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방한 작풍, 거침없는 필치 - 소동파의 시/ 류종목(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올해도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
"올해도 서른 명의 소동파가 나왔다."
이것은 고려 시대의 문학가 이규보가 그의 <전이지全履之에게 답하여 문장에 관하여 논하는 편지>에
인용한 것으로 당시 과거 시험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이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던 말이라고 한다.
서른 명이라고 한 것은 과거 시험 합격자의 수인 33명을 개략적인 숫자로 나타낸 것이니
당시 젊은 학자들이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모두 소동파蘇東坡의 시풍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 말은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는 시험 준비로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 부득이하지만 일단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그때부터 너도나도 소동파의 시풍을 배우기에 여념이 없었던 고려 문단의 기풍을 엿보게 하거니와
조선 시대의 대학자 김종직도 <청구풍아靑丘風雅>의 서문에서 "고려 중엽에는 소동파 시만 배웠다"고 한 것을 보면
고려 중엽 이후 우리나라 문인들 사이에 소동파의 시풍을 배우려는 기풍이 만연해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의 문인 김부식金富軾의 이름에는 소동파의 본명인 '식軾'자가 들어 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그의 부친일 것으로 추정되는 작명자가 소동파를 너무나 추앙한 나머지 그렇게 한 것임에 틀림없다.
김부식의 동생 김부철金富轍의 이름에도 소동파의 동생 소철蘇轍의 이름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
당시 소동파와 소철 그리고 그 부친 소순蘇洵 등 삼부자가 모두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고 있었던 것이다.
소동파의 시문이 우리나라 문인들 사이에서만 이토록 추앙을 받았을 리가 없거니와
그는 과연 금나라 문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추앙을 받고 있었다.
이처럼 다른 나라에서도 널리 추앙을 받고 있었으니
그의 위상이 본국인 송나라 문단에서는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중국 문단에 있어서의 그의 위상은 송나라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 지금까지 줄곧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도처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사형제도 폐지론의 선구자
스물두 살 되던 해인 1057년 소동파는 과거 시험 중의 2차 시험인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했다.
예부시란 1차로 각 지방에서 실시하는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들을 모아 도성에 있는 예부에서 치르는 시험이었다.
그해 예부시의 고시관리위원장은 구양수歐陽修였다.
구양수는 소동파의 답안지를 보고 망설일 것도 없이 대뜸 그것을 수석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다시 그것을 2등으로 바꾸었다.
당시 답안지는 응시자의 이름은 물론 필적조차 알아볼 수 없도록 고시관리관이 옮겨 써놓은 것이어서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그것이 증공曾鞏의 답안지일 것만 같아서 그랬다.
증공은 구양수가 직접 가르친 제자였는데
자기 제자를 수석으로 합격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로 인하여 소동파는 억울하게 수석 합격을 못하게 되었지만
사실상 당시 문단의 맹주인 구양수에게 이미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셈이었다.
►소동파가 제출한 답안지에 이런 말이 있었다.
요임금 때에 고요皐陶가 법관이 되었는데 한 사람을 사형에 처할 일이 생겼다.
고요가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요임금은 용서하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고요는 세 번이나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요임금은 세 번이나 용서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므로 천하가 고요의 법 집행이 준엄함을 두려워하고 요임금의 형벌 적용이 관대함을 좋아한다.
(····)
상을 줄 수도 있고 상을 안 줄 수도 있을 때 상을 주는 것은 지나치게 인자한 것이고
벌을 줄 수도 있고 벌을 안줄 수도 있을 때 벌을 주는 것은 지나치게 정의로운 것이다.
인자함은 지나쳐도 군자로서 문제가 없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치면 그것이 발전하여 잔인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인자함은 지나쳐도 되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
채점관인 구양수와 매요신은 모두 뛰어난 문인이요 학자였는데
이 부분이 어느 책에서 인용된 것인지 출전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나중에 소동파가 합격 인사를 갔을 때 매요신이 창피함을 무릅쓰고 소동파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소동파는 뜻밖에도 "꼭 출전이 있어야만 합니까?"하고 반문했다.
