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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도연명陶淵明

도연명 당시 정치적 인물 환현桓玄

도연명 당시 정치적 인물 환현桓玄

 

환현桓玄(369-404)

성은 환桓, 자는 경도敬道, 이름은 현玄이며 영보靈寶라고도 한다.

시호는 무도武悼이다.

 

지금의 안후이성 화이위안(懐遠)인 초국譙國 용항龍亢 출신으로

아버지는 동진東晋의 명장인 환온桓溫이며 어머니는 마씨馬氏 부인이다.

유씨劉氏 부인과 결혼해 예장왕豫章王 환승桓昇을 낳았다.

 

환온의 서자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총명해 환온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373년(동진 효무제 1) 환온이 죽자 5세의 나이로 남군공南郡公의 작위를 계승했다.

 

숙부인 환충桓沖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한 환현은 23세에 태자세마太子洗馬가 되었고

얼마 뒤에는 의흥태수義興太守로 임명되었다.

 

396년 안제安帝가 즉위하고 숙부인 司馬道子가 섭정을 맡으면서 전횡을 일삼자 동진은 심각한 혼란에 빠졌다.

398년(안제 2) 사마도자의 측근인 왕국보王國寶가 북부군北府軍의 통솔권을 빼앗으려고 하자

연주자사兗州刺史 왕공王恭과 예주자사豫州刺史 유해庾楷는 조정에 반기를 들고 군대를 일으켰다.

 

당시 광주자사廣州刺史로 임명된 환현도

형주자사荊州刺史 은중감殷仲堪과 함께 서부군西府軍을 이끌고 군대를 일으켰다.

 

왕공의 거병은 유뢰지劉牢之의 배신으로 실패했으나 이 과정에서 환현은 세력을 크게 확대할 수 있었다.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사마도자·사마원현司馬元顯 부자는 은중감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환현을 강주자사江州刺史로 임명했고 환현은 399년에 은중감과 옹주자사雍州刺史 양전기楊佺期를 죽이고

그들의 세력을 흡수해 서부군西府軍을 장악했다.

 

다음 해 조정이 서로 이반시키는 계책을 써서 형주사군荊州四郡을 다스리게 하고

은중감과 양전기楊佺期를 살해하게 하니 형옹荊雍을 거점으로 형주와 강주의 자사刺史를 겸임하면서

형주와 사주司州 등 여덟 주州를 다스리게 되었다.

심복의 부하들을 곳곳에 배치하여 군사력이 나날이 증강되었다.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자 각지에서 민란도 발생했는데 399년 저장성浙江省과 장쑤성江蘇省에서

손은孫恩이 오두미교五斗米敎 신도들을 중심으로 일으킨 민란은

402년에는 도읍인 건강建康(지금의 난징)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민란은 유뢰지가 이끈 북부군에게 진압되었지만 환현은 그 틈을 타서

서부군을 이끌고 건강으로 진입해 사마도자 부자를 죽이고 동진의 실권을 장악했다.

 

그 뒤 시중侍中과 상국相國 등의 지위에 올라 국정을 이끌었는데

이 시기에 죽간竹簡 등의 사용을 없애고 공문서의 작성을 종이로 통일시키기도 했다.

 

유뢰지 마저 제거한 환현은 403년 12월에 안제에게 선양을 받는 형식으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는 초楚라고 했고 연호는 영시永始라고 하였다.

환현이 세운 초나라를 다른 시대의 초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환초桓楚’라고 부른다.

 

그러나 환초 정권은 404년 3월 24일 유뢰지 휘하의 장수이던 유유劉裕가 군대를 일으키면서 3개월 만에 무너졌다.

제갈장민諸葛長民과 유의劉毅 등이 동시에 각지에서 군대를 일으키자

환현은 3월 28일에 건강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해 6월 19일에 아들인 환승과 함께 풍천馮遷에게 살해되었다.

환현이 죽은 뒤에 사촌인 환겸桓謙이 남은 세력을 모아 유유 등에 맞섰으나 결국 패하고 후진後秦으로 투항했다.

 

한편 환현이 죽은 뒤에 안제가 다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동진의 실권을 장악한 유유는 419년 1월에 안제를 살해하고

그의 동생인 사마덕문司馬德文을 제11대 공제恭帝로 옹립했다.

 

그리고 420년 7월에는 공제에게 선양을 받는 형식으로 직접 제위에 올라 동진을 멸망시키고 송宋나라를 세웠다.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동진東晉

동진東晉(317-420)은 중국의 서진西晉 왕조가 흉노족 유연劉淵의 전조前趙에게 정복되어 멸망한 후

사마예司馬睿에 의해 강남江南에 세워진 진晉의 망명 왕조이다.

서진과 구별하여 동진이라고 부른다.

 

306년 서진 말기에 영가의 난(永嘉之亂)에 의해 낙양洛陽이 함락되었고 흉노족 군사들이 회제懷帝가 포로로 삼고

사마씨들을 전부 잡아 학살하였고 사마씨 여성들을 전부 노비로 만들어 흉노족들에게 배분하였다.

이후 서진은 멸망하였다.

 

진의 낭야왕琅邪王인 사마예는 학살에 겨우 살아남아 건업建業으로 피하여

낭야의 호족 왕도王導의 힘을 빌려 이 땅에 동진을 건국했다.

 

약 100년간 11대에 걸쳐 지속되었고 흉노족의 한족 정복에 화북으로부터 피난해온

한족들이 양쯔강 유역에 건국하여 운영되었다.

당시 강남은 인구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농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원래 습기가 많아 수자원이 풍부한 지역이기도 하다.

 

제9대 효무제孝武帝 때 티베트인 전진前秦이 남하하여

한족을 정복하려는 전쟁이 일어나 동진은 위기를 맞게 되었다.

 

383년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 위기를 넘기지만 이때부터 긴 전란에 노역으로 동원된 농민 반란이 잦아지자

무장 환현桓玄이 반란을 막는다는 명분하에 거병하여 집권하게 되었다.

 

유유劉裕가 이를 진압하고 이에 대한 명분과 북벌 성공으로 새로이 집권에 성공한 뒤

아예 새로운 왕조를 세워 제위에 오르면서 동진은 멸망하게 되었다.

유유가 새로 세운 나라의 이름은 송宋이며 이는 남북조 시대에 강남에 세워진 남조南朝의 첫 왕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