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漢詩/도연명陶淵明

晦峯 河謙鎭의 <和陶詩>와 東坡 蘇軾의 <和陶詩> 比較硏究

晦峯 河謙鎭<和陶詩>東坡 蘇軾<和陶詩> 比較硏究

/이영숙李永淑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국문초록>

회봉과 동파는 몇 백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和陶詩’라는 하나의 시형식으로 遭遇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도연명이라는 인물의 도덕적 청렴함과 인품의 고결함, 은자로서의 삶에 같은 공감대를 느끼며 ‘화도시’를

짓게 되었고 특히 회봉은 소동파에게도 상당히 경도되어 있었는데 이도 화도시를 짓는 하나의 動因이 되었다.

 

시대의 간극을 뛰어넘고 ‘화도시’로 만난 이들은 각자 처한 시대와 현실에 고민하고 갈등하며

그 내면적 고뇌들을 시에 加減 없이 담아내었다.

 

그러므로 ‘화도시’는 그들의 정신적 고뇌의 산물이면서

한편으로는 현실의 고민과 갈등을 해소해가는 일종의 정신적 해방구이기도 하였다.

 

회봉은 화도시에서 유학자로의 자세를 견지하고 도덕적 선을 추구하는 시를 지었으며,

亡國의 좌절과 아픔을 화도시에 담아내었다.

 

유학자로서 이상적인 모습을 시에 나타내려한 회봉의 화도시에는 溫柔敦厚함이 담겨있다.

그리고 동파는 현실을 추구하는 유자로의 모습과 은일의 삶을 추구하는 은자로서 모습 사이에서 갈등하며

시대의 불우에 대한 좌절을 화도시에 담아내면서도 아주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보였다.

 

회봉은 동파와 유사하거나 또는 상이한 견해를 보이며 시공을 초월하여 ‘화도시’를 통해 동파와 交感하였다.

동파와 비교가 가능한 회봉의 화도시는 우리 한문학의 범위를 해방후까지 연장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근대한문학의 범주를 공고히 하게 한다.

 

Ⅰ. 들어가는 말

 

和陶詩는 도연명의 시에 화운한 시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의 송대 동파 소식에 의해 처음 시도된 시형식이다.

소동파에 의해 화도시가 처음 지어진 이후로 화도시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많은 문인들에 의해 창작되었으며

한시의 다양한 형식속에서 화도시라는 한 영역을 구축하고 그 창작전통은 꾸준히 이어져왔다.

 

우리나라에서의 화도시는 고려조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擬古和陶> 4首에서 시작하여¹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상촌象村 신흠申欽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극원屐園 이만수李晩秀 등에 의해

비교적 많은 양의 화도시가 지어졌다.

 

►1) 본고에서는 ‘和陶詩’만을 연구대상으로 함을 미리 밝혀 둔다.

도연명의 작품에 화운한 것으로 남윤수南潤秀가 ‘和陶辭’와 ‘和陶詩’를 통합한 연구를 진행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화도사和陶辭’로 이인로李仁老가 지은 <和歸去來辭> 1편이 있다고 밝혔다. 이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화답한

것이므로 여기서는 도연명의 시에 화운한 최초의 시를 밝힌 것이다.

 

권근의 <의고화도>는 도연명의 운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도연명의 뜻에 따라 화운한 우리나라 최초의

화도시라 할 수 있으며² 나머지 김시습ᆞ신흠ᆞ김수항ᆞ이만수는 50수 이상의 화도시를 지은 작가들이다.

 

►2) 이영숙(2012) <屐園 李晩秀의 ‘和陶詩’硏究> 동양한문학연구 제35집, 동양한문학회.

 

이처럼 고려조부터 시작된 화도시 창작전통은

계속 이어져 조선조에 들어서는 더욱 활발한 창작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황ᆞ김종직ᆞ송시열 등 유학자들도 그 창작대열에 합류하여 도연명과 소동파가 문학가들뿐만 아니라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그들의 문학으로 존숭 받았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조선조의 화도시 창작전통은 조선후기의 극원 이만수에게서 도연명의 시 전체를 화운하는 150수의

화도시로 나타났고 그 창작전통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져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1870-1945)에게서

우리나라 한문학사의 마지막 화도시 120수가 지어졌다.

 

회봉 하겸진은 조선후기에 태어나 대한제국기ᆞ애국계몽기를 거쳐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인물로

우리나라 한문학의 종장기에 활동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한문학적 성과는 결코 한문학의 종장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양적으로도 많고, 질적으로도 뛰어난 것이었다.