요임금처럼 인자한 성군과 고요처럼 엄정한 법관이라면
그들의 천성과 위인으로 미루어볼 때 능히 그럴만하지 않느냐는 것이 소동파의 대답이었다.
그것은 소동파 자신이 즉석에서 지어낸 허구적인 이야기였던 것이다.
가히 소동파의 성격을 짐작케 하고 앞으로 지어질 그의 시문이 얼마나
시원스럽고 호방한 작풍을 지니게 될 것인지를 예고하는 대목이었다.
이 문장에서 소동파는 인자함은 지나쳐도 무방하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상을 줄 때와 달리 벌을 줄 때는 특별히 신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판결에 오류가 있을 경우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죽는다는 이유로 사형제도폐지론이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거니와 소동파는 천년 전에 벌써 사형제도 폐지의 필요성을 깨달았던 셈이다.
제과制科란 특출한 인재를 발굴하기 위하여 황제가 특명을 내려
친히 시행하는 특별시험인데 소동파는 동생과 나란히 제과에도 합격했다.
제과에서 소동파 형제를 선발하고 난 뒤 인종황제는 희색이 만면하여
"나는 오늘 자손을 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할 재상 두 사람을 얻었소" 하고 황후에게 말했다.
그들 형제는 일시에 재상감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소동파蘇東坡의 글씨
잘되는 사람 곁에는 항상 그를 시기하여 발목을 붙잡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소동파는 일거에 구양수로부터 문학적 재능이 최고라고 인정받고 인종황제에게
정치적 재능이 최고라고 칭송받았으니 그에게 정적이 많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당시 왕안석을 중심으로 한 신법파 인사들이 무리하게 신법을 강행하고 있었는데 소동파는 많은 대신들과
마찬가지로 신법의 강행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사사건건 왕안석 일파와 의견이 충돌했다.
그가 만년에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지은 시 <금산사金山寺에 있는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에서
"너의 평생 공적이 무엇이더냐? 황주, 혜주 그리고 담주 뿐이네"라고 한 바와 같이 중간에 잠깐씩 조정의 요직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그의 생애는 대부분 신법파 인사들의 모함에 의한 지방관 생활과 유배 생활로 점철되었다.
그러나 이렇듯 힘든 그의 인생역정이 단순히 인생의 낭비였다고만 할 수는 없다.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역정이 그로 하여금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게 했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부닥치게 했으며 각지의 풍토와 풍속과 인정을 맛보게 했던 것이다.
더욱이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었던 여러 가지 경험은
그의 탁월한 재능과 호방한 성격을 만나 천고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작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자리를 내주지 않을 수 없소
"이 늙은이는 이제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을 수 없소."
이 말은 구양수가 예부시에서 소동파를 선발해놓고 동료인 매요신에게 한 말이었다.
구양수는 당시 문단의 맹주로서 당시의 문인들이 형벌도 무서워하지 않고
죽음이 닥쳐와도 담담하지만 구양수의 평가만은 두려워한다고 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한 구양수가 소동파를 두고 이런 말을 했으니
소동파는 일거에 구양수를 능가하는 최고의 문장가가 된 셈이었다.
구양수는 나중에 또 자기 아들과 함께 문장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다가 이야기가 소동파에게 미치자
"내 말을 잘 기억해두어라. 앞으로 30년이 지나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라고 했다 하니 그의 이 말이 결코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바 구양수의 예상대로
소동파는 마침내 송나라 최고의 문장가가 되었음은 물론 당송팔대가 중에서도 으뜸가는 문장가가 되었다.
►황쪼우의 동파적벽
소동파의 문장은 다양한 작풍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것을 일일이 다 거론할 수는 없고
단지 몇 개의 편린을 살펴봄으로써 그 전모를 엿볼 수밖에 없다.
후뻬이성 무한武漢에서 장강을 따라 동남쪽으로 백리쯤 내려간 곳에 시뻘건 바위 절벽이 하나 있다.
이른바 적벽이다.
그러나 여기는 삼국시대에 오나라 장수 주유周瑜가 위나라 군사를 대파한 적벽대전의 현장이 아니다.
