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陶淵明의 산문散文, 사부辭賦 및 후대에 끼친 영향
도연명의 현존하는 산문散文, 사부辭賦는 단지 10여 편밖에 없는데 대체로 각각의 작품이 매우 훌륭하다.
그 중요한 예술적 특징은 시가詩歌와 일치하나 몇 편은 풍격이 서로 다르다.
산문에서는 <도화원기桃花源記>가 가장 유명하다.
이 산문은 실제로는 거의 소설에 가까운데 또 전하는 바에 의하면
도연명이 지은 지괴志怪소설집 <수신후기搜神後記> 중에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지괴소설은 위진남북조 시대의 괴이한 것을 기록한 소설을 말한다.
글 중의 허구虛構의 “세외도원世外桃源”은 유가儒家가 환상幻想한 上古(상商·주周·진秦·한漢까지를 말함)
때의 순박淳朴함이 있고 또 노자老子가 선양宣揚한 “소국과민小國過民”의 사회 모식模式의 그림자도 있는데
그 중에 농촌 광경의 묘사는 작가의 전원시田園詩의 정취와 비슷하게 그렸다.
그것은 작가가 그의 사회적 이상에 의거해서 창작한 아름다운 상상想象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동란의 시대에서 태평사회에 대한 민중의 동경도 대표하고 있다.
문장의 언어는 우아하고 소박한 문필로 언어, 정취, 주제를 고도로 통일시켰다.
두 문장을 예로 들어본다.
무릉武陵의 어부가 도원桃源 초입에 들어간 구절이 있다:
홀봉도화림忽逢桃花林 홀연히 도화 숲이 나타났는데
협안수백보夾岸數百步 언덕을 끼고 수백 걸음을 걸으니
중무잡수中無雜樹 그 안에는 잡다한 나무는 없고
방초선미芳草鮮美 향기로운 풀이 싱싱하고 아름다운데
낙영빈분落英繽紛 꽃들이 어지러이 떨어져 있다.
도화원에서의 풍광은 이렇게 묘사했다.
토지평광土地平曠 옥사엄연屋舍儼然 땅은 평평하고 넓고, 집들은 정연하게 있고
유양전有良田 미지美池 좋은 밭과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상죽지속桑竹之屬 뽕나무와 대나무가 그 안에 있다.
천맥교통阡陌交通 계견상문鷄犬相聞 논두렁길이 서로 통하게 나있고, 닭과 개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은 작가가 자신과 남을 비교한 것으로 훌륭한 문장에 속한다.
작품 전체는 고작 100여 자에 불과하나
전체의 내용에 “불不”이라는 글자를 첫머리에서 말미까지 시종 관통시키고 있다.
마지막 종결 부분에 나오는 “망忘” 역시 어쨌든 “불不”의 의미를 갖고 있다.
첫머리에
선생부지하허인야先生不知何許人也 선생은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역불상기성자亦不詳其姓字 또한 성과 자도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또
한정소언閑靜少言 한가하고 고요히 말이 적고
불모영리不慕榮利 명예와 돈을 바라지 않고
호독서好讀書 불구심해不求甚解 책읽기를 좋아하는데, 깊이 이해를 구하지는 않는다.
말미에는
망회득실忘懷得失 마음속에 잃은 것과 얻은 것을 잃어
이차자종以此自終 이 때문에 스스로 끝을 맺었다.
대량으로 부정사不定詞를 사용하여 자기는 세간의 모든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다만 마음껏 진솔하게 생활하겠다는 생각을 표시하고 있다.
세속의 명예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이름을 더 하는 것조차도 별로 요긴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소위 “자연自然”의 인생철학인 것이다.
용어用語는 쉬우나 함축된 뜻은 깊은데 이 단문의 현저한 특징이다.
사부辭賦에서는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가 가장 저명하다.
이 작품은 도연명이 팽택령彭澤令 직에 근무할 때 관직에서 물러나려는 결심을 할 무렵에 지은 것이다.
글 중에서 귀로의 모습과 고향으로 돌아간 뒤의 생활을 묘사했는데 모두 상상想象으로 한 것이다.
고대의 각종 문체 중에서 사부의 기본적인 특징은 바로 화려함인데
도연명의 이 부賦는 도리어 상당히 소박하여 언어가 참신하고 유창하다.
서정적 색채가 농후하고 시의詩意가 풍부하며 동시에 또 철학 이치를 충만하게 내포하고 있다.
주초요이경양舟超遙以輕颺 배가 바람에 가볍게 흔들거리고
풍표표이흠의風飄飄而吹衣 표표하게 부는 바람에 옷자락이 휘날린다.
귀로에서 속박을 받게 되지 않아 자유롭고 가볍고 유쾌한 마음을 상상한 것인데
사람의 마음을 탁 트이게 하고 기분을 유쾌하게 만든다.
운무심이출수雲無心而出岫 무심한 구름은 산봉우리에서 피어오르고
오권비이지환烏倦飛而知還 까마귀는 피곤하여 돌아가려고 나는구나.
(····)
목흔흔이향영木欣欣以向榮 나무는 활기차고 무성하게 자라고
천연연이시류泉涓涓而始流 시냇물은 졸졸졸 흘러가네.
