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蘇軾 차운시次韻詩의 특징
文學碩士 學位論文 서울大學校 大學院 中語中文學科 文學專攻 이다연李多娟 2016年 8月
【국문초록】
차운시次韻詩는 화운시和韻詩의 일종으로 原詩의 운자를 순서대로 사용하여 창작한 시를 말한다.
차운시는 唐代의 원진과 백거이로부터 시작되었고
만당晩唐의 피일휴와 육구몽이 적극 받아들여 주변 문인들과 함께 실천함으로써 하나의 詩體로 굳어져갔다.
이후 宋代 초기에는 서곤파西崑派의 등장으로 화의불화운和意不和韻의 풍조를 이루다가
구양수와 매요신 등의 문인들이 다시 차운시를 활발하게 짓기 시작했다.
이것은 소식에 이르러서는 보편화되며 송대 사대부들의 유희를 통한 교유를 만족시켜 주는 놀이 수단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교유시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차운의 교유적 기능과 맞물려 차운시가 성행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이 시기의 문단의 영수였던 소식은 차운시를 다양한 모습으로 활용하여 차운시의 효용성을 높였다.
이 시기에는 이전에 비해 차운시가 성행하였기에 차운시에 관한 다수의 기존 연구가 있었다.
그러나 창화에서의 소재 분류와 교유 대상에 중점을 두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차운시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는 연구가 미진한 상태였다.
이는 차운시가 창화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창화의 내용적 측면으로만 접근한 탓이었다.
그래서 본고는 차운시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 차운시 자체의 특성에 주목하였다.
본고는 문인들의 놀이에서 탄생한 차운시가
소식에 이르러 다양화되고 대량으로 창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연구를 시작했다.
소식이 새로운 운각을 사용하여 자신의 시를 창작하지 않고
굳이 차운의 방식을 선택한 원인이 분명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차운시가 가진 놀이적 특성에서 기인한다고 여겨진다.
소식은 原詩의 운각을 순서대로 사용하면서 문인으로서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놀이는 그 특성상 긍정적인 감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식은 이러한 차운시를 다양하게 지어 자신의 시 창작에 활용하였다.
본고는 이를 차운 방식과 차운 대상의 측면으로 나누어 각각의 의미를 분석하였다.
첫 번째 소식 차운시의 특징은 창화 방식의 다양화였다. 이는 유희의 극대화로 해석된다.
먼저 기존의 1회의 唱과 和로 이루어졌던 창화가 연장된 모습이 자주 나타났다.
시인들은 반복되는 운각의 사용을 통해서 유희를 추구할 수 있었다.
또한 일대일 관계에서 행해진 기존의 방식과 달리 여러 사람과 계속 차운시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문인들은 특정한 집단 내에서 동질감을 느끼며 교유를 한 것이다.
그리고 타자간 관계에 개입하여 차운하는 형식도 있었다.
原詩 작자는 분명 다른 受信者에게 시를 썼지만
소식은 그 시에 차운함으로써 原詩 작자와 그 受信者 사이에 개입한 것이다.
이를 통해 소식은 原詩를 통해 형성된 긍정적 정서 위에서
그들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 성공적으로 교유를 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소식 차운시의 특징은 차운 대상의 다양화였다.
소식은 다른 이의 시를 차운의 대상으로 삼는 기존의 차운시를 벗어나 그 대상을 확대하였다.
그는 자신이 지은 시에 차운한 자화시를 지었고 古人의 시에 차운한 추화시를 짓기도 하였다.
먼저 자화시는 소식이 자신의 原詩와 연관성을 지어 특정한 규칙 아래에서
차운시를 창작했다는 점에서 놀이성 측면이 나타났다.
이는 시간적으로 연속 창작의 경우와 연속 창작이 아닌 경우로 구분되었는데
전자의 경우 한 편의 시와 같이 이어지고 후자의 경우 原詩와 자화시의 정서가 대체로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原詩와 자화시는 함께 놓고 보았을 때 시인의 심경을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자화시는 연작시로 파악되었다.
추화시는 크게 화도시 이전의 추화시와 화도시로 분류하여 각각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화도시 이전의 추화시는 시인과 原詩 작자가 같은 상황에 처해져 만들어진 것으로
유희를 위해 지었다는 점에서 일반 창화시의 창작 목적과 비슷하였다.
반면 화도시는 운각에 집중하여 차운시 창작에 몰입함으로써 시인의 슬픔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소식은 차운시를 놀이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화도시를 통해 긍정적인 정서를 얻어 위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본론의 마지막장은 소식 차운시의 한계를 살펴보았다.
소식과 같은 대문호도 상당수의 차운시를 짓다보면 운각의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차운시는 정해진 운각을 반드시 순서대로 사용해야 한다.
이에 따라 운각의 제약을 받아 부자연스러운 시상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특히나 句數가 많은 고체시의 경우에 이러한 한계점이 나타난 측면이 있었다.
이와 반대의 경우로는 운각의 글자를 교체하면서 시를 자연스럽게 전개한 경우가 있었다.
이 또한 차운시의 기본적인 창작 조건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운시의 한계로 지적될 수 있었다.
정해진 운각으로 원하는 시상을 전개할 수 없을 때 소식은 같은 韻部 내에서 다른 운자로 교체하였기 때문이다.
요컨대 차운시는 문인들의 놀이였고 소식은 차운시를 다양한 방식으로 창작하였으며 차운의 대상을 다양화하였다.
또한 이 과정에서 차운시의 창작 조건인 정해진 운각의 사용으로 인한 한계점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본고는 소식 차운시의 특징을 연구하였다.
더 나아가 이러한 연구를 통해 그 시대의 주변 문인들의 차운시를 함께 살펴볼 수 있었다.
따라서 소식 차운시의 특징 연구는 북송 시대 문인들의 교유 양상 및
차운시의 확장된 영역을 살펴볼 수 있게 해 주며 차운시의 본질을 알게 해 주는 데 의의가 있었다.
제1장 서론
제1절 연구 목적
차운시次韻詩는 화운시和韻詩의 일종이다.
和韻詩란 타인이 사용한 韻字나 그 韻目을 몇 가지 방식으로 활용하여 지은 시를 말한다.¹
►1) 강성위 <和韻詩의 類型과 特性考> 한국중국어문학회 <中國文學> vol.30, 1998,p.169.
唐代 이후로 시는 엄격한 격식을 요구하여 구법과 대장, 압운과 평측에 관한 규칙들을 지켜야 했는데
여기서 압운을 응용하여 발달시킨 것이 和韻詩이다.
이 화운의 종류로는 차운次韻, 의운依韻, 용운用韻의 3가지 형식이 있다.
次韻은 原詩에 사용된 운자를 순서대로 사용한 것을 말하며
依韻은 原詩의 운과 같은 운부에 속한 운자를 사용한 것,
用韻은 原詩의 운자를 그대로 사용하지만 순서는 고려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²
►2) 당시갱화唐詩賡和 당시唐詩에는 화답이 이어졌으니
유차운선후무역有次韻先後無易 차운은 선후에 바뀜이 없는 것이며
유의운동재일운有依韻同在一韻 의운은 한 운부 안에 함께 있는 것이며
유용운용피운불필차有用韻用彼韻不必次 용운은 그 운을 사용하되 반드시 차례를 지키는 것은 아니다.
류반劉攽 찬撰 <中山詩話> 淸 何文煥 輯, <歷代詩話> 卷一, 臺北: 漢京文化事業有限公司 1972, p.289.
이 중 송대에는 차운의 방식이 가장 많이 쓰였고 이후로 청대까지도 차운시는 보편적으로 창작되었다.
그런데 차운시에 대한 후대의 평은 부정적인 경우가 많아 보인다.
차운시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한 비평가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엄우嚴羽와 왕약허王若虛를 들 수 있다.
화운최해인시和韻最害人詩 화운은 사람의 시를 가장 해친다.
고인수창불차운古人酬唱不次韻 옛 사람들은 수창酬唱을 하되 차운은 하지 않았는데
차풍시성어원此風始盛於元 백白 피皮 륙陸 이러한 기풍은 원진과 백거이, 피일휴와 육구몽부터 성행하기 시작했다.
이본조제현而本朝諸賢 그러나 본조의 모든 현자들은
내이차이투공乃以此而鬪工 이를 가지고 다투어 다듬었으니
수지왕부유팔遂至往復有八 구화자九和者 마침내 왕복으로 8, 9차례에 이르렀다.
/엄우嚴羽 <창랑시화滄浪詩話>³
►3)하문환何文煥 집輯 <歷代詩話(二)> 嚴羽 <滄浪詩話> 臺北: 漢京文化事業有限公司, 1983, p.699.
차운식작시지대병야次韵寔作詩之大病也 차운은 진실로 시를 지을 때의 큰 병폐이다.
시도지송인詩道至宋人 이자쇠폐已自衰弊 이우전이차상상而又專以此相尙
시의 도가 송대인에 이르러 이미 절로 쇠퇴하였는데도 또 오로지 이것을 서로 숭상하니
재식여동파才識如東坡 역불면파탕이종지亦不免波蕩而從之
동파처럼 재주와 학식이 있는 사람도 또한 물결에 휩쓸려 그것을 따라감을 면치 못하여
집중차운자기삼지일集中次韵者幾三之一 문집 중에 차운한 것이 약 삼분의 일이다.
수궁극기교雖窮極伎巧 경동일시傾動一時 이해우천전다의而害于天全多矣
비록 재주가 지극히 교묘하여 한 시대를 움직였으나 천연스러움을 해친 바가 많다.
사소공이무차使蘇公而無此 기거고인하원재其去古人何遠哉
소공에게 이것(차운)이 없다면 그 거리가 옛 사람과 어찌 멀겠는가.⁴/왕약허王若虛 <호남시화滹南詩話>
►4)왕약허王若虛 <호남시화滹南詩話> 정복보丁福保 집輯 <歷代詩話續編>卷上 北京: 中華書局 1983, p.515.
엄우는 화운시가 “시를 해친다”고 비판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에 의하면 송대 모든 문인들이 차운시를 지었으며
서로 경쟁적으로 8, 9차례까지 이어나가며 차운시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차운시가 얼마나 성행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왕약허는 소식처럼 재주와 학식이 있는 사람조차
전체 시 중의 삼분의 일이나 되는 차운시를 지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그는 차운시가 시의 천연스러움을 해친 바가 많았다고 하였다.
즉 만약 소식이 차운시를 짓지 않았더라면 시를 더 잘 지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대량의 차운시를 지은 소식을 비판한 것이다.
따라서 이 두 편의 인용문을 종합하여 볼 때
소식을 포함한 송대 문인들 사이에 차운시가 매우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송대 문인들은 왜 “시를 해치는” 차운시를 지었는지
그들도 차운시에 대해 “시를 해친다.”고 여겼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문인들은 ‘이시위교以詩爲交’ 즉 시를 주고받는 행위를 통하여 교유를 했다.
이 경우의 詩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로서
문인들이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면서도 교유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차운시는 바로 이러한 문인들의 교유 과정에서 놀이로서 나왔는데
唐代에 들어 원진元稹과 백거역白居易가 시를 주고받으며 “차운次韻”을 시작하였다.⁵ ⁶
►5)唐代 元稹은 <상령호상공서上令狐相公書>에서
소생자췌小生自揣 불능유이과지不能有以過之 “제가 헤아려보건대 그를 뛰어넘을 수 없었으니
왕왕희배구운往往戱排舊韻 별창신사別創新詞 명위차운名爲次韻
왕왕 옛 운을 장난으로 늘어놓아 새 작품을 다르게 지어, 차운이라 이름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6) 그러나 원진(779-831)과 백거이(772-846)는 단지 ‘次韻’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을 뿐이고
실제로는 이단李端(?-785?)의 <야사병거희로륜견방野寺病居喜盧綸見訪>와 로륜盧綸(?-799?)의
<수리단공야사병거견기酬李端公野寺病居見寄> 증답시에서 이미 차운을 했다.
/장소우蔣紹愚 저著 <唐詩語言硏究>北京: 中州古籍出版社 1990, p.68.)
사실 창화에서 본래 和詩는 애초에는 한 사람이 선창하면 다른 사람이 화답하는 것으로
반드시 상대방의 원운 또는 원래의 운자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⁷
►7) 왕력 지음, 송용준 옮김, <중국시율학1> 서울: 소명출판, 2005, p.123.
그러나 송대 이후 和詩는 언제나 原韻을 따르게 되었으니⁸
문인들은 차운시를 오락의 수단 혹은 언어유희의 수단으로 자주 사용한 것이다.⁹
►8) 위의 책, p.124.
►9) 예를 들어 소식의 시
<강상치설江上値雪 효구양체效歐陽體 강 위에서 눈을 만나 구양수체를 모방하여
한부이염옥학노서접비무지류위비限不以鹽玉鶴鷺絮蝶飛舞之類爲比
‘소금⋅옥⋅학⋅백로⋅솜⋅나비⋅비행⋅춤’ 따위를 비유로 삼지 않고
잉부사호백결소등자仍不使皓白潔素等字 次子由韻
또한 ‘皓⋅白⋅潔⋅素’등의 글자를 사용하지 않기로 제한하여 자유의 시에 차운한다)>는 4가지의 조건
(➀구양수체를 모방할 것, ➁‘소금⋅옥⋅학⋅백로⋅솜⋅나비⋅비행⋅춤’을 비유로 삼지 않을 것,
➂‘皓⋅白⋅潔⋅素’ 등의 글자를 사용하지 않을 것,
➃子由의 시에 차운할 것)으로 구성되는 전형적인 오락 또는 언어유희를 위한 詩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차운시는 교유시의 증가와 함께 성행하였고
소식 이후 차운시는 교유의 보편적 방식으로 사용된다.
특히 문학적 영향력이 컸던 소식은 교유시를 통해 주변 사람들과
잦은 화답을 하였고¹⁰ 785首¹¹라는 대량의 차운시를 창작하였다.
►10) 송용준, 오태석, 이치수, <宋詩史> 서울: 역락, 2004, p.367.
►11) 內山精也에 의하면 중화서국에서 출판한 <蘇軾詩集>의 1권부터 45권까지 모두 2387首의 편년시가 있는데
그 중에서 확실히 차운시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785首이다.
이는 원시가 확인되지 않는 “和……”와 같은 제목의 시는 제외한 것이다.
內山精也, 王水照 主編<傳媒與眞相-蘇軾及周圍士大夫的文學-蘇軾及周圍士大夫的文學>
上海: 上海古籍出版社, 2013, p.334.)
그리고 소식의 문하생들에 이르러 차운이 성행하는 추세는 더욱 명백히 드러났으니
이는 그들이 시대의 추세를 받아들인 영향이며 또한 차운을 좋아했던 스승 소식의 영향이었다.¹²
►12) 金甫暻<蘇軾“和陶詩”硏究> 復旦大學 博士學位論文, 2008, p.67 참조.
대가의 시풍을 따른다는 것은 곧 주류에 속함을 의미했으며 이 시기의 문화 집단에 편입됨을 뜻하기 때문이다.¹³
►13) 서경호<중국문학의 발생과 그 변화의 궤적>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3, p.502.
이러한 과정을 거쳐 송대 여러 문인들의 차운시 창작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송대 문인들이 차운시를 짓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차운시는 놀이이기 때문에 놀이의 속성인 즐거움이 동반된다.
즉 차운을 통해 긍정적(+) 정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문인들은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차운시를 짓고 정해진 운각을 가지고 누가 더 잘 지었는지 경쟁을 하였다.
그리고 그 차운시는 즉흥적인 재치가 담기면서도 내용적으로 하나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 중 차운시를 가장 잘 지은 문인은 여러 사람에게 문인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고 주목을 받는 사람이 된다.
또한 차운은 문인들의 학식을 드러내는 데 쓰였으니
운각의 제약이 있는 상황에서도 시를 지을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송대에는 이러한 측면이 강했다.
송대 문인들은 폄적과 임지의 이동이 잦아 지속적으로 새로운 인물들과 교유를 형성해야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창화는 중요한 교제수단이었고 창화를 지식인이 반드시 갖추어야하는 재능으로 여겼다.14)
►14)강영姜霙 <張先 交遊詞의 ‘以詩爲詞’ 경향> 서울大學校 碩士學位論文, 2015, p.66.
그 중에서도 차운은 운각까지 정확히 맞추어야 하므로
그 사람의 作詩 재능이 얼마나 되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었다.
차운시를 잘 지으면 상대방에게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면서도 자신의 실력에 대해 만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차운시를 짓는 가장 큰 목적은 유희였고 이는 교유에 유리하게 사용되었다.
이렇게 차운은 즐거운 분위기를 만든다.
시인이 슬프거나 절망적인 부정적(-) 정서를 가지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문인들과 모여 차운시를 짓는 동안 생활 속에서 오는 근심을 잠시나마 잊기도 하며
차운시를 통해 형성된 즐거운 감정이 그 근심의 정도를 완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슬픔에 빠졌을 때 그 슬픔을 잊기 위해 다른 것에 집중하여
슬픈 상황에 집중된 초점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켜 슬픔을 완화시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와 관련하여 현대 심리학의 놀이치료를 생각해 볼 수 있으니 놀이에 참여하는 동안
긍정적인 情動의 효과로 인해 불안함이나 우울함을 덜 느끼는 경향이 있다.¹⁵
►15) Charles E. Schaefer 엮음, 김은정 옮김 <놀이치료의 기초> 서울: 시그마프레스, 2015, p.21.
그래서 때로는 이러한 효과가 차운시를 짓는 주요한 목적이 되기도 한다.
차운시 자체가 유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를 앞의 경우와 종합하여 정리하면 차운시는 긍정적인 정서를 부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즐거운 상황은 더욱 즐겁게 만들고, 슬픈 상황에서는 슬픔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운시의 목적이자 효과는 바로 즐거움이라 생각한다.
이전시기의 차운시와 비교하여 볼 때 소식은 차운시라는 정해진 규격안에서
차운시를 매우 자유롭게 활용하였고 차운시를 활발하게 창작하였다.
이는 소식이 당시 문단의 영수이며 시 창작에 능했기 때문에 더욱 가능했다.
차운시는 송대 이후 和韻詩의 主流이다.
그러므로 소식의 차운시를 연구하는 것으로 소식의 차운시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시대의 차운시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소식의 차운시는 그 시대의 차운시의 대표가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종류의 차운시를 통해 차운시의 발전사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을 종합하여 검토함으로써 소식 차운시의 특징을 파악하고
아울러 송대 차운시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제2절 선행연구 검토 및 연구방법
중국에는 이미 소식의 창화시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학위 논문이 3편¹⁶있고
소식과 소철이 주고받은 시를 연구한 논문¹⁷, 소식 주변의 인물들의 차운시를 연구한 논문¹⁸ 등이 있다.
►16)徐宇春 <蘇軾唱和詩硏究> 陝西師範大學 博士學位論文 2006. 閆偉偉 <蘇軾唱和詩硏究>
山西師範大學 碩士學位論文, 2010. 崔麗萍, <蘇軾和詩探究> 新疆師範大學碩士學位論文, 2005.
►17)黃瑩 <蘇軾蘇轍兄弟唱和詩硏究> 廣西大學 碩士學位論文 2008. 趙曉星, <論蘇軾、蘇轍唱和詩>
吉林大學 碩士學位論文, 2007. 李艶杰, <二蘇唱和次韵詩硏究> 鄭州大學 碩士學位論文 2007.
►18)呂雪梅 <晁補之唱和詩硏究> 西南大學 碩士學位論文 2015. 高邢生 <黃庭堅次韵詩硏究>
河北師範大學 碩士學位論文 2011. 蔡愛芳 <二蘇及“蘇門四學士”唱和詩硏究> 南京師範大學 碩士學位論文 2003.
그럼 먼저 소식과 관련된 선행연구부터 검토해보겠다.
먼저 단행본으로는 內山精也의 <傳媒與眞相-蘇軾及周圍士大夫的文學-蘇軾及周圍士大夫的文學≫이 있다.
이는 소식의 차운시에서 각각의 교유 대상에게 쓴 차운시의 수량을 구체적 수치로 밝히고 있으며
“次韻自作詩”와 “次韻古人詩”에 대해 분석하였다.
그리고 “次韻自作詩”의 특징을 “대비의 명확화”하고 한 것과 “和陶詩”의 특징을 시인의 재능을 보이기 위한
유희 추구라고 했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에서는 보지 못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설정한 “次韻自作詩”의 범위에는 창화 중의 原詩가 포함되어 있어 “自作詩”에 차운하는 것이 아니었고
“次韻古人詩”는 도연명의 시에 차운한 “和陶詩”를 다루면서 기본적인 창작동기를 소홀히 여긴 측면이 있었다.
소식의 차운시와 관련된 학위논문은 매우 많다.
그러나 창화시의 소재와 시기별 분류에만 그친 것이 대부분이었고 차운시만의 특징을 짚어낸 경우는 없었다.
서우춘徐宇春의 <소식창화시연구蘇軾唱和詩硏究>¹⁹는 소식과 蘇轍 사이,
소식과 蘇門四學士 사이의 창화시를 시기별로 분류하고
소식의 “和陶詩”에 관하여 창작 배경과 그 내용 및 평가를 다루고 있다.
►19)서우춘徐宇春 <소식창화시연구蘇軾唱和詩硏究> 陝西師範大學 博士學位論文 2006.
창화시를 시기에 따라 분류하여 차운시를 통해 소식의 감정의 흐름이 나타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이는 차운시가 아닌 일반 시에서도 보이는 경향이었다.
같은 연구로 염위위閆偉偉의 <소식창화시연구蘇軾唱和詩硏究>²⁰는 소식과 교유한 문인들을 소개하고
창화시의 思想傾向과 예술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20)염위위閆偉偉 <소식창화시연구蘇軾唱和詩硏究> 山西師範大學 碩士學位論文 2010.
그러나 단순히 교유의 상대방을 소개했다는 점, 창화시의 사상경향과 예술특징이
소식의 창화시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소식 시의 특징이라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다.
또한 소식이 도연명의 시에 화운한 시를 “和陶詩”라고 하는데 이에 대한 연구로는
김보경金甫暻의 <蘇軾“和陶詩”硏究>²¹가 있다.
►21)김보경金甫暻 <蘇軾“和陶詩”硏究> 復旦大學 博士學位論文 2008.
이 논문에서는 “和陶詩”의 창작배경을 자세히 분석하고
그 내용을 분류하여 소식에게 “和陶詩”가 갖는 의미를 분석하였다.
그러나 본고에서 중점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차운의 의미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면이 있었다.
한편 소식은 아우 소철과도 시를 매우 많이 주고받았는데 이에 대한 연구가 몇몇 논문에서 보인다.
조효성趙曉星의 <론소식論蘇軾 소철창화시蘇轍唱和詩>²²에서는 소식의 유배생활 이전의 창화시,
황주시기의 창화시, 원우시기의 창화시, 다시 유배생활 했던 시기의 창화시를 분류하여 분석하고 있다.
►22)趙曉星 <論蘇軾 蘇轍唱和詩> 吉林大學 碩士學位論文 2007.
반면 황형黃瑩은 <소식소철형제창화시연구蘇軾蘇轍兄弟唱和詩硏究>²³에서
창화시의 내용을 기준으로 분류하였는데 풍속을 담은 것, 그림을 보고 쓴 것,
도연명의 시에 추화한 것으로 나누어 연구를 진행하였지만 역시 소재 분류에 그친 다른 논문들과 비슷하였다.
►23)黃瑩 <蘇軾蘇轍兄弟唱和詩硏究> 廣西大學 碩士學位論文 2008.
唐代와 北宋 初의 다른 시인들에 비해 소식은 차운시를 매우 다양하게 활용하였다.
그러나 선행연구에서는 소식의 차운시 만의 특징이 아닌 소식 詩 자체의 특징을 서술하여 차운시를 통해
알 수 있는 특별한 사실이 없거나 차운시의 의미에 대하여 제대로 서술하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또한 차운시 방면에서도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차운시를 창작했는데
이러한 차운시의 특징으로는 기존의 연구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들이 확인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차운시의 주된 목적인 유희와 교유의 측면이 소홀히 여겨졌다는 것이다.
차운시가 교유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점으로 인하여 오히려 차운시의 자체의 존재를 간과하였으니
차운시의 창작원인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이 보이지 않았다.
차운시는 기본적으로 문인들의 놀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차운시 창작을 통해 각종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본고는 이를 보완하여 소식 차운시의 특징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제2장에서는 차운시를 주고받는 다양한 방식을 살펴보고 그러한 방식을 사용하게 된 이유를 함께 논의한다.
제3장에서는 소식 차운시에서 확장된 대상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그 대상들의 공통점을 파악하여 그 특징이 무엇인지 알아본다.
제4장에서는 그 차운시의 한계에 대해 다룰 것이다.
특히나 제4장에서 다룰 소식 차운시의 한계는 운각으로 인해 시를 창작하는 데 제약을 받은 경우를 살펴본다.
소식의 시는 <蘇軾詩集>(蘇軾 撰 왕문고王文誥 집주輯注 孔凡禮 點校 北京: 中華書局, 1996.)을 저본으로 삼고
<蘇軾全集校注>(張志烈, 馬德富, 周裕鍇主編, 河北人民出版社, 2010.)를 참조하였다.
제2장 창화 방식의 다양화
창화 방식의 다양화는 이전 시기의 창화시와 비교해 보았을 때 소식의 차운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두 명의 문인들이 1수씩의 창시唱詩와 화시和詩를 지어 창화하는 방식에서 나아가 다양한 방식이 나타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문인들이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교유를 하기 위하여
차운시를 다양한 방식으로 지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운시는 그들의 놀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 장에서는 그 구체적인 방식인 창화 횟수의 연장, 창화 참여자의 다양화, 타자간 관계에의 개입이라는
3가지의 경우로 나누어 소식 차운시를 통하여 놀이와 교유가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논의한다.
제1절 창화 횟수의 연장
일반적으로 창화시는 한 차례의 唱과 和로 이루어진 1회성의 창화였다.
唐代의 원진과 백거이도 1회성 창화시가 대부분이며²⁴ 晩唐의 피일휴皮日休와 륙구몽陸龜蒙의 창화시가 실려 있는
<송릉집松陵集>에도 절대 다수가 한 번의 唱과 和로 이루어진 창화시였다.²⁵
►24) 원진과 백거이도 한 차례 이상 창화한 詩가 있었다.
이를 “련환식창화連環式唱和”라고 하는데 총 5組가 있다.
하지만 이 중에서 차운의 형식으로 “連環式唱和”를 한 것은 겨우 1組뿐이다.
(이한남李汉南 <元白唱和诗统计分析> 河南師範大学 硕士學位論文, 2013, p.53.)
►25)동금금仝锦锦 <피륙창화시연구皮陆唱和诗研究> 河南師範大学 硕士學位論文, 2013, p.31.
그 후 唐이 망하고 宋에 이르러 서곤파西崑派가 문단을 이끌게 되었고 이들은
<서곤수창집西崑酬唱集>이라는 제목에 맞게 창화를 주된 목적으로 하여 詩壇을 이루었다.
그러나 서곤파의 창화는 차운이 아닌 시의 내용에만 화답하는 “화의불화운和意不和韻”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북송 초기를 지나 구양수와 매요신도 활발하게 창화를 이어나갔는데
그 둘은 비교적 다수의 차운시를 지어 창화하기 시작했지만 창화가 길게 이어지는 방식은 드물었다.
이는 송대 소식에 이르러 종종 여러 차례로 연장되었다.
소식은 계속 차운시를 이어가며 즐거운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또한 소식은 原詩와 관련하여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차운을 하여 말을 계속 덧붙였고
이는 차운시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자유롭게 활용되었다.
주빈周邠 <잠사簪屣 비녀 꽂고 신을 신은 이>
당상가성상알운堂上歌聲想遏雲 유미당의 노랫소리는 구름도 멈출 정도이니
옥인휴정벽사군玉人休整碧紗裙 옥인은 푸른 깁의 치마를 정돈하다가 쉰다네.
장잔분락연지훈粧殘粉落臙脂暈 화장은 무너져 분가루 떨어지고 연지가 번질 정도이며
음극배심호박문飮劇杯深琥珀紋 호박무늬의 깊은 술잔으로 과음하였네.
잠사정지고초객簪屣定知高楚客 비녀 꽂고 신을 신은 이는 분명 고고한 초나라의 객이
소담응호각진군笑談應好却秦軍 웃으며 얘기하다 진나라 군대를 물리치기에 좋을 것임을 안다네.
막사상마옥산도莫辭上馬玉山倒 말 타고 옥산에서 넘어지기를 사양하지 말게나
이시지류지야분已是遲留至夜分 이미 늦게까지 머물러 밤중이 되었다네.²⁶
►26) 文淵閣四庫全書本 査愼行 補注 <補注東坡編年詩> 卷九.
소식蘇軾
<회객유미당會客有美堂 유미당에서 손님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는데
주빈장관여삭승동범호왕배산周邠長官與數僧同泛湖往北山
주빈 장관이 몇몇 스님과 함께 호수에 배를 띄워 북산으로 가다가
호중문당상가소성湖中聞堂上歌笑聲 호수 가운데에서 유미당 위에서 노래하고 웃고 하는 소리를 듣고
이시견기以詩見寄 인화이수因和二首 나에게 시를 보내왔기에 이에 화답하여 두 수를 짓는다.
시주유복時周有服 당시 주빈은 복상 중이었다>
其一
애애군시사령운靄靄君詩似嶺雲 산 위의 구름처럼 그대의 시는 기품이 있어
종내부허취홍군從來不許醉紅裙 붉은 치마 앞에서 취하는 것을 허용한 적 없었지요.
부지야극천산취不知野屐穿山翠 나막신이 푸른 산을 뚫고 다닐지는 모르겠고
유견경요파낭문惟見輕橈破浪紋 오로지 가벼운 노가 물결을 부수는 것만 보인다오.
파억호노원언도頗憶呼盧袁彦道 도박장에 나간 원언도가 자꾸 생각났지만
난요매좌관장군難邀罵座灌將軍 좌중을 꾸짖은 관장군을 부르기는 어려웠다오.
만풍낙일원무주晩風落日元無主 저녁 바람 지는 해는 원래 주인이 없는 법
부석청량여자분不惜淸涼與子分 시원함을 그대와 나누길 아까워한 게 아니라오.
其二
재주무인과자운載酒無人過子雲 아무도 술을 싣고 자운을 찾는 이 없었다오.
엄관주와객서군掩關晝臥客書裙 빗장 걸고 낮잠 잤더니 손님이 하의에 글을 썼군요.
가후부공청주관歌喉不共聽珠貫 구슬꿰미 같은 목소리를 함께 듣지 않았는데
취면하인작힐문醉面何因作纈紋 취한 얼굴이 어떻게 비단의 무늬가 되었으리오?
승려차배향화사僧侶且陪香火社 승려들은 불교도를 늘리려 하고
시단욕렴관아군詩壇欲斂鸛鵝軍 시단에선 군사를 철수하려 하오니
빙군편요호변사憑君遍繞湖邊寺 그대는 호숫가의 절이나 돌아보시오.
창녹청내이십분漲綠晴來已十分 날이 갠 뒤 불어난 물이 호수에 가득 찼다오.²⁷
►27)<정본완역 소동파시집1> 833-834쪽. 본고의 소식 시 번역은 기본적으로 류종목<정본완역 소동파시집1>
서울대학교 출판부, 2012와 류종목<정본완역 소동파시집2> 서울대학교 출판부,
2012를 따르되 필요한 경우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이하에서는 편의상 서명과 쪽수만 표기한다.
희녕 6년(1073) 5월, 소식이 杭州에서 通判으로 있었을 때였다.
전당현령錢塘縣令인 주빈周邠은 소식의 친한 벗이었는데 배를 타고 서호를 지나가는 도중
소식과 기녀들이 유미당에서 잔치를 하며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주빈은 유미당에서 소식과 기녀들이 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상상하며 소식에게 <잠사簪屣>라는 시를 보낸다.
주빈은 유미당에서 노랫소리를 듣고는 기녀들이 춤을 추고 소식이 술을 많이 마신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면서 항주에 통판으로 온 소식이 國事를 잘 처리하는 유능한 인물이니 밤까지 계속 술을 마시라고 권한다.
이에 대해 소식은 제1수에서는
주빈이 기녀들과 취할 수 없는 상황이며 그를 부르려고 해도 차마 부를 수 없었다고 말한다.
소식은 해명을 하는 것이다.
이는 주빈이 복상服喪중이었고 소식의 입장으로서는 주빈을 잔치에 초대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
또한 제2수에서는 주빈 없는 잔치였으므로 아쉬움을 나타내어 그의 마음을 달래주고
주빈이 승려들과 배를 타고 호수 주변을 둘러보기를 권한다.
위의 시는 주빈이 보내온 시 한 수에 대하여 소식이 차운시 두 수로 화답한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차운시를 두 수나 지은 까닭은 무엇일까?
평소 소식은 칠언고시로 자신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토로하기를 좋아했고²⁸
소식의 대표적 시 형식이 칠언 고시²⁹라고 할 정도로 칠언고시에 능했던 사람이었다.
►28) 류종목 <팔방미인 소동파> 서울: 신서원, 2005, p.118.
►29) 송용준, 오태석, 이치수, 앞의 책, p.367.
古詩는 句數의 제한 없이 비교적 자유롭게 시를 지을 수 있으므로
소식은 구구절절한 해명을 위해 고체시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律詩인 原詩와는 다른 고체시로 화답한다면 原詩와의 동질감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창화시가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유희성이 감소하게 된다.
현재 소식은 그에게 미안하고 난감한 상황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수나 되는 차운시로 재치 있게 대응한다면 상대방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다.
이후로도 계속 좋은 교유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식은 주빈의 原詩에 두 수로써 차운을 한 것이다.
또한 차운시는 原詩의 상황에 이어 자연스럽게 다른 내용을 꺼내는 데 편리하다.