여기는 바로 소동파가 저 유명한 <적벽부赤壁賦>와 <적벽사赤壁詞>를 지은 곳으로 동파적벽이라고 한다.
적벽대전의 현장은 무한에서 서남쪽으로 장강을 3백리 가량 거슬러 올라간 후뻬이성 푸치(蒲圻)에 있는데
삼국적벽이라는 이름을 붙여 이 동파적벽과 구분한다.
동파적벽 옆에는 동파공원이라는 공원이 만들어져 있고
공원 안에 이부당二賦堂, 파선정坡仙亭, 뇌강정酹江亭, 수선정睡仙亭 등 소동파와 관련된 이름을 가진 많은
부속 건물이 지어져 있으며 건물 안에는 소동파의 시문이 빼곡히 걸려 있다.
'이부'는 소동파가 지은 <적벽부>와 <후적벽부>를 가리키는 말이니 이부당 안에는 당연히
그의 부賦(운문적인 성격이 많이 가미된 문장의 일종) 두 편이 나란히 걸려서 관광객의 발을 붙잡는다.
벽에 걸린 <적벽부>를 읽어보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소동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손님도 저 물과 달을 아시오?
물은 이처럼 밤낮없이 흐르지만 한 번도 저 강이 가버린 적이 없고,
달이 저처럼 찼다가 기울지만 끝내 조금도 없어지거나 더 자란 적이 없다오.
변한다는 관점에서 볼라치면 천지는 한순간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고
변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볼라치면 만물과 내가 모두 무궁하다오.
그렇거늘 또 무엇을 부러워 하리오?
그리고 저 천지간의 만물은 저마다 주인이 있으니 내 것이 아니면 비록 터럭 하나일지라도 가져서는 안 된다오.
다만 강 위에 부는 산들바람과 산 위의 밝은 달만은 귀에 들어오면 소리가 되고 눈에 닿으면 색깔이 되는데
아무리 가져도 금하지 않고 써도써도 없어지지 않는다오.
이것은 조물주의 무진장한 보물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라오.
►소식의 <적벽부赤壁賦>
영원히 변하지 않는 대자연 앞에서 아무리 난다 긴다 하던 영웅도 죽고 나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것,
인간은 이렇게 천지에 붙어사는 한 마리의 하루살이나 망망대해에 떨어진 한 알의 곡식에 불과한 것,
인생이란 이와 같이 보잘것없는 것이니 슬프지 않느냐고 함께 놀던 사람이 소동파에게 물었다.
이 물음에 대하여 소동파는 변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자연이나 사람이나 한시도 쉬지 않고 변한다고 할 수 있지만
변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자연도 사람도 변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니 세속적인 가치에 연연하지 말고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향유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마흔일곱 살 때 지은 이 <적벽부>는
적벽의 가을 경치를 배경으로 경물을 통해 우주와 인생의 이치를 설파하고 있다.
그는 이로부터 석 달 뒤에 다시 <후적벽>를 지어
적벽의 겨울 경치와 도사를 만나는 꿈을 통해 자신의 초탈한 인생관을 서술했다.
이처럼 그의 문장 중에는 인생철학을 노래한 작품이 많다.
인생철학을 노래한 이런 문장들은 시공을 초월한 항구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다 할 것이니
지금 읽어도 여전히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굉장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으므로
이러한 사고방식 역시 자연스럽게 그의 시문에 반영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먼 사람이 해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여 눈이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해의 모양은 구리쟁반과 같다"고 말해주자 그는 쟁반을 두드려 그 소리를 들었다.
나중에 종소리를 듣고는 그것을 해라고 여겼다.
또 어떤 사람이 "해의 빛은 촛불과 같다"고 말해주자 그는 초를 더듬어서 그 모양을 알았다.
나중에 피리를 만져보고는 해라고 여겼다.
해는 역시 종이나 피리와는 거리가 먼데 장님이 그 다름을 알지 못한 것은
자기가 직접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기 때문이다.
도를 알기 어려움은 해의 경우보다 더 심하니
사람들이 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장님이 해를 알지 못하는 것과 다를 리가 없다.
