 하나.

사물이나 그에 대한 감상을, 비유를 쓰지 아니하고 직접 서술하는 작법이다.

<毛詩 序〉에

‘시유육의詩有六義 시(3백)에는 六義가 있다’면서 ‘풍風 부賦 비比 흥興 아雅 송頌’을 열거했다.

 

2. 한문체에서 글귀 끝에 운을 달고 흔히 대對를 맞추어 짓는 글.

3. 과문科文에서 여섯 글자로 한 글귀를 만들어 짓는 글.

 

부는 본래 <시경>의 표현 방법의 하나로서 작자의 생각이나

눈앞의 경치 같은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이후 굴원屈原의 <초사楚辭>를 계승한 송옥宋玉 등에 의하여 하나의 문학 장르로 정립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아름다운 글을 통한 풍유諷諭에 목적을 두고 있다.

 

한漢대 사마상여司馬相如는 내용과 형식이 <초사>와는 달라진 ‘한부漢賦’라는 새로운 문체로 발전시켰다.

그 문체는 詩적인 측면보다는 산문적인 성분이 늘어난 것이다.

 

내용 면에서는 개성이나 개인의 감정이 사라지고

일정한 일이나 물건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일 자체에 더욱 중점이 놓여지게 되었다.

 

한나라의 황실에서는 <초사>를 애호하였다.

그래서 사마상여는 자기의 文才를 총동원하여 미사여구美辭麗句를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부는 듣는 이의 귀와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하려는 방향으로 형성,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유협劉勰이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부란 펼친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채색을 펼치고 무늬를 이룩하여 사물을 묘사하고 뜻을 표현하는 것이다.”

라고 부의 문체를 정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나라의 양웅揚雄은 부의 종류를 ‘詩人의 부’와 ‘소인騷人의 부’로 나누었다.

진晉나라 지우摯虞는 부의 종류를 고부古賦와 금부今賦로 나누고

원元나라 축요祝堯는 ‘시인의 부’ ‘소인의 부’ ‘사인詞人의 부’로 나누었다.

 

시대적으로는 대체로 부의 종류를

‘초사체楚辭體’ ‘양한체兩漢體’ ‘삼국육조체三國六朝體’ ‘당체唐體’ ‘송체宋體’로 분류한다.

 

그런데 명나라 서사증徐師曾의 <문체명변文體明辨>에서는

‘초사체’와 ‘양한체’는 모두 고부古賦로 일괄하여 처리하였다.

 

다시 후대의 부들은 문체에 따라 배부排賦·율부律賦·문부文賦로 분류하고 있다.

부의 구성은 대체로 직서체直敍體와 문답체問答體로 나누어진다.

한편의 부는 대개 서序·본문·결어의 3단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부는 꼭 3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句法은 <초사>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산문화하여 ‘혜兮’자를 쓰지 않고

4자구를 쓰면서 중간에 3자구나 6자구를 섞어 변화를 일으키는 작품도 있다.

부의 형식과 내용은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 한두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다.

 

배부는 서진西晉의 반악潘岳과 육기陸機 등에게서 시작하여

송나라 이후 육조시대(420∼589)에 성행하였던 문체이다.

 

반악과 육기는 부의 수사修辭에 더욱 공을 들여 對句를 많이 사용함으로써

뒤에 나타나는 변려문騈儷文의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를 변부騈賦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송나라 이후로는 시와 마찬가지로 부에 있어서도 더욱 형식적인

문장 수식에 노력하여 부의 음률효과까지도 중시하게 된다.

그 결과 아름다운 대구를 이루는 문사文辭를 늘어놓은

배부라는 형식주의적인 문체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율부는 당대에 이르러 과거科擧에 시부詩賦를 출제함으로써 생겨난 더욱 규식화規式化된 부체이다.

율부는 대구와 평측平仄의 음률까지도 중시하였다.

이것은 심약沈約의 사성四聲·팔병八病의 이론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시의 근체近體에 해당하는 부체라고 할 것이다.

다만 율부는 부의 내용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문장의 형식만을 중시했다.

이 점이 시와는 다르다. 율부는 송나라 초기에 과거에도 채용되었다.

 

문부는 송나라 구양수歐陽修 이후에 산문인 古文이 성행하면서 그 영향 하에서 이루어진 부체이다.

문부는 변려문을 배격하고 산문화한 것이 특징이다.