이는 차운을 통해 原詩와의 동질적 연결성을 확보했기에
한층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蘇軾 <正月二十一日病後 정월 21일에 병을 앓고 난 후에
술고요왕성외심춘述古邀往城外尋春 진술고가 성 밖으로 나가 봄놀이를 하자고 초청하여>
옥상산금고환인屋上山禽苦喚人 지붕 위의 산새들은 애타게 사람을 부르고
함전빙소홀생린檻前冰沼忽生鱗 난간 앞의 얼었던 못엔 갑자기 비늘이 생기건만
노래염반홍군취老來厭伴紅裙醉 나이가 들어 고운 기녀와 취하는 것도 싫증나고
병기공경백발신病起空驚白髮新 앓고 난 뒤 백발이 늘어 괜히 놀라기도 했었는데
와청사군명고각臥聽使君鳴鼓角 태수께서 울리시는 북소리 뿔피리소리 누워서 듣고는
시호치자정관건試呼穉子整冠巾 아이 불러 갓과 두건 매만져 본답니다.
곡난유사종한군曲欄幽榭終寒窘 굽은 난간 그윽한 정자는 아무래도 비좁으니
일간교원호탕춘一看郊原浩蕩春 들판에 찾아온 드넓은 봄을 한번 바라보렵니다.³⁰
►30) <정본완역 소동파시집1> p.766.
진양陳讓 <화소자첨통판재고중문여출교이시견기和蘇子瞻通判在告中聞余出郊以詩見寄
소자첨 통판이 휴가 중에 내가 교외에 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나에게 부친 시에 화답하다>
교원록의동유인郊原綠意動遊人 교외 언덕의 푸른 봄기운은 나그네를 움직이고
호상청파견약린湖上晴波見躍鱗 호수의 햇빛 비치는 물결에는 물고기 뛰어오르는 모습이 보이네.
한축아기천기원閒逐牙旗千騎遠 멀리 상아 장식의 깃발 든 일천 기마병을 한가하게 좇다가
암경매악만지신暗驚梅萼萬枝新 매화 꽃봉오리 만 가지가 새로워짐에 나도 모르게 놀라네.
심승매불제시벽尋僧每拂題詩壁 중을 찾아가 시를 쓴 벽을 늘 닦고
요객잉장려주건邀客仍將濾酒巾 손님 맞아 여전히 술 거를 두건을 들고 다니네.
기어문원하소고寄語文園何所苦 사마상여에게 전하나니 무엇을 괴로워하는가
차래상반일행춘且來相伴一行春 잠시 와서 우리 함께 봄놀이를 한 번 가세나.³¹
►31) <補注東坡編年詩> 卷九.
蘇軾 <유이관법주견향자有以官法酒見餉者 관아에서 담근 술을 보내온 사람이 있어서
인용전운因用前韻 앞의 시에 차운하여
구술고위이주음호상求述古爲移廚飮湖上 진술고에게 주방을 옮겨 호수에서 술을 마시게 해 달라고 청원하며>
희봉문외백의인喜逢門外白衣人 기쁘게도 대문 밖의 흰옷 입은 이 만났으니
욕회호중적옥린欲膾湖中赤玉鱗 호수 속의 붉은 비늘을 회 치고 싶습니다.
유방이장오방온遊舫已妝吳榜穩 놀잇배로는 이미 튼튼한 오지방의 배를 꾸며놨고
무삼초시월나신舞衫初試越羅新 춤옷으로는 처음 새로운 월지방의 비단옷을 입혀 보렵니다.
욕장어조추황모欲將漁釣追黃帽 낚시를 들고 노란 모자를 따라갈까 하오니
미요화도말강건未要靴刀抹絳巾 신발 신고 칼 들고 붉은 두건 매만져 맞아줄 필요 없답니다.
방의십분강반재芳意十分强半在 넘치는 봄기운이 절반 이상 남았으니
위군선답수변춘爲君先踏水邊春 그대를 위해 물가의 봄을 사전답사하렵니다.³²
►32) <정본완역 소동파시집1> p.768을 바탕으로 필자가 수정하였다.
위의 시는 소식→진양→소식의 차례로 창화가 이루어졌다.
소식의 原詩에 진양이 차운하고 진양의 시에 소식이 이어서 차운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1회씩의 唱과 和가 연장된 형식을 보여준다. 시의 흐름은 이렇다.
먼저 소식이 같이 봄놀이를 하자는 진양의 제안을 수락하는 시를 보낸다.
이 시는 창화의 原詩가 된다.
봄이 점점 다가오자 날씨가 따뜻해지고 한가하게 지내다 봄의 경치를 보러 가겠다고 답한다.
그러자 진양은 교외의 언덕에는 이미 봄이 다가왔으니
봄을 즐기는 상상을 펼치며 소식을 초청하여 함께 술을 마실 것이라고 답장을 한다.
소식은 또 다시 시를 쓰는데
봄놀이 이후 새로운 놀잇배를 준비해 놓았으니 배를 타고 호수에서 술을 마시자고 제안한다.
이 3편의 시는 모두 진양과 소식이 함께 봄놀이를 하는 날을 위하여 쓴 시이다.
진양과 소식은 차운의 형식을 통해 시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마지막의 소식의 차운시에서는 “호수로 옮겨 술을 마시게 해달라는” 소식의 새로운 요구가 나타난다.
차운시에서는 原詩의 내용을 연결함과 동시에 다른 내용을 자연스럽게 등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소식은 요구를 하는 입장에서 재치를 발휘하여 다시 차운을 하며 제안을 한다.
이때 놀이의 속성인 즐거운 정서가 반영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차운시는 상대방과 창화하는 데 편리하였고
原詩의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상대방에게 새롭게 하고 싶은 말을 잘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차운이 거듭될수록 유희의 정서는 강해진다.
또한 상대방에게 여러 차례 화답을 함으로써 그에게 적극적인 교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자신의 唱에 대하여 상대방이 운자 그대로 일일이 和를 해준다면 존중 받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운각이 정해져 있더라도 시를 계속 지을 수 있다는 능력도 은근히 상대방에게 보일 수 있고
본인의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차운시를 지을 수 있다는 자부심도 생기게 된다.
① 蘇軾 <차운혜순이수상회次韻惠循二守相會 혜주태수와 순주태수 두 명이 모여 지은 시에 차운하여>
공석상종일촌음共惜相從一寸陰 서로 따르던 짧은 시간을 함께 아쉬워하니
주배수천의수심酒杯雖淺意殊深 술잔은 비록 얕지만 뜻은 심히 깊기 때문이라네.
차동월하삼인영且同月下三人影 잠시 달 아래 세 개의 그림자와 함께 하나니
막작천애만리심莫作天涯萬里心 하늘 끝 만리의 먼 마음은 가지지 말게나.
동령근개송국경東嶺近開松菊徑 동쪽 고개에는 근래에 소나무 국화 길 열었는데
남당초절부근음南堂初絶斧斤音 남쪽 별당에는 막 도끼 소리 그쳤다네.
지군선송여장로知君善頌如張老 그대가 장씨 노인처럼 頌辭를 잘하는 것 알고 있으니
유망휴호갱일림猶望攜壺更一臨 여전히 호리병 가지고는 다시 한 번 왕림해 주기를 바란다네.
② 蘇軾 <우차운이수허과신거又次韻二守許過新居 두 태수가 새 집에 들르는 것을 허락하는 시에 또 차운하다>
삭무봉호고현음數畝蓬蒿古縣陰 몇 이랑의 쑥밭 옛 현에 그늘 드리우고
효창명쾌야당심曉窗明快夜堂深 새벽의 창문은 밝고 상쾌하며 밤의 별당은 그윽한데
야지복축비진댁也知卜築非眞宅 점을 쳐 정한 머물 곳은 진짜 집이 아님도 알고 있으나
료욕가부간차심聊欲跏趺看此心 아쉬운 대로 가부좌 틀어 이 마음을 보려하네.
문도휴호문기자聞道攜壺問奇字 듣자하니 호리병 지니고서 기이한 글자를 묻고
갱인등목조미음更因登木助微音 또 나무에 올라 작은 소리를 돕는다네.
상오배호강천경相娛北戶江千頃 북쪽 대문으로 보이는 천 이랑의 강을 즐기는데
직하도무지가림直下都無地可臨 곧장 내려오면 왕림할 만한 곳 전혀 없다네.
③ 蘇軾 <우차운이수동방신거又次韻二守同訪新居 두 태수가 함께 새 집을 방문한 시에 또 차운하다>
차생진욕로장음此生眞欲老牆陰 이 생에 참으로 담장 그늘에서 늙으며
각소도망세월심卻掃都忘歲月深 문 앞을 쓰는 것을 그만두어 세월의 깊음을 모두 잊고자 하였네.
발해이관현수정拔薤已觀賢守政 염교 뽑아 어진 태수의 정치를 이미 보았으니
절소료위고인심折蔬聊慰故人心 나물 꺾어 그런대로 옛 친구의 마음을 위로하네.
풍류하감상오어風流賀監常吳語 풍류 즐기는 하지장은 항상 오 지방 말을 하고
초췌종의독초음憔悴鍾儀獨楚音 초췌한 종의는 홀로 초 지방의 소리를 내네.
치상량방구제일治狀兩邦俱第一 두 지방을 다스린 공로는 모두 제일이니
영천귀거긍중림潁川歸去肯重臨 영천으로 돌아가 기꺼이 다시 왕림할 것이네.
④ 蘇軾 <순수림행循守臨行 출소환出小鬟 복용전운復用前韻
순주 태수가 떠나기 전에 시녀를 내 놓으므로 다시 앞의 운을 사용하다>
학어추앵재류음學語雛鶯在柳陰 말을 배우는 어린 꾀꼬리는 버드나무 그늘에 있는데
림행호출취유심臨行呼出翠帷深 떠나기 전에 불러내는 비취색 장막은 깊은데
통가불격동년면通家不隔同年面 집을 왕래하며 격이 없는 동년배의 얼굴은
득로방지리일심得路方知異日心 신하의 길 얻고서 바야흐로 훗날의 마음을 알았다네.
진저춘삼유상원趁著春衫遊上苑 봄 적삼 입고서 상림원에서 놀며
요구국수교신음要求國手敎新音 나라 최고의 재주꾼에게 새로운 노래 가르치기를 요구하네.
령매부용최귀기嶺梅不用催歸騎 고개의 매화 말 타고 돌아가도록 재촉할 필요가 없으니
절●수방구소림截●須防舊所臨 등자를 잘라 모름지기 원래의 왕림할 곳을 막아야 한다네.
소식은 혜주惠州에서 백학봉白鶴峰에 새 집을 지었는데 이를 백학신거白鶴新居라고 한다.
소식의 백학신거는 여러 시에서 등장하는데
“이매백학봉已買白鶴峰 이미 백학봉을 샀으니
규작종로계規作終老計 늙음을 보낼 것을 계획하네.”³³
라고 말했을 정도로 백학신거를 짓고 매우 기뻐하였다.
►33) <천거병인遷居并引><蘇軾詩集> 卷四十, p.2194.
그 후 얼마 안 되어 소식은 순주태수 주언질周彦質과 혜주태수 방자용方子容이
창화하며 차운시를 짓는 것을 보고 그 시에 차운하게 되었다.
①번시는 소식이 주언질周彦質과 방자용方子容의 시를 보고 처음 차운하게 된 것이다.
과거 그들과 짧은 시간의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는데
서로 멀리 있다는 생각은 뒤로 미루고 달 아래서 즐겁게 보내자고 하였다.
그러면서 소식은 마침 새로 머물 곳이 막 지어졌다면서 그들의 시에 차운하여 자신의 白鶴新居에 초대 하였다.
그러자 혜주태수 方子容이 그곳에 가겠다고 차운하여 답장을 한다.
초대에 응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소식은 다시 차운하는데 이것이 ②번시이다.
이 시에서 소식은 백학신거 주변의 경치를 감상한다.
또한 백학신거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신선처럼 살고 있다.
그래서 자신은 이렇게 살고 있으니 어서 이곳으로 와서 함께 즐기자고 다시 말한다.
그리고 ③번 시를 쓰는데 두 태수가 백학신거에 직접 방문 하자 기쁜 마음에 다시 차운한 것이다.
소식은 두 태수가 고을을 현명하게 잘 통치해주었다고 칭송하고 있다.
④번시는 순주태수가 백학신거에서 떠나게 되므로 시녀를 불러 노래를 하도록 시켰지만
아쉬운 나머지 말의 등자를 잘라서라도 그를 못 가게 막고자 하였다.
소식은 같은 운각을 가지고 4首의 차운시를 지었다.
같은 운각을 4회씩 사용하면서 시를 지은 것이다.
4首의 시는 각각 “자신의 백학신거로의 초청 → 초청에 응한 것에 대한 화답 → 직접 방문한 것에 대한 감사 →
떠나려는 상황에 대한 대응”이라는 내용으로 구성되는데 소식은 모든 시에 대해 일일이 화답해주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화답한 차운시를 보면 상대방은 기분이 좋아지게 된다.
유희가 극대화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지막 시는 상대방의 原唱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앞의 운에 차운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순주태수의 입장에서는 더욱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며
소식은 차운이라는 놀이를 통해서 즐거움을 더하면서도 그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이와 함께 4회나 되는 차운을 할 수 있다는 능력도 은근히 보일 수 있어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도 들 수 있다.
소식은 효과적으로 차운을 사용했던 것이다.
송대 이전, 특히 북송 초기까지만 해도 문인들은 贈詩에 대해
“화의불화운和意不和韻”으로 答詩를 지어 동일한 주제를 노래하였다.
그러나 소식을 비롯한 주변의 문인들은 차운의 방식을 통해 原詩와 차운시를 연결 짓는 것은 물론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함께 유희를 추구하며 즐거운 이미지를 동반할 수 있었다.
차운을 사용하면 최초의 原詩부터 마지막 차운시까지 하나의 흐름을 유지하는 가운데
각각의 시를 조금씩 재치 있게 변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운각은 상대방과 자신을 이어주는 하나의 연결고리이며 문인들의 유희를 만족시켜주는 놀이 수단이었다.
제한된 글자를 가지고도 시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소식은 창화 횟수를 연장함으로써 즐거움을 극대화할 수 있는
차운시의 이러한 특성을 적극 이용하여 교유를 했던 것이다.
제2절 창화 참여자의 다양화
문인들이 모여서 서로 교유하는 모습은 동진東晉 왕희지王羲之의 <란정집서蘭亭集序>와
그들의 ‘류상곡수流觴曲水’의 이미지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풍조는 후대의 문인들에게 하나의 典範이 되었다.
唐代에도 문인들은 무리지어 집단을 형성하여 그 집단 내에서 시를 쓰는 것을 즐겼다.³⁴
►34) 예를 들어 정월 그믐날에 문인들이 고정신高正臣의 정자에 모여 “華”字를 운으로 삼아 5언 율시를 지었다.
<회일연고씨림정晦日宴高氏林亭>라는 제목 아래 序文을 쓴 진자앙陳子昂을 포함하여 모두 21명이 시를 썼다.
그들은 “華”字는 반드시 들어가되 “華”가 속해있는 “마운麻韻”의 다른 운들을 사용하여 자유롭게 시를 지었다.
이것을 용운用韻이라고 한다.
물론 이 시기는 初唐 이었기 때문에 차운의 형식이 아니었으며
이들 문인집단은 시 창작을 同時性에 초점을 두었다.
창화는 양자간에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었다.
차운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中唐의 원진과 백거이도 두 사람 사이에서 창화한 시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晩唐도 마찬가지로 창화시집인 <송릉집松陵集>에 수록된 창화시는 총 692首로
그 중 피일휴와 육구몽의 창화시만 638首에 달한다.³⁵
►35)왕영파王永波 <晩唐皮陸詩人群体硏究> 四川大學 博士學位論文, 2006, p.31.
다른 여러 문인들과의 창화 자체가 적은 것이다.
이후 북송 초에 西崑派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집단적으로 창화시를 창작한 최초의 시인 군체가 된다.³⁶
►36)박민정朴玟貞 <北宋 西崑體 詩 硏究> 高麗大學校大學院 博士學位論文, 2011, p.218.
그러나 그들의 창화시집인 <서곤수창집西崑酬唱集>에 수록된 시를 보면 양억楊億 75수, 류균劉筠 73수,
전유연錢惟演 54수로 합하면 250수 가운데 총 202수가 되며³⁷ 그 중 次韻의 형태는 1組에 불과했다.³⁸
►37) 위의 논문, p.24.
►38) 위의 논문, p.93.
이렇게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을 중시했던 문인들의 심리로 인해
양자간에 이루어졌던 차운시는 다자간의 차운 창화시로 발전하게 된다.
본래 일대일 관계에서 贈答의 형식으로 발전한 창화시는
송대에 들어서면서 여러 사람과의 관계에서 활발하게 진행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소식은 여러 문인들과 차운하여 시를 자주 썼다.
이전의 “류상곡수流觴曲水”의 이미지를 가진 집단 창작시가 여러 사람이 각자 지은 것이었다면
소식에게는 차운 창화시로 활용된 것이다.
소식은 이러한 형태를 좋아했다.³⁹
그리고 이렇게 여러 사람이 모여 차운하는 일은 흔하게 이루어졌다.
►39) 蘇軾 <화왕승지삼수和王勝之 왕승지에게 화답하다 3首> 其二
제양여민창녹파齊釀如澠漲綠波 관청의 술은 승수의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것과 같고
공시구구가현가公詩句句可絃歌 그대의 시는 구절구절이 현을 켜며 노래할 만 하네.
류상곡수무다일流觴曲水無多日 유상곡수를 할 날이 많지 않으니
갱작신시계영화更作新詩繼永和 새로운 시를 더 지어서는 영원히 화답을 이어가야겠구려.
/<蘇軾詩集> 卷25 p.1325.
그런데 집단적 차운 창화에는 동질감이 더욱 뚜렷하게 형성된다.
이는 여러 사람들이 참여함으로써 오히려 다른 집단과의 구분되는
일종의 테두리가 생겨 그들만의 공간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 테두리 안에는 차운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차운에 동참할 실력이 된다.’는 암묵적인 인정을 받게 된다.
또한 사람은 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
그래서 사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집단 내에서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이렇게 어떤 한 가지 주제 또는 소재를 공유하여 다수의 문인들이 함께 글을 쓰는 경우는 글쓰기 행위에
있어서의 의식의 공유를 도모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데⁴⁰ 집단 내 문인들에게 결속력을 심어주기 때문이다.⁴¹
►40) 김상호 <당송 지식인의 정체성을 찾아서> 서경호, 김월회 외 지음,
<중국의 지식장과 글쓰기> 소명출판, 2011, p.228 참조.
►41) 송대 사대부 문인들은 창화를 통해 결속력과 소속감을 재확인하였다.
(鄭世珍 <烏臺詩案의 社會文化적 含意 硏究>, 서울大學校 博士學位論文, 2012, p.44.)
더군다나 문단의 대가인 소식이 집단의 一員으로 참여한다면 그 집단 내의 문인들은
자신이 소식과 교유할만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생기게 된다.
소식이 집단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상대방에게 차운의 동기를 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차운에 참여하는 문인들은 여러 측면에서 극대화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호완부胡完夫 <종유문자첨사인유회거지흥宗愈聞子瞻舍人有懷居之興 위단시희정爲短詩戱呈
내가 듣건대 자첨사인이 편안하게 지내는 흥에 대해 생각한 바가 있으므로 짧은 시를 장난삼아 드린다>
소공오십빈염반蘇公五十鬢髯斑 소공이 오십 세가 되니 수염은 희끗한데
운납청포입한관雲衲靑袍入漢關 구름 같은 적삼과 푸른 도포 입고 한나라의 관문으로 들어갔네.
가의적귀유태부賈誼謫歸猶太傅 가의는 폄적 받아 돌아가서도 여전히 태부를 했는데
사안투로부동산謝安投老負東山 사안은 늘그막에 동산을 저버렸다네.
황강천석홍진외黃崗泉石紅塵外 황강의 샘과 돌은 속세 밖에 있는데
양선우양반조간陽羨牛羊返照間 의흥의 소와 양은 석양 사이에 있구나.
지유죽림고흥재知有竹林高興在 대나무 숲의 심오한 흥이 있는 것을 알지만
욕한수긍방군한欲閑誰肯放君閑 한가하려 해도 누가 기꺼이 그대가 한가하도록 내버려 두겠는가.⁴²
►42) <보주동파편년시補注東坡編年詩> 卷26
蘇軾 <차운호완부次韻胡完夫 호완부의 시에 차운하다>
청삼별루상란반靑衫別淚尙斕斑 푸른 적삼에 이별의 눈물 떨어져 아직도 얼룩져있고
십재강호곤포관十載江湖困抱關 십년 동안 강호에서 관문 지키느라 곤고했다네.
노거상서환북궐老去上書還北闕 늙어 가매 상서 올려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조래주홀간서산朝來拄笏看西山 아침에 홀을 괴고서 서산을 바라본다네.
상종배주형해외相從杯酒形骸外 육신 너머로 술잔을 서로 좇는데
소설평생취몽간笑說平生醉夢間 웃으며 말하길 평생에 취하여 꿈속에 있는 듯하다네.
만사회수자백시萬事會須咨伯始 세상만사는 응당 백시에게 물어볼 것이니
백두용아점청한白頭容我占淸閑 흰 머리의 내가 맑고 한가로움을 점하도록 허락해주시오.
전목부錢穆父 <차완부운간자첨우사사인次完夫韻簡子瞻右史舍人
호완부의 운에 차운하여 우서사인 자첨에게 보내다>
사관파사마여반史觀婆娑馬與班 역사를 보는 사마천과 반고는 펄럭이는 옷을 입고서
십년류락공간관十年流落共間關 십년동안 떠돌면서 함께 고생하였네.
란봉희견상서성鸞鳳喜見翔西省 난새와 봉황이 중서성을 빙빙 도는 것을 보고 기뻐하니
원학하로원북산猿鶴何勞怨北山 원숭이와 학은 힘써 북산을 원망할 필요 없다네.
기학삼려음택반豈學三閭吟澤畔 어찌 굴원의 택반음澤畔吟을 배우겠는가.
잉흔이륙하운간仍欣二陸下雲間 두 육씨 아래 구름 사이에서 기뻐하네.
비유륜발수연필非維綸綍須椽筆 윤발이 아니면 모름지기 큰 붓으로
당론우의사연한讜論尤宜賜燕閑 바른 말을 하니 잔치 베풀어주기 더욱 마땅하네.⁴³
►43) <補注東坡編年詩> 卷二十六.
蘇軾 <차운전목부次韻錢穆父 전목보의 시에 차운하다)>
노입명광답구반老入明光踏舊班⁴⁴ 늙어서 명광궁에 들어가 옛 반열을 밟고서
염수나부창양관染鬚那復唱陽關 수염 물들였으니 어찌 다시 <양관곡>을 부르겠는가.
고인비상금란전故人飛上金鑾殿 옛 친구는 날아서 금란전에 오르고
천객래종반과산遷客來從飯顆山 쫓겨난 객은 반과산에서 왔다네.
대필추군서한수大筆推君西漢手 큰 붓으로 그대를 서한의 문장가로 추앙하는데
일언치아이류간一言置我二劉間 한 마디말로 나를 두 명의 유씨 사이에 두었으니
변수치주호동사便須置酒呼同舍 모름지기 술 베풀어 동료를 불러서는
간사비룡출제한看賜飛龍出帝閑 황제가 하사하신 준마가 황제의 마구간을 나가는 것을 보겠네.
►44) 호완부는 原詩에서 제1구의 운각으로 “반斑”을 사용하였고 소식도 이를 따른다.
여기에 호완부의 화답이 다시 이어지고 소식은 또 차운을 하는데 역시 “반斑”을 사용한다.
그리고 호완부의 原詩에 차운한 전목보는 제1구에서 “반班”을 사용하였고 소식은 역시 이를 따른다.
전목보의 화답이 다시 이어지고 소식은 또 차운을 하는데 마찬가지로 “반班”을 사용한다.
이를 통해 소식이 原詩의 운각을 얼마나 존중해 주었는지 알 수 있다.
蘇軾 <차운답리단숙次韻答李端叔 이단숙의 시에 차운하여 답하다>
야인여마역여반若人如馬亦如班 이 사람은 마원과 같고 또 반초와 같으니
소리호두출옥관笑履壺頭出玉關 웃으며 호두를 밟고 옥문관을 나섰다네.
이입서강도사적已入西羌度沙磧 서쪽 오랑캐의 땅으로 들어가 모래더미를 지나기도 하고
우종동해간도산又從東海看濤山 동해를 따라 파도의 산을 보기도 하였다네.
식군소리천인리識君小異千人裏 그대가 천 명의 사람 안에서 조금만 달라짐을 알게 되니
위아장사십재간慰我長思十載間 내가 그대를 10년 동안 오래도록 그리워한 것이 위로가 되었다네.
서생린거시해후西省鄰居時邂逅 중서성에 이웃하게 되어 마침 만나게 되었는데
상봉유미시투한相逢有味是偸閑 만남의 묘미는 짬을 내어 만나는 것이라오.
창화에 참여한 사람은 소식과 호완부, 전목보, 이단숙이다.
먼저 호완부의 原詩에서 호완부는 起居舍人으로 발령을 받은 소식에게 위로를 한다.
소식은 늘 상 은거에 대한 소망을 드러냈는데 은거할 틈도 없이 조정에서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뜻이라며 위로를 하는데 소식은 인생이 한바탕의 꿈과 같다며
자신에게 은거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는 차운시를 호완부에게 쓴다.
그리고 전목보는 호완부의 시에 차운하여 이제 더 이상 고생하지 말고
조정에서 일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라고 소식에게 말한다.
그러자 소식은 전목보 또한 중서사인으로 발령을 받았으니 술자리를 베풀어 즐겨야 한다고 대답한다.
한편 이단숙(이지의李之儀 자字 단숙端叔)이 소식에게 시를 보내는데⁴⁵
소식은 오랜만에 만났으니 시간을 내어 만나자며 이단숙에게 답했다.
►45) 이단숙의 原詩는 현존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5편의 시를 관통하는 대표적인 내용은 ‘소식이 起居舍人으로 발령받은 것’이다.
이를 중심으로 소식을 포함한 호완부와 전목보, 이단숙 4명은 계속 같은 운을 사용하여 말을 이어나간다.
그들은 운각의 공유를 통해 다른 이들과 구분된 공간을 형성하고 그 안에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이 운각을 사용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은 그들 집단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개인적이고 특별한 이야기를 가지고 집단 내에서 마음껏 말할 수 있었다.
또한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더욱 깊은 공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운각의 테두리 안에서 동질감이 주는 안정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함께 놀이할 때 유대감이 형성되고
행복한 기억이 만들어지며 새롭고 더 긍정적인 상호작용이 발생한다.⁴⁶
►46) Charles E. Schaefer 엮음, 앞의 책, 2015, p.276.
그래서 한 집단 내에서 상대방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으므로 문인들은 활발하게 교유를 할 수 있었다.⁴⁷
►47) 이후 호완부는 소식의 시에 다시 차운하고 소식은 여기에 또 화답하며
<차운완부재증지십次韻完夫再贈之什 호완부가 다시 보낸 시에 차운하는바
모이복거비릉某已卜居毘陵 여완부유려리지약운與完夫有廬里之約云
나는 이미 점을 쳐서 비릉에 은거할 집을 골랐으니, 완부와 오두막집의 약속에 대해 말하다)> 시를 썼다.
또한 전목보도 소식의 시에 다시 차운하고 소식은 여기에 또 화답하며
<차운목부사인재증지십次韻穆父舍人再贈之什 전목보 사인이 다시 보낸 시에 차운하다>를 썼다.
이를 통해 그들은 운각을 형성한 한 집단 내에서 자신들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 집단 내에서 창화를 할 때는 특정한 주제가 시의 소재로 사용된다.
그리고 그 주제는 일상적인 사건을 둘러싼 이야깃거리인 경우가 많았고
소식은 이를 통해 차운이 주는 긍정적인 정서를 얻을 수 있었다.
<왕진경시시王晉卿示詩 욕탈해석欲奪海石 왕진경이 시를보여주며 海石을 빼앗으려했는데
전목부錢穆父 왕중지王仲至 장영숙개차운蔣穎叔皆次韻 전목보, 왕중지, 장영숙이 모두 그 시에 차운했다.
목穆 지이공이위불가허至二公以爲不可許 전목보와 왕중지 두 명은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독영숙불연獨穎叔不然 오직 장영숙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금일영숙견방今日穎叔見訪 친도차석지묘親睹此石之妙 오늘 영숙이 나를 방문하여 직접 이 돌의 묘함을 보고는
수회전어遂悔前語 마침내 앞서 한 말을 후회했다.
복이위진경개가종폐부여자僕以爲晉卿豈可終閉不予者
나는 진경이 아마도 끝내 감추고 주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약능이한간이산마역지자若能以韓幹二散馬易之者 개가허야蓋可許也
만약 두 마리 말이 흩어져서 노는 한간의 그림과 海石을 바꾸는 것이라면 허락할만하다.
복차전운復次前韻 앞의 운에 다시 차운한다.>
1 상여유가산相如有家山 사마상여는 고향 산을 가졌는데
2 표묘재미록縹渺在眉綠 아득히 푸른 눈썹의 여인이 있었네.
3 수운천리원誰云千里遠 누가 천리가 멀다 했는가
4 기차일빈족寄此一顰足 이를 부치면 한 번 찡그리는 데 족했네.
5 평생금수장平生錦繡腸 평생에 비단 시문이 가득한 五臟이 있어도
6 조세려현복早歲藜莧腹 이른 나이부터 명아주와 비름만 먹었는데
7 종교사벽공從敎四壁空 설사 네 벽을 비게 했어도
8 미견량봉축未遣兩峰蹙 아직 두 눈썹 산을 찡그린 적 없었지.
9 오금황쇠병吾今况衰病 나는 지금 하물며 노쇠하고 병들었어도
10 의불망초목義不忘樵牧 뜻은 땔감을 캐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잊지 않았으니
11 서장구지석逝將仇池石 구지석을 가지고 가서
12 귀소민산독歸泝岷山瀆 민산의 도랑으로 거슬러 돌아가서는
13 수자불탐보守子不貪寶 보배를 탐하지 않는 그대의 청렴을 지켜주고
14 완아무하옥完我無瑕玉 옥에 흠이 없는 나의 지조를 완성하리라.
15 고인시상계故人詩相戒 옛 친구들은 시에서 서로 경계했는데
16 묘어여소복妙語予所伏 묘한 말이 나를 탄복시킬 만하였네.
17 일편독리론一篇獨異論 한 편만이 홀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데
18 삼점종량복三占從兩卜 세 사람이 점치면 두 사람의 점을 따른다 하였네.
19 군가화가삭君家畫可數 그대의 집에는 그림이 셀만하니
20 천기분상축天驥紛相逐 천리마가 어지러이 서로를 쫓는데
21 풍종략원야風騣掠原野 바람에 날리는 갈기는 들판을 정복하고
22 전미소간곡電尾捎澗谷 번개 같은 꼬리는 계곡을 노략질한다네.
23 군여허상역君如許相易 그대가 만약 서로 바꾸기로 허락해준다면
24 시역아소욕是亦我所欲 이는 또한 내가 바라는 바이네.
25 금조안서수今朝安西守 오늘 아침에 안서 태수인 장영숙은
26 내청양관곡來聽陽關曲 와서 <양관곡>을 들으면서
27 권아류차봉勸我留此峰 나에게 “이 봉우리를 가지고 있으시오.
28 타일래불속他日來不速 봉우리가 없다면 훗날 내가 돌아와도 초청받지 못할테니.”라며 권했네.
소식은 정덕유鄭德孺가 주고 간 怪石인 두 개의 海石을 가지고 있었다.
각각 초록색과 흰색의 돌이었는데 그 중 여기서의 海石은 초록색의 돌을 말한다.
이 海石은 울퉁불퉁한 것이 마치 산봉우리 같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소식은 海石을 봉우리가 많은 구지산仇池山의 돌인 구지석으로 말한다.
소식은 왕진경이 자신의 구지석을 빼앗으려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빌려 주지 않을 수는 없어 먼저 시(原詩)를 썼다.⁴⁸
►48) 소식의 原詩는
복소장구지석僕所藏仇池石 희대지보야希代之寶也 내가 구지석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희대의 보물이었으므로
왕진경이소계차관王晉卿以小計借觀 왕진경이 잔머리를 써서 빌려 보았는데
의재어탈意在於奪 복불감불차僕不敢不借 그 의도가 빼앗으려는 데 있었지만 나는 감히 빌려주지 않을 수 없었으니
연이차시선지然以此詩先之 이 시로써 그에게 먼저 준다)>이다.
여기에 차운하여 지은 시가 위의 시이다.
그러자 왕진경이 차운시로 화답하였다.
전목보와 왕중지는 차운시를 지어 빌려주면 안 된다고 하였고 처음에는 된다고 차운시를 썼던 장영숙도
나중에 직접 돌을 보고는 안 된다며 의견을 바꿨다.
그러나 소식은 왕진경이 소장한 한간의 말 그림과 교환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하며 시를 쓴다.
제1-8구는 구지석의 울퉁불퉁한 모양을 두 개의 봉우리로 보고
이를 眉山의 탁문군의 두 눈썹과 연결시킨 것이다.
탁문군은 사마상여와 함께 가난하게 살아도 아직 눈썹을 찡그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제9-14구는 소식이 구지석을 가지고 은거하여 자신의 지조를 완성하고자 하는 뜻을 나타낸다.
제15-18구에서는 친구들이 시를 써서 그들의 의견을 전달한 것을 가리키며
소식은 결국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을 따를 것이라 결정한다.