터득한 자가 일러줌에 있어서 비록 멋진 비유로 잘 가르쳐준다고 할지라도
역시 해를 쟁반과 초에 비유하는 것보다 나을 수가 없다.
쟁반에서 종에 이르고 초에서 피리에 이르는 것처럼 바꾸어가며 형상화한다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의 문장 가운데는 생동적인 비유와 명쾌한 논리로써 언어의 불완전성과 실습을 통한 체득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나아가 당시 과거제도의 문제점을 넌지시 꼬집은 이 <해의 비유>와 같은 논변문論辯文
(논리적 서술을 통하여 사리의 옳고 그름을 밝힌 문장)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치를 설파한 것인 만큼
이러한 문장 역시 시대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마힐의 시를 음미해보면 시 속에 그림이 있고,
마힐의 그림을 살펴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
이것은 소동파가 당나라 때의 시인 겸 화가인 왕유王維의 <남전연우도藍田煙雨圖>라는 그림을 본
소감을 피력한 문장의 일부로 시와 그림의 관계를 극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흔히 시는 말하는 그림이요 그림은 말 없는 시라고 하거니와
소동파는 일찍이 이 이치를 스스로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동파의 문장 중에는 이처럼 문예이론을 설파한 것도 많다.
►소동파蘇東坡의 그림 <고목괴석도枯木怪石圖>
대표적인 예로,
"나의 글은 만 섬이나 되는 많은 샘물이 땅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마구 솟아나와 평지에서는
도도하게 콸콸 흘러서 하루에 천리라도 어렵지 않으며 바위와 만나면 그 모양대로 구부러지고
물체를 따라 형체를 이루는 일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알 수 있는 것은 항상 가야만 할 곳으로 가고 항상 멈추지 않을 수 없는 곳에서 멈춘다는 것, 이런 것뿐이다"
라고 하여 문장이란 마땅히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지어야 한다고 역설한 <문장론文說>이 있다.
그리고
"입은 반드시 소리를 의식하지 않게 된 뒤라야 말을 잘할 수 있고
손은 반드시 붓을 의식하지 않게 된 뒤라야 글씨를 잘 쓸 수 있다"
라고 하여 자신의 존재를 잊을 정도로 정신이 집중된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서예 이론을 피력한 <건주숭경선원신경장기虔州崇慶禪院新經藏記>
"대나무를 그림에 있어서는 반드시 마음속으로 완성된 상태의 대나무를 구상한 다음 붓을 잡고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그리고 싶은 부분을 발견하면 급히 일어나 붓을 휘둘러 곧바로 끝내야 한다.
자기가 본 것을 쫓기를 마치 매가 토끼를 덮치듯 해야지 조금이라도 늦추면 사라져 버린다"라고 하여
이른바 '흉유성죽설胸有成竹說'이라는 회화 이론을 전개한 <운당곡언죽기篔簹谷偃竹記> 같은 문장도 있다.
이와 같은 그의 문예이론들은 당시에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문학계, 서예계, 회화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져 젊은이들의 학습 대상이 되고 있다.
►가까이서 안 보일 땐 물러나서 바라보라
정적들의 모함으로 황쪼우[黃州]에서 5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 뒤
유배지를 옮겨가는 도중 소동파는 파양호鄱陽湖 서북쪽에 있는 여산廬山을 구경했다.
우뚝한 봉우리와 길게 뻗은 산줄기, 깊숙한 골짜기에 깎아지른 절벽, 기묘한 형상의 거대한 바위,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양각색의 풀과 나무, 나무에서 지저귀는 온갖 새들의 노랫소리,
여산은 과연 천하의 절경이었다. 소
동파는 10여 일 동안 여산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관찰해보았지만 너무나 다양하고
개성적인 그 산의 형상을 무어라고 한 마디로 표현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고심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참으로 걸작이었다.
가로로 보면 산줄기, 옆으로 보면 봉우리
멀리서 가까이서 높은 데서 낮은 데서
보는 곳에 따라서 각기 다른 그 모습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건
이 몸이 이 산속에 있는 탓이리.
