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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도연명陶淵明

화도시和陶詩

화도시和陶詩 도시陶詩에 화운和韻하다

도시陶詩는 도연명陶淵明(도잠)의 시를 말하는데 대개 자연스럽고 한적한 정취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화도시和陶詩 즉 화도연명의고和陶淵明擬古 시는 도잠의 시에 화운和韻한 시를 말하는데

송대宋代 시인 소식蘇軾(소동파)에 의해 시도된 형식이다.

 

지금까지 동양의 많은 문인들이 화도시를 지었는데

이것이 일종의 문학적 유희로 몇 수를 짓는 데 그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多作으로 하나의 편篇을 형성할 정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도잠이라는 인물이 보여준 出處에 대한 모범적 자세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보였던 절제된 인격미,

인간과 자연의 合一로 나타나는 그의 문학성 때문에 그의 시문은 후대 문인들에게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1수 이상 화도시를 지은 문인들은 약 67人이며

도잠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화답한 화도사和陶辭를 창작한 문인까지 합치면 약 134人 정도가 된다고 한다.

 

 

►화도시서和陶詩序/신흠申欽 <상촌선생집>21권

 

내 조정에서 죄를 얻고 한 번은 쫓겨나서 田里로 돌아왔으나

두 번째 축출되어서는 심심산골에 갇혀 있게 되어 세상에서는 이미 더부살이 존재가 되었다.

 

원래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때로 책이나 펴들고 꿈속을 헤매듯이 지내다가 그것마저도 그만 두었었는데

어느 날 소장공蘇長公(소동파)이 도잠陶潛(도연명)의 시에 화답한 시를 보고 내 마음에 깊이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이유는 소동파蘇東坡가 세상을 내리 보는 자세로서 혜주惠州 담주儋州에서 굴욕을 당했던 처지가

바로 지금의 나와 비슷한데다가 도연명의 그 고고한 인품과 티 없이 굳은 지조에 대하여는

내가 존경하고 사모하기가 소동파보다 못지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동파가 했던 것처럼 나도 그 뒤를 이어 화답한 것인데 모두 102首에 달한다.

아! 그들이 다시 살아 이 세상에 올 수 있다면

내 소동파는 서로 도움을 주는 친구로 삼을 것이고 도연명은 스승으로 모실 것인데.

 

혼탁한 흐름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육지가 강으로 변하고 있을 때 늦게야 의희義熙 연간에 살면서

자기 자신을 무회씨無懷氏의 백성에다 비유했던 그를 생각하면 그 발자취야 비록 현격한 차이가 있겠으나

그러나 그 가상적 운치로 말하면 그렇다는 것이니

 

가령 그러한 논리라면 소동파가 혜주에서 갖가지 풍상을 실컷 겪었던 일도

그것이 왜 도연명에는 미치지 못할 이치가 있으며

 

내가 지금 벼슬을 버리고 소양에 있으면서 그 두 분을 뒤따르려는 것도 그렇게 큰 거리가 있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사리에 통달하고 식견이 넓은 사람은 겉 빛깔이 검고 누렇고를 따지지 않는 법이다.

 

만약에 출처出處 굴신屈伸을 표준으로 하여 두 가지로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찌꺼기를 논하는 것으로서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구별을 할 것이다.

 

정사년(1617) 4월 하순 소양昭陽의 우사寓舍에서 현옹玄翁(신흠 자신)은 쓰다.

/번역: 고전번역원

 

 

►도시자주陶詩自做/이익李瀷 <성호사설>29권

 

옛사람의 시는 하향시골의 野人과 같아서 관冠도 바로 제 손으로 만든 것이요,

띠도 역시 제 손으로 만든 것이요, 옷과 신발도 모두 제손으로 만든 것이요,

기물器物도 역시 제 손으로 만든 것이라, 참된 마음이 표현되어 공졸工拙을 분별할 수 있거니와

요즘 사람의 시는 경읍京邑의 선비와 같아서, 관은 바로 빌린 것이요, 띠도 바로 빌린 것이요,

옷과 신발도 역시 빌린 것이요, 기물도 모두가 빌린 것이라,

비록 아름답고 우아하여 볼만한 것은 있을지라도 다 자기의 소유물이 아니요,

동녘 이웃에게 빌리고 서녘 이웃에서 빌려 쓴 것이니 무엇이 족히 칭할 것이 있으랴!