제19-24구는 왕진경의 집에 있는 말 그림 중에서 소식이 본 그림 속의 말의 모습이 매우 용맹하니
그러므로 구지석과 교환해줄 수 있다고 허락한 내용이다.
제25-28구에는 장영숙이 길을 떠나며 구지석의 산봉우리 모양을 보고는
왕진경에게 이것을 주지 말고 지니고 있으라고 권하는 모습이 나타난다.⁴⁹
그렇다면 시의 흐름을 바탕으로 차운이 진행되는 전체적인 상황을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한다.
►49) 이후 소식은
<식욕이석역화軾欲以石易畫 진경난지晉卿難之
소식이 돌을 가지고 그림과 바꾸려고 하니 왕진경이 난감해 하였다.
목부욕겸취이물穆父欲兼取二物 영숙욕분화쇄석穎叔欲焚畫碎石
전목보가 두 가지 물건을 다 취하려고 하자, 장영숙이 그림을 태우고 돌을 부수려고 했다.
내복차전운乃復次前韻 병해이시지의幷解二詩之意 이에 앞의 운에 다시 차운하며, 함께 두 시의 뜻을 풀어본다>
라는 시를 지어 돌과 그림을 바꾸지 말고 각자 자신의 것을 즐기자고 하며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장영숙
소식─왕진경─╋전목보─소식─소식
┖왕중지
제2장 창화 방식의 다양화
소식과 함께 차운에 참여한 사람은 왕진경, 장영숙, 전목보, 왕중지이다.
소식을 포함한 5명이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시를 쓴 것이다.
이렇게 일상 속 사건을 시에 적는 것은 宋詩의 특징이었다.
송대 시인들은 특별한 감정이나 아름다운 풍경뿐만 아니라 그들이 일상생활을 통하여
보고 느끼는 조그만 일들까지도 빠짐없이 세밀하게 노래하였다.⁵⁰
►50)金學主 譯著<新譯 宋詩選> 서울: 명문당, 2003, pp.42-43.
소식 역시 생활에서 일어나는 작은 일들을 기록하였고 일상생활을 소재로 한 시가 많다.⁵¹
►51)채애방蔡爱芳 南京師範大學 碩士學位論文, 2003, p.30.
이는 차운의 형식과 어울려 일정한 효과를 주고 있다.
그들만의 특별한 이야기는 차운시를 통해 한 묶음이 되고 운각은 그들 집단을 다른 집단과 구분시켜 주었다.
또한 즐거운 분위기가 형성되므로 차운시를 활용하여
거절 또는 반대의 의견을 나타내면서도 심각한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을 수 있었다.
재치 있게 자신의 생각을 적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차운시에서 소식은 장영숙과 전목보, 왕중지의 의견을 정리하여
결정을 내리는데 이 과정조차도 모두 시로 기록하였다.
그들만의 특별한 사건을 차운시를 통하여 하나의 스토리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게 특정한 사건을 함께 겪은 사람들끼리는 동질감이 형성되므로 교유에 있어서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소식은 이렇게 다자간의 차운 창화를 통해 유희성을 극대화시키며 교유를 하였다.
앞서 살펴본 시들은 세 명 이상의 문인들이 모여 지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집단적 시 창작이 아주 크게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다.
여러 문인들은 소식의 시에 동시적으로 차운시를 지어 화답을 하였다.
蘇軾 <武昌西山幷敍 무창 서산시를 서문과 함께 쓰다>
가우중嘉祐中 한림학사승지등공성구翰林學士承旨鄧公聖求 위무창령爲武昌令
가우연간에, 한림학사승지 등성구가 무창의 수령이 되었다.
상유한계서산常游寒溪西山 산중인지금능언지山中人至今能言之
자주 한계의 서산에서 노닐었는데, 산 속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능히 그것을 말한다.
식적거황강軾謫居黃岡 여무창상망與武昌相望 역상왕내계산간亦常往來溪山間
내가 폄적된 황강은 무창과 서로 바라보고 있었기에 또한 자주 계곡과 산 사이를 왕래하였다.
원우원년11월29일元佑元年11月29日 고시관직考試館職 여성구회숙옥당與聖求會宿玉堂 우화구사偶話舊事
원우 원년 11월 29일에 고시관직을 맡았었는데, 성구와 함께 옥당에 묵다가 우연히 옛 일을 말하게 되었다.
성구상작聖求嘗作 각지암석刻之岩石 성구가 일찍이 지었던 시를 바위에 새겼는데
인위차시因爲此詩 청성구동부請聖求同賦 이 때문에 성구가 함께 읊고
당이유읍인當以遺邑人 사각지명측使刻之銘側 마땅히 읍인 왕문보에게 남겨 묘비명 옆에 새기게 할 것을 청하였다.
1 춘강록창포도배春江淥漲蒲萄醅 맑은 봄 강물 불어나 푸른 색 포도주 같은데
2 무창관류지수재武昌官柳知誰栽 무창 관가에 심은 버들은 누가 심었는지 알고 있는가.
3 억종번구재춘주憶從樊口載春酒 번구에서 봄 술을 싣고서
4 보상서산심야매步上西山尋野梅 서산으로 걸어 올라가 들의 매화를 찾던 일이 생각나네.
5 서산일상십오리西山一上十五里 서산은 한번 올라가면 십오리인데
6 풍가량액비최외風駕兩腋飛崔嵬 두 겨드랑이는 바람을 타고 높이 날았네.
7 동유곤와구곡령同游困臥九曲嶺 함께 노닌 이들은 지쳐 구곡령에 누웠는데
8 건의독도오왕대褰衣獨到吳王臺 옷 걷고 홀로 오왕대에 도착했다네.
9 중원북망재하허中原北望在何許 중원은 북쪽으로 바라보면 어디에 있는가?
10 단견낙일저황애但見落日低黃埃 다만 지는 해가 누런 먼지 아래로 내려가는 것만 보였네.
11 귀래해검정전로歸來解劍亭前路 돌아오는 해검정 앞길
12 창애반입운도퇴蒼崖半入雲濤堆 푸른 벼랑은 반쯤 구름파도 더미로 들어가 있었네.
13 낭옹취처금상재浪翁醉處今尙在 원결이 취한 곳은 지금도 여전히 있는데
14 석구불음무준뢰石臼抔飮無樽罍 술잔이 없으니 절구 모양 돌을 쥐고 마신다네.
15 이래고의수부사爾來古意誰復嗣 그 뒤로 옛 뜻은 누가 다시 이었겠는가
16 공유묘어류산외公有妙語留山隈 그대에게는 오묘한 말이 있어 산의 모퉁이에 남겼다네.
17 지금호사제초극至今好事除草棘 지금까지 호사가들은 풀과 가시나무를 없애며
18 상공야화소창태常恐野火燒蒼苔 들불이 푸른 이끼를 사를까 항상 두려워한다네.
19 당시상망불가견當時相望不可見 그때는 서로 바라봐도 볼 수 없었는데
20 옥당정대금란개玉堂正對金鑾開 옥당에서 마침 열린 금란전을 마주하고 있다네.
21 개지백수동야직豈知白首同夜直 어찌 알았겠나, 백발로 함께 밤을 새며
22 와간연촉고화최臥看椽燭高花摧 누워 촛불을 보며 꽃심지를 꺾을 줄을
23 강변효몽홀경단江邊曉夢忽驚斷 강가에서의 새벽꿈이 홀연히 놀라 끊어진 것은
24 동환옥쇄명춘뢰銅環玉鎖鳴春雷 구리 문고리와 옥 쇠사슬이 봄 우레처럼 울려서라네.
25 산인장공원학원山人帳空猿鶴怨 산 속 사람 떠나 장막이 비니 원숭이와 학은 원망하지만
26 강호수생홍안래江湖水生鴻雁來 강호에 봄물이 불어나면 기러기가 오겠지.
27 청공작시기부로請公作詩寄父老 청컨대 그대가 시를 지어 늙은이에게 부쳐
28 왕화만학송풍애往和萬壑松風哀 가서 만 골짜기의 소나무 바람이 슬픈 것에 화답하게나.
蘇軾 <서산시화자삼십여인西山詩和者三十餘人 재용전운위사再用前韻爲謝
서산시에 화답한 사람이 삼십 여명이므로 앞의 운을 다시 사용하여 감사하다>
1 주안발과여춘배朱顔發過如春醅 붉은 얼굴 되었다 지나감이 봄 술과 같고
2 흉중리조초미재胸中梨棗初未栽 가슴 속의 배와 대추는 본래 심지 않았네.
3 단사미역소백발丹砂未易掃白髮 단사로도 백발을 쓸어버리기 쉽지 않은데
4 적송각욕삼황매赤松却欲參黃梅 적송자는 도리어 황매사람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네.
5 한계본자원공사寒溪本自遠公社 한계는 본래 원공의 결사와 같아
6 백련취죽의최외白蓮翠竹依崔嵬 흰 연꽃과 푸른 대나무는 높은 산에 의지하네.
7 당시석천조금상當時石泉照金像 그때의 바위틈의 샘물이 금상을 비추나니
8 신광야발여오대神光夜發如五臺 밤에 빛나는 신령한 빛은 오대산과 같았네.
9 음천감면득진의飮泉鑑面得眞意 샘물 마시며 얼굴 비추어 참 뜻을 얻었나니
10 좌시만물개부애坐視萬物皆浮埃 만물이 모두 떠다니는 티끌임을 앉아서 보았네.
11 욕수모경반전리欲收暮景返田里 노년을 거두려고 전원으로 돌아가
12 원소강수궁리퇴遠泝江水窮離堆 멀리 강물을 거슬러 올라 이퇴산 끝까지 가고 싶었지만
13 환조개독수로병還朝豈獨羞老病 조정으로 돌아오니 어찌 유독 늙고 병든 것만 부끄럽겠는가
14 자탄재진경공뢰自歎才盡傾空罍 재주가 다하였으니 빈 잔을 기울이며 스스로 탄식한다네.
15 제공거거야하옥諸公渠渠若夏屋 여러 공들의 깊고 넓음은 큰 집과 같아
16 탄토풍월청우외呑吐風月淸隅隈 풍월을 삼키고 뱉어 모서리를 맑게 하는데
17 아여폐정구불식我如廢井久不食 나는 버려진 우물과 같아 오랫동안 마실 수 없고
18 고추결락생음태古甃缺落生陰苔 옛 벽돌은 이지러져 떨어지고 그늘에는 이끼가 생겼네.
19 삭시왕복상감발數詩往復相感發 여러 시가 왕복하여 서로 감회를 나타내니
20 급신제구한광개汲新除舊寒光開 새 것을 길어 옛 것을 없애 맑고 차가운 빛이 열리네.
21 요지이월춘강활遙知二月春江闊 멀리서도 아나니 2월의 봄 강은 넓어서
22 설랑도권운봉최雪浪倒卷雲峰摧 흰 물결이 출렁거려 높은 봉우리도 꺾겠지.
23 석중무성수역정石中無聲水亦靜 바위에 소리 없고 물 또한 고요한데
24 운하해전공산뇌云何解轉空山雷 어찌 빈산에 우레가 치리라 알았겠는가.
25 욕취제공평차어欲就諸公評此語 여러 공들이 이 말을 평하는 데 나아가고 싶지만
26 요식우희하종래要識憂喜何從來 근심과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야 하기에
27 원구남종일작수原求南宗一勺水 원컨대 남종의 한 국자 물을 구하여
28 왕여굴가전여애往與屈賈湔餘哀 가서 굴원, 가의와 더불어 남은 슬픔을 씻어야겠네.
소식은 차운시 제목에서 30여 명이 자신의 시에 화답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화운 중에서도 차운의 형식으로 화답하였다.⁵²
►52) 이 중 확실히 차운시를 지은 문인으로는
공무중孔武仲 <차운소한림서산시次韻蘇翰林西山詩 소자첨 한림학사의 서산시에 차운하다>
류반劉攽<등성구왕위무창령鄧聖求往爲武昌令 등성구가 과거에 무창의 수령이었을 때
각석원차산와존刻石元次山漥尊 돌에 <원차산와존元次山漥尊>을 새겼는데
급소자첨적관황주유무창견전각及蘇子瞻謫官黄州遊武昌見前刻
소자첨이 황주에 폄적되어 무창에서 노닐며 앞서 새긴 것을 보았으니
후동재한림後同在翰林 인유시시여因有詩示余
후에 함께 한림학사로 재직하면서 있었던 시를 나에게 보여준 것을 인하여
여위차운화지 余爲次韵和之 나는 차운하여 그 시에 화답했다>
장뢰張耒<차운소공무창서산次韵蘇公武昌西山 소공의 무창 서산시에 차운하다>
소철蘇轍<차운자첨여등성구승지동직한원次韵子瞻與鄧聖求承旨同直翰苑 회무창서산구유懷武昌西山舊遊
자첨과 등성구 승지가 한림원에서 함께 당직하며 쓴 시에 차운하며, 무창 서산에서 옛날에 노닌 일을 생각하다>
황정견黄庭堅 <차운자첨무창서산次韵子瞻武昌西山 자첨의 무창 서산시에 차운하다>
조보지晁補之 <차운소공한림증동직등온백회구작次韵蘇公翰林贈同職鄧溫伯懷舊作
소공 한림학사가 함께 당직한 등온백에게 준 시에 차운하여 옛 일을 생각하며 짓다> 등이 있다.
이로보아 소식의 시에 차운한 문인들은 모두 차운시를 지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소식이 다시 같은 운각으로 차운하여 여러 문인들에게 화답한 것도
그들이 차운을 하였기 때문이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소식은 등성구가 시를 바위에 새긴 것을 보고는 자신도 시를 짓고
등성구가 화답시를 지음으로써 함께 바위에 시를 새겨주기를 청했다.
등성구에게 화답시를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소식은 은근히 자신의 시도 함께 새겨주기를 원하는 마음도 보인다.
소식은 原詩에서 무창의 풍경과 그곳을 감상하는 자신의 감회를 길게 적는다.
그 중에서 마지막 8구는 등성구와 옥당에 묵으면서 자다가 문고리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등성구에게 화답하는 시를 지어 달라고 직접 부탁을 한다.
그리고 이 시에 삼십여 명이 차운을 하게 된다.
며칠 동안 이곳을 왔다간 삼십 여명이 차운시를 남긴 것이다.
소식은 화답해 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으로 차운시를 짓는다.
제14구부터는 본격적으로 이러한 내용이 나타난다.
자신은 재능을 다하여 시를 잘 짓지 못했다며 탄식하며 겸손을 내비치는데
화답한 여러 문인들은 시를 잘 지었으니 마치 깊고 넓은 큰 집과 같다고 한다.
화답을 주고받으며 그들의 시는 맑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다.
그래서 소식은 제25구에서 여러 문인들이 시를 짓는 곳에 가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불도를 닦아 시름을 덜어내야 하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原詩에서 소식은 일차적으로 등성구에게 화답시를 요구하였다.
소식은 주도적인 위치에서 다른 문인에게 화운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위에 그 시를 새김으로써 자신과 등성구의 시를 보는 사람들이 화답해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또한 이 차운에 참여한 문인들은 소식의 시에 차운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동참하게 된다.
그와 교유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소식의 제안이 여러 문인들에게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차운시를 지을만한 수준이 된다면 누구나 동참할 수 있으니
그 문인들의 입장에서 차운하는 것 자체도 영광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문인들은 28句의 고체시에 차운하며 집단적 시 창작을 한다.
운각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에서 활동하며 결속력을 다지는 것이다.
문인들은 집단적으로 차운시를 지었다.
차운시가 하나의 모임을 형성하게 함으로써
차운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어울리게 하는 공간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그 차운에 참여한 사람들은 서로 같은 知的 수준에 있다는 암묵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차운에 동참하는 문인 중 한 사람은 문단의 영수인 소식이었다.
소식과 같은 大家와 함께 차운시를 짓는다면 자신이
소식과 어울릴만한 문인이라는 자부심이 더욱 들게 될 것이다.
소식의 입장에서도 자신과 같은 수준의 詩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교유의 벗으로 확보하게 되므로
사회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장점으로 인해 소식의 집단적 차운시 창작이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제3절 타자간 관계에의 개입
시는 書信의 역할을 대체하였으므로 여기에는 受信者가 특정된다.
그런데 소식은 原詩의 작자가 타인에게 보내는 시에 끼어들어 차운을 하였다.
상대방을 明示한 시에 끼어들어 차운을 한 것이다.
그리고 原詩의 작자는 그 수신자와 개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둘만의 이야기가 시를 통해 전해지는 것이다.
소식은 이러한 관계에 개입을 하였다.
본 절에서는 이러한 방식을 ‘타자간 관계에의 개입’이라 말할 것이다.
소식은 原詩의 受信者가 아닌데도 그 시에 차운을 한 것인데
소식 차운시의 受信者는 原詩의 시인 또는 原詩의 受信者이다.
그렇다면 소식은 왜 특정한 사람에게 쓴 타인의 시에 차운을 하였는가?
이러한 형식을 취한 데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다.
이렇게 차운을 한다면 그 시의 발신자 또는 수신자
그리고 자신을 동시에 연결시키면서 그들 속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식은 차운시를 가지고 詩로 매개되는
그들의 개인적 관계에 조심스럽게 들어가 그들에게 접근하여 교유를 시도한다.
이는 原詩 작자가 보낸 贈詩에 이미 긍정적인 정서가 깔려 있어 그들과 교유하는 데 더욱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즐거운 분위기에서 교유를하는 것이 성공적이다.
그 상태에 차운시로 더욱 좋은 분위기를 형성하였기에 이 시도는 효과적이었다.
특히나 차운시는 상대방의 운자 선택을 존중하여
상대방에 대한 예우가 드러나기 때문에⁵³ 상대방에 대한 존중감까지 더해줄 수 있다.
►53) 강민호 <押韻의 미학으로 본 次韻詩의 특성에 대한 연구 ― 元白과 蘇軾의 차운시를 중심으로>
한국중국어문학회<中國文學>vol.72, 2012, p.54.
소식은 이러한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차운시의 가장 큰 장점들이 적극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큰 특징을 바탕으로 타자간 관계에의 개입은 다양하게 이용 된다.⁵⁴
►54) 소철의 시에도 이러한 특징이 발견된다.
<次韵景仁丙辰除夜><次韵景仁招宋溫之職方小飮><次韵景仁飮宋溫之南軒二首>
<次韵景仁正月十二日訪吳縝寺丞二絶> 등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소철은 범진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지은 시에 차운함으로써 그 자신도 범진과 범진의 벗 사이의 관계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鄭世珍<烏臺詩案의 社會文化적 含意 硏究> 서울大學校大學院 博士學位論文, 2012, p.129.)
황정견黃庭堅 <곽명보작서재우영미청여부시이수郭明甫作西齋于潁尾請予賦詩二首
곽명보가 영미에 서재를 지어 놓고 나에게 시 짓기를 청하다>
其一
식빈자이관위업食貧自以官爲業 가난하게 먹으면서도 스스로가 관직을 업으로 삼았으니
문설서재의름연聞說西齋意凜然 서재의 뜻은 경외할 만하다 들었네요.
만권장서의자제萬卷藏書宜子弟 만 권의 책들은 자제들에게 마땅하고
십년종목장풍연十年種木長風煙 十年之計로 나무를 심어 풍광이 길게 보이는군요.
미상종일불사영未嘗終日不思潁 아직까지 하루 종일 영주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상견선생다호현想見先生多好賢 선생께서 현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요.
안득옹용일준주安得雍容一樽酒 어디서 한 잔의 술을 얻어 온화해질 수 있을까요
녀랑대하수여천女郞臺下水如天 여랑대 아래의 물은 하늘과 같다는데.⁵⁵
►55)黃庭堅 撰, 任淵, 史容, 史李温 注, 劉尚榮 點校<黃庭堅詩集注(三)>
外集 卷二 北京: 中華書局, 2003. p.785.
소식蘇軾 <차운황노직기제곽명부부추영주서재이수次韻黃魯直寄題郭明父府推潁州西齋二首
황노직이 관청의 추관⁵⁶인 곽명보의 영주 서재에 써서 보낸 시에 차운하다>
►56) 刑獄을 관장하는 관리.
其一
수두탁목상의객樹頭啄木常疑客 나무 끝의 딱따구리를 늘 손님으로 오해하였으니
객거이진정불연客去而嗔定不然 손님이 떠나면서 성내는 일 분명 없을 것일세.
탈할이응생정말脫轄已應生井沫 비녀장을 빼서 던져버려 이미 우물 안에 거품 일었으니
해의료복기포연解衣聊復起庖煙 옷 벗고는 그런대로 다시 부엌 연기 나게 하네.
평생시주진상오平生詩酒眞相汚 평생의 시와 술은 참으로 서로를 더럽혔으니
차거문서공독현此去文書恐獨賢 이번에 보낸 서찰이 홀로 힘쓴 것일까 두렵다네.
조만서호영화발早晩西湖映華發 조만간 서호에 흰 머리를 비추어
소주번동수중천小舟翻動水中天 작은 배가 물속에 비친 하늘을 일렁이겠지.
곽명보라는 사람이 영주潁州에 서재를 지었다.
그것을 기념하고자 변경에 있는 황정견에게 시를 지어주기를 부탁한다.
황정견은 먼저 곽명보의 청렴한 인품과 함께 현인들을 위하여 서재를 지은 곽명보의 뜻을 칭송하였다.
그리고 하루빨리 영주에 가서 곽명보를 만나고 그의 서재를 보고자 하는 마음을 드러내며
영주에 있는 곽명보에게 이 시를 보냈다.
이때는 元祐 4년(1089) 4월로 소식이 변경에서 한림학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소식은 황정견이 곽명보에게 보낸 시를 읽고 역시 차운을 하여 보낸다.
곽명보는 언제나 손님을 잘 맞아주는 사람이며 소식은 그를 만나 함께 술자리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식은 어서 영주에 가서 곽명보를 만나고 싶다고 한다.
곽명보는 황정견에게 서재를 기념하는 시를 지어달라며 직접 부탁하였다.
여기에서 곽명보와 황정견 둘만의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소식은 자신에게 부탁하지도 않은 시를 지어 곽명보에게 보낸다.
그는 차운시를 이용하여 둘의 관계에 개입하여 곽명보에게 접근한다.
같은 자리에 있지 않아도 황정견의 시를 통해 자신을 그들과 연결하여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 교유를 하는 것이다.
차운시를 이용하면 먼저 운각 자체로 인한 유희성으로 인해 즐거운 분위기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게다가 소식 차운시의 내용은 곽명보에 대한 칭송이다.
앞서 황정견이 곽명보의 인품을 칭송하여 이미 곽명보의 기분을 좋게 만든 상태였다.
여기에 그러한 내용의 차운시까지 더해지면서 곽명보에게 운각을 공유한 황정견과
소식 두 명의 문인이 그를 칭송한다는 기쁨을 배로 줄 수 있게 된다.
이 시는 소식과 곽명보가 시로써 교유한 첫 번째 詩이며 이후에 소식과 곽명보의 교유는 지속된다.
실제로 元祐 6년(1091) 9월에 소식은 영주지주潁州知州로 좌천되어 부임하게 되고
곽명보와 만나 반년 동안을 함께 교유하였다.⁵⁷
►57) 이는 소식의 <여명부권부제형與明父權府提刑>
(孔凡禮 點校 <蘇軾文集> 卷59 北京: 中華書局 1996, p.180.)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도관반세到官半歲 의비덕우依庇德宇 “부임한 지 반년 동안 덕택으로 감싸주셨는데,
획수해거獲遂解去 감복심의感服深矣 관직에서 해방되어 떠나가게 되어 심히 감복합니다.”라 했다.
(소식은 1091년 9월부터 영주에 있다가 1092년 3월에 양주로 옮겨갔으므로 반년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소식이 일찍이 황정견의 시에 차운함으로써 곽명보와의 교유의 기반을 마련한 덕분이었다.
개인적인 일로 연결된 관계 안에도 차운시를 통하여 개입하여 교유를 확대한 것이었다.
차운시는 운각의 공유로 인하여 原詩의 내용과 정서를 이어받게 된다.
차운은 原詩를 따르겠다는 의지를 표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운시를 지을 때 原詩의 역할은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다.
특히나 原詩 작자의 贈詩 창작의 동기는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며
이를 받는 상대방도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原詩를 통해 타자간의 공통된 정서가 이미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즐거운 이미지를 동반하는 차운이 추가된다면 교유하기에 더 좋은 환경이 마련된다.
장뢰張耒 <사전목부혜고려선謝錢穆父惠高麗扇 전목보가 고려선을 준 것에 감사하다>
삼한사자문장공三韓使者文章公 고려의 사자들은 뛰어난 문장을 쓰는 공이며
동이수신친소궁東夷守臣親掃宮 동쪽 오랑캐 제후들은 몸소 궁중의 일을 처리한다네.
청엄불수탁중헌淸嚴不受橐中獻 청렴하고 엄하여 주머니 속의 헌물을 받지 않으니
만리귀래량송선萬里歸來兩松扇 만리에서 돌아오는 건 두 개의 송선이라네.
유월장안한여세六月長安汗如洗 유월의 장안은 땀으로 씻는 듯한데
기의락아회수리豈意落我懷袖裏 어찌 나에게 떨어뜨려 소매 안에 품는 것을 생각 했으리오.
중주전취상설환中州翦就霜雪紈 중주에서는 눈같이 흰 비단을 잘라
천년순풍고기자千年淳風古箕子 천년 전의 예스러운 고풍의 키를 만드네.⁵⁸
►58)<보주동파편년시補注東坡編年詩> 卷29
소식蘇軾 <화장뢰고려송선和張耒高麗松扇 장뢰의 <고려송선> 시에 화답하다>
가련당당십팔공可憐堂堂十八公 불쌍하게도 당당하던 소나무는
노사불입명광궁老死不入明光宮 늙어 죽은 뒤에도 명광궁에 들어가지 못했다네.
만우불래난자헌萬牛不來難自獻 만 마리 소가 오지 않으니 스스로를 바치기도 어려워
재작단단수중선裁作團團手中扇 마름질하여 손 안의 둥근 부채로 만들었다네.
굴신몽구군일세屈身蒙垢君一洗 몸 굽혀 치욕을 받은 것 그대가 한 번에 씻어주고는
괘명군가시집리掛名君家詩集裏 그대의 시집에 이름을 올려주었으니
유승한궁비첩여猶勝漢宮悲婕妤 오히려 한나라 궁궐의 슬픈 반첩여보다
망충불견승난자網蟲不見乘鸞子 거미줄 보지 않은 난새 타고 간 진 왕녀 보다 더 낫다네.
고려송선高麗松扇은 고려의 소나무 가지로 만든 부채이다.
이 부채는 고려에서 宋으로 보내지는데 宋人들은 高麗松扇을 애호했다.
그리고 장뢰張耒는 蘇門四學士 중 한 사람으로 소식의 제자이다.
어느 날 전목보가 장뢰에게 고려의 나무로 만든 부채를 선물하자 장뢰는 그 보답으로
감사의 시를 쓰는데 고려 사람들과 高麗松扇에 대한 칭찬이 시의 주된 내용이다.
그런데 소식의 차운시에서는 안타깝게도 큰 재목이 되지는 못했으나 장뢰가 이 소나무로 만든 부채를 가지고
시를 지어주었기 때문에 부채의 신세가 반첩여나 진 왕녀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결국 시를 지은 장뢰를 칭찬한 것이다.
原詩의 배경은 전목보가 장뢰에게 고려송선을 선물하여 장뢰가 감사하는 상황이다.
즉 장뢰에게는 이미 긍정적인 정서가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식은 장뢰의 시에 차운을 하는데 그 내용은 장뢰에 대한 칭찬이다.
그는 타자간 관계에 개입하여 이미 긍정적으로 형성된 정서 위에서 차운시로 교유를 시도한 것이다.
또한 이는 장뢰가 선택한 운각이기 때문에 장뢰를 존중한다는 마음을 함께 전달할 수 있었다.
장뢰의 시를 인정해 준다는 뜻도 담겨있는 것이다.
소식은 이렇게 제자인 장뢰에게 화답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타자간 관계에서 온 정서를 바탕으로 즐거움이 추가되었기에 교유에 유리했다.
송별시를 받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문인들은 오랜 벗을 전송하면서 송별시를 지어 그를 보내는 정감을 전달했다.
그리고 소식은 타인의 송별시에도 차운을 하였다.
전목부錢穆父
<출성마상유회장영숙이수出省馬上有懷蔣穎叔二首 대궐에서 나와 말 위에서 장영숙에 대한 회포가 일어 쓰다>
其一
춘설경성일척니春雪京城一尺泥 봄 눈 내려 서울에는 한 자의 진흙 있는데
병안환억장정서並鞍還憶蔣征西 안장 끼고 서쪽으로 전쟁 가는 장영숙을 아직도 그리워하네.
벽당홍패출관거碧幢紅旆出關去 푸른 휘장과 붉은 깃발 들고 관문을 나가는 그대에게
일로동풍송마제一路東風送馬蹄 가는 길에 봄바람이 말굽을 보내겠네.⁵⁹
►59)<補注東坡編年詩> 卷三十六
소식蘇軾
<차운전목부마상기장영숙이수次韻錢穆父馬上寄蔣穎叔二首 전협이 말 위에서 장영숙에게 보낸 시에 차운하여>
其一
옥관불용일환니玉關不用一丸泥 옥문관에 진흙 한 덩이는 필요 없으니
자유장성조서서自有長城鳥鼠西 본래 조서산 서쪽에 장성이 있기 때문이라네.
잉여고인심토물剩與故人尋土物 더욱이는 옛 친구와 토산물을 찾아서는
납조홍국기타제臘糟紅麴寄駝蹄 납일의 술지게미와 붉은 누룩을 낙타의 발굽에 보내네.
전목부錢穆父와 장영숙蔣穎叔은 모두 소식의 벗이다.
전협은 장영숙이 떠나게 되자 송별시를 그에게 보냈는데 소식은 그 송별시를 보게 되어 차운을 한다.⁶⁰
►60) 진관은 “전협의 <차운출성마상유회장영숙次韵出省馬上有懷蔣穎叔
대궐에서 나와 말 위에서 감회가 있어 장영숙에게 쓰다> 시에 차운하다)”을 지었다.
진관 또한 전목보의 시에 차운한 것이다.
전목보는 시간이 지나도 떠나간 장영숙을 아직도 그리워한다며 장영숙에게 이 시를 보냈다.
소식은 차운시를 통해 장성과도 같은 장영숙이 있기 때문에
굳이 진흙으로 장성을 쌓을 필요가 없다면서 그를 칭송하고 그에 대한 정을 드러냈다.
소식은 떠나간 장영숙에 대하여 새로운 운을 사용하여 시를 짓지 않고 전목보의 시에 차운하였다.
일반적으로 자신을 그리워해주는 누군가가 있고 그에게 편지를 받으면 뿌듯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운각을 가진 차운시를 또 받았을 때 原詩와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게 되므로
시를 받는 장영숙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여러 사람들로부터 존중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또한 原詩와 차운시를 나란히 놓고 감상함으로써 공통된 운각이 주는 리듬감⁶¹으로 인해 재미를 느끼게 된다.
►61) 차운시는 압운에 의한 미감과 그 효용에 대한 인식이 창화의 관습과 결합하며 탄생하였다.
(강민호, 앞의 논문, 2012, p.55.)
차운은 놀이로서 그 속성은 즐거움이다. 공유된 운각을 보며 상대방은 즐거운 정서가 형성된다.
여기에 운각을 재치 있게 사용하여 해학적 요소를 삽입한다면 차운시는 그 효과를 더욱 발하게 된다.
따라서 차운을 하면 심각한 상황에서도 그 감정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소식蘇軾
<차운왕정국사한자화과음次韻王定國謝韓子華過飮
왕정국의 <한자화가 집에 들러 술을 마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 시에 차운하다>⁶²
►62)왕정국의 原詩는 현존하지 않는다.
1 초유손숙오楚有孫叔敖 초나라에는 손숙오가 있을 때는
2 장성은천리長城隱千里 장성은 천리에 숨어있었네.
3 애재련군자哀哉練裙子 슬프구나, 표백한 바지를 입은 자는
4 부신섭파리負薪躡破履 땔나무를 지고서 해진 신발을 신었으니
5 개무고교친豈無故交親 어찌 사귄 친구가 없으랴마는
6 서거여복수逝去如覆水 가버린 것이 물을 엎지른 것과 같구나.
7 불여노우맹不如老優孟 늙은 우맹이
8 담소탁해미談笑託諧美 담소 중에 해학의 아름다움을 기탁한 것만 못하고
9 세가불가시世家不可恃 권문세가는 믿을 만하지 않으니
10 여의절족궤如倚折足几 다리가 부러진 안석에 기대는 것과 같다네.
11 상부유현상祥符有賢相 진종眞宗 때에는 어진 재상이 있어
12 수악천하지手握天下砥 손으로 천하를 쥐어도 공평했다네.
13 의민역명공懿敏亦名公 의민懿敏 또한 이름 난 공인데
14 삼귀덕작치三貴德爵齒 세 가지 귀한 것은 덕과 벼슬과 나이었다네.
15 개관금기일蓋棺今幾日 관을 덮은 지 오늘로 며칠인가
16 공자수료리公子誰料理 공의 아들을 누가 돌보아주겠으며
17 수요경료리誰要卿料理 누가 경이 돌보아주기를 원하는가?
18 욕설차지지欲說且止止 말하려고 하다가도 또 멈춘다네.
19 댁상개부공宅相開府公 집터의 관상을 보고 부공을 열고
20 구위창생기久爲蒼生起 마침내 백성들을 위하여 일어났지만
21 여하수로별如何垂老別 늘그막의 이별은 어떠한가?
22 빙반궤창이冰盤饋蒼耳 얼음 같은 쟁반의 도꼬마리를 먹기만 하는구나.