 

그는 1700여 수에 가까운 한시를 남겼으며

우리나라 한문학사의 마지막 시화집이라 할 수 있는 <東詩話>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화도시 뿐만 아니라 수미음首尾吟 집자시集字詩 ᆞ회문시回文詩 등 다양한 형식의 시를 지어

일제강점기 종식되어가는 한문학의 장을 풍성하게 하였다.

 

본고에서는 하겸진의 화도시와 소식의 화도시를 비교하여 두 인물간 화도시의 同異점을 분석하고

그 의식의 차이 및 시대적 상황이 미친 영향 등을 파악해 보도록 하겠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두 사람 화도시의 특징을 알게 될 것이고, 시대를 초월하여 창작되어온

화도시의 의미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연구가 진행되어 회봉의

 

문학성을 알리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일제강점기를 근대한문학의 시기로 보는 시각을 공고히 하고

그 지평을 넓히는데도 일조하게 될 것이다.

 

Ⅱ. 시대적 배경과 창작배경 검토

 

회봉 하겸진과 동파 소식은 그 생존시대와 문학에 있어 많은 간극을 가진 인물로

동일선상에 놓고 논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화도시라는 공통점을 놓고 보면 두 사람에게서 공통점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소동파는 王安石의 新法을 반대하고 비판함으로써 流配와 解配를 반복하며 고난의 인생에 대한 여정을

시로 풀어내었고, 하겸진은 망국에 대한 恨과 망국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의 고통을 시로 풀어내었다.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화도시의 창작배경을 살펴봄으로써

문학가이자 지식인으로서 그들이 지녔던 시대적 아픔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이렇게 시대 상황과 그것에 결부된 그들의 화도시 창작배경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우리는 그들의 화도시를 좀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一端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회봉과 동파라는 두 인물이 시공을 초월하여 시를 통해 만나 서로 교감하며 동화되어 가는 과정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이 화도시라는 공동의 매개물로 조우하게 된 하나의 원인이 된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1. 시대적 배경

하겸진의 자는 숙형叔亨, 호는 회봉晦峯, 본관은 진양晉陽으로 1870년 晋州 士谷里에서 태어났다.

회봉은 어렸을 때부터 영민하여 祖父인 만취晩翠 하학운河學運(1815-1893)이 매우 아꼈다고 한다.

 

그가 출생한 시기는 1866년 병인양요로 인하여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 등이 서양 문물을 배척하여 통상에 반대하고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내세워 개항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위정척사운동이 확대되던 시기였다.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된 후에 회봉은 파리장서사건과 2차 유림단 사건에 관여하여 두번의 옥고를 치렀다.

파리장서사건은 스승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1864-1919)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고

2차 유림단 사건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의 부탁에 의한 것이었다.

 

두 번의 옥고와 <국성론國性論><명장열전名將列傳><용장열전勇將列傳> 등으로

국민의식을 고취시키며 항일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道를 부지하고 지켜서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었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망국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가장 큰 혼란과 암흑의 시기이며

자기 정체성과 시국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시대에 대한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을 어떤 형식으로든 표출하게 되는데

회봉은 그것을 항일과 저술활동ᆞ후학양성으로 나타내었으며

이러한 그의 의식들은 문학에 그대로 녹아들어 한문학의 종장을 갈무리하는 문학적 결정으로 승화되었다.

 

소식의 자는 자첨子瞻 또는 화중和仲이며 호는 東坡居士로 북송 때 사람이다.

8세 때부터 미산현眉山縣의 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道家 특히 莊子의 齊物哲學을 접하게 되었다.

 

1056년 21세 때 부친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상경하여 그해 가을 進士가 되었고

이듬해 禮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나란히 급제했지만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1060년 服喪을 마치고 수도인 開封으로 돌아온 소동파는

관리임용 특별시험인 制科에 동생과 함께 급제하여 문명을 드날렸다.

 

그러나 소식의 관직생활은 王安石의 新法과 결부되어 그렇게 순탄치 않았다.