여산 기슭에 있는 서림사西林寺라는 절의 벽에 써놓았기 때문에 <서림사의 벽에>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 시는 10여 일 동안 여산을 구경한 소감을 총결산한 것이다.
그가 내린 결론은 여산은 보는 각도에 따라 매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것의 참된 면모를 알 수가 없었는바 그 까닭은 바로 자신이 여산 안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가까이서 안 보일 때는 한 발 물러나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이치를 담고 있다.
첫 구절에서 여산의 여러 가지 형상 가운데 일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둘째 구절에서 여산의 전체적인 면모를 추상적으로 개괄한 후,
나머지 두 구절에서 이를 바탕으로 보편적인 이치를 도출해낸 것이 이 시의 특징이다.
널리 알려져 있는 '여산진면목'이라는 성어는 바로 이 시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우주와 인생의 이치를 설파하는 설리적說理的 성격은 당시唐詩에서는 보기 힘든 송시宋詩의 특성인데
소동파는 송시의 설리적 특성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항쩌우 서호에는 원래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서호'라는 이름이 오늘날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호수에서 술 마시노라니 맑다가 비가 오네>라는 소동파의 시 덕분이다.
수면이 반짝반짝 맑을 때가 좋더니
산빛이 어둑어둑 비가 와도 멋지네.
서호는 월서시越西施
옅은 화장, 짙은 분 아무래도 어울리네.
이 시에서 그는 기발하게도 맑으면 맑은 대로 아름답고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운치가 있는 서호를
짙은 화장을 하든 옅은 화장을 하든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월서시에 비유함으로써
이 시를 널리 유행하게 만들었고 나아가 '서호'를 보편적인 명칭으로 굳어지게 했으니
시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할 수 있다.
월서시 : 춘추시대 월나라의 미인.
월나라 임금 구천勾踐이 회계산會稽山에서 있었던 패전의 치욕을 씻기 위하여 臥薪嘗膽하던 무렵
월나라 대부 범려范蠡가 서시西施를 발견하여 미인계를 씀으로써 마침내 오나라를 대파했다.
항쪼우 서호 가에 망호루望湖樓라는 커다란 누각이 있다.
이 누각은 옛날부터 시인묵객들이 즐겨 올라가 시를 짓던 곳인데 이 누각 바로 밑에
"옛날부터 망호루를 노래한 시가 매우 많거니와 그 가운데 북송 때의 대시인 소동파의
<6월 27일 망호루에서 술에 취해>가 가장 유명하다"라고 쓴 빗돌이 세워져 있다.
소동파는 이처럼 경물의 아름다움을 실물보다 더 아름답게 그려낸 서경시도 잘 지었다.
소동파는 각지의 지방관으로 나가 있는 동안 신법의 무리한 시행으로 인하여 현지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직접 목격하고는 백성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그들을 동정하는 시를 많이 지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신법파 인사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소동파가 마흔네 살 되던 해에 마침내 그의 시 가운데 왜곡이나 과장을 할 수 있는 것을
모조리 찾아내어 황제를 비방했다는 대역죄를 뒤집어씌웠다.
이 일로 인하여 소동파는 5년 동안 허뻬이성 황쩌우에서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유배령이 풀려 다시 조정으로 들어가 3년 동안 한림학사 등의 요직에 있다가
다시 자청하여 항주태수로 나가게 되었을 때 문언박이 이렇게 부탁했다.
항주에 가거든 시를 많이 짓지 마시게.
자네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자네를 모함할까봐 겁나네.
그에게 또 대역죄가 뒤집어씌워질까 걱정한 원로대신의 애정 어린 충고였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천성이 말을 조심하지 않아 친한 사람에게든 안 친한 사람에게든
꼭 속을 털어놓아야지 못다 한 말이 있으면 마치 목구멍에 음식이 걸린 것 같아서 반드시 토해내고야 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시로써 백성의 고통을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 없고 관리들의 횡포와 무능을 나무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산촌>에서 "근래에 석 달 동안 소금이 없기 때문이라네"라고 하고
<오중(中 지방 농촌 아낙의 탄식>에서
"소 팔아 세금 내고 집을 뜯어 밥 지으며, 내년에 굶을 일은 생각할 수 없었지요"
라고 하여 백성들의 불쌍한 삶에 동정심을 표시했다.