23 친혐방악천親嫌妨鶚薦 친혐 제도는 현인을 추천하는 것을 방해하니
24 상대발미차相對發微泚 서로 마주하면 땀을 삐질 흘린다네.
25 신시여탄환新詩如彈丸 새로운 시는 탄환 같이 빨라
26 탈수불이귀脫手不移晷 손을 벗어나면 해 그림자가 움직이지 않을 정도라네.
27 아역로빈객我亦老賓客 나 또한 늙은 빈객이라
28 고어락환기苦語落紈綺 쓴 말 하며 화려한 비단에 글을 쓴다네.
29 막사삼상장莫辭三上章 세 번 상소문 올리기를 사양하지 말게나
30 유도빈천치有道貧賤恥 도가 있는데 빈천한 것은 부끄러운 것이니
왕정국王定國(왕공王鞏 1048-1111)은 소식의 오랜 벗으로 소식이 왕정국의 시에
차운한 작품만도 29首⁶³나 될 만큼 그와의 교유활동은 활발했다.
►63) 內山精也, 앞의 책, p.334.
그리고 한자화韓子華(한강韓絳 1012-1088)는 왕정국의 고종사촌 형이다.
이 시는 왕정국이 자신의 집에 고종사촌인 한자화가 들러서
술을 마시고 간 것에 대해 감사하여 쓴 시에 소식이 차운한 것이다.
소식은 차운을 통해 왕정국과 한자화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소식은 한자화에 대한 비판을 시작한다.
초나라의 유능한 재상인 손숙오가 있을 때에는 長城이 제 기능을 하지 않아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추천 받지 못한 왕정국은 가난한 모습으로 살고 있으니 이는 우맹優孟이 楚 莊王에게 부탁하여
손숙오 아들에게 식읍을 준 것과 반대로 한자화는 왕정국에게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였음을 지적한 것이다.
게다가 왕정국은 권문세가에 의지하거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과거 眞宗(997-1022)때 왕정국의 할아버지인 왕단王旦이 어진 재상으로 있었고
그의 셋째 아들인 왕소王素도 명성이 있던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죽어 왕정국을 돌보아 줄 사람이 없다.
그래서 소식은 한자화가 왕정국을 잘 도와주어야 함을 우회적으로 말한다.
비록 한자화가 벼슬길에 올랐으나 왕정국과는 헤어지게 되었고 친혐親嫌으로 인해
친척인 왕정국을 추천할 수도 없어 왕정국을 마주하면 민망하여 식은땀이 나는 상황이 나타난다.
마지막 4구에서는 왕정국에게 직언처럼 쓴 소리를 계속 할 것을 제안하고 가난하지 않게 살기를 바라고 있다.
왕정국과 한자화는 사촌지간이며 왕정국의 原詩는 전해지지 않지만 제목을 보아 감사하다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소식의 차운시에 앞서 왕정국의 집에서 한자화가 들러 술을 마신 그들만의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자화가 왕정국을 추천하지 못한 것에 대해 소식은 평소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여기에 차운을 시도한다.
그는 역사적 사실들을 끌어 와서 왕정국을 돕지 못한 한자화를 비판하며
왕정국이 가난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자꾸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소식은 차운의 유희성을 이용하여 재치 있게 불만을 표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23-24구에서 “친혐방악천親嫌妨鶚薦 친혐제도는 현인을 추천하는 것을 방해하니
상대발미차相對發微泚 서로 마주하면 땀을 삐질 흘린다네.”라며
운각 “차泚”를 사용하여 해학적인 정서를 부가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운각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소식은 한자화에 대한 불만을 표현했기 때문에
자칫하면 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주어 교유관계에 지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차운시를 지어 운각으로 인한 해학적 요소를 삽입하면 그 분위기를 완화시킬 수 있다.
또한 한자화는 감사 편지를 받고는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에게 위의 차운시를 보낸다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요소들로 인하여 소식은 차운시를 통해 한자화와 왕정국을 자신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면서도
교유 관계를 고려하여 불만을 재치 있게 전달하였다.
소식은 이렇게 차운시를 지어 교유를 지속할 수 있었다.
타자간 관계에의 개입을 통한 차운은 다양한 효과를 주었다.
그들은 소식이 차운하기에 앞서 특정한, 개인적인 사건을 가지고 시로 연결되어 있었고
贈詩의 특성상 시의 내용은 긍정적이다.
이를 통해 둘 사이에는 긍정적인 정서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차운시는 原詩와 결합하여 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기도 하고
原詩 작자의 운각을 따름으로써 그를 존중하는 느낌까지 줄 수 있다.
이는 차운이 놀이의 속성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소식은 그들에게 놀이를 하며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교유를 시도했다.
그러므로 소식은 ‘以詩爲交’의 문화 속에서 타인의 관계에 개입하면서 자신의 교유를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3장 차운 대상의 다양화
차운시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존재가 시 창작의 조건이 된다.
唱詩에 和詩로써 대응하면서 상대방과 교유를 하는 것이 차운시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식의 차운시에는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原詩가 존재한다면 차운시를 지은 경우가 있었다.
그 原詩의 작자는 소식 본인이거나 이미 죽고 없는 古人이 되기도 한다.
소식은 교유 상대방의 시가 아닌 자신의 시와 古人의 시를 차운의 대상인 原詩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차운 대상의 다양화는 소식 차운시의 특징이 된다.
이렇게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차운을 한다는 것은 소식에게 특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각각 놀이를 통해 자신의 시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게 하거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임을 이 장에서 논의한다.
제1절 自和詩
소식은 자신의 시에 다시 차운을 하기도 하였다. 본고에서는 이를 ‘自和詩’라 할 것이다.
자화시는 소식이 자신의 시에 차운하였기에 두 사람 간에 唱과 和가 이루어졌던 창화시와는 다르다.
唱과 和의 주체가 모두 시인 자신이라는 점에서 자화시는 특별하다.
먼저 자화시를 다루기 위해서는 무엇이 자화시인지에 대한 범위를 설정해야 한다.
자화시와 관련된 기존의 선행연구에서는 “차운자작시次韻自作詩”를
“첩차운疊次韻”으로 규정하고 그 수량을 87首⁶⁴라 한 바 있다.
►64) 위의 책, p.335.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른 문인과의 창화 과정 중에 소식 자신이 처음 지은 詩에
다시 차운하게 된 형식도 포함시켰으니 이는 창화에서의 原詩가 ‘상대방의 시’임을 간과한 것이다.
즉 소식은 상대방이 쓴 시에 화답한 것이지 최초의 자신의 시에 차운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화시가 아닌 것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
이는 소식이 시 제목을 붙이는 습관을 통해 알 수 있다.
原詩와 차운시의 제목을 차례대로 본다.
⋅<제야병중증단둔전除夜病中贈段屯田 제야를 맞아 병석에 누워서 단둔전에게 드린다> /
<화돈교수견기和頓敎授見寄 용제야운用除夜韻 돈교수가 보내온 시에 화답하여 제야를 노래한 시에 차운한다>
⋅<송벽향주여조명숙교수送碧香酒與趙明叔敎授 조명숙 교수에게 벽향주를 보내며> /
<조기견화부차운답지趙旣見和復次韻答之 조씨가 이미 나의 시에 화답해 왔기에 다시 차운하여 답한다>
⋅<륙월십이일주성보월六月十二日酒醒步月 리발이침理髮而寢
6월 12일에 술에서 깨어 달빛 아래에서 산책하는데, 머리를 빗고는 잠에 들며)> /
<화자유차월중소두운和子由次月中梳頭韻 자유가 달빛 아래에서 머리를 빗는 시의 운에 차운한 시에 화답하다>⁶⁵
►65)소철은 소식의 시 <6月12일 주성보월酒醒步月 리발이침理髮而寢>에 화답하여
<차운자첨소두次韻子瞻梳頭>를 지었다.
이에 다시 화답한 소식의 시가 <화자유차월중소두운和子由次月中梳頭韻>이다.
위의 예시를 보면 차운시의 제목에 “견기見寄 나에게 보냈다”
또는 “견화見和 나에게 화답하였다”와 같은 말을 적었음을 볼 수 있다.
세 번째 예시도 자신의 시에 화답한 소철의 시에 화답한 것임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시의 제목에는 상대방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각종 표지들이 등장한다.
소식 시의 제목에는 시를 짓게 된 이유와
당시의 구체적 상황 및 창화한 사람들과 운의 사용 상황이 포함되기 때문이다.⁶⁶
►66)이려李黎 이인생李寅生
<개권요상억開卷遙相憶 지음량부조知音兩不遭 - 소식시작중적독자의식탐석蘇軾詩作中的讀者意識探析>
廣西大學文化與傳播學院 <黃岡師範學院學報>2008, p.2.
소식은 이렇게 시창작의 동기 또한 구구절절하게 제목에 읊어 자신에게 화답하였기에 보낸다고 적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를 통해 자화시가 아닌 시를 추려낼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순수하게 자신의 시에 차운한 경우는 이와 다르다.
⋅<송노원한소경지위주送魯元翰少卿知衛州 위주지주로 부임하는 노원한 소경을 전송하며> /
<용구운송로원한지명주用舊韻送魯元翰知洺州 옛 운을 사용하여 노원한 지명주를 전송하며>
⋅<울고대鬱孤臺>/<鬱孤臺(재과건주再過虔州 화전운和前韻⁶⁷)(울고대 다시 건주를 지나며 전운에 화운하다>
►67) 소식의 自注이다.
⋅<류별금산보각留別金山寶覺 원통이장로圓通二長老 금산의 보각·원통 두 장로와 작별하며)> /
<여거금산오년이복지余去金山五年而復至 次舊詩韻 증보각장로次舊詩韻 贈寶覺長老
내가 금산을 5년 동안 떠났다가 다시 이르렀으니 옛 시의 운에 차운하여 보각장로께 드린다>
이러한 예들은 “見和”나 “見寄” 등의 표현 없이 “차전운次前韻 전운에 차운하다”
“부차운復次韻 다시 차운하다” “용구운用舊韻 옛 운을 사용하다” 등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전에 지었던 자신의 시에 차운한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본고에서 설정한 대부분의 자화시는 ‘이전의 운을 사용했다’는 표지를 가지고 있다.⁶⁸
►68) 예외적인 경우가 1組 있는데
<여전후수予前後守 졸여항倅餘杭 범오년凡五年 하추지간夏秋之間 증열불가과蒸熱不可過
독중화당동남협獨中和堂東南頰 하감해문下瞰海門 동시만리洞視萬里 삼복상소연야三伏常蕭然也
소성원년유월紹聖元年六月 주행부령외舟行赴嶺外 열심熱甚 홀억忽憶>과
<자호협조풍오수慈湖夾阻風五首 其一>이다.
그러나 두 시의 편년시기가 비슷하고 原詩의 내용을 통해
原詩와 차운시가 같은 소재를 다룬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러한 분류 기준에 따라 原詩와 함께 묶은 자화시를 31組로 설정하고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소식은 같은 운각을 사용하여 자신의 原詩와 차운시, 즉 자화시를 하나의 짝으로 묶었다.
그리고 原詩와 자화시는 특정한 상황 또는 사건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이는 소식이 자화시를 짓기 위해 原詩에 차운함으로써 原詩의 운각에 담긴 특정한 상황 또는 사건을 가져온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화시를 原詩와 관련시켰다.
또한 자화시와 原詩간에는 긴밀히 연결된 장치들이 눈에 띄는데
이는 소식이 原詩를 고려하며 자화시를 지어 관련성을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차운의 속성인 유희성이 발현된 모습이 보인다.
시인이 관련성을 부여했다는 것은 그 관련된 요소를 가지고 놀이를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소식은 이를 통해 놀이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자화시는 原詩와의 운각의 공유를 통해 原詩와의 동질성을 부여하고
原詩와 밀접하게 연결시키기 위해 창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자화시와 관련된 기존 연구에서 內山精也는
대비적 국면이 출현하면 소식은 의도적으로 자화시를 짓는다고 하였다.⁶⁹
►69) 內山精也, 앞의 책, pp.337-350 참조.
그러나 그의 견해에 따르면 原詩와 자화시간에 대비되는 양상으로만 작품을 해석하게 되며
이외의 경우의 자화시에 대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또한 소식의 자화시는 단순히 대비의 측면으로만 파악하기에는 시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본고는 이러한 견해에서 더 나아가 소식의 자화시를 파악할 것이다.
소식의 자화시는 내용의 흐름이나 전개 방식 측면에서 原詩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거나 原詩의 상황이 자화시에서
지속되는 경우도 있으며 原詩에서 다하지 못한 새로운 말을 하는 경우 등 다양한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편 시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連作詩”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연작시란 같은 제목 아래 두 수 이상을 연이어 지은 시로 지적된다.
그리고 시적 대상의 공유는 연작시의 속성이자 구성 원리이다.⁷⁰
►70) 최경환 <김상용金尙容의 ‘四時詞’와 8수 連作詩의 構成原理>
부산외국어대학교 <外大論叢>vol.20, 2000, p.179.
연작시를 이루는 개별시가 각기 독립적으로 온전한 시상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개별시 상호간에 내용상의 연계성이 있어야 제대로 된 연작시라 할 수 있다.⁷¹
►71) 이영주 <두보 연작시의 장법 연구>서울大學校 人文大學 東亞文化硏究所 <東亞文化> vol.49, 2011, p.31.
이러한 점을 종합해보면 소식의 자화시는 연작시로 볼 근거가 생긴다.
앞에서 서술한 原詩와 자화시에 관련성을 부여한 것과 결합하여 연작시의 기법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절에서는 소식의 原詩와 자화시를 連作詩로 보고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연작시를 연구할 때 하나의 제목 아래 여러 편의 시를 지은 작품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데 소식의 原詩와 자화시는 개별적인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적인 시적 대상을 공유하고 있고
한 편의 긴 시처럼 내용이 이어지기도 하며 그것들 사이에 일정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原詩가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지속되는 것이다.
이는 연속으로 시를 창작했을 경우이다.
또한 연속적으로 창작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러한 시는 原詩와 자화시간에 나타난 정서가 대체로 다르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분석을 위해 두 가지의 경우를 구분하여 시를 분석한다.
(1) 연속 창작의 경우
이러한 자화시와 原詩는 거의 연속적으로 지어진 작품이다.
이 중 먼저 연작시의 기법을 사용하여 原詩의 내용에 이어 못 다한 말을 자화시에서 하는 경우를 보겠다.
蘇軾 <장지호주희증신로將之湖州戱贈莘老 호주로 떠나기 전에 장난삼아 손신로에게 드린다>
여항자시산수굴餘杭自是山水窟 여항은 본래 멋진 산수가 다 모인 곳인데
측문오흥갱청절仄聞吳興更淸絶 듣자 하니 오흥은 더욱 멋지다지요.
호중귤림신저상湖中橘林新著霜 호수 속의 귤 숲에는 방금 서리가 내린 듯
계상초화정부설溪上苕花正浮雪 개울가의 갈대꽃은 바로 공중에 뜬 눈인 듯
고저다아백우치顧渚茶芽白于齒 고저산의 차 싹은 이빨보다 더 희고
매계목과홍승협梅溪木瓜紅勝頰 매계 가의 모과꽃은 뺨보다 더 붉다지요.
오아회루박욕비吳兒膾縷薄欲飛 오인의 실 같은 회는 날아갈 듯 얇디얇아
미거선설참연수未去先說饞涎垂 가기 전에 먼저 얘기만 해도 침이 줄줄 흐르는군요.
역지사공도군구亦知謝公到郡久 사안이 오래전에 그 고을에 가신 걸 아나니
응괴두목심춘지應怪杜牧尋春遲 두목이 봄놀이 가는 게 너무 늦다고 나무라실 테지만
빈사지가대선탑鬢絲只可對禪榻 머리가 하얀 이 몸은 선탑이나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니
호정불용장수희湖亭不用張水嬉 호숫가의 정자 앞에 수상유희는 펼칠 것 없다오.
蘇軾 <재용전운기신로再用前韻寄莘老 다시 지난번 시의 운자를 사용하여 손신로에게 부친다>
군불견君不見 그대는 보지 못했소.
이보개삼굴夷甫開三窟 이보가 굴을 세 개나 팠어도
불여장강호치절不如長康號癡絶 장강이 천치라고 불린 것만 못했음을?
치인자득종천년癡人自得終天年 어리석은 자는 자득하여 천수를 다 누리지만
지사사지죄막설智士死智罪莫雪 지혜로운 자는 지혜에 죽어 그 죄를 씻을 수 없다오.
곤궁수요경료리困窮誰要卿料理 곤궁하다고 누가 그대에게 자기 일 잘하라 하겠소?
거두간산홀괘협擧頭看山笏掛頰 고개를 들고 먼 산을 보며 홀로 뺨을 받칠 텐데요.
야부시중자불비野鳧翅重自不飛 들오리는 날개가 무거워 스스로 안 난다지만
황학하사량익수黃鶴何事兩翼垂 황학은 무슨 일로 두 날개가 축 처졌소?
니중상종개득구泥中相從豈得久 진흙탕 속의 상종이 어찌 오래가겠소?
금아불왕항공지今我不往行恐遲 지금 내가 안 가면 아마 늦을 테지요.
강하무쌍응미거江夏無雙應未去⁷² 강하의 천하무쌍이 아직 가지 않았을 텐데
한무문량상오희恨無文良相娛嬉⁷³ 그와 함께 시문으로 즐긴 적 없음이 안타깝소.⁷⁴
►72) <후한서後漢書⋅황향전黃香傳>
황향자문강黃香字文彊 강하안륙인야江夏安陸人也 황향의 자는 문강이며 강하 안륙 사람이다.
······
박학경전博學經典 구정도술究精道術 능문장能文章 경사호왈京師號曰
경전에 박학하고 도술에 정통함을 강구하며 문장에 능하니 경사 사람들이 부르길
천하무쌍天下無雙 강하황동江夏黃童 “천하에 둘도 없는 강하의 황동이다”라고 하였다.
소식은 황향黃香의 姓氏를 빌려 황정견을 지칭하였다.
►73) 소식은 여기에
“황정견黃庭堅 신로서莘老婿 능문能文 황정견은 손신로의 사위로, 글을 잘 지었다.”이라는 自注를 붙였다.
►74) 이상 두 수는 <정본완역 소동파시집1> pp.704-709.
먼저 原詩는 熙寧 5년(1072) 11월에 지은 것으로 호주지주였던 손신로가
소식을 호주로 초청하여 호주로 떠나기 전에 손신로에게 시를 주었다.
시 전체적으로 호주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호주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자화시는 같은 해 11월 말에 지은 것이다.
소식은 조정을 떠나 호주에 있는 손신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손신로의 사위인 황정견을 빨리 가서 만나보고 싶다고 편지로 부쳤다.
소식은 原詩와 자화시를 통해 자신이 할 말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두 편의 시는 내용상 이어져 있으니 이를 크게 요약하자면
“호주의 경치 상상(原詩) → 곧 가겠다고 대답(原詩) → 손신로를 위로(자화시) →
손신로를 빨리 만나고 싶어함(자화시) →황정견을 만나고 싶어 함(자화시)”의 순서로 내용이 전개된다.
자화시는 原詩와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는 것이다.
原詩에서 곧 가겠다고 이미 대답한 뒤에도 소식은 자화시를 통해 자신의 原詩를 이어나갔다.
이는 손신로와 함께 황정견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새로이 전하기 위해서이다.
소식은 이때 처음으로 황정견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식시견족하시문어손신로지좌상軾始見足下詩文於孫莘老之坐上
용연이지聳然異之 이위비금세지인야以爲非今世之人也
나는 처음 그대의 시문을 손신로의 집에서 보고는 깜짝 놀라 지금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소.
신로언莘老言 차인此人 인지지자상소人知之者尙少 자가위칭양기명子可爲稱揚其名
손신로는 이 사람을 아는 사람이 적으니 제가 그 이름을 알릴 수 있을 것이라 하였소.
(······)
기후과리공택어제남其後過李公擇於濟南 즉견족하지시문則見足下之詩文 유다이득기위인익상愈多而得其為人益詳
그 후 제남에서 이공택의 집에 들러 그대의 시문을 보았는데 볼수록 그대의 위인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었소.⁷⁵
►75) <답황로직서答黃魯直書> (孔凡禮 點校 <蘇軾文集> 卷五十二, 1996, pp.1531-1532.)
이는 1078년에 徐州에서 소식이 쓴 글로 황정견의 <상소자첨서上蘇子瞻書 소자첨에게 올리다>에 대한 답장이다.
실제 소식과 황정견의 만남은 元豐 元年(1078)이지만
위의 시를 통해 소식의 자화시가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소식은 자화시를 原詩의 내용과 연결시키면서 새로운 말을 덧붙였다.
이것은 소식이 자화시를 창작하는 규칙 중 하나였다.
原詩로 인해 앞의 상황이 특정되고 原詩와 자화시를 하나의 흐름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시인이 놀이를 추구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의 묶음으로 된 原詩와 자화시는 연작시에서 보이는 특성을 가지게 된다.
이는 차운시가 原詩를 특정하는 역할을 하며 原詩와 동질감을 형성하고 있기에
상대방에게 ‘연결된 시’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효과적으로 기능한 것이었다.
자화시는 原詩의 상황에 변화가 생길 경우에도 사용된다.
原詩에서 말한 것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소식은 차운을 통해 내용을 이어받아 자화시를 지었다.
蘇軾 <송고자돈봉사하삭送顧子敦奉使河朔⁷⁶ 하삭으로 부임하는 고자돈을 보내며>
►76) 하북로도전운사河北路都轉運使를 말한다.
1 아우고자돈我友顧子敦 나의 벗 고자돈은
2 구담량준위軀膽兩俊偉 체구와 담력 두 가지 모두 뛰어나다네.
3 편편십위복便便十圍腹 뚱뚱한 열 뼘 둘레의 배는
4 부단저서사不但貯書史 경서와 사서를 비축하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5 용군삭백인容君數百人 그대와 같은 수백 명의 사람을 담아
6 일소만사이一笑萬事已 한 번 웃음에 만사가 끝나게 해 주었다네.
7 십년와강해十年臥江海 십년 동안 강과 바다에 누워있었으니
8 료불견온희了不見慍喜 성내고 기뻐하는 모습을 전혀 보지 못했지만
9 마도향저양磨刀向豬羊 칼을 갈아 돼지와 양을 향하게 하고
10 시주회린리釃酒會鄰里 술을 걸러 마을 사람들을 모았네.
11 귀래여일몽歸來如一夢 한 바탕의 꿈을 꾼 듯 돌아왔는데
12 풍협유무미豐頰愈茂美 볼이 퉁퉁하니 더욱 보기 좋구나.
13 평생비칙수平生批勅手 평생에 비칙을 담당하여
14 농묵사황지濃墨寫黃紙 짙은 먹으로 황금빛 종이에 글을 썼는데
15 회당늑연연會當勒燕然 장차 연연산에 공을 새기러
16 낭묘등검리廊廟登劍履 조정에서 올라 검을 차고 신을 신은 채
17 번연향하삭翻然向河朔 급하게 하삭으로 가면서도
18 좌념동군수坐念東郡水 다만 동군의 물난리를 염려한다네.
19 하래흘불거河來屹不去 황하에서 와서는 확고히 떠나지 않나니
20 여존내용이如尊乃勇耳 왕존 같은 사람이 용자일 따름이라네.
蘇軾 <제공전자돈諸公餞子敦 식이병불왕軾以病不往 부차전운復次前韻
여러 공들이 자돈을 전별해주는데, 나는 병으로 인해 가지 못하므로, 앞의 운에 다시 차운하다>
1 군위강남영君爲江南英 그대는 강남의 뛰어난 인물이 되었는데
2 면작하삭위面作河朔偉 얼굴은 하삭의 장대함을 띠었다네.
3 인간일호한人間一好漢 세상에 유일한 용감한 사내가 있으니
4 수사장장사誰似張長史 그 누가 형주장사인 장간지와 같을까.
5 상서고류군上書苦留君 글을 올려 진실로 그대를 머무르게 하고자 했으나
6 언졸첩보이言拙輒報已 말재주가 옹졸하니 즉시 안 된다고 알려주고는 끝났다네.
7 치지물복도置之勿復道 그를 두는지의 문제는 다시 말하지 말 것이니
8 출처구가희出處俱可喜 떠나고 머무르는 것 모두 기뻐할만하기 때문이네.
9 반여공륙척攀輿共六尺 육척의 수레를 잡고서
10 식육비만리食肉飛萬里 고기를 먹으며 만리를 날아간다네.
11 수언원근수誰言遠近殊 누가 조정에서 멀고 가까움이 다르다고 말했는가
12 등시조정미等是朝廷美 조정의 찬미는 똑같은데
13 요지송별처遙知送別處 멀리서도 송별할 곳 아나니
14 취묵쟁림지醉墨爭淋紙 취한 먹으로 다투어 종이에 휘갈겼다네.
15 아이병두문我以病杜門 나는 병 때문에 문을 닫고서
16 상송공진리商頌空振履 상나라의 노래를 부르며 공연히 신발을 끌지만
17 후회지하일後會知何日 후일의 모임이 언제인지 안다면
18 일환여복수一歡如覆水 한 번 기뻐함이 물을 엎지른 것과 같을 것이네.
19 선보천금구善保千金軀 천금 같은 몸을 잘 지켜야 하나니
20 전언희지이前言戱之耳 앞의 말들은 농담일 따름이라네.
元祐 2년(1087) 4월, 변경에 있을 때였다.
친한 벗인 고자돈이 변경인 하삭으로 부임하게 되어 송별시를 써 주었다.
그런데 고자돈은 매우 뚱뚱한 사람이므로 소식은 그의 배 둘레가 열 뼘이나 되며 볼이 퉁퉁하다고 희롱 하였다.
고자돈은 조정에서 평생을 근무하다가 변경으로 가게 된 상황이었다.
이때 마침 하삭에는 물난리가 났었는데 고자돈은 그것을 걱정하며 부임하여 잘 처리하고자 했다.
소식은 그의 이러한 모습에 감탄하며 송별시를 지었다.
그리고 얼마 후 여러 사람과 송별해주기로 하였는데 소식이 몸이 아파 가지 못하게 되자 자화시를 쓴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전송해주기 위해 모여 송별시를 써 주었다.
그러나 소식은 제15구에서 몸이 아파 못 가게 되었다고 말하며
다음번에 기쁘게 만나면 좋겠다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제19-20구에서는 “앞의 말이 농담이었으니” 귀한 몸을 잘 보살피라며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原詩와 자화시는 “고자돈 송별”이라는 같은 사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두 편의 시는 “고자돈의 외적인 모습(原詩) → 고자돈의 결단에 대한 칭송(原詩) →
고자돈의 용감함을 칭송(原詩와 자화시를 연결) → 송별의 모습 상상(자화시) →
가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자화시)”으로 이어진다.
이 중에서도 “고자돈의 용감함을 칭송”하는 부분은 原詩와 자화시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이를 통해 “못 가게 되었다”는 새로운 내용을 시의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꺼낸 것이다.
또한 자화시의 마지막 2구에서 原詩에서 했던 고자돈에 대한 희롱을 언급하며 직접적으로 原詩의 내용을 가져왔다.
소식은 특정한 사건을 가진 운각을 다시 사용하며 자화시와 연결시킨 것이다.
이렇게 연결고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소식은 적극적인 놀이를 하게 되었고
결국 두 편의 시는 하나의 흐름을 가진 연작시의 특성을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자화시 중에는 原詩와 자화시가 이어지며 하나의 주제가 공통적인 요소를 가지고
조금씩 변화하면서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다음의 세 편으로 이루어진 시가 그렇다.
蘇軾 <11月26日 송풍정하松風亭下 매화성개梅花盛開 11월 26일에 송풍정에서 매화가 만발하다>
1 춘풍령상회남촌春風嶺上淮南村 춘풍령 위의 회남촌에는
2 석년매화증단혼昔年梅花曾斷魂⁷⁷ 예전의 매화가 넋을 끊어놓았었는데
3 개지류락부상견豈知流落復相見 떠돌아다니다 매화를 다시 만날 줄 어찌 알았겠는가
4 만풍단우수황혼蠻風蜑雨愁黃昏 비바람 부는 남방에 황혼 되니 근심하네.
5 장조반락려지포長條半落荔支浦 긴 가지는 여지 개펄에 반쯤 닿고
6 와수독수광랑원臥樹獨秀桄榔園 비스듬히 누운 나무는 광랑 동산에 홀로 빼어나다네.
7 개유유광류야색豈惟幽光留夜色 어찌 다만 그윽한 빛이 밤을 붙잡아 두었을 뿐이겠는가
8 직공냉염배동온直恐冷艶排冬溫 다만 차가운 자태가 따뜻한 겨울을 밀어낼까 걱정된다네.
9 송풍정하형극리松風亭下荊棘裏 송풍정 아래의 가시나무에
10 량주옥예명조돈兩株玉蕊明朝暾 두 그루 흰 꽃이 아침 해에 빛나네.
11 해남선운교타체海南仙雲嬌墮砌 남쪽 바다 신선의 구름이 교태롭게 섬돌에 떨어지고
12 월하호의래구문月下縞衣來扣門 달빛 아래 흰 옷 입은 선녀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네.
13 주성몽각기요수酒醒夢覺起繞樹 술도 깨고 꿈도 깬 채 나무를 맴도는데
14 묘의유재종무언妙意有在終無言 심오한 뜻 있어도 끝내 말이 없구나.
15 선생독음물탄식先生獨飮勿歎息 선생은 홀로 마신다고 탄식하지 말지니
16 행유락월규청준幸有落月窺淸樽 다행히 지는 달이 맑은 술잔을 엿보고 있다네.
►77) [公自註] 여석부황주予昔赴黃州 내가 예전에 황주에 갔을 때
춘풍령상견매화春風嶺上見梅花 유량절구有兩絶句 춘풍령에서 매화를 보고서 두 편의 절구시를 지었다.
명년정월明年正月 왕기정도상往岐亭道上 부시운賦詩云 다음 해 정월에 기정으로 가서 읊은 시에서
‘거년금일관산로去年今日關山路 “작년 오늘 관산의 길에서
세우매화정단혼細雨梅花正斷魂’ 매화에 가랑비 내리니 바로 넋을 끊는구나.”라 하였다.
蘇軾 <재용전운再用前韻 다시 앞의 운을 사용하다>
1 나부산하매화촌羅浮山下梅花村 나부산 아래의 매화촌
2 옥설위골빙위혼玉雪爲骨冰爲魂 흰 눈은 뼈가 되고 얼음은 혼이 된다네.
3 분분초의월괘수紛紛初疑月挂樹 분분한 것이 처음에는 나무에 걸린 달이라고 의심했는데
4 경경독여삼횡혼耿耿獨與參橫昏 밝은 것이 홀로 새벽에 기울어있는 삼성과 함께 있다네.
5 선생색거강해상先生索居江海上 선생은 강과 바다에 외로이 사나니
6 초여병학서황원悄如病鶴棲荒園 병든 학처럼 근심하며 황폐한 동산에 깃들어 산다네.
7 천향국염긍상고天香國艶肯相顧 천하의 빼어난 향기와 자태는 기꺼이 돌아볼 만하니
8 지아주숙시청온知我酒熟詩淸溫 아는 것은 내가 술에 취해 시가 맑고 따뜻하게 된 것이라네.
9 봉래궁중화조사蓬萊宮中花鳥使 봉래궁의 화조사인
10 녹의도괘부상돈綠衣倒挂扶桑暾 푸른 옷 입은 부상의 아침의 도괘자는
11 포총규아방취와抱叢窺我方醉臥 수풀더미에서 내가 막 취해 누운 것을 보고는
12 고견탁목선고문故遣啄木先敲門 딱따구리로 하여금 먼저 문을 두드리게 한다네.
13 마고과군급소쇄麻姑過君急掃灑 마고선녀가 그대에게 들러 급히 먼지 쓸고 물 뿌리게 하니
14 조능가무화능언鳥能歌舞花能言 새는 능히 노래하고 춤추며 꽃은 능히 말을 한다네.
15 주성인산산적적酒醒人散山寂寂 술 깨어 사람들 흩어지니 산은 적막한데
16 유유락예점공준惟有落蕊黏空樽 다만 떨어진 꽃만 빈 술잔에 붙어 있구나.
蘇軾 <화락복차전운花落復次前韻 꽃이 떨어지니 앞의 운에 차운하다>
1 옥비적타연우촌玉妃謫墮烟雨村 태진비는 가랑비 마을로 유배당했는데
2 선생작시여초혼先生作詩與招魂 나는 시 지어 혼을 부른다네.
3 인간초목비아대人間草木非我對 세상의 초목들은 나의 짝이 아니라며
4 분월우계성유혼奔月偶桂成幽昏 달 속으로 달려가 계수나무와 짝 지어 혼인하였구나.
5 암향입호심단몽闇香入戶尋短夢 은은한 향기 사립문으로 들어와 잠깐의 꿈을 찾는데
6 청자철지류소원靑子綴枝留小園 푸른 열매만 가지에 이어져 작은 동산에 남았네.
7 피의련야환객음披衣連夜喚客飮 옷 걸치고 밤새도록 객을 불러 술을 마시는데
8 설부만지료상온雪膚滿地聊相溫 흰 살갗이 바닥 가득하니 잠시나마 따뜻하구나.
9 송명조좌수불수松明照坐愁不睡 관솔로 앉은 자리 비추나 근심으로 잠들 수 없고
10 정화입복청이돈井華入腹淸而暾 새벽녘에 기른 물은 뱃속으로 들어가 맑고도 따뜻하구나.
11 선생래년륙십화先生來年六十化 선생은 내년에 육십 세가 되나니
12 도안이입불이문道眼已入不二門 도의 눈은 이미 불이문을 들어갔다네.
13 다정호사여습기多情好事餘習氣 정이 많아 일을 좋아하니 번뇌가 넘쳐
14 석화미인도무언惜花未忍都無言 지는 꽃을 애석해함을 참을 수 없는 나머지 말이 없다네.