구양수의 <추성부秋聲賦>와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 같은 명작들이 남아 있다.

 

문부는 형식적인 율부와는 달리 개성적인 창의創意가 담긴 새로운 부체이다.

구양수·소식 이후에는 그들의 작품을 뒤따를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

 

신라 최치원崔致遠의 <영효부咏曉賦>가 우리나라의 첫 번째 부 작품이다.

그 형식은 당시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율부와 같이 대우對偶와 환운換韻을 쓰고 있다.

 

고려 때에는 부를 과거시험의 과목으로 정했다.

그에 따라 최충崔冲의 사숙私塾인 구재九齋 같은 데에서도 부를 학습하였다.

그리고 ‘양경시부良鏡詩賦’라고 노래된 것을 보면 많은 작품을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령문功令文이어서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은 듯하다.

 

<동문선>에 전하는 최초의 작품은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의 <중니봉부仲尼鳳賦>와 <아계부啞鷄賦>이다.

앞의 것은 공자와 봉鳳의 덕을 읊었고 뒤의 것은 닭을 빌려 특정인물을 풍유한 것이다. 형식은 고부에 가깝다.

 

이규보李奎報는 부에 있어서 다양한 문재를 발휘하여 훌륭한 작품을 남긴 작가이다.

기발한 우의寓意로 가탁된 <외부畏賦>는 문부체이고

허무한 인생의 달관을 주제로 한 <몽비부夢悲賦>는 고부체이다.

 

물성物性을 통하여 인성人性을 풍유한 <방선부放蟬賦>

낙천지명樂天知命의 인생관을 담은 <조강부祖江賦>

인정의 감응상感應相을 논리적으로 편 <춘망부春望賦> 등은 걸작이다.

 

부는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를 비롯하여

작품은 人性이나 사리·물정 혹은 역사사실을 논설한 설리적인 것이 많다.

고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부 작품 역시 형식과 체재 면에서 고려시대와 별로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으며

근원적으로는 중국 부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있다.

그것은 조선 후기에 과거시험 과목으로 쓰인 과부科賦이다.

 

과부는 주로 중국의 역사사실이나 옛 시문의 한 구절을 주제로 삼아 1구6언으로 30구에서 60구까지 지었다.

일정한 압운도 없고 각 구 제3언 다음에 대개 허자를 써서 구의 호흡을 조절하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율부처럼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여 문집에 전하지 않았다.

선비들이 과거 응시 이전에 습작하기 위하여 전인의 잘된 작품을 초록해두었던 것이 간혹 보일 뿐이다.

 

부는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이고 귀족적 성향을 띠고 있어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가 쉽다.

그러나 한문 문장의 다양한 표현 가능성을 개발하는 데는 큰 공헌을 하였다.

따라서 부의 발달을 통하여 한문 문장의 수사기교와 음운의 해화諧和가 한층 더 발달할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부는 중국과 어음이 달라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대漢代의 부賦

부賦는 원래 <시경詩經> 六義의 하나로, 직접적인 서술 수법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에 이러한 직접적 서술 수법 사용하는 문학 장르를 ‘부’라 함으로써 문학 체재가 되었다.

 

부자賦者 포야鋪也 부는 펼친다는 뜻이다.

포채리문鋪彩摛文 체물사지야體物寫志也 문채를 펼쳐서 사물을 구체화하고 뜻을 기록하는 것이다.

/유협劉勰 <문심조룡文心雕龍⋅전부편詮賦篇>

 

‘포채리문鋪彩摛文’은 화려한 문사로 자세하게 묘사하는 부의 형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체물사지體物寫志’는 부의 내용으로 사물에 대한 작자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부는 순자荀子의 <부賦>편이다.

이는 예禮 지智 운雲 잠蠶 잠箴의 5가지에 대해 암시와 상징 등의 수법을 이용하여

서술한 것으로 부의 일반적인 포진鋪陳 수법과는 다르다.

 

한대의 부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굴원屈原이다.

굴원이 <초혼招魂>에서 보여준 장황하면서도 과장된 묘사와 대화 형식을 후세의 부가賦家들이 모방하였다.