 

나는 <정절집靖節集(도잠의 문집)>을 살펴보니 곧 스스로 지어낸 것이라,

이 때문에 배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요즘 세상에 논하는 시는 남의 물건을 빌어서 벌여놓기를 빈틈없이 잘한 것에 지나지 아니하며

또 혹자는 남의 물건을 빌어서 선후가 전도되고 본말이 착란 되게 만드는 일도 있으니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번역: 성호기념관

 

►간재艮齋의 <화도시和陶詩>에 관한 연구

도학적인 삶의 자세를 견지한 간재에게 왕성한 시 창작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시는 사무사思無邪라고 하여 성정도야性情陶冶의 한 방편으로 중요시되었으니

간재 역시 시를 전연 도외시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물이 문집에 남은 소량의 시다.

‘화도’는 그 중의 하나다.

 

물론 간재는 李白을 필두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우암尤庵 송시렬宋時烈 김영식金永植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율곡栗谷 이이李珥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회옹晦翁 주희朱熹 수옹遂翁 권상하權尙夏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와 같은 분들의 시를 이따금 한 편씩 차운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해 ‘화도’는 양적으로 무려 6수나 된다.

마음먹고 붓을 잡은 연작임이 분명하다.

 

39살이 되던 1879년의 일이니 고결한 삶을 노래한 도잠陶潛에 대한 존경의 발로이다.

Ⅲ장과 Ⅳ장에서 검토하였듯이

첫 수를 제외한 다섯 수는 歸田園과 별반 관련 없는 도학자의 기습氣習이 노래되고 있다.

 

둘째 수를 보면 우암이 가려 뽑은 朱子의 소차疏箚가 주된 소재로

이를 현종顯宗에게 읽어보도록 청한 박세채朴世彩까지 거론되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사단四端을 밝게 알아 실천궁행實踐躬行하라는 유교적인 가르침을 담았다.

넷째 수에서는 아예 송나라의 학자 채원정蔡元定과 그의 아들 채침蔡沈을 백세의 스승으로 기리고 있다.

 

다섯째 수에서는 孔子를 필두로 주자朱子 안자顔子 증자曾子 황간黃幹 채원정 등을 두루 언급하면서

이들과 종유해보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내용으로 꾸렸다.

 

여섯째 수는 시절을 한탄하는 작품으로 王道政治를 구현할 수 있는 현인을 간절히 소원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화도’는 간재의 성리학적인 세계관이 깃든 대표적인 연작시로 지목해볼 수 있다.

 

기존 시인들의 和陶詩와는 전혀 다른 간재만의 ‘화도’가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간재는 실제 여러 海島를 물색하기도 하고 미리 군산도와 왕등도 등지에서 거처한 적이 있다.

 

그 후 1912년 9월, 간재는 72세의 나이로 계화도繼華島에 이주하여 여생을 이곳에서 마무리 지었다.

이는 도잠이 실현했던 귀전원의 계승이었으니 간재가 일찍이 ‘화도]를 지었던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화도’는 간재의 시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계화도 은거의 단초를 미리 내보인 작품으로 지목된다.

 

►‘화도시和陶詩’는 도연명의 시에 화운和韻한 작품을 말하는데

운자韻字를 따라 쓰는 방식으로 도연명 시에 대한 존중과 공감을 표현한다.

영화에서의 오마주와 비슷하다.

 

조선시대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다음과 같은 ‘화도시’를 남겼다.

도연명의 ‘술주述酒(술을 이야기하다)’ 시는 본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김종직은 송나라 탕한湯漢의 주석을 통해 이 시가 유유劉裕에 의해 시해당한 남조南朝 진晉나라 공제恭帝를

애도하는 내용임을 확인하고 도연명의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이 시를 썼다.

특히 유유의 아들이 손자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덧붙여 유유의 악행에 대한 天理의 보응報應을 부각시켰다.

 

<김종직金宗直 ‘화도시 述酒’는 도잠의 <述酒> 5언시 34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