15 류련일물오과의留連一物吾過矣 한낱 미물에 미련을 둔 것은 내 잘못이니
16 소령백벌공뢰준笑領百罰空罍樽 웃으며 빈 술잔에 벌주를 받는다네.
먼저 첫 번째 시는 紹聖 元年(1094) 11월 26일에 지은 작품이다.
이때는 혜주로 온 지 약 두 달이 되었을 무렵으로 유배당한 슬픔과 외로움이 드러난다.
소식은 첫 번째 유배지인 黃州에서 元豐 4년(1081) 정월에 지었던 詩⁷⁸를 생각하며
예전의 매화를 떠올리는데 현재의 자신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시를 짓게 된다.
►78) <정월이십일왕기정正月二十日往岐亭 정월 20일에 기정으로 갔는데
군인반郡人潘 고古 곽삼인송여어녀왕성동선장원郭三人送余於女王城東禪莊院
군의 사람인 반언명潘彦明 고경도古耕道 곽흥종郭興宗 세 사람이 나를 여왕성의 동쪽에 있는 선장원에 보내주다>
십일춘한불출문十日春寒不出門 십일 동안 봄이 춥다고 문을 나가지 않았으니
부지강류이요촌不知江柳已搖村 강의 버드나무가 이미 마을을 흔들었는지도 몰랐다네.
초문결결류빙곡稍聞決決流冰谷 얼음 계곡에서 콸콸 흐르는 물소리는 점점 들려오고
진방청청몰소흔盡放靑靑沒燒痕 파릇파릇 풀들이 모조리 퍼져서 불사른 흔적을 없앴다네.
삭무황원류아주數畝荒園留我住 수 이랑의 거친 언덕에는 나만 머물러 살고 있으니
반병탁주대군온半甁濁酒待君溫 반쯤 남은 탁주를 가지고 그대 기다려 따뜻하게 하네.
거년금일관산로去年今日關山路 작년 오늘에는 관산의 길에 있었는데
세우매화정단혼細雨梅花正斷魂 가랑비가 매화에 내리니 정말 넋을 끊는 듯하구나.
(<蘇軾詩集> 卷21 pp.1077-1078.)
지금의 매화는 활짝 피어 향기가 진하며 고운 자태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태는 신선 또는 선녀와도 같다.
그러나 자신의 처지 때문에 그런 매화를 보며 근심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시는 11월 26일 이후에 지은 詩인데 앞의 詩처럼 매화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슬퍼한다.
그런데 앞의 詩와 다르게 새로운 사건이 나타난다.
먼저 제9구에서 “화조사”가 등장하는데, “화조사”는 唐 玄宗이 미녀를 뽑아 입궁시키는 일을 담당했던 관직이다.
즉 시와 연결하면 “화조사”는 아름다운 매화를 데려가는 세월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화조사”인 도괘자 새가 딱따구리를 시켜
매화가 다 지기 전에 어서 매화를 감상하며 즐기라고 재촉하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 구에서는 “떨어진 꽃”이 등장한다.
이는 모두 매화가 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구절이다.
마지막 시는 12월에 지은 시로 매화는 이미 떨어진 상황이다.
소식은 제2구에서 매화의 혼을 부르며 매화의 넋을 기리면서 전설 속의 인물인 姮娥에 비유하여
달 속으로 가서 계수나무와 짝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떨어진 꽃잎에서 나오는 향기를 맡고는 순간 매화를 찾아보지만 이미 매실(靑子)이 가지마다 달려있었다.
이러한 매화의 모습을 보며 소식은 너무나 애석해하고 있다.
이렇게 세 편의 시는 각각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들을 이어보면 공통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본다.
11月26日 松風亭下 梅花盛開 |
再用前韻 | 花落復次前韻 | |
중심 소재 | 매화 | 매화 | 매화 |
창작 시기 | 11월 26일 | 11월 26일 | 11월 26일 |
주요 내용 | 매화가 만개한 모습 | 꽃잎이 조금 떨어진 모습 | 꽃잎이 거의 다 떨어진 모습 |
주된 정서 | 근심(愁) | 근심(悄) | 근심(愁) |
소식(先生)의 모습 | 달 아래 홀로 술을 마시고 있음 | 병든 학처럼 황폐한 동산에 살고 있음 | 육십 세가 되어 참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함 |
매화의 이미지 |
⋅그윽한 빛깔(幽光) ⋅차가운 자태(冷艶) ⋅신선 같은 구름(仙雲) ⋅달빛 아래 흰 옷 입은 선녀(月下縞衣) |
⋅나무에 걸린 달(月挂樹) ⋅천하의 빼어난 향기와 자태(天香國艶) ⋅마고선녀(麻姑) |
⋅세상으로 유배당한 태진비(玉妃謫墮) ⋅달로 달려가 계수나무와 짝함(奔月偶桂) ⋅푸른 열매(靑子) |
구조 | ⋅起(시상의 발단: 매화가 활짝 핀 고고한 모습) |
⋅承(시상의 연결: 매화가 활짝 핀 모습) ⋅轉(시상의 전환: 떨어진 매화 꽃잎의 흔적에 근심함) |
⋅結(시상의 마무리: 꽃이 진 것을 애석해함) |
위 세 편의 시는 “매화”라는 하나의 제목을 가진 일반적인 연작시로 보기에 충분하다.
매화가 시의 중심 소재가 되고 매화가 만개한 모습부터 꽃잎이 떨어지는 모습,
거의 다 떨어진 모습의 각각 다른 3개의 장면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 매화는 모두 신선의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세편의 시에서 모두 소식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 “先生”이 시 속에 직접 등장하여 자신을 객관화시켜
마치 다른 사람과 교유하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 동시에 시적 주체의 감정의 흐름이 명확히 드러난다.
위의 시들은 명확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연작시의 기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각각의 시는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즉 개별적으로 완결성을 가진 詩가 세 편이 모였을 때에도
기승전결의 구조로 구성된 한편의 장편시가 되는 것이다.
차운을 통해 原詩와의 동질성이 생기고 소식은 여기에 내용과 표현상에서도
原詩와의 연계를 추구하면서 자화시를 지었다.
이렇게 시인의 의도적인 시상 배치는 시를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이 과정에서 차운의 놀이적 측면이 드러난다.
적극적으로 운각을 맞추면서 내용면에서도 공통점을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의 규칙이 되어 시인의 시 창작을 구속한다.
소식은 자발적으로 정한 규칙을 따르고 통제되는 상황 아래에서 활동하는 것이다.⁷⁹
►79) 로제 카이와 지음, 이상률 옮김<놀이와 인간> 서울: 문예출판사, 1994, p.60 참조.
따라서 자화시는 原詩의 내용에서 변화하고 발전하며 연작시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세 편의 시를 연작시로 놓고 읽는다면 더욱 깊이 있는 감상을 할 수 있게 됨을 알 수 있다.
(2) 연속 창작이 아닌 경우
한편 자화시에는 原詩와 자화시가 연속적인 창작이 아닌 경우가 있다.
즉 原詩와 자화시가 창작된 시기가 다른 것이다.
또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시인이 가진 정서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에는 대체로 原詩와 자화시의 정서가 다르다.
본고는 이것 역시 연작시로 파악하려 한다.
일반적으로 연작시는 시간적으로 연속하여 짓거나 그 정서가 동일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소식의 原詩와 자화시는 시의 소재를 공유하고 같은 흐름으로 이루어지며 대부분의 原詩와 자화시가
짝을 이루어 같은 首의 原詩와 자화시로 구성되고 또한 상황이 서로 대비되어 짝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⁸⁰
►80) 이에 대하여 강민호는 <杜甫 類似連作詩 고찰>에서
각각의 제목을 가진 시를 묶어 유사연작시로 파악한 바 있다.
그는 중국의 고전시가 대우를 추구한 것처럼
두보의 대우 추구 심리도 유사연작시에 확장되어 발현되고 있다고 하였다.
유사연작시가 연작시인 이유를
①제목에서 같은 부분을 공유하거나 시간적으로 연속되거나 상황이 서로 대비되어 짝을 이루는 경우가 많고
②유사연작시의 詩體 형식이 거의 일치하며
③전체적으로 나름의 연결성과 장법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으로 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강민호 <杜甫 類似連作詩 고찰>, 한국중국어문학회 <中國文學> vol.85, 2015 참조.)
이에 따라 본고에서 설정한 자화시 31組 가운데 14組를 시간적으로 연속 창작이 아닌 경우로 분류하였고
본고는 그것들이 연작시로서 연결될 수 있다고 본다.
소식은 평생에 관직생활과 3차례의 폄적으로 인하여
많은 곳을 이동하였으므로 같은 곳에 다시 가게 된 일이 있었다.
자화시는 그때의 감정을 다른 운자를 사용하여 짓지 않고 과거의 시에 차운을 하여 지은 것이다.
소식은 原詩의 운각을 통해 原詩에 대한 기억을 끌어오고
자화시에 같은 흐름을 사용하여 현재의 감정을 나타냈다.
原詩와 자화시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내용의 순서를 맞추어 두 편의 시가 관련이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시를 지었다는 점에서 여기에서 또한 놀이적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소식은 이렇게 차운으로 나타날 수 있는 동질감을 극대화하여 자화시를 창작한 것이었다.
蘇軾 <류별우천留別雩泉 우천을 떠나며>
거주속우천擧酒屬雩泉 술 한 잔을 들어서 우천에게 권하나니
백발일야신白髮日夜新 백발이 밤낮으로 새로이 나는구나.
하시천중천何時泉中天 언제나 샘물 속의 맑은 하늘이
복조천상인復照泉上人 샘물에 비친 이 사람을 다시금 비추려나?
이년음천수二年飮泉水 두 해 동안 이 샘물을 마셔 왔으니
어조역상친魚鳥亦相親 이곳의 물고기와 새도 서로 친한데
환장농천수還將弄泉手 이제는 또 샘물로 장난치던 손으로
차일향서진遮日向西秦 해를 가리며 서쪽에 있는 진 땅으로 가겠구나.⁸¹
►81) <정본완역 소동파시집2> 519쪽
蘇軾 <재과상산화석년류별시再過常山和昔年留別詩 다시 상산을 지나며 옛날의 留別詩에 화답하다>
구루산전수傴僂山前叟 산 앞의 꼬부랑 늙은이
영아여영신迎我如迎新 나를 맞아주는 것이 마치 새 사람을 맞아주는 듯하네.
나지몽환구那知夢幻軀 어찌 알겠는가 꿈과 환상 같은 몸이라
념념비석인念念非昔人 찰나에도 옛적의 사람이 아닌 것을.
강호구방랑江湖久放浪 강호에서 오랫동안 방랑하였으니
조시수상친朝市誰相親 조정에서 누구와 친하겠는가.
각심천원거卻尋泉源去 차라리 샘의 근원을 찾으러 떠나서는
도화응피진桃花應避秦 도화원에서 응당 진대의 난을 피하겠네.
熙寧 9년(1076), 소식은 知河中府에 임명되어
더 이상 밀주 우천에 오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아쉬워하며 <류별우천留別雩泉>를 지었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현실에 대해 탄식하며 앞으로 맡게 될 관직 생활을 계획하였다.
그리고<재과상산화석년류별시再過常山和昔年留別詩>는 元豐 8년(1085) 10월에 密州에서 지었다.
이 시기는 黃州에서의 고된 유배생활을 마치고 登州知州에 임명한다는 조서를 받고 등주로 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이제까지의 삶은 꿈을 꾼 듯 허망하고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즐겁지 만은 않다.
마지막 두 구에서는 소식의 심경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도화원”으로 피해 앞으로는 세속의 관직생활을 떠나고자 한다.
이는 原詩에서 다음 관직을 담당할 일을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자화시에서는 인생여몽의 의식이 매우 짙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두 편의 시의 정서는 분명 다르다.
그러나 공통점을 가지고 시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작시의 특성이 보인다.
이를 알기 위해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본다.
句 | 留別雩泉 | 再過常山和昔年留別詩 | 공통점 |
1~2 | 우천을 대하는 자신의 모습 | 자신의 모습과 우천이 자신을 마주하는 태도 |
우천과 마주하는 자신의 모습 |
3~4 | 회재불우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탄식 |
인생무상의 삶에 대한 탄식 | 탄식 표출 |
5~6 | 우천에서의 생활 | 우천을 떠난 이후의 모습 | 우천에서의 생활을 기준으로 한 태도의 변화 |
7~8 | 다가올 관직 생활에 대한 계획 |
장차 세속을 떠나 살겠다는 의지 표현 |
미래에 대한 태도 |
위의 표로 정리하여 보면 原詩와 자화시는 매우 긴밀하게 짜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편의 시는 같은 구조로 전개되고 있었다.
시를 네 가지의 내용으로 나누었을 때 그 내용의 흐름이 같은 순서대로 등장하는 것이다.
소식은 자화시를 지을 때 原詩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시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原詩와 자화시의 각각 다른 정서가 잘 표출되고 있다.
이렇게 관련성을 부여함으로써 유희를 추구함과 동시에 연작시의 특성이 나타난 것이다.
고체시로 지은 자화시에서도 연작시의 기법을 사용한 것이 보인다.
소식은 짧은 율시뿐만 아니라 고체시에서도 原詩와 자화시를 연결시켰다.
蘇軾 <울고대鬱孤臺>
1 팔경견도화八境見圖畫 팔경을 그림에서 보았으니
2 울고여구유鬱孤如舊遊 울고대는 예전에 노닐던 곳 같고
3 산위취낭용山爲翠浪勇 산은 비취빛 물결 되어 솟아오르고
4 수작옥홍류水作玉虹流 물은 옥무지개 되어 흐르네.
5 일려공동효日麗崆峒曉 해는 새벽의 공동산을 곱게 꾸미고
6 풍감장공추風酣章貢秋 바람은 가을의 장공수를 상쾌하게 하며
7 단청미변섭丹靑未變葉 단청은 아직 잎을 변하게 하지 않았는데
8 린갑욕생주鱗甲欲生洲 물고기비늘 같은 물결은 물가를 생겨나게 하네.
9 남기혼성수嵐氣昏城樹 안개에 성의 나무는 흐려지고
10 탄성입불누灘聲入巿樓 여울 소리는 저자의 주루까지 들어가며
11 연운침령로煙雲侵嶺路 연기 같은 구름은 고갯길을 엄습하고
12 초목반염주草木半炎州 초목은 후덥지근한 땅의 반을 차지한다네.
13 고국천봉외故國千峰外 고향은 일천 봉우리 너머로
14 고대십일류高臺十日留 높은 누대에서 십일 동안 머무르게 되었으니
15 타년삼숙처他年三宿處 훗날에 세 밤을 머물게 된다면
16 준의계귀주准擬系歸舟 돌아가는 배 묶어 놓기를 바라네.
蘇軾 <울고대鬱孤臺 재과건주再過虔州 화전운和前韻⁸² 건주를 다시 지나며 전의 운에 화답한다>
►82) 소식의 自註이다.
1 오생여기이吾生如寄耳 내 삶은 마치 붙어사는 것 같아서
2 령해역한유嶺海亦閑遊 영남의 바다 또한 한가롭게 노닌다네.
3 공석삼백리贛石三百里 감석은 3백리까지 있고
4 한강척오류寒江尺五流 추운 강은 일척 오촌을 흐른다네.
5 초산미유산楚山微有霰 초산에는 조금이나마 싸라기눈 내리는데
6 월장구무추越瘴久無秋 월 지방에는 가을이 없어 오랫동안 장기가 돌았지.
7 망단횡운교望斷橫雲嶠 횡운교를 끝까지 바라보니
8 혼비타설주魂飛咤雪洲 눈 덮인 땅이 신기하여 혼이 날아갈 정도라네.
9 효종시출사曉鐘時出寺 새벽 종소리 때때로 절에서 나고
10 모고각명누暮鼓各鳴樓 저녁 북소리 각각 누각마다 울리는구나.
11 귀노미천장歸路迷千嶂 돌아가는 길은 일천 산봉우리로 길을 잃었는데
12 노생열백주勞生閱百州 힘겨운 삶은 일백 고을을 지났다네.
13 불수원학화不隨猿鶴化 원숭이와 학을 따라 변하지 않고
14 감작가호류甘作賈胡留 기꺼이 오랑캐 장사꾼이 되어 머무르리.
15 기유초구재祇有貂裘在 다만 (술과 바꿀) 담비 가죽옷만 남아있다면
16 유감매조주猶堪買釣舟 아직은 낚싯배를 사서 견디리라.
먼저 첫 번째 <鬱孤臺> 작품은 紹聖 원년(1094) 8월에
惠州로 폄적 가는 도중에 건주虔州의 울고대에서 지은 것이다.
소식은 이전에 군수였던 공종한이 그렸던 八境圖를 보았었다.
八境 중 하나가 바로 울고대였는데 소식은 그림에서 울고대를 본 적이 있었으므로
실제 울고대를 보고 나서도 예전에 노닐던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제3구부터 제8구까지는 각종 비유를 사용하여 울고대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울고대를 지나 혜주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풍경이 걱정스럽게 다가온다.
그런 곳에 유배로 인해 현재 십일이나 머무르게 되었으므로 그는 혹시 훗날에 이곳에 오게 된다면
새로운 마음으로 3일 정도만 머무르면서 풍경을 제대로 감상하며 만끽하고자 하는 소망을 품게 된다.
자화시인 두 번째 <鬱孤臺>작품은 건중정국建中靖國 원년(1101) 정월에 지은 것이다.
소식은 1097년 7월부터 세 번째 폄적을 당하여 담주儋州에 있었다.
그런데 소식은 儋州 유배가 풀려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건주虔州를 지나며 과거 7년 전에 지었던 시에 차운을 한다.
그 동안의 고생으로 초탈하게 된 소식은 첫 번째 구에서부터 “내 삶은 마치 붙어사는 것 같아서”라며
살기 어려운 지역인 영남의 바다도 “한가롭게 노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제3구부터는 영남지역에서의 생활을 회상하며
제9구에서는 현재 돌아가는 길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 동안 고생하며 지내온 삶을 되돌아보고 초탈한 정신을 지속하고자 한다.
모든 고난을 다 겪었기 때문에 영남에서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句 | 울고대鬱孤臺 | 鬱孤臺(再過虔州 和前韻) | 공통점 |
起 1-2 | 실경으로 접한 울고대 | 유배 후의 감회 표출 | 작시의 계기 서술 |
承 3-8 | 울고대의 풍경 묘사 | 실제 겪은 영남지역의 환경 | 울고대(영남)의 모습 |
轉 9-12 | 실제 영남지역의 환경을 겪기 전의 불안 |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의 고달픔 | 현 시점의 감정 |
結 13-16 | 즐거운 마음으로 새롭게 방문하고 싶은 장소 |
견딜만한 장소 | 훗날 울고대에 대한 바람 |
각각 16句로 구성된 시는 위에서 나눈 句로 기승전결을 구분할 수 있다.
소식은 原詩와의 흐름을 맞추어 공통적인 내용을 순서대로 전개하였다.
두 편의 다른 시를 닮은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세심하게 시를 창작한 것이다.
율시처럼 2구씩 끊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도 原詩와 같은 모습을 만들었다.
이는 소식이 자화시 창작을 놀이로 여겼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니 단락을 나누는 일정한 규칙이 있었던 것이다.
소식은 이 규칙을 바탕으로 현재의 감정을 더욱 잘 전달할 수 있었다.
이전과 비교하여 달라진 감회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는 原詩와 자화시의 관련성을 드러내기 위해 연작시의 기법을 사용하고 과거의 울고대에서 느끼게 된
감정을 운각과 내용의 흐름을 통해 현재와 연결시켜 유기적으로 시를 구성한 것이었다.
그런데 시의 흐름상 비슷한 전개가 이루어지는 것 외에도
原詩와 자화시가 특정한 기준을 중심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原詩와 자화시에는 관련된 지점이 보이는 것이다.
蘇軾 <증청량사화장로贈淸涼寺和長老 청량사에 있는 화장로에게 드리다>
대북초사몰마진代北初辭沒馬塵 대북쪽 定州에서 막 작별하고 말 먼지에 빠졌는데
강남래견와운인江南來見臥雲人 강남으로 오니 구름에 누운 이를 보았지요.
문선불계전삼어問禪不契前三語 참선을 묻지만 “前三三後三三”을 깨닫지 못하고
시불공류장륙신施佛空留丈六身 부처에게 시주하느라 겨우 한 길 육척의 불상만 남겼네요.⁸³
►83) 소식의 두 번째 아내 왕윤지王閏之가 죽은 지 1년 후에
그의 아들들이 아미타 불상을 그린 그림을 시주한 것을 말한다.
노거산림도몽상老去山林徒夢想 늙어 가매 산림에서 다만 헛된 생각을 하는데
우여종고갱청신雨餘鐘鼓更淸新 비 내린 뒤 종소리와 북소리는 더욱 맑고 새로워요.
회수일세황모장會須一洗黃茅瘴 모름지기 황모장을 한 번 씻어내야 하니
미용심장백첩건未用深藏白㲲巾 두건 속에 깊이 감추어둘 필요 없겠네요.(고운 모포 첩㲲)
蘇軾 <차구운증청량장로次舊韻贈淸涼長老 옛날에 썼던 운에 차운하여 청량사의 장로에게 드리다>
과회입낙지다진過淮入洛地多塵 회수를 지나 낙양으로 들어가니 땅에 먼지가 많아
거선서풍욕오인擧扇西風欲汚人 부채 들어 막아도 서풍은 사람을 더럽히려 하는데
단괴운산불개색但怪雲山不改色 다만 괴이하게도 구름 덮인 산은 낯빛을 바꾸지 않고
개지강월해분신豈知江月解分身 강 위의 달이 자기 몸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어찌 알까요.
안심유도년안호安心有道年顔好 마음 편히 하고 도가 있으니 얼굴이 좋고
우물무정구법신遇物無情句法新 사물을 마주쳐도 정이 없으니 구법이 참신하네요.
송아장로주일섭送我長蘆舟一葉 장로사에서 일엽편주를 탄 나를 전송해주고
소간설낭만의건笑看雪浪滿衣巾 눈 같은 물결이 옷과 두건에 가득한 것을 웃으며 보겠군요.
먼저 原詩는 紹聖 元年(1094)에 지은 것으로 소식이 定州의 태수로 있다가
두 번째 폄적을 받고는 惠州로 가는 도중 금릉에서 청량사의 和長老를 만나 그에게 쓴 시이다.
소식은 청량사에 도착해서 구름에 누운 신선과 같은 화장로를 만났다.
자신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헛된 생각을 하는데 청량사의 풍경은 정말 이름처럼 청량淸凉했다.
이를 통해 풍경을 묘사함과 동시에 자신과 대비되는 화장로의 불법에 대한 경지를 드러냈다.
한편 차운시는 建中靖國 元年(1101)에 금릉에서 지은 것으로 담주儋州에서의 세 번째 폄적생활을 마치고
예전의 안식처인 의흥宜興이 있는 常州로 가게 된 상황에서 和長老에게 쓴 것이다.
금릉으로 들어가니 바람에 먼지가 날려 사람을 더럽히려 하지만
구름 덮인 산은 먼지가 불어와도 그대로 있고 강이 맑아 달은 강에 비친 모습과 똑같다.
이를 통해 소식이 금릉으로 들어가 먼지를 덮어 쓰는 상황과
반대로 청량사의 풍경과 화장로의 모습은 변함없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그리고 고난 끝에 상주로 가게 되었으니
잔잔하고 고요한 소식의 마음 상태와 초탈한 경지에 이른 그의 모습이 보인다.
原詩와 자화시는 청량사의 풍경과 화장로에 대한 칭송을 공통적으로 하고 있다.
소식의 처지에는 변화가 있지만 청량사와 화장로는 변함없기 때문이다.
소식은 자신의 상황을 잘 드러내기 위하여 청량사와 화장로를 기준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각각 다른 정서를 지닌 시를 하나로 묶기 위해서 같은 운각을 사용하면서 공통적인 기준을 부여한 것이다.
이 기준을 통해 原詩와 자화시의 감정이 두드러진다.
소식은 原詩와의 동질감을 극대화하면서 原詩와 자화시를 연결시킨 것이다.
이렇게 특정한 상황 또는 사건을 가진 原詩에 차운함으로써 原詩와 자화시의 연결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상을 정리하면 자화시는 창화가 모두 본인에 의해 이루어진 독특한 차운시임을 알 수 있었다.
소식은 이 자화시를 창작하면서 原詩와 유기적 관련을 형성하기 위해
차운의 방식을 도입하였고 原詩와 자화시 사이에 동질감을 부여하였다.
原詩의 운각에는 특정한 상황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속적으로 창작된 原詩와 자화시를 결합하면
전체적으로 하나의 흐름을 가진 시가 되거나 서로 연결된 모습이 보였다.
또한 연속적인 창작이 아닌 경우에도 같은 순서대로 내용을 구성하여
서로 연결된 詩임을 드러내거나 하나의 요소를 기준으로 삼아 시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소식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놀이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차운시라는 형식 안에서 또 다른 규칙을 설정하여 유희성을 더욱 표출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타인과의 창화가 아니더라도 차운시의 놀이적 특성이 드러남을 알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본고는 개별 제목을 가진 原詩와 자화시를 연작시로 파악하였다.
소식은 자신의 시에 차운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차운시를 창작하여
본인의 유희의 추구와 함께 독자로 하여금 시를 잘 이해하도록 만든 것이다.
제2절 추화시追和詩
추화追和는 後人이 前人의 詩에 화답한 것을 말한다.
소식은 일찍이 한유와 이백, 위응물, 도연명의 시에 차운한 적이 있고
같은 시대 사람이지만 왕안석, 매요신 등이 이미 죽고 난 후에 그들의 시에 차운한 경우도 있었다.
이 중 이백과 한유, 위응물의 시에는 각각 1수씩만 차운한 반면
도연명의 시에는 총 124수⁸⁴의 차운시를 지었으니 그것을 和陶詩라고 한다.⁸⁵
►84)淸 왕문고王文誥 <소문충공시편주집성총안蘇文忠公詩編註集成總案> 卷34
巴蜀書社 1985, p.5.(金甫暻, 앞의 논문, p.19에서 재인용)
►85) 일부 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중복해서 화답시를 썼다.(안희진 <소식의 ‘화도시’를 논함>
한국중국문화학회<中國學論叢> vol.13, 2002, p.10.)
예를 들어 <화도련우독음和陶連雨獨飮 2首>는 같은 운으로 두 수를 지은 작품이다.
화도시는 그 수량뿐만 아니라 소식이 혜주와 담주로 폄적된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창작⁸⁶했다는 점에서 일반 차운시와 다르다.
►86) 첫 작품인 <화도음주시和陶飮酒詩 20首>를 1092년에 짓고
그 후 1095년부터 1100년까지 나머지 시를 지었다.
이를 고려한다면 실제 화도시를 창작한 기간은 약 6년으로 그 기간이 비교적 짧다.
소식 이전의 시인들은 古人의 시에 화운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古人의 詩를 보며 그 詩體를 모방하여 시를 짓거나 그것에 대한 감흥으로 시를 지었다.
이는 古人의 시를 학습하기 위해서 혹은 古人의 감정에 공감하기 때문이었다.
소식은 여기에 차운의 방식을 적용하였다.
상대방의 존재를 기본 조건으로 하는 창화의 영역으로 古人의 시를 가져온 것이다.
原詩의 작자에게 보여줄 수 없었던 화답시지만 소식에게는 특별한 효과를 가져 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식이 原詩를 본다고 해서 무조건 추화시를 짓는 것은 아니었다.
시를 지을 것인지 짓지 않을 것인지는 시인의 선택이기 때문이다.⁸⁷
►87)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시인은 갑자기 시를 쓰고 싶은 충동에 빠지는 때가 종종 있다.
어떤 내적인 욕구가 스스로 시 쓰기를 유혹하는 경우이다.
그것은 배가 고플 때 무엇인가를 먹고 싶은 충동에 빠지는 것과 비유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무엇인가 먹고 싶은 때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전자의 경우는 필연적인 것이겠으나 후자의 경우는 돌발적이다.
그러나 돌발적이라고 해서 그것을 간단히 우연이라고 말할 수만은 물론 없다.
비록 배고프지 않은 상황에서 과일을 먹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 충동은 신체의 미묘한
메커니즘-예컨대 영양소의 균형적 공급과 같은 것-이 입맛을 자극한 결과라 볼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를 쓰고 싶은 충동 역시 본질적으로는 내적인 어떤 원인에 의하여 유발되는
정신의 한 현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오세영지음 <시 쓰기의 발견> 서울: 서정시학, 2013, pp.96-97.)
소식이 추화시를 짓게 된 배경에는 그에게 ‘특별한 原詩’가 존재했던 것이다.
그것은 소식에게 특별한 창작 동기를 불러일으켰다.
그 ‘특별한 原詩’는 바로 소식이 古人과 같은 상황에서 창작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차운이라는 유희적 요소의 개입으로 즐거운 상황은 더욱 즐겁게 만들고
운각에 몰입하여 슬픈 감정에 집중된 초점을 흩어놓아 슬픔을 완화시킬 수 있다.
차운의 놀이적 특성이 가져오는 긍정적인 정서 때문이다.
또한 ‘같은 상황을 겪은 누군가’와 운각을 공유하며 동질감이 생기면서 그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기도 하다.
운각을 통해 原詩의 작자에게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식은 자신과 같은 상황을 가진 原詩를 만났을 때 차운을 적용하였다.
소식의 추화시를 전체 시기 안에서 보았을 때
시 창작의 목적은 크게 화도시와 그 이전시기의 시⁸⁸로 구분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다음의 두 경우로 나누어 논의를 진행한다.
►88) 이에 대하여 김보경金甫暻은 그의 논문
<蘇軾“和陶詩”硏究>(復旦大學 博士學位論文 2008, pp.50-51.)에서 한유, 이백, 위응물, 도연명의 <飮酒> 시에
차운한 시를 우연적이며 흥이 돋아 짓게 된 시라고 하였고 內山精也는 그의 책
<傳媒與眞相-蘇軾及周圍士大夫的文學-蘇軾及周圍士大夫的文學>(上海古籍出版社, 2013, p.356.)에서
한유, 이백에게 차운한 시는 같거나 관련 있는 장소에 처했을 때 지은 것에 반해
위응물에 차운한 시는 비교적 명확한 동기를 찾기 어렵다고 한 바 있다.
(1) 화도시 이전의 추화시
화도시 이전의 추화시는 原詩의 작자가 古人인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原詩 작자가 소식과 같은 상황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면 추화시를 짓게 된다.
이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위하여 시간적 창작 순서에 따라 추화시를 살펴본다.
먼저 첫 번째로 지은 추화시의 제목을 본다.
蘇軾 <2月16日 여장與張 이이군유남계李二君游南溪 2월 16일 장군⋅이군과 함께 남계에서 놀 때
취후醉后 상여해의탁족相與解衣濯足 술에 취하여 서로 옷을 벗고 발을 씻다가
인영한공因詠韓公 산석지편山石之篇 한유의 <산석> 시를 읊었는데
개연지기소이낙이망기유삭백년지외야慨然知其所以樂而忘其有數百年之外也 차기운次其韻
감개무량하게도 그가 즐거웠던 까닭을 알고는 그가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임을 잊고 그의 시에 차운한다.>⁸⁹
►89) <정본완역 소동파시집1>pp.356-357.
소식은 그의 벗들과 함께 놀다가 <山石> 시를 읊고 한유가 즐거웠던 까닭을 깨닫게 되어 차운시를 지었다.
한유의 상황이 자신의 상황과 일치 하였고 한유의 마음을 깨달아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식은 이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가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임을 잊고” 차운을 한다.
原詩 작자가 古人이라는 사실은 현재 차운시를 짓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차운을 통해 현재의 즐거운 정서를 더욱 즐겁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蘇軾 <유혜산병서遊惠山幷敍 혜산에서 노닌 감회를 노래한 시와 그 서문>
절록여석위전당졸節錄余昔爲錢塘倅 왕래무석往來無錫 미상부지혜산未嘗不至惠山
나는 옛날에 항주통판으로 있을 때 무석을 왕래했는데 그때마다 혜산에 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기거오년旣去五年 부위호주復爲湖州 여고우진태허與高郵秦太虛⋅항승삼요동지杭僧參寥同至
떠난 지 5년 만에 다시 호주를 다스리게 되어 고우 사람 진태허 및 항주 스님 참료와 함께 이곳으로 왔다가
람당처사왕무능覽唐處士王武陵⋅두군竇羣⋅주숙소부시朱宿所賦詩
당나라 처사 왕무릉⋅두군⋅주숙이 지은 시를 보았는데
애기어청간소연유출진지자愛其語淸簡蕭然有出塵之姿 추용기운追用其韻 각부삼수各賦三首
그 말이 청려하고 산뜻하여 홍진에서 벗어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 좋아서
그들의 운을 사용하여 각기 세 수씩을 짓는다.
其二
승유개수석勝遊豈殊昔 멋진 유람 옛날과 다를 리가 없으매
청구잉절진淸句仍絶塵 산뜻한 시구가 옛날처럼 초연하네.
조고읍구사弔古泣舊史 옛 일을 애도하고 옛 역사에 눈물짓고
질참가소민疾讒歌小旻 참소를 싫어하고 <소민>을 노래했으니
애재부풍자哀哉扶風子 아아 애달프게도 부풍 사람은
난여소허린難與巢許鄰 소보나 허유와 이웃되긴 어려웠겠네.
원풍 2년(1079), 소식은 호주지주湖州知州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무석無錫에서 진관, 항주 스님 참료와 함께
혜산에서 노닐다가 唐代의 사람이었던 왕무릉, 두군, 주숙⁹⁰이 쓴 시를 보게 되었다.