 

<史記⋅굴원열전>에서는

굴원기사지후屈原旣死之後 초유송옥楚有宋玉 당륵唐勒 굴원이 죽은 후 초나라에는 송옥, 당륵,

경차지도자景差之徒者 개호사이이부견칭皆好辭而以賦見稱

경차景差 등이 모두 사辭를 좋아하였으며 부賦로써 이름을 날렸다

라고 하여 굴원의 제자들이 이미 ‘사’에서 ‘부’로 문체의 변이를 완성하였다고 하였다.

 

이들의 작품은 사지寫志를 위주로 하고 있고 풍간諷諫과 원망의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

형식상에 있어서도 굴원의 작품과 흡사하여 통칭 소체부騷體賦라 한다.

 

그러나 매승枚乘의 <七發>은 이런 소체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풍간의 뜻이 비교적 짙게 들어있기는 하지만 음악과 향연과 사냥 등으로 그 소재를 넓혔으며

句式이 이미 산문화하고 있거니와 전편에 걸쳐 문답식을 사용하고

편폭이 비교적 길어서 소체부에서 대부大賦로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대부大賦는 규모가 크고 산문화한 부로 ‘체물體物’에 역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주로 가공송덕歌功頌德을 위해 창작하였으므로 풍간諷勸의 뜻은 거의 없다.

 

서한西漢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상림부上林賦> 양웅揚雄의 <감천부甘泉賦><우렵부羽獵賦>

동한東漢 반고班固의 <양도부兩都賦> 장형張衡의 <이경부二京賦>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동한시대 반고의 <양도부>와 장형의 <이경부>는 모두 사마상여의 <자허부>와 <상림부>를 모방하고 있지만

묘사의 범위가 더욱 확대되어 동도東都 낙양洛陽과

서도西都 장안長安 두 도시의 규모와 생활상을 상술하고 있다.

 

장형의 <이경부>는 과장과 수식어를 보다 많이 동원하면서

통치자의 사치에 대한 풍유諷諭를 두드러지게 나타냈다.

 

대부에서 서정적인 소부小賦로의 진화 역시 장형에서 비롯되었다.

장형의 <귀전부歸田賦>는 세태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전원으로 돌아가 은둔하고 싶은 마음을 서정적으로

서술하면서도 암흑정치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형식상으로도 대부의 장황함과 미사여구의 악습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편폭이 축소되고 문사가 간결명료하면서 서정을 위주로 하고 있다.

 

이후 조일趙壹의 <자세질사부刺世疾邪賦> 채옹蔡邕의 <술행부述行賦>

예형禰衡의 <앵무부鸚鵡賦> 등은 모두 장형의 스타일을 모방한 탁월한 서정 소부들이다.

 

 

►사辭

우수와 격정 같은 것을 남방가요의 아름다운 형식을 빌려 표현하는 한문문체.

 

사는 ‘초사楚辭’ 혹은 ‘소騷’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초나라 땅에서 지어져 초사라고 불렀고 屈原의 <離騷>가 대표적인 사이기 때문에 소라고도 하였던 것이다.

이들 명칭이 너무 협의적인 표현이라 생각하여 후세에는 이러한 유형의 작품들을 일반적으로 사라 부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사辭와 부賦는 나눌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사와 부를 사부라고 통합하여 불렀다.

김석주의 <해동사부海東辭賦>에서도 사와 부의 구별을 하지 않고 사부라 하였고

작품도 사와 부를 함께 구별 없이 수록하였다.

간혹 사와 부를 나누어 따로 사용할 경우도 별 구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와 부를 구별한 것은 <한서漢書 양웅전揚雄傳>에서 보인다.

“부에는 <이소>보다 깊은 게 없고 사에는 <상여相如>보다 아름다운 게 없다.”라고 한 것이다.

 

부는 한대에 이르러 특정한 체제를 형성하였다.

부는 <초사>의 한 형식을 계승한 것이다.

그렇지만 비교적 산문의 수법을 많이 운용하여 사와는 다르게 발달하였다.

 

부는 웅대하거나 독특한 사물들을 아름답고 멋지게 표현하려고 애쓴 서사적 작품이고

사는 우수와 격정 같은 것을 남방가요의 아름다운 형식을 빌려 표현하고 있는 서정적인 작품이다.

 

사 작품 가운데 이인로李仁老의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가 최초의 작품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에 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 등으로 계승되었다.

이들 이후에는 그리 왕성한 창작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석주金錫胄의 <해동사부>에 선록된 58편 가운데 사는 6편 밖에 실리지 않았다.