균륜법均輪法 ᆞ청묘법靑苗法 등 이른바 신법에 반대했던 소식은 지방을 전전하며 관직생활을 했고

그 과정에서 신법으로 고생하는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써 묘사한 것이 이른바

‘오대시안烏臺詩案’이라는 사건으로 비화되어 어사대의 관원들에게 체포당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다행히 사형을 면한 그는 100일간의 구금에서 풀려나 黃州로 流刑을 가

‘東坡’라는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5년간의 황주 생활동안 소식은 <赤壁賦>라는 걸출한 문학적 성과를 내어 놓음으로써

타고난 문학적 자질로 현실의 고뇌와 갈등을 승화시켜 가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후 神宗이 죽고 哲宗이 즉위하자 선인태황후宣仁太皇后가 섭정을 하며 司馬光을 소환하여 신법을 폐지하고

소동파도 다시 발탁되어 禮部郎中에서 시작하여 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知制誥가 되었다.

 

그러나 이 생활도 오래가지 못하고 사마광 死後 다시 신법은 부활되었고 소동파는 좌천되어 惠州司馬가 되었다.

이후 소동파는 지방관을 전전하며 담주儋州까지 좌천되는 고초를 당했다.

 

이름은 좌천이었지만 실제로는 유배생활과 다름없는 관직생활이었고 이런 고초를 당하면서도

소동파는 도연명처럼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깊은 비애를 갖고 있었다.

 

소동파는 일생동안 귀향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귀향에 대한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귀향에 대한 강한 희망은 동파 자신이 아무 것에도 구속받기 싫어하는 천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그는 자신의 관직 생활을 물고기나 짐승이 어항이나 우리에 갇혀서 자연본성을 잃어 가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도연명을 심리적인 위안의 대상이나 정신적인 탈출구로 삼았던 것인데, 이것이 나이가 들고 현실의

경험이 풍부해지면서 도연명에 대한 기탁은 귀향이 아닌 그 정신적인 경지, 시정신으로 전이되어 갔다.³

 

►3) 안희진安熙珍(2002) <소식의 ‘和陶詩’를 논함> 中國學論叢 제13집

 

그리하여 그는 1902년 56세 때 <화음주> 20수로 시작한 화도시를 혜주와 담주에서 꾸준히 이어

담주를 떠날 때까지 약 8년간에 걸쳐 창작했다.

인생의 말년에 접어들면서 도연명에게 가지고 있었던 존모를 시를 통해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2. 화도시 창작배경

회봉이 화도시를 짓게 된 데에는 그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도연명과

소동파에 대한 경도가 영향을 미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가 화도시를 지으며 쓴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소동파는 스스로

“내가 도연명을 좋아하는 것이 어찌 유독 그의 시를 좋아하는 것뿐이겠는가?

그의 사람됨에 대해서도 진실로 감동한 바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뜻을 얻은 곳에 이르러서는 도연명에게 부끄러움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대체로 그 의도는 도연명을 자신에게 견준 것이다.

 

하지만 소동파와 도연명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같지 않다.

그러므로 도연명은 寓意와 근심에 찬 분노가 많으며

소동파는 호방한 필치로 유희遊戱함이 있으니 이는 작은 차이일 뿐이다.

 

내가 사는 시대의 상황은 도연명과 같고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는 것은 또한 소동파와 같다.

그러나 도연명에 대해서는 끝내 부끄러움만 있다.

어찌 도연명에게만 부끄러움이 있겠는가?

또한 소동파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을 수가 없다.⁴

 

►4) 하겸진河謙鎭 <회봉선생유서晦峯先生遺書> 권8, <和陶詩>

“東坡自云 吾於淵明 豈獨好其詩哉 如其爲人 實有感焉 又曰 至得意處 無愧淵明 蓋其意 以淵明自況也

然而東坡與淵明 所遭時世 不同 故淵明多寓意憂憤 東坡或乃肆筆游戱 此爲少異耳 余則時世 與淵明同

好淵明之詩 亦與東坡同 而於淵明 終有愧焉 豈惟有愧淵明 又不能無愧東坡”

 

화도시를 지으면서 쓴 이 서문에서 회봉은 소동파의 화도시 서문을 인용하여

자신도 도연명의 시를 좋아했다고 밝히며 그 점이 소동파와 같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회봉이 도연명과 소동파에 대해 상당히 경도되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소동파의 시권을 읽고 그것을 따라보고자 동파가 했던 것과 동일하게 도연명의 시에 화답했다고 밝혔다.

 

행위의 선후를 따지자면 동파에게 경도된 것이 먼저이고 그 경도된 행위의 결과로 <화도시>를 짓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도연명에 대한 선의의 감정도 저변에 깔려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회봉의 문집을 살펴보면 그가 도연명에게 보다 소동파에게 더 많이 경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회봉선생유서>에서 ‘淵明’은 31번 등장하고 ‘東坡’는 38번 등장한다.