►90) 왕무릉은 <숙혜산사宿慧山寺 혜산사에 머무르다>
두군은 <동왕회백주하경숙혜산사同王晦伯朱遐景宿慧山寺 왕회백과 주하경과 함께 혜산사에 머무르다>
주숙은 <숙혜산사宿慧山寺 혜산사에 머무르다>를 지었다.
그들은 셋이 함께 혜산을 노닐며 그 감회를 시로 지었다.
두군과 그 벗들은 혜산사에서 함께 경치를 감상하고 노닐며 시를 지었다.
소식은 그 시가 마음에 들었던 나머지 진관과 참료와 함께 그 시에 추화시를 짓게 된다.⁹¹
►91) 진관秦觀은 <동자첨부유혜산삼수同子瞻賦游惠山三首 자첨과 혜산에서 노닐며 짓다 3수>
삼요參寥는 <자첨부수호주삼수子瞻赴守湖州三首 자첨이 호주지주로 부임하며 짓다 3수>를 지었다.
이는 혜산에서 벗들과 함께 노니는 소식 자신의 상황이 왕무릉, 두군, 주숙과도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위의 시는 그 중에서도 두군의 시에 차운한 것이다.
소식은 이렇게 즐거운 상황에서 차운으로 시를 지어 즐거움을 발산하였다.
같은 감정을 가졌던 原詩의 작자와 동질감을 느끼며 자신의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그런데 소식이 처한 상황이 긍정적인 경우가 아닐 때에도 추화시는 유용하게 쓰인다.
‘같은 상황에 처했던 누군가’와 운각까지 공유하며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슬픔에 집중된 상황에서
그의 초점을 운각을 맞추는 것으로 분산시켜 슬픔에서 한 걸음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蘇軾 <화리태백병서和李太白幷敘 이태백의 시에 화답하며 서문과 함께 쓰다>
절록리태백유심양자극궁감추시節錄李太白有潯陽紫極宮感秋詩
이태백에게는 <심양자극궁감추작尋陽紫極宮感秋作 심양의 자극궁에서 가을에 느낀 바가 있어 짓다> 시가 있다.
자극궁紫極宮 금천경관야今天慶觀也 자극궁은 지금의 천경관이다.
도사호동미이석본시여道士胡洞微以石本示余 개기사탁蓋其師卓 지소각之所刻
도사인 호동미가 석본을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아마도 그 스승인 탁기가 새겼을 것이다.
유도행有道行 절희과인節羲過人 금망의今亡矣
탁기는 도술을 행하였고 절의가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데 지금은 죽었다.
태백시운太白詩云 이태백 시에서 이르길
49년비四十九年非 일왕불가복一往不可復 “49년은 잘못되었지만, 한 번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네.”라고 하였다.
여역49予亦四十九 감지感之 차기운次其韻 나도 또한 49세이므로 느끼는 바가 있어 그 시에 차운한다.
옥지일명경전초玉芝一名瓊田草 동미종지칠팔년의洞微種之七八年矣
옥지는 일명 경전초라 하는데 호동미가 그것을 심은 지 칠팔년이 되었으니
운云 갱삭년가식更數年可食 허이유여許以遺余 몇 년이 지나 먹을 수 있으니 나에게 주기를 허락한다고 하였다.
고병기지故幷記之 그러므로 함께 그것을 기록한다.
류광발영환流光發永歡 흐르는 세월에 긴 탄식을 하나니
자석비여독自昔非余獨 예부터 나 홀로 그런 것이 아니었다네.
항년49行年四十九 49년을 지나
환차북창숙還此北窗宿 또 여기 북쪽 창에서 자는구나.
면회탁도인緬懷卓道人 아득히 탁씨 도인을 생각하니
백수우의복白首寓醫卜 흰 머리로 의술과 점술에 기대었다네.
적선고원의謫仙固遠矣 폄적된 신선은 본래 멀지만
차사역난복此士亦難復 이 도사 또한 돌아오기 어렵구나.
元豐 7년(1084) 5월, 소식이 49세일 때였다.
그는 도사 호동미의 석본에 새겨진 이백의 시를 보게 되었다.
그 시에는 이백이 49세가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을 탄식하는 구절이 있었고
소식은 이에 공감을 느껴 차운을 한다.
탁기가 새긴 석본은 남아있지만 사람은 죽고 없는 상황을 마주하며
이백의 심경을 더욱 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식은 이 시에서
“흐르는 세월에 긴 탄식을 하나니 예부터 나 홀로 그런 것이 아니었다네.”라며 이백도 그러했음을 말하였다.
原詩의 작자도 자신과 상황이 같았었기에 그와 동질감을 형성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소식은 이백과 운각을 통해 하나로 묶였기 때문에 가까운 거리에서 그에게 위로를 받을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차운의 속성인 긍정적 정서의 효과가 나타난다.
시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운각을 가지고 놀이를 시도함으로써
고조된 감정을 가라앉히며 슬픔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식은 자신은 물론이며 그 시를 읽는 독자들도
차운시를 통해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다음 시의 서문을 본다.
蘇軾 <목산병서木山幷敘 목가산을 서문과 함께 써서 읊다>
오선군자상축목산삼봉吾先君子嘗蓄木山三峯 차위지기여시且爲之記與詩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일찍이 세 개의 봉우리로 된 목가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또한 그것을 위해 記와 詩를 지었다.
시인매이장성유詩人梅二丈聖兪 견이부지見而賦之 시인 매성유가 보고는 그것을 읊었다.
금삼십년의今三十年矣 이유자천승而猶子千乘 우득오봉又得五峯 익기益奇
지금 30년이 지나 조카인 천승이 다섯 개의 봉우리로 된 목가산을 또 얻었는데 더욱 기이하다.
인차성유운因次聖兪韻 사병각지기측使幷刻之其側
매성유의 운에 차운하는 것으로 인하여 그것을 그 옆에 나란히 새기게 한다.
가우嘉祐 2년(1057),
소식의 아버지 소순蘇洵은 강물에 떠다니는 산 모양의 그루터기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집으로 가져왔다.
세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과 같아 기이하게 여기며 이 기쁨을 글로 적은 것이 바로 <木假山記>이다.
또한 그의 벗인 매요신도 목가산을 보고
<소명윤목산蘇明允木山 소명윤의 목가산>을 지어 그것을 玩賞하는 즐거움을 적었다.
그리고 元祐 3年(1088),
소식의 조카인 천승이 다섯 봉우리로 된 목가산을 가져오자
옛날의 목가산과 그것을 읊은 매요신의 시가 떠올라 차운을 한다.
소식은 차운시를 짓고는 기쁜 나머지 매요신의 시와 자신의 시를 목가산에 새기게 하였다.
이를 통해 소식이 차운시를 지은 이후 더욱 기쁜 상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굳이 原詩까지 함께 목가산에 새기게 하여 原詩와 차운시를 나란히 놓고 즐거움을 남기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기이한 목가산을 구경하러 온 여러 사람들이 함께 새긴 原詩와 차운시까지 읽게 되기 때문이다.
소식은 이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재미있게 전달하고 싶었다.
운각을 공유한 詩도 완상玩賞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차운시가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더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原詩 작자가 古人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原詩에서 형성된 정서가 차운시의 감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지가 중요했던 것이다.
蘇軾 <화도음주이십도병서和陶飮酒二十道幷敘 도연명의 음주 시 20수에 화답하며 서문과 함께 쓰다>
오음주지소吾飮酒至少 상이파잔위락常以把盞爲樂
나는 술을 매우 적게 마시는데, 항상 술잔을 잡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긴다.
왕왕퇴연좌수往往頹然坐睡 인견기취人見其醉 이오중료연而吾中了然
자주 멍하니 앉아서 졸았으니, 남들은 나를 취한 것으로 보지만 나는 또렷하였고
개막능명기위취위성야蓋莫能名其爲醉爲醒也
아마 아무도 내가 취했는지 깨어 있는지를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재양주시在揚州時 음주과오첩파飮酒過午輒罷
양주에 있을 때 술을 마시다가 낮이 지나면 문득 술 마시기를 마쳤다.
객거해의반박客去解衣盤礴 종일환부족이적유여終日歡不足而適有餘
객이 떠나 옷을 벗고는 다리를 뻗고 앉았는데, 종일토록 기쁨은 부족하지만 한적함은 넘쳤다.
인화연명음주이십수因和淵明飮酒二十首 이 때문에 도연명 음주 20수에 화운하여
서이방불기불가명자庶以仿佛其不可名者 시사제자유示舍弟子由 조무구학사晁無咎學士
모호하여 취했는지 깨어 있는지 형용할 수 없는 것을 동생 자유와 조무구 학사에게 보여주고자 한다.
元祐 7년(1092) 7월, 소식이 양주태수揚州太守로 있을 때였다.
소식은 평소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해 멍하게 있을 때가 많아 취했는지 깨어 있는지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러한 상태를 즐겼던 것이다.
어느 날 다른 이와 함께 술을 마시다 혼자 편하게 있었는데
한가한 정취가 넘쳐 도연명의 <음주>시에 차운을 하게 된다.
그러고는 자신의 차운시에 자신의 즐거운 상태를 잘 묘사하여 소철과 조보지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소식은 술을 마시는 상황에서 도연명의 음주시에 차운하여 자신의 즐거움을 발산하였다.
도연명이 술을 마시며 느꼈던 감정을 소식도 느꼈으니 시 창작을 촉발시키는 상황이 존재했던 것이다.
평소 취한 듯 깨어 있는 듯한 상태를 즐겼던 소식은 이 시를 짓고 난 후 만족감을 얻어 더욱 즐거웠던 것이다.⁹²
►92) <和陶飮酒> 시는 화도시 124首에 속한다.
그러나 이 시는 폄적지에서의 절망적인 환경에서 지어진 화도시와는 창작 목적의 측면에서 다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를 화도시 이전의 추화시로 분류하였다.
蘇軾 <기등도사병인寄鄧道士幷引 등도사에게 서문과 함께 부치다>
절록나부산유야인節錄羅浮山有野人 상전갈치천지례야相傳葛稚川之隷也
나부산에 야인이 있는데 전하기로는 갈치천(갈홍)의 종이다.
등도사수안鄧道士守安 산중유도자야山中有道者也 등도사 수안은 산 속에 있는 도사다.
상어암전견기족적장이척허嘗於菴前見其足迹長二尺許
일찍이 암자 앞에서 그의 발자국 길이가 두 척 남짓임을 본 적이 있었다.
소성이년정월이일紹聖二年正月二日 여우독위소주予偶讀韋蘇州
소성 2년 정월 2일에 나는 우연히 위응물의 시를 읽게 되었다.
<기전초산중수사寄全椒山中首士>시운詩云 <전초산의 도사에게 부치다> 시에서 이르길
금조군재랭今朝郡齋冷 홀념산중객忽念山中客 “오늘 아침 군수의 집이 서늘하니 갑자기 산 속의 객이 생각나네.
간저속형신澗底束荊薪 귀래자백석歸來煮白石 산골짜기 밑에 가시나무 덤불을 묶어놓고 돌아와서 흰 돌을 삶네.
요지일준주遙持一樽酒 원위풍우석遠慰風雨夕 아득히 한 동이 술을 가지고서 멀리서 비바람 치는 저녁을 위로하네.
낙섭만공산落葉滿空山 하처심행적何處尋行迹 나뭇잎 떨어져 빈산에 가득하니 어디서 행적을 찾겠는가.”라 하였다.
내이주일호乃以酒一壺 의소주운依蘇州韻 작시기지作詩寄之
이에 술 한 병을 가지고 위응물의 운에 의지하여 시를 지어 그에게 부친다.
유인불가견幽人不可見 숨어사는 이를 만날 수 없지만
청소문월석淸嘯聞月夕 맑은 휘파람소리가 달밤에 들리네.
료희암중인聊戱菴中人 그런대로 암자에 있는 이를 희롱하나니
공비본무적空飛本無迹 하늘을 나는 이는 본래 자취가 없기 때문이라네.
어느 날 소식은 우연히 위응물의 시를 읽게 되었는데
위응물은 전초산의 도사를 그리워하며 그에게 시를 보냈다.
이에 소식도 평소 알고 있었던 등도사가 떠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소식이 일찍이 암자 앞에서 등도사의 발자국을 본 적이 있었는데
위응물의 시에 의하면 도사의 행적은 남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를 운각인 “적迹”으로 연결시켜 등도사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함과 동시에 장난스럽게 희롱을 한 것이다.
즉 운각이 정해진 차운시였기 때문에 소식은 효과적으로 재치 있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의 추화시는 대부분 原詩 작자가 古人인지의 여부와
古人이 누구인지의 여부는 추화시를 짓는데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
또한 창작시기를 고려했을 때 평생에 걸쳐 산발적으로 나타났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로 설명될 수 있다.
먼저 송대 문인들이 창화시를 지을 때 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만든 운각에 차운해야 그들만의 집단을
형성할 수 있다는 인식이 뚜렷했기 때문에 古人의 시에 차운할 일이 적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모인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만든 운각에 차운해야 실질적인 유희와
경쟁적 요소가 부가되므로 굳이 古人의 시에 차운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가능성도 크다.
결국 앞서 살펴본 추화시는 일반 창화시와 같이 차운의 유희성이 발현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다만 소식의 상황과 原詩의 상황이 같다는 점이 추화시의 창작 동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2) 和陶詩
소식은 그의 만년에 영남으로 유배를 받게 되는데 이 시기에 화도시의 집중적 창작이 이루어진다.
사실 이는 소식이 평소에도 도연명을 매우 좋아했던 것과 관계가 깊다.
도연명은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彭澤현령을 그만 두고 전원으로 돌아갔다.
더 나아가 전원으로 돌아간 뒤에는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며 정신적인 깨달음을 많이 얻었다.
그래서 도연명은 하나의 전형으로서 소식뿐만 아니라 많은 문인들에게도 추앙을 받았다.
문인들에게 도연명이란 속세를 벗어나 진정한 은거를 이루어낸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또한 소식은 평소 은거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지만 실천할 수 없었다.
그의 초월의지는 임금을 위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들을 구제함으로써 공명을 이루고 난 다음에
세속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초연하게 살고 싶다는 조건부의 소망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⁹³
►93)류종목柳種睦 <蘇軾詞硏究> 서울: 중문, 1993, p.187.
결국 정신적으로 괴로운 소식은 단순히 도연명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열렬히 그의 정신적인 경지를 사모하고 닮고자 하게 되었고 현실에서 귀향할 수 없었을 바에야
“和陶詩”를 지어 자기의 꿈을 투영하면서 자신의 정신적 경지를 시가로 승화하고자 했다.⁹⁴
소식은 身邊에 某種의 일을 당했을 때 도연명의 시중 그 경우에 맞는 시를 골라 창화하였다.⁹⁵
和陶詩는 소식이 정치적으로 좌절했을 때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에 이를 극복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⁹⁶
►94) 안희진, 앞의 논문, p.8.
►95) 진영희<동파의 정치생애와 문학과의 관계 시론:
<화도시>를 중심으로> 영남중국어문학회<中國語文學>vol.10, No.1, 1985, p.94.
►96) 金甫暻 앞의 논문, p.187.
시 창작에 있어 시적 발상의 대상을 직접 선택하였기에 화도시는 특별하게 여겨진다.
소식은 도연명과 정신적인 교유를 하며 위로를 받기 위해 화도시를 창작하였다.
도연명과 자신을 동일시하여⁹⁷ 그 상황에서
도연명과 같은 태도로 대처하며 정신적 위로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97) 조규백, <도연명에의 동일화양상과 도시의 창조적 수용 — 소식시의 한 단면>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大東文化硏究> vol.31, 1996, p.224.
그러나 이러한 창작 목적에는 왜 굳이 차운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시인은 시를 지어 슬픈 감정을 표출함으로써 자신의 근심을 달래는데 차운을 하면
정해진 운각으로 인해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펼치기에 제약이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곤궁에 빠진 시인이라면
현재의 슬픈 감정을 표출하는 데 집중을 하느라 운각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절망적인 상황에서 왜 굳이 차운을 한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 다음의 시를 본다.
蘇軾 <화도귀원전거륙수和陶歸園田居六首 도연명의 <귀원전거> 시에 화운하다>
절록삼월사일節錄三月四日 유백수산불적암游白水山佛迹岩 3월 4일에, 백수산의 불적암에서 노닐다가
목욕어탕천沐浴於湯泉 희발현폭지하晞髮懸瀑之下 호가이귀浩歌而歸
탕천에서 목욕을 한 뒤 폭포 아래에서 머리를 말리고 큰 소리로 노래하며 돌아갔다.
견여각항肩輿卻行 이여객언以與客言 불각지수북려지포상不覺至水北荔支浦上
가마를 타고 물러나 가며 손님과 이야기하는데, 어느새 물의 북쪽으로 여지포에 이르렀다.
만일총롱晩日蔥曨 죽음소연竹陰蕭然 시려자류류여검실의時荔子纍纍如芡實矣
석양은 밝게 비치고 대나무 그림자는 쓸쓸한데 때마침 여지는 여러 개가 꿰어져 있어 마치 가지연밥 같았다.
유부노년팔십오有父老年八十五 지이고여왈指以告余曰 85세인 어떤 노인이 가리키며 나에게 말하길
급시가식及是可食 공능휴주래유호公能攜酒來游乎
“지금은 먹기 좋은 때이니, 공께서는 술을 들고 와서 노닐 수 있겠습니까?”하니
의흔연허지意欣然許之 마음으로 기쁘게 그것을 허락하였다.
귀와기각歸臥旣覺 돌아와 자다가 이윽고 깨어났는데,
문아자과송연명聞兒子過誦淵明<귀원전거시륙수歸園田居詩六首> 내실차기운乃悉次其韻
아들인 過가 도연명의 <귀원전거> 시 6수를 외우는 것이 들려 이에 그 운에 전부 차운하였다.
시始 여재광능화연명余在廣陵和淵明 飮酒二十首 처음에 나는 광릉에서 도연명의 <음주> 시 20수에 화운하고
금복위차今復爲此 요당진화기시내이이要當盡和其詩乃已耳
지금 다시 이것(귀전원거)을 쓰는데, 그의 시에 모두 화운하고 나서야 그만둘 따름이다.
금서이기묘총대사삼요자今書以寄妙總大士參寥子
오늘 묘총대사인 참료자에게 시를 써서 부친다.
其六
석아재광릉昔我在廣陵 옛날에 내가 광릉에 있었을 제
창망시상맥悵望柴桑陌 자상의 두렁길을 슬프게 바라보았었는데
장음음주시長吟飮酒詩 <음주> 시를 길게 읊으며
파획일소적頗獲一笑適 자못 한 번 웃음의 만족을 얻었지.
소식은 그의 아들인 과過가 <歸園田居> 시를 외우는 것을 듣고는 도연명의 모든 시에 차운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이에 앞서 소식은 탕천에서 오며 일부러 큰 소리로 노래하며 자신의 슬픈 감정을 달래려했고
여지포에 갔더니 주위 풍경은 쓸쓸하게 보였다.
또한 술을 가져와 함께 노닐자는 노인의 제안을 받고는 기쁘게 동참하였다.
여기에서라도 만족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중 제5수에서는 과거에 <음주> 시를 읽으며 기쁨을 얻었음을 말하였다.
소식은 <음주> 시를 통해 긍정적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는 차운의 대상이 “도연명”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지만 “차운”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놀이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웰빙과 고요함의 상태에도 접근할 수 있도록 해 주는데
놀이를 통해 이완될 때 공감과 친밀감의 능력이 증진된다.⁹⁸고 한다.
소식은 도연명을 떠올리며 그의 심경에 공감하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놀이를 시도하며 위로를 얻었다.⁹⁹
►98) Charles E. Schaefer 엮음, 백지연 옮김 <성인을 위한 놀이치료> 서울: 북스힐 2011, p.18.
►99) 이러한 측면에서 앞서 소개한
<和李太白幷敘 이태백의 시에 화답하며 서문과 함께 쓰다>도 화도시와 같은 목적에서 지어진 것이다.
물론 평생에 걸쳐서 차운시를 창작했기에
그것이 하나의 시 창작 습관이 되어 화도시에 반영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식은 이미 수 없이 많은 차운시를 통해서 차운의 효과에 대해 파악하였다.
여기에서 적극적인 속성을 지닌 놀이의 특성¹⁰⁰이 드러난다.
►100) Charles E. Schaefer 엮음, 앞의 책, 2015, p.59.
즉 소식은 적극적으로 긍정적인 정서를 얻고자 한 것이다.
그는 슬프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운각에 몰입하여 놀이를 시도함으로써
잠시나마 슬픔을 잊고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차운시는 운각을 차례대로 따라야 하고 소식은 차운시를 잘 지었다.
힘겨운 과제가 수준 높은 실력과 결합하면
일상생활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심도 있는 참여와 몰입이 이루어진다.¹⁰¹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여한 없이 쓸 때 몰입을 하게 되고, 일이 마무리된 다음에야
자신이 한 체험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지난 일을 되돌아보며 행복을 느끼게 된다.¹⁰²
►101)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지음, 이희재 옮김 <몰입의 즐거움> 서울: 해냄, 1999,p.46.
►102) 위의 책, p.48 참조.
소식도 마찬가지로 도연명의 모든 시에 차운함으로써 절망적 현실에서 빠져나오는 데 도움을 받았다.
그렇다면 차운의 특성을 바탕으로 도연명과 화도시가 어떻게 위로를 주었는지 본다.
陶淵明 <지주止酒 술을 끊으며>
거지차성읍居止次城邑 사는 곳은 성읍에 가까워도
소요자한지逍遙自閑止 거닐며 한가롭게 산다네.
좌지고음하坐止高蔭下 앉기를 멈추는 곳은 높은 그늘 아래이고
보지필문리步止蓽門裏 걷기를 멈추는 곳은 사립문 안이라네.
호미지원규好味止園葵 좋은 맛은 동산의 푸성귀에서 그치고
대환지치자大歡止稚子 큰 기쁨은 어린 아이에게서 그치네.
평생부지주平生不止酒 평생에 술을 끊지 않았으니
지주정무희止酒情無喜 술을 끊으면 마음에 기쁨이 없을 것이라네.
모지불안침暮止不安寢 저물녘에 끊으면 편히 잠들지 못하고
신지불능기晨止不能起 아침에 끊으면 일어날 수 없다네.
일일욕지지日日欲止之 매일매일 술을 끊고자 하나
영위지불리營衛止不理 끊으면 혈의 작용이 다스려지지 않을 것이라네.
도지지불락徒知止不樂 다만 아는 것은 끊으면 즐겁지 않다는 것이며
미신지리기未信止利己 끊으면 나에게 이롭다고 믿지 않았네.
시각지위선始覺止爲善 끊어야 좋음을 이제야 깨달았으니
금조진지의今朝眞止矣 오늘 아침에야 진실로 끊었다네.
종차일지거從此一止去 지금부터 한 번 끊는다면
장지부상사將止扶桑涘 부상의 물가에서야 끊을 것이네.
청안지숙용淸顔止宿容 맑은 얼굴이 옛 얼굴에서 멈춘다면
해지천만사奚止千萬祀 어찌 천만년만 끊겠는가.¹⁰³
►103) 四部叢刊景宋巾箱本, 陶潛 撰, 湯漢 箋注 <箋注陶淵明集> 卷三.
蘇軾 <화도지주和陶止酒 도연명의 <술을 끊으며> 시에 화운하다>
정축세丁丑歲 여적해남予謫海南 자유역폄뢰주子由亦貶雷州
정축년에 나는 해남으로 유배를 당했는데 자유 또한 뇌주로 유배를 당했다.
5월11일五月十一日 상우어등相遇於藤 동행지뢰同行至雷 5
월 11일에 함께 등주에서 만나서는 뇌주까지 동행하였다.
유월십일일六月十一日 상별相別 도해渡海 6월 11일에 이별하고 바다를 건넜다.
여시병치신음余時病痔呻吟 자유역종석불매子由亦終夕不寐
나는 그때 치질에 걸려 끙끙거리며 신음하였는데 자유 또한 밤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인송연명시因誦淵明詩 권여지주勸余止酒 도연명의 시를 읊는 것으로 인하여 나에게 술을 끊기를 권했다.
내화원운乃和原韻 인이증별因以贈別 서기진지의庶幾眞止矣
이에 원래의 운에 화운하며 이 시로써 증별하였으니 진실로 술을 끊기를 바랄 따름이다.
1 시래여물서時來與物逝 때는 오고 만물은 가는데
2 로궁비아지路窮非我止 길이 궁하니 내가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네.
3 여자각의행與子各意行 너와 각각 마음대로 다니다가
4 동락백만리同落百蠻裏 함께 남방으로 떨어졌구나.
5 소연량별가蕭然兩別駕 쓸쓸하게도 두 대의 이별하는 수레는
6 각휴일치자各攜一穉子 각각 한 어린아이가 끌고 있다네.
7 자실유맹광子室有孟光 너의 집에는 맹광과 같은 아내가 있지만
8 아실유법희我室惟法喜 나의 집에는 불법으로 인한 기쁨만이 있구나.
9 상봉산곡간相逢山谷間 산골짜기에서 서로 만나
10 일월동와기一月同臥起 한 달 동안을 함께 누웠다가 일어났는데
11 망망해남북茫茫海南北 아득한 바다의 남북 쪽으로 있어도
12 조역족생리粗亦足生理 거친 밥 또한 살기에 족하다네.
13 권아사연명勸我師淵明 도연명을 스승으로 삼기를 나에게 권하니
14 력박차위기力薄且爲己 또한 나를 위한 것이지만 그럴 능력이 안 된다네.
15 미아좌배작微疴坐杯酌 작은 병 있어도 앉아서 술만 따르니
16 지주즉추의止酒則瘳矣 술을 끊으면 고쳐질 것이라네.
17 망도수미제望道雖未濟 길을 내다보는데 비록 건널 수는 없지만
18 은약견진사隱約見津涘 바닷가에서 만나기로 조용히 얘기했지.
19 종금동파실從今東坡室 오늘부터 동파의 집에서는
20 불립두강사不立杜康祀 두강의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지 않을 것이라네.
도연명의 原詩는 매 句마다 “止”를 사용한 시이다.
평생을 술로 보낸 도연명은 술을 끊으면 즐겁지 않을 것이라 여겨왔다.
그러나 술을 잠깐이나마 끊었으니 만약 맑은 얼굴이 지속된다면
천년만년도 끊을 수 있겠다면서 재치 있게 시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소성紹聖 4년(1097) 6월 11일,
소식은 바다를 건너 담주儋州로 가기 전에 소철과 만나 한 달 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는 평소 치질이나 각종 자질구레한 병을 많이 앓았고
이때도 역시 치질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소철과 떨어져야 할 상황이 다가왔다.
그러자 소철이 도연명의 <술을 끊으며> 시를 외우면서 소식에게 술을 끊기를 권한다.
이는 제13-14구에서 소철이 소식에게 도연명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소식은 소철이 시를 읊으며 이별시를 주기 때문에라도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술을 끊으려 한다.
도연명의 시는 해학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반면 소식 시는 슬픈 정서가 짙게 깔려있다.
폄적을 받은 처지에 소철과 이별하는 상황, 치질로 인한 신체적 고통이 더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에 소철은 도연명의 해학적인 시를 가져와 소식이 차운시를 지을 기회를 제공하였다.
차운시 창작이 근심을 달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식은 차운시를 짓는 데 집중하여 슬픈 감정을 완화시키거나 슬픔을 잊어보고자 하였다.
소철과 소식은 놀이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자신들을 위로하려고 했던 것이다.¹⁰⁴
►104) 소철은 소식의 시에 화답하여 <차운자첨화도공지주次韵子瞻和陶公止酒
자첨이 도연명의 <술을 끊으며> 시에 화운한 시에 차운하다> 시를 지었다.
또한 소식, 소철은 도연명과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여
같은 사건을 겪은 도연명으로부터 가까운 곳에서 위로를 받았다.
차운으로 형성된 동질감은 소식에게 긍정적인 정서를 마련해주어 슬픔을 완화하도록 도와주었다.
놀이의 특성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이다.
추화시 중에서도 화도시는 소식이 직접 상황에 맞추어 原詩를 골라서 차운을 한다는 점에서
다른 일반적 창화시 보다도 더욱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소식은 도연명의 시에 차운할 것을 제안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아우 소철의 경우에는 자신이 시를 보내면 화답해 주리라는 예상을 기본적으로 했던 것 같다.¹⁰⁵
이는 차운을 통해 놀이의 장을 마련하여 긍정적 정서를 얻기 위해서였다.
►105) <초별자유初別子由 아우와 막 작별하다>
아소지자유我少知子由 나는 어릴 적부터 자유를 알았거니와
천자화이청天資和而淸 타고난 자질이 온화하고 해맑으며
호학노익견好學老益堅 학문을 좋아함이 나이 들수록 더 굳건하고
표리점융명表里漸融明 외면과 내면이 점점 더 융화되고 명철하네.
개독위오제豈獨爲吾弟 그런 그가 어떻게 내 동생일 뿐이겠나?
요시현우생要是賢友生 요컨대 그는 나의 현명한 친구인데
불견륙칠년不見六七年 예닐곱 해 동안이나 못 보았으니
미언수여갱微言誰與賡 미묘한 말로 그 누구와 창화하겠나?
(······)
소철은 소식에게 아우이면서도 창화를 할 수 있는 벗이었다.(번역은 <정본완역소동파시집2> p.635 참조.)
陶淵明 <정운停雲 멈추어 선 구름>
정운停雲 사친우야思親友也 <멈추어 선 구름>은 친한 벗을 그리워하는 시다.
준담신료罇湛新醪 술통에 새로 빚은 막걸리가 괴어 있고
원렬초영園列初榮 뜰에는 갓 피어난 꽃이 늘어서 있는데
원언부종願言不從 탄식미금歎息彌襟 친구가 생각나도 만날 수 없어서 가슴에 탄식이 가득하다.
其一
애애정운靄靄停雲 어둑하게 멈추어 선 구름
몽몽시우濛濛時雨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
팔표동혼八表同昏 사방이 온통 어두컴컴해지고
평로이조平路伊阻 평탄한 길이 꽉 막혀버렸다.
정기동헌靜寄東軒 조용히 동쪽 창가에 기대어
춘료독무春醪獨撫 봄 막걸리를 혼자서 마신다.
량붕유막良朋悠邈 좋은 벗은 아득히 멀리 있어
소수연저搔首延佇 우두커니 서서 머리 긁적인다.¹⁰⁶
►106) 송용준 역 <도연명 시선> 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10, pp.157-158.
蘇軾 <화도정운사수병인和陶停雲四首幷引 도연명의 <멈추어 선 구름> 시 4수에 화답하며 서문과 함께 쓰다>
자립동이내풍우무허일自立冬以來風雨無虛日 입동 이래로 비바람이 없는 날이 없었으므로
해도단절海道斷絶 바닷길이 끊어져
부득자유서不得子由書 자유의 서신을 받을 수 없었다.
내화연명乃和淵明<정운停雲>시이기詩以寄 이에 도연명의 <멈추어 선 구름> 시에 화답하여 부친다.
其一
정운재공停雲在空 허공에 멈추어 선 구름
암기장우黯其將雨 어둡더니 비가 오려고 하네.
차아회인嗟我懷人 탄식하며 나는 그대를 그리워하는데
도수차조道修且阻 길은 길고 또 험하네.
권차구구眷此區區 구차하게 이를 돌아보며
부앙재무俯仰再撫 고개를 숙였다 드는 사이에도 다시 좇는다네.
량신과조良辰過鳥 좋은 때는 지나가는 새와 같아서
서불아저逝不我佇 가버리고는 나를 위해 멈추어주지 않는구나.
소철蘇轍 <화자첨차운도연명정운시병인和子瞻次韵陶淵明停雲詩幷引
도연명의 <멈추어 선 구름>에 차운한 자첨의 시에 화답하다>
정축십월丁丑十月 해도풍우海道風雨 담뢰우전불통儋雷郵傳不通
정축년 10월에 바닷길에 비바람이 치므로, 담주와 뇌주의 우편이 전해지지 않았는데
자첨형화도연명정운사장이치상사지의子瞻兄和陶淵明停雲四章以致相思之意 철역차운이보轍亦次韻以報
자첨 형이 도연명의 <멈추어 선 구름>에 화운함으로써
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르렀으니 나 또한 차운하여 보낸다.
其一
운과남명雲跨南溟 구름이 남쪽 바다를 넘어서
남북일우南北一雨 남북으로 온통 비가 내리네.
첨망비요瞻望匪遥 멀지 않은 곳을 바라보니
함정사조檻穽斯阻 함정으로 모두 막혔다네.
몽왕종지夢往從之 꿈속에서 가서 형님을 따르며
인수상무引手相撫 손을 뻗어 서로를 어루만지네.
소언미반笑言未半 웃으며 말하는 것 아직 반도 안 끝났는데
사아불저捨我不佇 나를 떠나고는 멈추어주지 않는구나.¹⁰⁷
►107) 蘇轍 著, 陳宏天, 高秀芳 點校 <蘇轍集(三)> 北京: 中華書局, 1999, pp.943-944.
먼저 도연명의 시의 소재인 “멈추어 선 구름(停雲)”은
먹구름은 하늘을 어둡게 만드는 존재로 당시 어지러운 사회현실을 비유하고 있다.
도연명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 자신을 알아주는 벗을 그리워하며 시를 지었다.
그리고 소식은 비바람 부는 날씨 때문에 소철에게 편지를 전해줄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상황이 도연명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소철에게 화도시를 보내자
소철은 소식의 마음을 알고는 소식을 그리워하는 시를 지어 화답했다.
소식은 소철에게 화도시를 지어 보내는데 이를 차운에 참여할 것을 제안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소철은 소식이 도연명의 시에 차운함으로써 그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소철은 역시 차운을 하여 소식에게 보냈으니 이는 소식의 제안에 응한 것이다.