<동문선>에는 사와 부를 나누어 독립시켜 작품을 수록하였다.

권1의 첫머리에 <화귀거래사><산중사山中辭><민지사閔志辭> 등 10편을 싣고 이어서 부를 싣고 있다.

 

<속동문선>에도 사가 부와 분리되어 서거정徐居正의 <불암사위전상인작佛巖辭爲專上人作>

강희맹姜希孟의 <향산사香山辭> 등 7편의 사가 수록되어 있다.

 

<문선文選>에서도 사를 독립해서 하나의 문체로 세워 부·시 등과 함께 나란히 벌여 놓고

한 무제의 <추풍사秋風辭>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사체의 대표적 작품이라고 하였다.

 

●원진사願陳辭 원컨대 사辭를 나열하리다.

세란악선불차치世亂惡善不此治 세상이 어지러우면 선하고 악한 것을 다스리지 못한다네.

은과질현隱過疾賢 잘못을 숨기고 어질고 착한 사람을 미워하며,

장유간사선무재長由姦詐鮮無災 간사함을 쓰게 되니 재앙 없음이 적다네.

 

환난재患難哉 환난患難이여!

판선阪先 선성先聖에 반대되어

성지불용聖知不用 성스러운 지혜가 쓰이지 못하고

우자모愚者謀 어리석은 자가 계략을 세우네.

 

전차이복前車已覆 앞의 수레가 이미 전복되었는데도

후미지갱後未知更 뒤에서는 고칠 줄을 모르니

하각시何覺時 무엇으로 때를 깨달으랴!

 

불각오不覺悟 뉘우침도 깨닫지 못하고

부지고不知苦 고통도 알지 못하며

미혹실지역상하迷惑失指易上下 미혹되어 가리키는 것을 잃고 위와 아래가 바뀌었네.

 

중불상달中不上達 충성이 위로 통하지 못하며

몽엄이목새문호蒙揜耳目塞門戶 눈과 귀가 가려지고 모든 문이 막혔네.

 

문호새門戶塞 모든 문이 막혔으니

대미혹大迷惑 크게 미혹되어

패란혼막부종극悖亂昏莫不終極 어그러지고 어려워지고 어두운 것이 다 끝마치지 못했네.

 

비반역非反易 옳고 그른 것이 서로 바뀌고

비주기상오정직比周欺上惡正直 친밀함이 군주를 속이며 정직한 것을 싫어하네.

 

정직오正直惡 정직한 것을 싫어하니

심무도心無度 마음에 헤아림이 없어서

사왕벽회실도도邪枉辟回失道途 마음이 바르지 않고 간사하여 길을 잃었네.

 

기무우인己無郵人 자신이 탓할 사람이 없으니

아독자미我獨自美 나 홀로 스스로 아름답게 여긴다고

기독무고豈獨無故 어찌 홀로 무사하겠는가!

 

부지계不知戒 경계할 줄을 알지 못하면

후필유後必有 뒤에 반드시 허물이 있으니

한후수과불긍회恨後遂過不肯悔 뒤에 후회하여 허물이 이루어지면 즐겨 앞의 일을 뉘우치지 않는다네.

 

참부다진讒夫多進 참소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아가서

반복언어사태反覆言語詐態 참소가 반복되면 사특한 것이 생긴다네.

 

인지태人之態 사람들이 사특하여

불여비不如備 위에서 방비를 알지 못하고

쟁총질爭寵嫉 총애를 다투고 어진 이를 시기하며

현리오기賢利惡忌 어진 이를 꺼리는 것만 이롭게 여기네.

 

투공훼현妒功毀賢 공로를 시기하고 어진 이를 헐뜯으며

하감당여상폐닉下歛黨與上蔽匿 아래로는 붕당을 모으고 위에서는 은폐하네.

 

상옹폐上壅蔽 위에서 보필하는 신하가 가려지면

실보세失輔勢 군주가 도와주는 세력을 잃게 되어

임용참부불능제任用讒夫不能制 참소하는 사람을 임용하게 되어서 제재할 수가 없게 된다네.

 

곽공장보지난孰公長父之難 숙공孰公과 장보長父의 어려움으로

여왕류어체厲王流於彘 여왕厲王이 체彘에 유배되었네.