대단히 구체적으로 자연계의 자생自生과 자멸自滅하는 광경을 그려 자유가 충족된 영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바로 이런 묘사가 객관적인 대상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가의 인생의 정취를 포괄하고 있기에
특별하고 뛰어나게 감동을 준다.
위에서 말한 몇 편은 분위기가 비교적 평화스럽다.
그런데 <감사불우부感士不遇賦>에서는 재능이 있으면서도 펼 기회를 만나지 못하여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방법이 없는 고민을 강조하여 토로하고 있어 비교적 격렬함이 뚜렷하게 드러나 보인다.
<제정씨매문祭程氏妹文>은 자신의 친여동생을 애도한 작품인데 비통함을 진심으로 쏟아내서 감동을 준다.
<한정부閑情賦>는 도연명집 중에서 비교적 훌륭하고 특수하다.
작품의 주제의 의의는 “한정閑情”(유유자적한 마음)을 표방標榜하여 감정을 제한했는데
실제 내용은 오히려 대다수의 유사한 작품과 마찬가지여서 열렬하게 남녀 간의 정情을 과장하고 있다.
게다가 문사文辭는 막힘이 없이 유창하고 색채는 탐스럽고 아름답다.
그 중에 ‘원재의이위령愿在衣而爲領 옷깃을 여미고 싶다’
이하의 한 큰 단락은 각종각양의 비유를 사용하여 美人을 친밀하게 사귀려는 마음을 표현했는데
세밀하고 생동감 있게 사물을 묘사하고 대단히 능숙하게 배치하여 자못 민가民歌의 특징을 지녔다.
여기에서 도연명의 사상적 정취의 다른 면과 문학적 재능의 다양성을 알 수 있다.
도연명은 후대에 다방면으로 영향을 주었다.
남조南朝에서는 그를 대체로 품행이 고결한 은사隱士로서 대우하는데
그의 문학 창작에 관한 평가는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
그 당시의 사회는 보편적으로 화려한 문풍文風을 추앙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연명의 소박하고 평범한 그러한 시문 풍격은 일반 작가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당唐나라에 이르러서야 정황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심미審美적 취미가 같지 않은 이백李白, 두보杜甫 등은
특별히 존경하는 문학 선배 중에 도연명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저광희儲光羲 위응물韋應物 일파의 시인은 비록 자주
도연명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예술 풍격은 도리어 도연명의 시에서 영향을 뚜렷하게 받았는데
당시唐詩 중에서 이들은 중요한 유파流派에 속했다.
당나라 시를 주도하는 풍격은 수사修辭의 미와 격정激情의 결합이라고 말해야 마땅한데
이것은 분명히 도연명의 시 정신精神과 같지는 않다.
그래서 도연명 시가 그들의 작품에 미친 영향의 범위는 그다지 크지 않다.
송대宋代에 이르러서, 도연명은 보편적으로 일치된 추앙을 받기 시작했다.
이것은 송대의 사회 분위기가 당나라 때에 비해 매우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가詩歌에서는 격정과 낭만 정신이 감퇴하기 시작했고 이성理性적 뜻의 내포를 중시하는 쪽으로 전향했다.
북송北宋의 저명한 문학가 소식蘇軾은 <여소철서與蘇轍書>에서 도연명을 이렇게 평했는데
그 특징을 상당히 정확하게 잘 잡고 유달리 높게 평가했다.
기시질이실기其詩質而實綺 그 시의 품질은 실제로 비단처럼 아름다운데
구이실유癯而實腴 여윈 것 같으나 실제는 살쪄서
자조自曹 유劉 조조曹操로부터 유종원柳宗元,
포鮑 사謝 리李 두제인杜諸人 포조鮑照, 사령운謝靈運, 이백李白, 두보杜甫 등의 여러 사람
개막급야皆莫及也 모두가 이에 미치지 못한다
기타의 약간의 이름난 시인과 비평가도 도연명에 대해 똑같이 칭찬을 많이 했다.
여기에 이르러서 도연명은 詩 역사에서 일류 시인으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확립하게 되었다.
도연명 개인의 인격이 고상하다는 것은 응당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그는 사회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 문학 창작을 주도하는 방면에서는 오히려 갈등을 회피하고
세속에 구속되지 않고 되도록이면 초연하여 현실의 고통을 잊기를 갈망했다.
건안建安 문학의 진취적 정신과 정시正始 문학의 비극적 의식은
모두 현실의 사회관계 중에서 인간의 자유의지 실현을 요구했다.
일방적으로 말하자면 도연명의 “자연” 철학은 일종의 심오한 철학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데
그러나 그는 이를 통해서 바로 인간사회에서의 자유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피했던 것이다.
이것은 역시 개체의식이 약화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후세의 문인들은 사회의 압박을 받아 반항하기가 어렵게 될 때면 곧 도연명을 더욱 쉽게 떠올렸는데
그의 인생관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사회의 억압을 뚫고 나가기보다 쉬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자기 위안을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충돌하게 되더라도 쉽게 위험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도연명은 당나라 때보다는 송대의 문인에게 더 추앙을 받았는데 그 원인은 여러 방면에 있다.
그러나 당唐·송宋 사회의 환경이 같지 않고 아울러 두 시기의 문인정신 상태도 다른 것도
적어도 결정적인 요인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중국 문화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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