또 <빗속에 천축산天竺山의 영감관음원靈感觀音院을 보고>에서
"농부는 쟁기를 던져버리고,
아낙네는 광주리를 팽개쳤는데,
불당에는 관음상이 하얀 옷을 차려입고,
자애로운 표정으로 점잖게 앉아 있다"라고 했으며
<진계상陳季常이 소장한 주진촌가취도朱陳村嫁娶圖>에서
"지금이야 그곳 풍물 그릴 것이 있겠나, 아전들이 세금 내라고 밤에도 문을 두드리니"
라고 하여 무능하거나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들의 작태를 고발하기도 했다.
소동파에게는 이처럼 현실 문제를 고발한 풍자시도 많다.
►중국인의 마음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대문호
"한 가지 바라는 건 사람이나 오래 살아, 천 리 밖에서 고운 달을 함께 봤으면."
이것은 요즘 중국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 가운데 하나인
<한 가지 바라는 건 사람이나 오래 살아>라는 노래의 마지막 구절이다.
대만 가수 떵리쥔鄧麗君이 '담담한 정'과 '잊지 못할 추억의 명곡'이라는 가요 앨범에 동시에 수록하여
유포시킨 이후 대만은 물론 중국 대륙에서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즐겨 부르는 인기 가요가 되었다.
이것은 원래 송나라 때 유행했던 노래로 그 가사가 바로 소동파의 사詞였다.
즉 <수조가두水調歌頭>라는 소동파의 사에 량훙쯔梁弘志라는 현대 작곡가가 새로운 곡조를 붙이고 떵리쥔이
그것을 멋들어지게 부름으로써 대만과 홍콩 나아가 대륙에 있는 10여 억 중국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동파의 작품이 오늘날도 여전히 많은 중국인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 가면 도처에서 소동파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그의 고향인 쓰촨성 메이산[眉山]과 그의 무덤이 있는 허난성 쟈셴[郲縣]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부임한 지 5일 만에 조정으로의 소환령을 받아 반 달 정도밖에 머물지 않은 산뚱성 펑라이[蓬萊]에도
그의 사당과 시비詩碑가 있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그가 머문 곳 도처에 그의 사당이나 기념관이 있고
그 옆에 으레 그의 상이 세워져 있는 것은 조금도 의아해할 일이 아니다.
이밖에도 그의 발길이 닿았던 곳이면 어디에나 다 그가 아직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쩌쟝성 항쪼우의 서호에는 소제蘇隄라는 이름의 제방이 있고 그 남쪽 끝에 소동파기념관이 있으며
산뚱성 쭈청[諸城]에는 동파소구東坡小區라는 아파트단지가 있는데 그 부근에는 동파슈퍼마켓, 동파목욕탕겸이발소,
동파침구안마보건중심, 동파진료소겸약방 등등 '동파'라는 이름을 가진 간판이 수없이 많다.
그리고 강소성 쉬쪼우에는 소공탑蘇公塔이라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그가 5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후뻬이성 황쪼우에는 그가 노닐던 적벽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한
동파공원이 있고 그가 잠시 은거한 적이 있는 쟝쑤성 이싱[宜興]에는 동파서원이 있으며
그 부근에 동파소학과 동파중학이라는 학교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동파찻집ㆍ동파세탁소ㆍ동파노래방이 있다.
안훼이성 푸양[阜陽]의 서호에는 소제蘇堤와 동파문화구가 있고 심지어 동파매원이라는 매실과수원도 있다.
그리고 허뻬이성 띵쪼우[定州]에는 동파쌍괴東坡雙槐라는 그가 심은 홰나무 두 그루가
아직도 주민들의 보호를 받으며 싱싱하게 살아 있다.
그가 두 번째로 유배 생활을 한 꽝뚱성 훼이쪼우의 그가 거주하던 집터에는 그가 사용하던 우물이
아직도 보존되어 있고 동파소학이라는 학교가 있는가 하면 동파낙원이라는 어린이 놀이터가 다 있고
그 안에 동파유아원이 있다.