 

주유려周幽厲 주周나라 유왕幽王과

소이패所以敗 여왕厲王의 실패는

청규간충시해聽規諫忠是害 바른 간언을 듣지 않고 충성스러운 이들을 해쳤기 때문이네.

 

차아하인嗟我何人 슬프다! 이 어떤 사람이

독불우시당란세獨不遇時當亂世 홀로 때를 만나지 못하여 난세에 당한 것인가?

 

욕충대欲衷對 진실로 마음속을 봉하려 하는데

언부종言不從 말이 따르지 않고

공위자서신리흉恐爲子胥身離凶 오자서伍子胥가 될까 두려워서 몸은 흉한 곳으로 떠나네.

 

진간불청進諫不聽 간언을 올려도 듣지 않자

경이독록기지강剄而獨鹿棄之江 촉루屬鏤로 목을 베어 강에 버렸네.

 

관왕사觀往事 지나간 일을 보면

이자계以自戒 스스로 경계가 되는데

치란시비역가식治亂是非亦可識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고 옳고 그른 것을 또한 가히 알 것이네.

탁어성상이유의託於成相以喻意 성상成相에 의탁하여 마음을 깨우치도록 한다네.

 

►순자荀子(BC298?-BC238?) 戰國時代 조趙나라의 사상가思想家.

이름은 황況. 예의禮儀로써 사람의 성질性質을 교정矯正할 것을 주장主張하고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에 대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제창提唱하였다.

저서著書에 <순자荀子>가 있다.

 

이름은 순황荀況. 자는 순경荀卿.

공맹사상孔孟思想을 가다듬고 체계화했으며 사상적인 엄격성을 통해

이해하기 쉽고 응집력 있는 유학 사상의 방향을 제시했다.

 

유학사상이 2천년 이상 전통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유교철학을 위해 공헌한 순자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후대의 유학자들이 인간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보는

그의 염세주의적 관점만을 부각시킴으로써 그가 이룩한 많은 지적인 업적이 흐려졌다.

 

12세기 초 성리학의 출현과 함께 그의 사상은 냉대를 받기 시작했는데 최근에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그의 본명은 순황이지만 보통 순자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子’ 라는 글자를 철학자들의 이름에 존칭으로 붙였다.

 

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조나라 출생이라는 것, 몇년 동안 동쪽에 있는 제齊나라의 직하稷下 학파에 있었다는 것,

그 후에 중상모략을 받아 남쪽의 초楚나라로 옮겼고

BC255년 그 나라의 지방 수령을 지내다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곧 죽었다는 것 등이 알려진 사실이 전부이다.

 

유가철학의 발전에서 순자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그의 주요저작인 <순자>의 역사적인 영향력에서 볼 수 있다.

전체 32장인 <순자>는 대부분 그 자신이 쓴 것으로 전해지는데

후대에 수정되거나 위조되지 않아서 원본이 그대로 보존 되어 있다.

 

<순자>는 중국 철학 발전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논어>·<도덕경>·<맹자>·<장자> 등과 같은 초기 철학서적들은 일화·경구警句로 채워진

서술 양식을 가지고 있어서 당시의 복잡한 철학적 논의를 더 이상 설득력 있게 전달해 주지 못했다.

 

이와는 달리 순자는 유가 철학자 가운데 최초로 스승의 말·대화를 기록한 제자들의 글뿐만 아니라

자기가 직접 쓴 체계적인 논문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표현했다.

 

또한 총론적인 설명, 연속적인 논증, 세부적인 상술, 명료성에 중점을 두는 엄격한 서술 형태를 취했다.

순자의 가장 유명한 말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선한 것은 수양에 의한 것일 뿐이다" 이다.

이른바 성악설이다.

 

그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수양철학이다.

만일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둔다면 이기적이고 무질서하며 반사회적·본능적 충동들로 가득 찰것이라고 주장한다.

사회는 개인이 도덕의식을 가진 인간이 될 때까지 점차적으로 이끌고 도야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순자荀子>20권

戰國時代의 유학자儒學者인 순자荀子가 지은 사상서思想書.

예禮와 의義를 외재적인 규정規定이라 하고 그것에 의한 人間 규제를 중시重視하는

예치주의禮治主義를 강조強調하며 성악설性惡說을 주창主唱하였다.

후에 한비자韓非子 등이 계승繼承하여 법가法家 사상思想을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