 

특징적인 것은 ‘연명’의 경우는 ‘화도시’와 관련된 시에서 나타난 것 외 詩, 書, 序文, 記文, 墓碣銘 등에서

고루 나타난다는 점이고 ‘동파’의 경우는 주로 次韻詩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회봉은 소동파의 시에 차운한 시를 많이 지었는데 화도시도 소동파의 시를 차운한 하나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 등을 고려해 보았을 때 소동파가 회봉에게 미친 영향은 크며

다른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보아도 소동파가 회봉에게 미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회봉은 1931년 62세에 德谷書堂이라는 강학처를 만든 회봉은

같은 해 뜻을 함께 하는 벗 10여 명과 함께 조계강潮溪江 가에 만수당晩修堂을 축조한다.

 

만수당은 회봉이 뜻을 같이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축조한 것으로 당시 유학자들의 교류의 장으로 활용하였다.

이 ‘만수당’이라는 이름을 회봉은 소동파의 시에서 따왔다.

 

우소무력벽중음迂疎無力闢重陰 우활하고 힘없지만 무거운 그늘을 열고

복차도연기의심卜此徒然寄意深 이곳에서 공연히 깊은 뜻 부치노라.

향사풍류증궐수香社風流增厥數 향사香社의 풍류에 그 수를 더했으니

소공만졸획오심蘇公晩拙獲吾心 소공蘇公 만년 ‘졸자수拙自修’ 내 마음에 드네.

 

안전천경록강수眼前千頃綠江水 눈앞에 千頃의 푸른 강물 펼쳐졌고

정반량산청계림庭畔兩山靑桂林 뜰 가의 두 산 푸른 桂林으로 둘렀네.

대득진기도파료待得塵機都擺了 세속적 욕심을 모두 버리니

공안진악불난심孔顔眞樂不難尋 공자와 안회의 眞樂을 찾기 어렵잖네.⁵

 

►5) 하겸진河謙鎭 <회봉선생유서晦峯先生遺書>권4,

往年 余與同志諸人 起小堂潮溪嶺中 取東坡詩 下士晩聞道 聊以拙自修之語 名以晩修 因共拈韻賦之

 

이 시에서 회봉은 소동파의 시 구절 ‘하사만문도下士晩聞道 료이졸자수聊以拙自修’⁶에서

‘만문도晩聞道’와 ‘졸자수拙自修’를 따다가 ‘晩修堂’이라 이름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6) 蘇軾 <東坡全集>권24 ‘빈가정소지貧家浄掃地’

貧家浄掃地 貧女好梳頭, 下士晩聞道, 聊以拙自修,

扣門有嘉客, 一飯相邀留, 舂炊勿草草, 此客未易媮,

慎勿用勞薪, 感我如薫蕕, 德人抱衡石, 銖黍安可廋

 

그리고 그렇게 ‘문도聞道’하고 ‘졸수拙修’하면서 孔子와 顔子의 도를 지키는 것으로

만년의 계획으로 삼으려 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노년을 정리하고자 지은 교유의 장에 붙인 이름을 소동파의 시에서 따온 것은

그가 평소 때도 소동파를 존숭하고 그의 시를 즐겨 보았음을 대변해 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이 뿐만 아니라 회봉은 소동파와 같은 감흥을 느끼려고도 노력을 했다.

그는 <乘小艇至絶壁下李孔遇台鎭誦東坡赤壁賦其聲滿江至夜始還>이라는 시에서 소동파가

적벽 아래에서 작은 배를 띄우고 노닐며 적벽부를 지은 것과 동일한 감흥으로 시를 짓기도 하였다.

 

그는

우두별래환차일牛斗別來歡此日 ‘견우성 북두성이 뜨도록 이 날을 즐기나니,

타년녕부소여금他年寧復少如今 훗날 어찌 지금처럼 다시 젊어지겠는가?’

라며 생의 유한함을 탄식하며 눈앞의 순간에 충실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적벽부에서

“우리네 인생의 짧음을 슬퍼하고 長江의 끝없음을 부러워하네.

신선을 끼고서 즐겁게 노닐며, 밝은 달을 안고서 길이 마치고 싶으나.