둘은 도연명을 떠올리며 현재의 상황에 대한 위로를 받는다.
소식은 놀이를 통한 효과를 잘 이용하였던 것이다.
상대방이 소철이 아닌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소식은 도연명의 原詩와는 다른 모습으로 화도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는 적극적으로 놀이를 하는 과정에서 창조성이 발휘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¹⁰⁸
►108) 성인에게는 놀이가 창의성, 심신의 통합을 포함한 수많은 적응적 행동을 촉진한다.
(Charles E. Schaefer 엮음, 앞의 책, 2011, p.14.)
陶淵明 <증양장사병인贈羊長史幷引 양장사에게 서문과 함께 써서 주다>
좌군양장사左軍羊長史 함사진천銜使秦川 작차여지作此與之
좌장군의 양장사가 명령을 받아 진천(長安)으로 가게 되었으니, 이 시를 지어 그에게 준다.
우생삼계후愚生三季後 어리석은 나는 삼대三代 뒤에 태어나
개연념황우慨然念黃虞 감개하며 황제와 우순을 생각한다네.
득지천재외得知千載外 천년 전의 일을 알 수 있는 것은
정뢰고인서正賴古人書 바로 고인의 글에 의지해서라네.
현성류여적賢聖留餘跡 현인과 성인이 남긴 자취는
사사재중도事事在中都 일마다 중도에 있구나.
기망유심목豈忘遊心目 어찌 마음과 눈으로 노니는 것을 잊었겠는가
관하불가유關河不可踰 관문을 넘을 수가 없다네.
구역보이일九域甫已一 구주가 이미 하나가 되었으니
서장리주여逝將理舟輿 배와 수레를 장만하여 장차 갈 것이네.
문군당선매聞君當先邁 그대가 먼저 간다고 들었어도
부아불획구負痾不獲俱 병들어 함께 할 수 없으니
로약경상산路若經商山 가는 길에 만약 상산을 지난다면
위아소주저爲我少躊躇 나를 위해 조금이나마 머무르면서
다사기여록多謝綺與甪 기리계와 녹리선생에게
정상금하여精爽今何如 지금은 정신이 어떠하신지 안부를 여쭤주시오.
자지수부채紫芝誰復採 자줏빛 영지는 누가 다시 캐는가?
심곡구응무深谷久應蕪 깊은 계곡은 아마도 오랫동안 황폐했을 것인데.
사마무세환駟馬無貰患 사마를 타는 이는 근심을 면할 수 없지만
빈천유교오貧賤有交娛 가난한 이는 사귐의 즐거움이 있다네.
청요결심곡淸謠結心曲 맑은 노랫가락은 마음에 맺었지만
인괴운견소人乖運見疎 사람과 어긋나고 운수와 멀어졌다네.
옹회루대하擁懷累代下 여러 세대 뒤에도 이런 마음 품고 있나니
언진의불서言盡意不舒 말이 다해도 마음 속 뜻은 펼 수 없구나.¹⁰⁹
►109) <注陶淵明集> 卷二.
蘇軾 <화도증양장사병인和陶贈羊長史幷引 도연명의 <양장사에게 주다> 시에 화답하여 서문과 함께 쓰다>
득정가회정로서得鄭嘉會靖老書 욕어해박재서천여권견차欲於海舶載書千餘卷見借
정가회의 글을 받았는데 배에 책 천여 권을 실어 나에게 빌려주고자 했다.
인독연명<증양장사>因讀淵明<贈羊長史>시운詩云 도연명의 <양장사에게 주다> 시에서 말한
우생삼계후愚生三季後 “어리석은 나는 삼대三代뒤에 태어나,
개연념황우慨然念黃虞 감개하며 황제와 우순을 생각한다네.
득지천재사得知千載事¹¹⁰ 천년 전의 일을 알 수 있는 것은,
상뢰고인서上¹¹¹賴古人書 바로 고인의 글에 의지해서라네.”를 읽었기에
차기운이사정군次其韻以謝鄭君 그 운에 차운함으로써 정가회에게 감사한다.
►110) 도연명의 시는 事가 아닌 外이다.
►111) 도연명의 시는 上이 아닌 正이다
아비황보밀我非皇甫謐 나는 황보밀이 아닌데도
문인여지우門人如摯虞 문하생들은 지우와 같아서
부지량치주不持兩鴟酒 술 단지 두 개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긍차일거서肯借一車書 기꺼이 책을 수레에 가득 채워 빌려주어
욕령해외사欲令海外士 바다 건너의 선비로 하여금
관경사홍도觀經似鴻都 경서를 보게 해 주었으니 홍도문에 있는 것과 같구나.
결발사문사結髮事文史 상투 틀고서 글을 쓴 지가
부앙륙십유俯仰六十踰 잠깐 사이에 60년이 넘었는데
노마불내방老馬不耐放 늙은 말은 버려짐을 못 견디고
장명사복여長鳴思服輿 길게 울며 수레를 그리워한다네.
고지근진재故知根塵在 육근과 육진이 존재함을 아는 고로
미면병약구未免病藥俱 병을 면치 못하면 약을 구비해야 한다네.
념군천리족念君千里足 그대의 천리마를 생각해보니
력괴유지주曆塊猶踟躕 빠르게 달릴 수 있음에도 머뭇거렸지만
호학진백업好學眞伯業 학문을 좋아하는 것은 진실로 원백업과 같고
비견가상여比肩可相如 사마상여에게 비견할 만하다네.
차서구이숙此書久已熟 이 책은 (그대에게는) 오래도록 이미 익숙하지만
구아금황무救我今荒蕪 황무지 같은 지금의 나를 구해주었는데
고참상유박顧慚桑楡迫 늘그막에 핍박받아 과거를 돌아보니 부끄럽고
구염시서오久厭詩書娛 시와 글의 즐거움은 싫어진 지 오래라네.
주부병미능奏賦病未能 글 올리는 것은 병으로 쓰지 못하고
초현로갱소草玄老更疎 태현경 짓는 것은 늙었으니 뜸해졌지만
유당거양묵猶當距楊墨 오히려 응당 양주와 묵적을 막아
초욕징형서稍欲懲荊舒 조금이나마 남방의 형서를 징계하려하네.
도연명은 양장사에게 증별시를 썼다.
양장사는 북벌에 성공한 류유劉裕를 축하하러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연명은 시에서 과거 황제와 순임금의 태평성대를 생각하고 성인들이 있었던 중원지역을 그리워한다.
왕조교체기로서 지금은 너무나 혼란스러운 시기이며
자신이 세상과 어긋나 쓰임을 받지 못함에 대해 탄식을 하였다.
그리고 소식은 이 중 첫 4구의 내용을 인용하여 화도시를 쓴다.
담주에 머무르며 마음껏 책을 볼 수 없었는데 혜주에서 관직을 하고 있었던
정가회(字 정로靖老)가 책을 보내주어 감사하다고 시를 지어 보낸 것이다.
60년을 살았지만 결국 먼 곳으로 유배당하고 몸은 늙어 쇠약해졌다.
그렇지만 친구 정가회는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많이 읽고
그 책들을 자신에게 주었으니 열심히 읽겠다며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
소식은 도연명의 시 일부분에서 착안하여 화도시를 지었다.
이는 화도시가 소식에게 하나의 놀이였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놀이 안에서는 자유로운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¹¹²
►112) 로제 카이와 지음, 앞의 책, p.14 참조.
소식은 도연명의 송별시를 정가회에 대한 감사편지로 사용했다.
도연명의 原詩에서의 첫 4구는 태평성대를 말하기 위해 시의 발단으로 삼은 것인 반면
소식은 정가회가 보내준 책을 말하기 위해 그 구절을 시의 발단으로 삼았다.
또한 原詩에서는 왕조가 바뀌게 되어 혼란한 사회에 대한 개탄을 서술했다면
화도시에서는 상대방을 칭송하고 감사를 표현했다.
그는 도연명의 原詩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았으니
이는 놀이에서의 창조성이 발휘된 결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추화시는 화도시와 그 이전의 추화시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는 原詩 작자의 상황과 소식의 상황이 같다는 점이 있었다.
소식은 여기에서도 차운시를 놀이로 삼은 모습이 나타났다.
화도시에서는 놀이의 장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창조성을 발휘하여 시를 지었고
그 이전의 추화시에서는 일반 창화시와 같이 즐거움을 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또한 原詩 작자가 古人인지의 여부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않았다.
“차운” 자체로서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컸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고는 기존 연구에서 “도연명”을 강조한 것과 달리 “차운”에 무게를 두고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는 차운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놀이의 속성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소식은 곤궁한 상황에서도 굳이 “차운”을 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제4장 소식 차운시의 한계
차운시는 송대에 매우 성행하여 문인들이 보편적으로 짓는 시의 형식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의 비평가들은 차운시의 폐해를 비판하였고
그 중에서도 차운시를 많이 지었던 소식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하였다.
金의 왕약허王若虛는
“비록 재주가 지극히 교묘하여 한 시대를 움직였으나 천연스러움을 해친 바가 많다.
소식에게 차운이 없다면 그 거리가 옛 사람과 어찌 멀겠는가”¹¹³라 하였고
淸의 마성익馬星翼은
“차운시수동파대재次韻詩雖東坡大才 차운시는 비록 소동파가 큰 재주가 있었지만
역유주박불온처亦有湊泊不穩處 또한 억지로 끌어 모아 타당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¹¹⁴
라고 하는 등 소식 차운시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113) 원문은 본고 p.2의 주석 4번 참조.
►114)淸刻本, 馬星翼 撰 <東泉詩話> 卷二.
차운시는 정해진 운각을 사용하는 것이 시 창작의 조건이다.
그러나 이 운각은 시인에게 시를 마음대로 쓸 수 없게 하는 제약이 되어
결국 차운시라는 형식이 가져오는 한계가 나타나게 된다.¹¹⁵
►115) 실패를 낳는 두 번째 요인은 작품의 형식으로 다른 무엇보다도 장르를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다.
이것도 사실 하나의 범주로 보기는 어렵지만 역사적 실제 사례들을 통해 검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어떻든 어떤 작가들은 기꺼이 자신을 특정 범주의 작가로 자처한다.
한데 어떤 부적합한 장르를 선택하거나 특히 선택한 주제에 부적합한 장르를 선택한 경우
역시 좋지 않은 결과에 이를 위험성이 있다.
(피에르 바야르 저, 김병욱 옮김 <망친 책,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서울:여름언덕, 2013, p.33.)
피에르 바야르는 실패한 작품과 관련 있는 요소 중 하나로 작품의 형식을 들고 있다.
그는 형식이 이미 한계를 가진 경우 위대한 작가들도 실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식의 차운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여기서는 소식이 차운시를 잘 짓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대량의 차운시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다는 데에서 논의를 출발하는 것이다.
소식과 같은 대시인도 모든 차운시 작품을 잘 쓰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대량의 차운시를 창작한 만큼 한계가 드러날 개연성이 더 많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차운시의 특성으로 인한 한계점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제1절 부자연스러운 시상 전개
차운시는 原詩의 운각을 그대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조건이다.
이 조건은 차운시의 作者를 구속한다.
결국 시인은 운각을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기존 시의 운각에 지배당하는 상황인 만큼 억지로 거기에 맞는
표현을 만들어야 했으므로 왕왕 부자연스럽고 조화롭지 못한 시구를 낳기도 한다.¹¹⁶
즉 부자연스러운 시상이 전개되는 것이다.
►116)김보경 <시가창작詩歌創作에 있어서 차운次韻의 효과效果와 의의意義에 대하여
— 소식蘇軾의 시가詩歌를 중심으로> 중국어문연구회<中國語文論叢>vol.45, 2010, p.49.
이는 句數가 많은 古詩의 경우에 더욱 심해지는데 그만큼 지켜야 할 운각이 많기 때문이다.
소식은 시의 내용을 희생시킴으로써 정해진 운각을 사용하는 차운시의 규칙을 준수하였다.
그러나 시의 내용이 자연스럽지 못함은 분명 차운시의 한계였다.
이 부분은 淸代 학자인 기윤紀昀의 평가에 기대어 논의를 진행한다.
紀昀은 소식 詩 전체에 대하여 비평을 하였다.
歷代로 소식의 시에 대하여 비평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대부분의 비평가들과 달리 기윤은 소식의 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그의 비평을 통해 소식 詩의 문제점을 유추할 수 있었다.
특히 차운시의 경우 “운각에 끌려 다녔다”는 구체적인 비판을 한 시가 있다.
이러한 비판은 비평가의 지위와 학식의 수준이 보장되지 않으면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알기 위해 다음의 글을 본다.
건륭신묘팔월乾隆辛卯八月 기공자발운紀公自跋云 건륭 신묘년(1771) 8월. 기윤은 자신의 발문에서 이르기를
여점론시집시어병술지오월余點論是集始於丙戌之五月 초이묵필初以墨筆
“내가 이 시집을 평가하기를 병술년(1766) 오월부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검은색 붓으로 하고
재열개용주필삼열再閲改用朱筆三閱 우개용자필又改用紫筆
다시 볼 때는 붉은색 붓을 사용하여 고치고 세 번째 볼 때는 자줏빛 붓을 사용하여 고쳤으니
교호종횡交互縱橫 체상도을遞相塗乙 태모호불가변식殆模糊不可辨識
종횡으로 교차하며 번갈아가며 글자가 지워져서 거의 모호해져 변별하여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므로
우붕전록友朋傳錄 각이의거취지各以意去取之
친구가 옮겨 베끼면서 각각 뜻을 가지고 글자를 버리거나 남겨두었다.
속어문인갈편수정화처득초백선생수비본續於門人葛編修正華處得初白先生手批本
기윤의 문인인 편수관 갈정화가 있는 곳에서 얻은 초백선생(사신행)의 수비본에 이어서 썼고
우보사어하극지중又補寫於罅隙之中 또한 틈새에도 보충해서 썼으니
익교갈난별益轇轕難別 더욱 얽혀서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금세륙월자오로목제귀今歲六月自烏魯木齊歸 장주다가長晝多暇 인선차정본因繕此淨本 이편성람以便省覽
금년 6월에 우루무치에서 돌아왔는데 낮은 길고 짬이 많았으니 이 깔끔한 책에 베껴서 편하게 살펴보았다.
개지시오열의葢至是五閱矣 이에 이르러 5번 본 셈이 되었다”고 하였다.¹¹⁷
►117)淸别下齋叢書本, 錢泰吉 撰 <曝書雜記> 卷一.
기윤은 병술년(1766)에 처음 시작하여 신묘년(1771)까지 5년 동안 소식 시를 평가하였다.
또한 검은색 붓, 붉은색 붓, 자줏빛 붓을 사용하여 3차례를 검열하고 사신행의 수비본에 보충해서 쓰고
다시 깔끔하게 베껴서 살펴보면서 고치기를 약 5차례 하였다.
이를 통해 그가 매우 공을 들여 소식 시를 평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고는 기윤의 지적을 바탕으로 운각으로 인해 시상이 부자연스럽게 전개되는 시를 짚어본다.¹¹⁸
►118) 이와 관련하여 서미추徐美秋는 그의 논문 <기윤평점시가연구紀昀評點詩歌硏究>
(復旦大學 博士學位論文 2009, p.110.)에서 기윤이 운각의 문제를 지적한 소식의 시
<교태박견화복차운답지喬太博見和復次韻答之 태상박사 교씨가 나의 시에 화답해 왔기에 다시 차운하여
그의 시에 화답한다>를 분석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논문에서는 기윤이 소식 시의 내용과 표현기법 등을 주로 분석하는데
중점을 두었고 본고와 같이 운각의 한계를 짚은 것은 1首에 불과하다.
蘇軾 <차운서요문기설무저천次韻舒堯文祈雪霧豬泉
서요문이 무저천에서 눈을 내려달라는 제사를 드린 시에 차운하다>
1 장소사의일촌복長笑蛇醫一寸腹 우습게도 사의의 한 치 배로
2 함빙토박하시족 銜冰吐雹何時足 물 마셔 우박으로 토해봤자 어느 세월에 충분하겠는가.
3 창아무죄역가련蒼鵝無罪亦可憐 푸른 거위는 죄가 없으니 또한 불쌍하여라
4 참경횡반불감곡斬頸橫盤不敢哭 목 베어 쟁반에 가로로 놓았으니 감히 울 수도 없다네.
5 개지천하유저룡豈知泉下有豬龍 어찌 샘 바닥에 저룡이 있어
6 와침뇌거답음축臥枕雷車踏陰軸 누워 우레신의 수레를 베고 지축을 밟는 줄을 알겠나.
7 전년태수위한청前年太守爲旱請 전년의 태수께서는 가뭄 때문에 도움을 빌었는데
8 우점수인여살숙雨點隨人如撒菽 빗방울은 사람을 따라 후두둑 콩을 뿌린 듯
9 태수귀국룡귀천太守歸國龍歸泉 태수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용이 샘으로 돌아가도
10 지금인영기원록至今人詠淇園綠 지금까지 사람들은 기수淇水 동산의 푸른 대나무를 노래한다네.
11 아금우복리차한我今又復罹此旱 나는 오늘 또 다시 이 가뭄을 인하여 근심하나니
12 늠름피민재구독凜凜疲民在溝瀆 두려워하며 지친 백성들이 죽어 도랑에 버려졌기 때문이라네.
13 각심구적고신천却尋舊跡叩神泉 옛 흔적을 찾아 신의 샘물을 두드리는데
14 좌객잉휴왕자연坐客仍攜王子淵 앉아있는 객은 여전히 왕자연을 이끈다네.
15 간초중화락직송看草中和樂職頌 풀 보며 <중화>와 <낙직>을 부르고
16 신성묘어위화전新聲妙語慰華顚 새로운 소리와 기묘한 말로 흰 머리 늙은이를 위로하네.
17 효래천상동풍급曉來泉上東風急 새벽 샘물가에 동풍이 급히 불어오니
18 수상빙주로교읍須上冰珠老蛟泣 늙은 교인蛟人이 울어 수염에는 얼음 구슬이 맺혔다네.
19 괴사욕핍룡비기怪詞欲逼龍飛起 괴이한 말로 용을 핍박하여 날게 하려하지만
20 험운불량오소급險韻不量吾所及 험운이라 내가 미칠 바를 모르겠네.
21 항간적설후매우行看積雪厚埋牛 장차 소가 묻힐 정도로 두껍에 쌓인 눈을 볼 터인데
22 수여춘공흔백칩誰與春工掀百蟄 누가 봄의 재주꾼과 더불어 겨울잠을 자는 온갖 짐승을 깨울 것인가.
23 차시환부차군시此時還復借君詩 지금 돌아와서 다시 그대의 시를 빌리는데
24 여력태주잉관립餘力汰輈仍貫笠 남는 힘은 끌채를 지나 또한 수레 덮개를 뚫었다네.
25 휘호락지물언피揮毫落紙勿言疲 붓 휘둘러 종이에 쓰니 지쳤다고 하지 마시오
26 경룡재기진실시驚龍再起震失匙 놀란 용이 다시 일어나 우레를 내면 숟가락을 떨어뜨릴 것이니.
이 시는 총 26句의 고체시이다.
장편의 詩에 차운을 한다면 시상을 전개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위의 시도 마찬가지이다.
소식의 시로 보아 原詩의 작자인 서요문의 시에서
가뭄이 들어 눈이 오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드렸음을 알 수 있다.
서요문은 서주교수徐州敎授로서 나라의 우환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다.
이때는 12월이었고 겨울 가뭄을 해소하기 위해서 서요문은 기설제祈雪祭를 드리게 되었다.
徐州太守였던 소식은 祈雪祭를 주제로 삼아 그것과 관련된 전고들을 다수 인용하여 차운시를 전개한다.
제1-6구에서는 기우제祈雨祭와 관련한 전고들이 등장한다.
먼저 사의蛇醫에 대한 전고는 蛇醫를 독 안에 넣고 10세 이하의 어린아이들이 푸른 대나무로 독을 치면
비가 내린다는 내용이고 함빙토박銜冰吐雹는 전설 속 벌레인 석척蜥蜴 물을 마시면 우박으로 토해내는 내용이며
거위를 참경斬頸하는 것은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거위를 바친다는 전고이다.
또한 저룡豬龍은 암컷 돼지가 나왔다 들어갔기에 저룡추豬龍湫라고 불리는 연못에서
당唐 천복天復 연간에 가뭄이 들어 수재守宰가 제사를 지내 비가 내렸다는 전고를 인용한 것이다.
제7-12구에서는 소식 이전의 태수였던 부흠지傅欽之가 무저천霧豬泉에 제사를 드렸던 사실과
가뭄으로 죽어 가는 백성들을 위해 걱정하는 소식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제13-16구에서는 詩文에 능했던 왕자연처럼 서요문이 原詩에서
백성들을 걱정하며 눈이 내리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시로 잘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제17-22구에서는 봄바람이 불며 교인鮫人이 눈물을 흘려
주인의 쟁반에 가득 채워준 전고를 비추어볼 때 비나 눈이 내릴 조짐이 보이는 것 같다.
또한 서요문의 시에서 험운險韻을 사용하여 소식 자신이 지은 차운시는
그것을 따라갈 수 없다고 하면서 장차 눈이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4구에서는 餘力임에도 불구하고 화살이 끌채를 지나 수레덮개를 뚫었다는 전고를 인용하여
서요문이 餘力으로 써도 詩가 너무 뛰어난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용이 일어나자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리며
큰 우레 소리가 날 만큼 서요문의 詩가 뛰어나다고 거듭 칭찬하고 있다.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句 | 내용 |
1-6 | 기우제와 관련한 전고 서술 |
7-10 | 이전 태수의 성공적인 기우제 |
11-12 | 가뭄으로 인한 소식의 근심 |
13-16 | 서요문의 原詩 칭찬 |
17-18 | 비 또는 눈이 내릴 조짐이 보임 |
19-20 | 서요문의 原詩 칭찬 |
21-22 | 비 또는 눈이 많이 내릴 조짐이 보임 |
23-26 | 서요문의 原詩 칭찬 |
기윤은 이 시에 대하여
“다위운각소견多爲韻脚所牽 많은 부분이 운각에 끌려 다녀
불심자여不甚自如 그다지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지적하였다.¹¹⁹
같은 내용이 여러 번 반복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119)증조장曾棗莊 증도曾濤 編<蘇詩彙評(二)> 臺北: 文史哲出版社印行, 1998, p.743.)
서요문의 原詩를 칭찬하며 이로 인해 비 또는 눈이 내릴 조짐이 보인다는 내용이 등장했다면
그 다음에는 새로운 내용이 이어지면서 시가 마무리되어야 한다.
그러나 제19-20구에는 서요문이 험운으로 시를 잘 썼다며 그의 시를 칭찬하는 내용이 또 다시 등장한다.
제21-22구도 장차 눈이 내린다는 내용이 나오므로 반복되는 부분이 있다.
제23-26구도 또 다시 原詩에 대한 칭찬을 하고 있어 흐름상 어색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더 있다.
제20구에서 험운이기 때문에 자신이 原詩만큼 잘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한 부분이다.
이는 단순히 서요문이 시를 잘 썼고 자신의 시에 대한 겸손을 표현하는 내용에서 더 나아가
험운으로 시를 창작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소식도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뛰어난 필력을 지닌 시인도 때로는 운각의 구속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原詩가 소식 자신이 쓴 시일 때도 이러한 문제가 나타난다.
소식은 原詩에서 못 다한 말을 자화시를 통해 다시 전했는데 이 과정에서 부자연스러운 내용이 보인다.
蘇軾 <차전운재송주정유次前韻再送周正孺 앞의 운에 차운하여 주정유를 다시 전송하며>
1 동천득망낭東川得望郎 동천은 낭중을 얻었으니
2 좌여서쟁중坐與西爭重 서천과 중요함을 다투리.
3 고풍경석실高風傾石室 고고한 풍모는 석실을 기울게 하고
4 구학비문총舊學鄙文冢¹²⁰ 옛 학문인 문총을 낮게 여기네.
►120) [公自註] 류태劉蜕<문총명文冢銘> 재재주在梓州
5 촉인안사군蜀人安使君 촉지방 사람들은 사군이 편안하다 여기며
6 소지야불용所至野不聳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도 두려워하지 않으리.
7 죽마영세후竹馬迎細侯 대나무말 타고 곽급을 맞아주고
8 대전송류총大錢送劉寵 큰 돈 (한 장)으로 유총을 보내게 되리.
9 요지구계로遙知句溪路 멀리서도 아나니 구계로에서
10 노치상부옹老稚相扶擁 늙은이와 어린아이는 서로 이끌어 줄 것이고
11 간화고총사看畫古叢祠 숲 속의 옛 사당에서 그림을 볼 때
12 백괴조유공百怪朝幽拱 온갖 귀신들이 조회하며 은밀히 절하리.
13 우두여두률牛頭與兜率 우두사와 도솔사의
14 운목울퇴농雲木蔚堆壟 구름 높은 나무는 언덕에 무성할 것이고
15 취향추구유醉鄕追舊游 취향에서 옛 친구를 따라 노닐며
16 필진가여용筆陣賈餘勇 필진은 남은 용기를 팔 만하리.
17 료장시주락聊將詩酒樂 그런대로 시와 술로 즐기며
18 일소부서용一掃簿書冗 번잡한 장부를 한 번에 쓸어버리고
19 서풍취호구西風吹好句 서풍은 좋은 구절을 불어오니
20 주옥본무종珠玉本無踵 옥구슬은 본래 자취가 없다네.
이 시는 소식의 시
<송주정유지동천送周正孺知東川 동천지주로 가는 주정유를 전송하며>¹²¹에 이어 지은 자화시이다.
►121) <送周正孺知東川 동천지주로 가는 주정유를 전송하며>는 주정유가 동천으로 가게 된 일,
신하 또는 인재로서 그의 청렴한 모습을 말하며, 소식은 그러한 그를 따르겠다는 내용이다.
즉 주정유의 현재의 모습에 대해 칭송하였다.
그래서 소식은 자화시를 지어 앞으로 부임하게 될 동천에서의 모습을 상상하여
자신이 미처 다 말하지 못한 내용을 전달한 것이다.
주정유의 고향은 四川인데 조정에서 관직을 맡다가 東川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즉 주정유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知州를 맡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소식은 그를 위해 송별시를 짓는데 한 편으로는 부족했는지 위의 시를 다시 써서 그에게 전한다.
소식은 동천에서의 주정유의 모습을 상상한다.
제1-6구는 고공랑중考功郞中이었던 주정유가 동천으로 가게 되었으니
주정유의 고고한 기풍과 뛰어난 학식으로 석실이 기울어지고 문총은 경시 받을 것이라 한다.
또한 그 지역의 사람들이 주정유 덕분에 태평성대를 누릴 것이라고 한다.
제7-8구는 동천의 어린이들이 주정유를 맞아주고
늙은이들은 청렴하게 지주를 맡은 그를 아쉬워하며 떠나보낼 것이라고 한다.
제9-12구는 태평성대가 되어 사람들이 서로 돕고 귀신들도
그에게 절을 할 만큼 그 지역을 잘 다스릴 것이라 한다.
제13-20구는 고향에서 옛 친구와 노닐며 좋은 시를 지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기윤은 이 시에 대하여
“견어운각牽於韻脚 다부자연多不自然 운각에 끌려 다녀 많은 부분이 자연스럽지 않다.”¹²²고 평가하였다.
►122) <蘇詩彙評 3> p.1291.
먼저 이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정유가 동천에 가면 이렇게 될 것이라는 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¹²³
►123) 詩가 동천에서의 일을 말한다는 단서는 다음과 같다.
句 | 단서 | 관련 설명 |
1 | 東川, 西川 | 四川의 東西部를 말함 |
3 | 石室 | <蜀志> 성의 남쪽에 있음 |
4 | 文冢 | 소식의 自註: 류태劉蛻의 <文冢銘>이 있는 곳 |
5 | 蜀人 | 지금의 四川 |
9 | 句溪路 | 梓州 관할의 中江縣 서쪽 |
13 | 牛頭, 兜率 | 梓州에 있는 절 이름 |
15 | 舊游 | 고향에서 놀던 옛 친구 |
그래서 제7-10구에서 어린아이와 늙은이들이 태평성대를 누리며 서로 돕는다고 한 것이다.
문제는 제11-12구의 내용이다.
주정유가 고을을 잘 다스린 나머지 온갖 귀신들까지 그에게 절할 것이라는 그의 의도는 알 수 있지만
시상 전개상 “숲 속의 옛 사당”과 “그림”이 갑자기 나오면서 귀신들의 모습이 등장하는 내용이 흐름에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다.
또한 제13-14구에서 동천에 있는 절이 나오면서 언덕 위에 울창한 나무가 구름 높이 솟아 있는 내용도
주정유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에서 쓴 내용인지 알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시는 계속 주정유에 대한 칭송이 이어지는데 나무가 울창한 모습이 나오는 것이 의구심을 들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를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제11-14구의 내용은 분명 문맥이 원활하게 흐르지 않았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운각의 제약이 차운시를 창작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박학다식한 소식도 운각 때문에 고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본 차운시 작품 이외에 시의 제목에 “용기운用其韻”이라고 쓴 작품이 있다.
차운시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실제 소식의 창작 습관상 차운일 것으로 여겨진다.
이 또한 운각의 제약을 받아 시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蘇軾 <태작회중우풍시迨作淮中遇風詩 희용기운戱用其韻
(태迨가 <회중우풍시淮中遇風詩회수에서 바람을 만나다> 시를 지었는데 장난삼아 그의 운을 사용하여 짓다>
1 아시여병기我詩如病驥 내 시는 마치 병든 준마가
2 비명향쇠초悲鳴向衰草 시든 풀을 향해 구슬프게 우는 것과 같다네.
3 유아진기자有兒眞驥子 우리 아들은 진짜 천리마라
4 일분군마도一噴群馬倒 한 번 뿜어내면 뭇 말들이 쓰러진다네.
5 양기물음아養氣勿吟哦 기운을 길렀으면 자질구레하게 퇴고하지는 말고
6 성명기태조聲名忌太早 너무 일찍 이름이 나는 것은 삼가야 한다네.
7 풍도차필력風濤借筆力 바람과 큰 물결에 필력을 빌렸으니
8 세축고운소勢逐孤雲掃 기세는 외로운 구름을 쫓아내어 쓸어버렸다네.
9 하여도가아何如陶家兒 도연명 집안 아이들이
10 요사멱리조繞舍覓梨棗 집안을 돌며 배와 대추를 찾던 것에 비해 어떤가?
11 군간압강운君看押强韻 그대 보시게나, 험운을 쓰는 것이
12 이승교여도已勝郊與島 이미 맹교나 가도보다 앞선 것을
소식의 아들인 소태蘇迨가 어느 날
<회중우풍시淮中遇風詩>를 지었는데 소식은 소태의 운을 사용하여 시를 지었다.
소식은 아들의 시를 병든 준마와 같은 자신의 시와 비교해 천리마가 기세를 내뿜자
뭇 말들이 그 기세에 압도당한다며 아들의 시를 칭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같이 총명하여 박해를 받을까봐¹²⁴걱정하는 아버지로서의 모습이 나타난다.
►124) 소식은 이후 <세아희작洗兒戲作>(<蘇軾詩集> 卷四十七, p.2535.) 시에서
인개양자망총명人皆養子望聰明 사람들은 모두 자식이 총명하기를 바라지만
아피총명오일생我被聰明誤一生 나는 총명으로 일생을 그르쳤다네.
유원해아우차로惟願孩兒愚且魯 다만 원하는 것은 아이들이 어리석고 노둔하여
무재무난도공경無災無難到公卿 재앙 없이 어려움 없이 공경에 이르는 것이라네. 라고 하였다.
이러한 걱정은 모진 풍파를 겪은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진정으로 할 수 있는 말이다.
소식은 늘 이러한 걱정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식은 아들이 시를 쓴 것이 기특하였고 도연명의 아들도 자신의 아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험운[强韻]을 가지고 쓴 시는 가난하고 궁상맞은 맹교나 가도의 시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기윤紀昀은 이 시에 대한 평으로
전후개작예사前後皆作譽詞 “앞뒤로는 모두 칭찬하는 말을 지었는데
이이양기이구횡삽규계어기중而以養氣二句橫揷規戒於其中
‘양기養氣’의 두 구는 그 가운데 경계하는 말을 삽입한 것이므로
맥락도불상관脈絡都不相貫 맥락이 모두 서로 관통하지 않는데
차역견어운각고야此亦牽於韻脚故也 이 또한 운각에 끌려 다녔기 때문이다.”¹²⁵
►125)(<蘇詩彙評(三)> p.1136.)라고 하며 운자의 제약 때문에 내용이 원활하게 이어지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소식은 전체적으로 시를 쓴 아들을 칭찬하고 있다.
그런데 제5구와 제6구에서는 일찍이 총명하여 인생의 고난을 많이 겪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여 아들이 그러한 삶을 살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아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기윤의 평가처럼 문맥상 자연스럽지 않다.
앞부분에는 칭찬이 나오다가 후반부에서 약간의 경계가 나오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마지막 두 구이다.
소식은 아들이 맹교나 가도 같은 大詩人보다도 험운을 잘 사용했다고 칭찬하였다.
이는 험운을 사용하여 시를 짓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소식의 언급을 통하여 운각의 제약이 시 창작을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대문호인 소식과 같은 문인도 모든 작품에서 시상을 완벽하게 전개하지는 못했다.
차운시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정해진 운각을 사용하였지만
그것은 시인을 구속하여 부자연스러운 내용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약허王若虛도 이러한 점을 지적하여 소식이 차운시를 쓰지 않았더라면
시를 더욱 잘 쓸 수 있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한 것이었다.
이는 차운시의 형식이 가져오는 한계이다.
운각의 제약으로 인해 분명 시의 내용이 원활하게 흐르지 않은 것이다.