그가 세 번째로 유배생활을 한 하이난성 딴쪼우[儋州]에는 동파서원이 있고 그 안에 유명한
동파입극상東坡笠屐像(소동파가 해남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길을 가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는 바람에 부근에
있는 현지 주민에게 빌려서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이 있다.
그리고 그의 무덤이 있는 허난성 쟈셴[郲縣]에는 소동파 서거 9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최근에
동파비림東坡碑林을 만들었는데 각계의 소동파 전문가들이 각자 소동파의 명작 한 편씩을 써서 새긴 비석이
320여 개나 늘어서 있어서 그 방대한 규모가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한다.
이런 예들은 모두 소동파가 지금도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중국인들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소동파를 추앙하는 것인가?
그것은 주로 그의 문학 작품 가운데 천고의 명작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식적 제약을 거부하고 실용성과 합리성, 자연미와 개성미를 중시하여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가식 없이
진솔하게 표현함으로써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의 지속적인 사랑을 받아온 그의 문학 작품은
송나라 때부터 출판되기 시작한 수십 가지에 달하는 그의 시문집을 통하여 전해오는데 최근에는 그의 모든 시에
주석을 가하고 그의 모든 문장을 현대 중국어로 번역한 <주역본註譯本 소동파전집蘇東坡全集>이 출간되어
우리에게 한결 더 가까워졌다.
소동파의 시문집은 분량이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그의 시문 가운데 우리말로 번역된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은 기존의 우리말 번역본에 거의 다 수록되어 있는 셈이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소동파는 늘 은거를 염원했고 따라서 과감하게 관직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간 도연명을 흠모하여
도연명의 모든 시에 화답한 이른바 '화도시和陶詩'를 지음으로써 오래전에 죽은 옛날 사람의 시에 화답하는
새로운 시형을 개발하기까지 했다.
그는 그토록 은거를 염원했으면서도 무엇 때문에 끝내 은거를 결행하지 못했을까?
소동파는 항상 임금의 은혜를 잊지 않고 백성을 사랑한 두보의 사람됨과 그의 시를 대단히 좋아했다.
이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봉사해야 한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이 투철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가 유가의 현실참여 사상과 도가나 불가의 현실도피 사상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서 한편으로는
도연명처럼 현실의 질곡에서 벗어나 전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와 백성을 위해 봉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을 끝내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2. 소동파의 <적벽부>와 <적벽사>는 둘 다 삼국시대에 오나라 장수 주유가
위나라 군사를 대파한 적벽대전 장면을 생각하면서 지은 천고의 명작이다.
그러나 그가 이 작품을 지은 곳은 결코 적벽대전의 현장이 아니었으며 소동파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엉뚱한 장소에서 적벽대전의 장면을 상상한 뒤
영웅호걸의 자취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고 읊고 있다.
그는 적벽대전의 현장이 아닌 줄 알면서 왜 그곳에서 이런 작품을 지었을까?
당시 그는 우국충정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적들의 모함을 받아 황쪼우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던 만큼 인생무상에 대한 감회가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그리고 황쪼우 사람들은 그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그곳이 적벽대전의 현장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 정도이므로 굳이 부인할 필요 없이 그곳을 적벽대전의 현장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3. 항간에 소동파가 "원컨대 이 몸이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 번 구경했으면"이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온다.
<소동파전집>에 이런 말이 없으므로 이 말이 사실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섣불리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왜 이런 말이 생겼을까?
고려인들은 소동파를 극도로 추앙했지만 그는 송나라의 기밀이 고려를 통해 적국인 거란으로 흘러들어 갈
우려가 크다거나 고려 사신이 입국할 때마다 그들에 대한 영접준비 과정에서 송나라 백성들이 심한 고통을
당한다는 등의 이유로 고려 사신이 송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금강산에 대한 찬미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고려 사신의 송나라 입국을 반대한
소동파마저도 고려의 산천인 금강산에 대해서만은 대단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이 있다.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 5. 22.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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