쉽사리 얻지 못할 것임을 알고, 슬픈 바람에 남은 여운 부치노라.”⁷

라고 말한 客의 소회와 상당부분 일치하는 심경의 표현이다.

 

►7)모곤茅坤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권144 <前赤壁賦>

哀吾生之須臾 羨長江之無窮 挾飛仙以遨遊 抱明月而長終 知不可乎驟得 託遺響於悲風

 

이처럼 회봉은 소동파 시에 차운하고 그의 감흥을 공유하는 등의 행위로

소동파에 대한 존모의 뜻을 나타내며 그의 詩作을 追和하였다.

 

화도시 창작에 있어서도 회봉은 동파의 화도시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도연명의 시중에서 동파가 화답한 작품만 화답하였으며

여러 편의 시에 서문을 써서 소동파와 관련된 부분을 설명하기도 했다.

 

한편 소동파가 화도시를 창작하게 된 데에는 도연명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소동파는 화도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 시인들은 그 옛 작품을 따라 하기는 하였지만 그 옛 시인들과 화운하는 시를 쓰지는 않았다.

옛 시인의 시에 화운하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아는 옛 시인 중에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오직 도연명의 시만은 좋아한다.

(····)

도연명의 시 중 109편의 화운시를 지어 매우 만족스러울 뿐만 아니라

도연명에게도 크게 미안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시들을 모아 시집을 만들고 후세사람들에게 전하여 나를 기리도록 한다.

그러나 나는 도연명의 시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에 있어서 더욱 감동을 받았다.⁸

 

►8) 蘇軾 <東坡全集>권31 <和陶詩序>

古之詩人 有擬古之作矣 未有追和古人者也 追和古人 則始於吾 吾於詩人 無所甚好 獨好淵明之詩 淵明作詩不多

然其詩質而實綺 癯而實腴 自曹劉鮑謝李杜諸人 皆莫及也 吾前後 和其詩 凡一百有九篇 至其得意 自謂不甚愧淵明

今將集而併録之 以遺後之君子 其為我志之 然吾於淵明 豈獨好其詩也哉 如其為人 實有感焉

 

화도시 서문에서 소동파는 특별히 좋아하는 시인은 없지만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며

자신이 화운시의 시발점이 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도연명의 시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람됨에 있어서는 더욱 감동을 받았다며

도연명의 지조 있고 청렴한 ‘固窮節’의 삶을 동경하였다.

 

소동파의 도연명에 대한 이러한 경도가 화도시를 짓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그는 화도시를 통하여 도연명에 대한 존모의 뜻을 선명하게 드러내었다.

 

Ⅲ. 화도시를 통해서 본 회봉과 동파

 

소동파가 살았던 시대와 회봉이 살았던 시대는 시간과 공간의 간극이 아주 크다.

그러나 그들은 도연명이라는 인물에게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그의 시와 인생에 동화되었다.

그 동화의 결과로 나타난 ‘화도시’는 두 사람의 내면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그들은 시를 통해 각각 같은 모습과

다른 모습을 나타내며 시공을 초월하여 문학으로 또 다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도연명과 회봉ᆞ소동파의 화도시 전체를 비교해 보면 아래 도표와 같은 현황을 얻을 수 있다.

<표 1> 도연명시와 하회봉·소동파 <화도시> 현황

►이 표는 일반 독자에게는 번거로울 뿐이라 생각해 생략함/空空

 

회봉은 소동파의 화도시 중 120수에 화답했다.

회봉은 <화도시> 서문을 통해

“소동파를 본받아 소동파가 화답한 것은 모두 화답하고, 소동파가 화답하지 않은 것은 화답하지 않았다.”⁹

고 화도시 창작 편수에 대해 밝히고 있다.

 

►9)하겸진河謙鎭 <회봉선생유서晦峯先生遺書>권8 <和陶詩>

余讀東坡和陶詩卷 因竊效之 而悉和其作 東坡所不和者 亦不和

 

위 도표에서 보듯 도연명의 시 중에서 소동파가 화답하지 않은 것은 회봉도 화답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東坡全集>에 수록된 화도시는 31卷에 78수, 32卷에 57수로 모두 135수인데 이 중 회봉은 120수를 화답하였다.

 

소동파의 <和陶詩> 중에는 <歸去來辭>를 이용한 集子詩 10수가 화도시에 포함되어 있는데

회봉은 이 집자시 10수를 따로 분리하여 「화도시」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동파는 <귀거래사>에 화답하여 <和歸去來辭>를 지었으나 회봉은 짓지 않았다.