제2절 운각의 교체
운각의 교체는 原詩에서 정해진 운각 대신 다른 운각으로 바꾸어 차운시를 지은 경우를 말한다.
시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하기 위해서 운각을 바꾼 것이다.
그런데 “운각의 교체”는 앞 절의 상황과는 반대의 모습이다.
앞에서 다룬 “부자연스러운 시상 전개”가 정해진 운각을 지켜 사용하기 위해 시의 내용을 희생한 것이라면
“운각의 교체”는 시의 자연스러운 내용을 위해 차운시의 규칙을 어기고 운각을 희생한 것이다.
소식은 운각을 교체할 때 같은 韻部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시상에 적합한 글자를 골라 썼다.
그는 차운시의 규칙을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해진 운각을 사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역시 차운시의 한계로 지목될 수 있다.
이는 본고에서 저본으로 삼은 왕문고王文誥의 <蘇軾詩集>을 기준으로 原詩와 비교하여 살펴본다.
蘇轍 <자첨견허려산징니연子瞻見許驪山澄泥硯 자첨이 여산의 징니연을 주기로 나에게 허락하다>
1 장안신연석동견長安新硯石同堅 장안의 새 벼루는 굳기가 돌과 같은데
2 부대서구수허반不待書求遂許頒 글로 구하는 것 필요 없이 (나에게) 주기로 허락받았네.
3 기필위인승근세豈必魏人勝近世 어찌 반드시 위나라 사람이 요즘 사람 보다 낫겠는가
4 강추동작몰려산强推銅雀沒驪山 동작대를 힘껏 밀어 여산에 빠지게 했는데
5 한매서권개운엽寒煤舒卷開雲葉 그을음으로 폈다 뭉쳤다 구름 모양을 만들고
6 청로점류발체산淸露霑流發涕潸 맑은 이슬 흘리니 눈물 흘리는 것 같다네.
7 조여봉제기서안早與封題寄書案 아침에 봉하여 쓴 시를 부쳐서는
8 보군상죽필신반報君湘竹筆身斑 그대에게 알리나니 붓대가 상죽처럼 얼룩덜룩하다네.¹²⁶
►126) <蘇轍集(一)> 卷二, pp.20-21.
蘇軾 <차운화자유욕득려산징니연次韻和子由欲得驪山澄泥硯
여산의 징니연을 얻게 되어서 지은 자유의 시에 차운하여 화답한다.>
1 거세쟁칭업와견擧世爭稱鄴瓦堅 온 세상이 다투어 업와연이 튼튼하다 칭송하거니
2 일매불환백금반一枚不換百金頒 벼루 하나를 금 백 냥의 하사품과도 안 바꾸는데
3 기지호사왕부자豈知好事王夫子 어찌 알았으리오 호사가 왕선생이
4 자채림동수령산自採臨潼繡嶺山 스스로 임동의 수령산에서 가져올 줄을?
5 경화상함천맥난經火尙含泉脈暖 전쟁의 불길 거치고도 천맥의 온기가 남았으니
6 조진응유루흔산弔秦應有淚痕潸 진시황을 애도하는 눈물 자국도 있으리라.
7 봉제기거오무용封題寄去吾無用 나는 필요 없으니 봉하여 너에게 부쳐주마.
8 근일종융의학반近日從戎擬學班 요즘 나는 오랑캐 쫓으려고 반초를 배우려 하니까.¹²⁷
►127) <정본완역 소동파시집1> p.378.
소철은 소식에게 려산驪山의 징니연澄泥硯을 달라고 하였고 소식은 소철에게 주겠다고 허락하였다.
이 징니연은 진흙을 걸러 고운 흙을 불에 태워 만든 벼루로 당시 사람들은 이를 귀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소철은 소식의 허락을 받고 그 감회를 시로 적었다.
그는 누군가가 동작대銅雀臺를 밀어서 여산으로 넘어뜨렸을 것이라 상상한다.
이는 위魏의 조조曹操가 축조한 동작대의 기와로 만든 벼루가 매우 귀했던 것과 관련 있다.
여산에서 뛰어난 벼루가 나온 이유가 넘어진 동작대의 기와로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고운 흙을 불에 태워 그것으로 벼루를 만들며 벼루에 먹물을 흘리는 모습을 눈물 흘리는 것에 비유하였다.
그러고는 자신은 자주 글을 써서 붓대에 먹물이 묻어있다는 사실을
소식에게 알려 그 벼루를 애용할 것이라 말하며시를 마쳤다.
소식은 이 시를 받고는 벼루에 대한 찬사를 나타냈다.
여산에 있는 수령산에서 가져온 이 벼루가 동작대의 기와로 만든 벼루보다도 뛰어나다고 하였다.
또한 자신은 後漢의 장수인 반초班超처럼 武에 힘을 쓸 테니 소철에게 이 벼루를 잘 사용하라고 하였다.
原詩와 차운시의 운각은 각각 “견堅 반頒 산山 산潸 반斑”과 “견堅 반頒 산山 산潸 반班”이다.
제8구의 운각인 “반斑”과 “반班”이 다른 것이다.
<광운廣韻>에 의하면 “반斑”은 “산刪”운에 속하고 “반班”도 “산刪”운에 속한다.
두 글자는 같은 운부에 속한 것이다.
소식은 같은 운부 내에서 운각을 교체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소철은 原詩에서 상죽湘竹의 고사¹²⁸를 인용하여 손에 묻은 먹물로 붓대가 얼룩덜룩하게 된 모습을 말하였다.
반면 소식은 글을 쓰는 도구인 벼루를 소철에게 주고 반초班超¹²⁹를 본받아서 나라에 공을 세우고 싶다고 말하였다.
►128) 舜임금에게는 부인인 아황娥皇과 녀영女英이 있었다.
그런데 순임금이 죽자 슬퍼하며 湘江에서 통곡을 하며 눈물을 흘리니
그 눈물이 대나무에 떨어져 대나무에 반점이 생겼다.
그것을 상죽湘竹이라 한다.(자세한 내용은 <列女傳>참조.)
►129) <後漢書⋅班超傳>
가빈家貧 상위관용서이공양常爲官傭書以供養 구로고久勞苦
반초는 집이 가난하여 항상 관가에서 돈을 받고 글씨를 써 주며
(어머니를) 봉양하고 오랫동안 고생하며 일하였다.
상철업嘗輟業 투필탄왈投筆歎曰 일찍이 일을 그만두고는 붓을 던지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대장부무타지략大丈夫無他志略 “대장부가 다른 포부가 없으면
유당효부개자장건립공이역猶當效傅介子張騫立功異域 이취봉후以取封侯 안능구사필연간호安能久事筆硏間乎
마땅히 부개자와 장건을 본받아 이역에서 공을 세워 제후에 봉해져야지
어찌 오랫동안 글씨 쓰는 일이나 하리오?”라고 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소철은 “얼룩덜룩한 반점”의 의미로 “斑”을 사용하였고
소식은 “반초”의 의미로 “班”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소식은 原詩의 운각을 교체함으로써 시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만든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타인과의 창화가 아닌 시에서도 발견된다.
소식의 자화시와 화도시에서도 운각의 교체가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蘇軾 <추전정보표형지박追餞正輔表兄至博 부시위별賦詩爲別
외사촌형인 程正輔를 전송하러 박라까지 갔다가 시를 지어 작별하다>
1 고신남유타황관孤臣南遊墮黃菅 외로운 신하는 남쪽에서 노닐며 누런 띠 풀로 떨어졌는데
2 군역하사래목만君亦何事來牧蠻 그대 또한 무슨 일로 남방의 오랑캐를 다스리러 왔나요.
3 의주단호룡강굴艤舟蜑戶龍岡窟 구룡강 동굴의 오랑캐 집에 배를 대어놓고
4 치주야엽광랑간置酒椰葉桄榔間 광랑나무 사이에서 야자 잎으로 술잔치를 베푸는데
5 고담이소쇠어루高談已笑衰語陋 고상한 담론에 노쇠한 말이 비루함을 이미 웃었고
6 걸구우각청시잔傑句尤覺淸詩孱 걸출한 시구는 맑은 시가 형편없다 더욱 느끼게 하는데
7 박라소현승사고博羅小縣僧舍古 박라 작은 현의 스님의 옛 집에서
8 아불인거군망환我不忍去君忘還 나는 차마 떠나지 못하고 그대는 돌아가기를 잊었지요.
9 군응회망진여초君應回望秦與楚 그대는 틀림없이 진 땅과 초 땅을 되돌아보면서¹³⁰
10 몽섭한수수진관夢涉漢水愁秦關 꿈속에서 한수를 건너면서 진나라의 관문에서 근심할 것이고
11 아역좌념고안객我亦坐念高安客 나 또한 앉아서 고안의 객을 그리워하나니¹³¹
12 신유황얼참동산神遊黃蘖參洞山 정신은 황얼사로 달려가며 동산사에 참배할 것이지요.
►130) 정정보의 형제인 정지소鄭之邵와 정지원鄭之元은 각각 사주지주泗州知州와 초주지주楚州知州였는데
秦은 정지소가 있는 泗州를 말하고 楚는 정지원이 있는 楚州를 말한다.
이는 정정보가 그의 형제들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31) 高安은 균주筠州를 말한다. 소철은 이 당시 筠州에 폄적되어 있었다.
13 하시광탕세하적何時曠蕩洗瑕謫 어느 때에야 용서를 받아 옥의 티를 씻어서는
14 여군귀가상추반與君歸駕相追攀 그대와 수레 타고 돌아가서 서로 뒤따르고 붙잡으며
15 리화한식격강로梨花寒食隔江路 배꽃 피는 한식절에 강가 길을 사이에 두고
16 량산요대쌍연환兩山遙對雙煙鬟
두 산이 멀리서 마주 보는 것이 한 쌍의 구름 같은 쪽 머리가 되게 할 수 있을까요.
17 귀경불용일전물歸耕不用一錢物 돌아가 농사짓는 데에는 한 푼의 돈도 필요하지 않는데
18 유요량각비잔안惟要兩脚飛孱顔 다만 험준한 산을 날아다닐 두 다리만 필요하네요.
19 옥상단족기분아玉牀丹鏃記分我 단사광맥의 붉은 살촉 같은 단사를 보면 나에게 나누어 줄 것을 기억하여
20 조아금정광란반助我金鼎光斕斑 나의 금 솥이 빛을 반짝반짝 내도록 도와주세요.
蘇軾 <재용전운再用前韻 다시 앞의 운을 사용하다>
1 락천쌍빈여상관樂天雙鬢如霜菅 백락천은 귀밑머리가 서리 맞은 풀과 같을 때에야
2 시지사견소여만始知謝遣素與蠻 비로소 기녀인 번소와 소만을 풀어줄 줄을 알았는데
3 아형록발울여고아형록발울여고 우리 형님은 검은 머리가 옛날처럼 검고 무성한데
4 이료몽환제인간已了夢幻齊人間 이 세상이 꿈만 같다는 사실을 이미 안 것이지요.
5 아미권주료이이蛾眉勸酒聊爾耳 고운 눈썹이 술을 권하니 즐길 따름이지만
6 처중태인무홍잔處仲太忍茂弘孱 왕처중은 너무 잔인하고 왕무홍은 나약하여
7 삼배경취편귀와三杯徑醉便歸臥 세 잔에 바로 취하여 돌아가서 누우면
8 해상지부기왕환海上知復幾往還 바다 위를 또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할까요.
9 련연륙요진답국連娟六幺趁蹋踘 간드러지는 육요령은 축국을 좇고
10 묘묘삼첩영양관杳眇三疊縈陽關 아득한 양관곡은 삼첩으로 얽혀있네요.
11 주성몽단하소유酒醒夢斷何所有 술 깨고 꿈 깨면 무엇이 있을까요
12 락화류수공청산落花流水空靑山 떨어진 꽃과 흐르는 물과 빈 청산만 있겠지요.
13 홀경뇨고발야반忽驚鐃鼓發夜半 한밤중에 징소리 북소리 나서 문득 놀랐나니
14 명월불허유인반明月不許幽人攀 밝은 달이 은거하는 이가 붙잡기를 허락하지 않네요.
15 증행무물유일어贈行無物惟一語 송별하며 드릴 게 없어 다만 말이나 한 마디 하나니
16 막견장무침운환莫遣瘴霧侵雲鬟 장기 어린 안개가 구름 같은 머리를 침범하도록 하지마세요.
17 라부도인일경개羅浮道人一傾蓋 나부산의 도인은 한 번 수레 덮개를 기울이고는
18 욕계백일류군안欲繫白日留君顔 흰 해를 매어서는 그대의 얼굴을 붙잡아두려 하네요.
19 응지아시향안리應知我是香案吏 나는 향안리이니
20 타년허철봉래반他年許綴蓬萊班 훗날에 봉래궁의 반열을 잇게 될 것을 허락할 줄을 응당 알아야 하지요.
위의 시는 소식의 原詩와 그에 차운한 자화시이다.
紹聖 2년(1095) 3월, 소식이 혜주惠州 박라현博羅縣에서 정정보程正輔¹³²를 전송해주며 지은 것이다.
►132) 소식의 누나 蘇八娘과 결혼한 소식의 외사촌 형이다.
原詩는 정정보가 소식이 있는 곳에 들러 함께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놀다가 떠나게 되어 슬퍼하는 내용이다.
정정보가 마음속으로 동생들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소식도 균주筠州 고안현高安縣에 있는 소철을 그리워한다.
그래서 하루빨리 사면을 받아 유배가 풀리면 함께 노닐고자 한다. 그리고 자화시의 내용은 이렇다.
정정보는 인생여몽을 일찍이 깨달았고 소식과 함께 기녀들의 노래를 들으며 술을 마신다.
그런데 술이 깨고 시간이 지나면 이별이 다가오기 때문에 슬퍼하고 건강하기를 바라며 작별인사를 한다.
마침 나부산의 도인은 정정보와 처음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정보가 늙지 않도록 붙잡아두려 하고 소식은 훗날에 정정보와 조정에서 만날 것을 기약한다.
原詩에서 다 하지 못한 말을 자화시를 통해 이어나간 것이다.
原詩에서 이별의 슬픔을 말했다면 자화시에서는 현재 이별의 상황과 앞으로의 일에 대한 당부가 나온다.
그런데 두 편의 시에서 운각이 다른 부분이 보인다.
原詩에서는 “···, 반攀 환鬟 안顔 반斑”을 사용하였고 자화시에서는 “···, 반攀 환鬟 안顔 반班”을 사용하였다.
앞서 예로 제시한 시와 마찬가지로 가장 마지막 구절의 운각인 “斑”과 “班”이 다른 것이다.
소식은 같은 운부의 다른 글자로 운각을 교체하였다.
그리고 原詩의 “斑”은 “란반斕斑”의 의미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반면 자화시의 “班”은 “반열”의 의미로 쓰였다.¹³³
►133) 소식은 앞서 호완부胡完夫와 전목부錢穆父, 이단숙李端叔과 창화한 차운시에서
첫 구에 압운한 운각들을 상대방의 그것과 똑같이 사용하였다.
호완부가 사용한 “斑”을 “얼룩”의 의미로 사용하였고 전목보가 사용한 “班”을 “반열”의 의미로 사용한 바 있다.
(본고19-21페이지 참조) 그리고 그 후에 소식과 호완부, 전목보는 1회씩 또 차운을 하였다. 각각의 제1구를 본다.
•蘇軾 <次韻完夫再贈之什,某已卜居毘陵,與完夫有廬里之約云>:
“詔語春溫昨夜班.(조서는 봄의 따뜻함같이 어젯밤에 반포되었다)”
•蘇軾 <次韻穆父舍人再贈之什>: “柳絮飛時簡籜斑.(버들개지 날릴 때 죽순 껍질에 얼룩무늬가 생겨났다)”
이를 통해 소식은 분명 “班”과 “斑”을 구분하여 썼음을 알 수 있다.
소식은 훗날 정정보와 조정에서 만나자며 황궁을 뜻하는 “봉래궁蓬萊宮”을 끌어온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사신행査愼行(1650-1728)은
결운전작반結韻前作斑 차작반此作班 “마지막 운은 앞의 작품에서는 ‘斑’을 사용했고 이 작품(자화시)에서는
‘班’을 사용했는데 의각부동義各不同 불응통용不應通用 뜻이 각각 다르므로 통용해서는 안 된다”¹³⁴고 한 바 있다.
►134)<補注東坡編年詩> 卷39
따라서 소식은 차운시의 한계로 인해 운각을 희생시키면서 시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전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陶淵明 <권농勸農 농사를 권하다>
1 기절역과氣節易過 절기는 쉬이 지나가나니
2 화택난구和澤難久 따뜻하고 윤택함이 오래가기 어렵네.
3 기결휴려冀缺攜儷 기결은 아내를 끌고 나갔고
4 저닉결우沮溺結耦 장저와 걸닉은 함께 밭을 갈았지.
5 상피현달相彼賢達 저 현명하고 통달한 이들도
6 유근롱무猶勤壟畝 여전히 부지런하게 밭두둑을 갈았다네.
7 신이중서矧伊眾庶 하물며 저 뭇 사람들이
8 예거공수曳裾拱手 옷자락 끌며 팔짱 끼고 있으랴.¹³⁵
►135)<箋注陶淵明集> 卷一.
蘇軾 <화도권농륙수和陶勸農六首 병인幷引 도연명의 농사를 권하는 시에 서문과 함께 화답하다 6수>
해남다황전海南多荒田 해남도에는 황폐한 논밭이 많아서
속이무향위업俗以貿香爲業 민간에서는 향 파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다.
소산갱도所産秔稌 부족어식不足於食 생산되는 벼는 먹기에 부족하다.
내이저우잡미작죽미이취포乃以藷芋雜米作粥糜以取飽 이에 저우를 쌀과 섞어 죽을 끓여 배를 채운다.
여기애지予旣哀之 내화연명乃和淵明<권농勸農>시詩 이고기유지자以告其有知者
나는 그러한 상황을 슬퍼하여 이에 도연명의 <농사를 권하며> 시에 화운함으로써 아는 자들에게 농사를 알린다.
其四
1 청아고언聽我苦言 내 쓴 소리 들으면
2 기복영구其福永久 그 복은 영구하다네.
3 리이처사利爾耝耜 농기구들을 날카롭게 하고
4 호이린우好爾鄰偶 이웃과 잘 지내시게.
5 참애봉조斬艾蓬藋 온갖 잡풀들을 베고 나면
6 남동기무南東其畝 남쪽과 동쪽이 다 밭이니
7 부형진정父兄搢梃 늙은이들은 막대기를 꽂아
8 이질유수以抶游手 일없이 노는 사람을 채찍질해야 한다네.
도연명은 전원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는 삶을 추구하였다.
그는 뭇 사람들에게 농사를 권하며 농사를 짓지 않는 이들을 비판하였다.
기결과 장저, 걸닉과 같은 옛 현인들도 농사를 지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화도시는 紹聖 4年(1097) 8월에 담주儋州에서 지었다.
소식은 땅이 척박하여 쌀이 생산되기 어려운 환경을 탄식하며 도연명의 시에 차운하여 농사를 권하였다.
풀들을 베고 밭을 갈아 농사를 해야함을 말하고 있다.
각각의 시의 운각은 “구久 우耦 무畝 수手”와 “구久 우偶 무畝 수手”로 제4구의 “우耦”와 “우偶”가 다르다.
먼저 <廣韻>에 의하면 “우耦”는 “후厚”운에 속하고 “우偶”도 “厚”운에 속한다.
같은 운부 내에서 운각을 교체하여 사용한 것이었다.
또한 原詩는 <論語⋅微子>의 전고인
“장저걸닉우이경長沮桀溺耦而耕”을 인용한 것으로 “장저와 걸닉이 밭을 갈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도연명은 “우耦”를 “밭을 갈다”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소식 화도시의 제3구와 제4구는 對句를 이루고 있으니
“리이처사利爾耝耜 호이린우好爾鄰偶”의 “처사耝耜(농기구)”와
“린우鄰偶(이웃)”는 모두 명사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소식은 린鄰과 합쳐 “이웃”의 의미로 “우偶”를 사용한 것이다.¹³⁶
►136) 참고로 소식의 화도시에 소철이 차운한 <화자첨차운도연명권농시和子瞻次韵陶淵明勸農詩
자첨이 도연명의 <농사를 권하다> 시에 차운한 시에 화답하다> 시에서는 原詩와 같은 운각을 사용하여
“숙위저닉孰爲沮溺 풍우상우風雨相耦 누가 장저와 걸닉이 되어, 비바람에도 함께 밭을 갈까?”라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운각을 교체하면서 시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추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운각의 교체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운각을 생략한 경우도 있다.
이것 역시 소식 차운시의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여기에서 잠시 부연해 둔다.
原詩인 황정견의 시가 총 14句인 반면 소식의 차운시는 12句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작품을 본다.
黃庭堅 <고시이수상소자첨古詩二首上蘇子瞻 소자첨에게 올리는 고시 두 수>
其二
1 청송출간학靑松出澗壑 푸른 소나무는 골짜기에서 자라는데
2 십리문풍성十里聞風聲 십 리까지 소나무에 바람 이는 소리가 들린다네.
3 상유백척사上有百尺絲 위에는 백 척 길이의 새삼이 있고
4 하유천세령下有千歲苓 아래에는 천 년 된 복령이 있네.
5 자성득구요自性得久要 복령의 본래 성질은 오랫동안 살게 하는 것이며
6 위인제퇴령爲人制頹齡 사람이 나이 먹어 쇠잔함을 막기 위한 것이네.
7 소초유원지小草有遠志 새삼이란 작은 풀이 원대한 뜻을 가졌으니
8 상의재평생相依在平生 평생을 서로 의지하며 사네.
9 의화부병세醫和不幷世 의화는 세상과 함께 하지 않으니
10 심근차고체深根且固蒂 뿌리를 깊게 박고 꼭지를 단단하게 한다네.
11 인언가의국人言可醫國 사람들은 나라를 고칠 만하다고 말하지만
12 하용태조계何用太早計 크게 서두름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13 소대재즉수小大材則殊 작거나 크거나 재목은 모두 다르지만
14 기미고상사氣味固相似 기세와 뜻은 진실로 비슷한 법이라네.¹³⁷
►137)<黃庭堅詩集注(一)>卷一, pp.49-50.
蘇軾 <차운황로직견증고풍이수次韻黃魯直見贈古風二首 황노직이 보내온 고풍 두 수에 차운하여>
其二
1 공산학선자空山學仙子 인적 없는 빈 산에서 신선을 흉내 내어
2 망의생소성妄意笙簫聲 생황 소리 퉁소 소리 제멋대로 내보지만
3 천금득기약千金得奇藥 천금을 주고 기이한 불로약을 샀는데
4 개시개희령開視皆豨苓 열어 보니 모두 다 희령 뿐인 꼴
5 부지시인중不知市人中 거리의 사람들 중에
6 자유안기생自有安期生 이미 안기생이 있는 줄을 몰랐다네.
7 금군이도세今君已度世 그대는 지금 이미 세속을 초월하여
8 좌열상중체坐閱霜中蔕 앉아서 서리 맞은 꼭지를 보고
9 마사고동인摩挲古銅人 옛날 거인의 동상을 어루만지며
10 세월불가계歲月不可計 세월이 얼마인지 헤아릴 수 없게 됐네.
11 랑풍안재재閬風安在哉 신선세계 낭풍산이 어디에 있나?
12 요군상지사要君相指似 그대가 나에게 좀 가리켜주기 바라네.¹³⁸
►138) 번역은 <정본완역 소동파시집2> p.814를 바탕으로 수정하였다.
소식은 일찍이 손신로의 집에서 황정견의 시문을 본 적이 있었다.¹³⁹ 자세한 내용은 본문 p.48 참조.
이후 元豐 元年(1078) 6월에 황정견과 소식은 직접 시문을 주고받으며 교유를 하였으니 바로 위의 시이다.
황정견은 제1-8구까지가 소식에 대한 내용이며 제9-14구까지는 자신에 대한 내용으로 시를 구성하였다.
그는 소식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소식을 소나무에 비유하며 칭송하였다.
<회남자淮南子⋅설산說山>의 새삼과 복령을 인용하였는데¹⁴⁰
새삼과 복령을 통하여 그것이 천년 된 소나무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소식이 그것과 같이 오랫동안 변함없는 모습을 가졌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자신은 비록 작은 材木이지만 소식과 같은 뜻을 지녔음을 말하였다.
►140)
천년지송千年之松 하유복령下有茯苓 상유토사上有兎絲
천년 된 소나무에는 아래에는 복령이 있고 위에는 새삼이 있다.
상유총시上有叢蓍 하유복구下有伏龜
위에는 시초 덤불이 있고 아래에는 엎드린 거북이가 있다.
성인종외지내聖人從外知內 이견지은야以見知隱也
성인은 밖을 통해 안을 알고 보이는 것으로써 숨어있는 것을 안다.
소식은 제1-6구까지는 자신에 대한 내용이며 제7-12구까지는 황정견에 대한 내용으로 시를 구성하였다.
그는 자신을 칭송하는 시에 대한 화답으로 겸손함을 보였다.
복령에는 약효가 있지만 자신은 희령豨苓이라며 겸손한 말로 답했다.
또한 안기생의 고사¹⁴¹를 들어 안기생이 원래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했다.
즉 자신이 그동안 황정견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다.
그가 보기에 황정견은 신선과 같은 사람으로 일반 관리들처럼 세속적이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식은 이러한 처지에 놓인 황정견을 위로한 것이다.
►141)안기선생자安期先生者 랑야부향인야瑯琊阜鄕人也 안기선생은 낭야군 부향 사람이다.
매약어동해변賣藥於東海邊 시인개언천세옹時人皆言千歲翁
동해 가에서 약을 팔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천세 노인’이라 불렀다.
진시황동유秦始皇東遊 청견請見 여어삼일삼야與語三日三夜
진시황이 동쪽을 순행했을 때 (그에게) 접견하기를 청하여 함께 3일 밤낮 동안 얘기를 나눈 후
사금벽도수천만賜金璧度數千萬 출어부향정出於阜鄕亭 개치거皆置去
수천만 금에 달하는 황금과 벽옥을 하사했으나
(안기선생은)부향정을 떠날 때 (하사받은 보물을) 모두 놓아두고 갔다.
(번역은 劉向 지음, 김장환 옮김<열선전: 중국 도교의 70仙人 이야기> 서울: 예문서원, 1996, p.30참조)
原詩는 총 14구이며 소식의 차운시는 12구로 이루어져 있다.¹⁴²
그리고 각각의 운각은 “성聲 령苓 령齡 생生 체蔕 계計 사似”와 “성聲 령苓 생生 체蔕 계計 사似”이다.
►142) 황정견의 시가 실린 <豫章黃先生文集><山谷內集詩注>와 본고에서 저본으로 삼은 <蘇軾詩集> 이외에
다른 판본인 <東坡詩集注><施注蘇詩> 및 南宋의 소호邵浩가 정리한 <파문수창집坡門酬唱集>에도
모두 황정견의 시는 14구이며 소식의 시는 12구이다.
그런데 사신행은 <補注東坡編年詩>에서 原詩인 황정견의 시를 첨부 하였는데
“령齡”자가 쓰인 두 구절을 삭제하되 “초계어은총화에 따르면 ‘자성득구요自性得久要 위인제퇴령爲人制頹齡’의
두 구절이 있다(<補注東坡編年詩> 卷十六.)”라고 주석을 삽입한 바 있다
原詩의 제5-6구에 해당하는 “령齡” 운각이 차운시에는 없는 것이다.
현존하는 각종 판본상에 의하면 소식은 이 운각을 빼고 차운시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소식의 차운시에는 운각을 바꿔서 시를 쓴 경우도 있었다.
정해진 운각을 사용하며 시상을 자연스럽게 전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식은 같은 운부 내에서 다른 운각으로 교체함으로써 시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구성하였다.
차운시의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지는 못했지만 원활한 시상 전개를 위한 것이었다.
차운시에는 이러한 한계가 존재하였다.
이를 통해 소식과 같은 천재 시인도 완벽한 차운시의 창작은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제5장 결론
본고는 송대 문인들 사이에서 차운시가 왜 성행하였는지
차운시를 왜 지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문단의 영수이며 대표인 소식의 차운시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송대 소식에 이르러 차운시가 보편적으로 창작되며 소식이 대량의 차운시를 창작하였고
차운의 방식과 차운의 대상을 다양화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논의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기존연구는 소재 분류에 편향한 나머지 오히려 “차운”의 의미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히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반면 필자는 송대 문인들에게 “차운”이 매우 큰 의미였다고 생각한 바 그것은 문인들의 놀이로서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교유를 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차운이라는 놀이를 통해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고는 이를 중심으로 소식의 차운시의 의미를 논하였다.
제2장에서는 소식의 차운시의 특징인 창화 방식의 다양화를 살펴보았다.
이는 유희의 극대화를 추구한 것이었다.
소식은 다른 문인들과 창화를 하며 차운시를 지어 교유를 하였다.
그는 한 번의 唱과 和로 이루어졌던 기존의 창화방식을 연장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재치 있게 전달하였고 상대방에게 일일이 화답하여 그에 대한 존중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한 두 명의 문인끼리 주고받는 창화의 방식을 확대하여 여러 문인들이 참여하는 집단 차운시를 창작하였다.
문인들은 이 모임을 통해서 운각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의 동질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한 집단 내에서 더욱 가까워지며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서로 경쟁을 하며 문인으로서의 자질을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타자간 관계에 개입하여 차운하는 방식도 있었다.
原詩 작자는 분명 다른 受信者에게 시를 쓴 것이었는데
소식은 그 시에 차운함으로써 原詩 작자와 그 受信者 사이에 개입한 것이다.
소식은 타자간에 이미 형성된 긍정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그들의 관계 속으로 들어갔기에 그들과 교유를 하는 데 유리하였다.
차운시를 통해 그 상대방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제3장에서는 소식 차운시의 두 번째 특징인 차운 대상의 다양화를 살펴보았다.
그는 자신이 지었던 시에 차운한 자화시를 지었고 古人의 시에 차운한 추화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는 기존의 차운시가 상대방의 존재를 필수 조건으로 한 것과 비교되며 소식만의 독특한 차운시이기도 하다.
차운시는 본래 다른 사람과 시를 주고받으며 교유를 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제1절에서는 자화시를 다루었다.
그것은 시인의 의도 아래 原詩와 내용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연작시의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파악하였다.
소식은 자화시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규칙을 설정하여 자신의 原詩와 연관성을 부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차운의 놀이적 기능이 나타났다.
그 규칙을 기준으로 삼아 자화시를 창작하며 연작시의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화시는 연속으로 창작한 경우와 연속 창작이 아닌 경우의 두 가지로 나누었다.
먼저 전자의 경우는 소식이 자화시를 지을 때 原詩의 내용을 이어서 못 다한 말을 전하거나
原詩와 연결했을 때 한 편의 긴 詩가 되도록 만든 것이다.
후자의 경우, 공통적인 흐름 또는 기준을 설정하여 原詩와 자화시의 정서가 잘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原詩와 자화시를 함께 놓고 봄으로써 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제3장 2절에서는 추화시를 다루었는데
크게 화도시 이전의 추화시와 화도시로 분류하여 각각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화도시 이전의 추화시는 시인과 原詩 작자가 같은 상황에 처해져 만들어진 것으로
유희를 위해 지었다는 점에서 일반 창화시의 창작 목적과 비슷하였다.
또한 原詩의 작자가 古人인지의 여부가 창화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화도시는 현대의 놀이치료와 같은 목적에서 창작된 모습이 보였다.
소식은 운각에 집중하여 차운시 창작에 몰입함으로써
열악한 폄적지에 처한 자신의 슬픔을 잠시 잊거나 완화시켰다.
화도시 창작을 통해 같은 처지에 있었던 도연명의 존재 자체로 위로를 받기도 했지만
차운시 자체의 놀이적 특성으로 인해 슬픔에 집중된 초점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도연명의 시와 다른 모습으로 자유롭게 시를 짓기도 하였다.
소식은 화도시를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놀이를 하였기 때문이다.
제4장은 소식 차운시의 한계를 분석하였다.
소식과 같은 대문호도 대량의 차운시를 짓다보면 운각의 제약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한계로는 부자연스러운 시상의 전개가 있었다.
특히 이러한 한계점이 나타난 작품은 주로 고체시에 집중되었다.
이는 청대 학자인 기윤의 평가에 의지하여
운각과 관련된 문제가 있는 차운시를 선정하여 구체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정해진 운각의 사용으로 인해 시의 내용이 매끄럽지 못한 측면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이와 반대의 경우로 운각의 글자를 바꿔가면서 시를 자연스럽게 전개한 경우도 있었다.
앞에서 지적한 한계점은 운각을 맞추기 위해 시의 내용을 희생한 것인데 반해
이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을 가진 시의 내용을 지키기 위해 정해진 운각을 사용해야 하는 규칙을 어긴 것이다.
소식은 같은 운부 내에서 운각을 교체하여 차운시를 지어 시의 흐름을 원활하게 창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차운시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한계였다.
본고는 차운시가 문인들의 놀이라는 입장에서 각각의 시에서 “차운”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분석하였다.
차운시가 보편화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하나의 문화로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한다.
소식은 분명 새로운 운자를 사용하여 자신의 시를 창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차운의 방식을 선택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바로 차운시가 놀이이며 즐거움을 얻게 해 주는 도구였기에 가능했다.
본고는 소식의 차운시를 대표로 선정하여 논의를 하였으나
그 수량의 방대함으로 인하여 모든 작품을 아우를 수 없었다.
또한 차운의 방식과 대상의 특징을 중점으로 논의를 진행하였기에 상대방의 原詩와
차운시의 구조나 표현 기법을 비교하는 등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수 없었다.
따라서 차운시에서 이렇게 상대방의 原詩를 어떠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후속 연구로 남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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