이것을 제외한 소동파의 <화도시>는 모두 124수인데 이 중 <示周掾祖謝和淤城東學舍作>과

<和東方有一士>는 도연명의 시에는 없는 시이다.

 

그러므로 회봉은 소동파의 <화도시>에서 이 두 수를 제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歸田園居>가 6수인데 회봉은 도연명의 시 6수 중 1수는 江文通의 擬作이므로

동파는 알지 못해서 화답했으나 본인은 화답하지 않는다고 하였다.¹⁰

 

►10)하겸진河謙鎭 <회봉선생유서晦峯先生遺書>권8 <和歸田園居>

陶詩六首 其一 乃江文通擬作也 東坡蓋不知而誤和之 是爲可疑耳

 

그리고 <和答龐參軍>이 6수인데 5수만 화답했다. 이상에서 15수의 차이가 발생하였다.

이를 제외하고 회봉은 모두 소동파를 따랐으며 화도시의 서문 곳곳에서 소동파를 언급하며

소동파와 시흥을 일치시키려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20수나 되는 <화도시> 전체를 일일이 비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회봉과 동파의 화도시를 가장 대표할 만한

몇 수의 시를 중심으로 두 사람의 詩作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시는 개인적인 서정이 주를 이루어 표현되는 문학의 한 분야이다.

그러므로 회봉과 소동파의 화도시도 개인적인 서정이 주를 이루는데

이를 통해 두 사람 의식의 同異를 비교해 본다는 것은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현실인식에 대한 차이를 알아볼 수 있는 부분,

지식인이면서 통솔자로서의 자세에 대한 견해를 알아볼 수 있는 부분,

시대와 현실에 대한 개인적 소회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부분 등

세부분으로 나누어 두 사람에 대한 비교를 해보도록 하겠다.

 

이를 통해 비록 부분이기는 하지만 <화도시> 전체에 나타나는

두 사람의 의식세계에 대한 전모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기초하여 이 장에서는 두 인물의 시를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

농사와 농민에 대한 인식, 술을 통해서본 내면의 情懷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알아보기로 하겠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는

시에 나타나는 역사적 인물의 행적에 대한 평가를 통해 현실인식의 차이에 대해 알 수 있으며,

농사와 농민에 대한 인식에서는 농사와 농민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하층민에 대한 위정자 및 지식인으로서의 인식에 대해 알 수 있으며,

술을 통해서본 내면의 정회에서는 술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가감 없이 토로해 내는 내면세계에 대해 알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회봉과 동파가 몇백년이라는 시공을 초월하여 화도시를 통해 同異를 반복하며

어떻게 소통해 가는지에 대해 알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두 사람 화도시의 특징에 대해서도 파악해 볼 수 있다.

 

1.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

120수의 화도시 중에서 역사적 인물에 대한 회봉의 생각과 소동파의 생각을 선명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은

<화영형가和詠荊軻><화영이소和詠二疏><화영삼량和詠三良>이다.

 

이 시는 형가荊軻·소광疏廣 · 소수疏受 · 엄식奄息ᆞ중행仲行ᆞ침호鍼虎에 대해 읊은 시로 각 시에서 이들 인물의

행동에 대한 회봉과 소동파의 견해가 나타나 있으므로 그것을 통해 회봉과 동파의 의식세계를 알 수 있다.

 

화도시 120수 중에서 이처럼 회봉과 소동파의 의식세계에 대한 선명한 관점을 궁구해볼 수 있는 시는 없다.

먼저 <화영형가>를 통해 형가에 대한 회봉과 동파의 평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형가는 전국시대 齊나라 사람으로 燕나라 태자 丹의 문객이 되어

秦王을 암살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이 인물에 대해 도연명은 그의 기개와 용맹함을 높이 기려

기인수이몰其人雖已沒 천재유여정千載有餘情

‘사람은 비록 죽었지만, 천년토록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킨다.’라고 하였다.

 

이 형가에 대해 회봉도 도연명과 유사한 입장을 취하였는데, 시를 통해 그의 생각을 알아보도록 하자.

(····)

형경여연단荊卿與燕丹 형가와 연나라 태자 단은

역미위진영亦未爲眞英 또한 진정한 영웅은 아니라네.

배주상연낙杯酒相然諾 잔 들고 서로 승낙했으니

비이의위성非以義爲聲 의리로 명성을 내려한 것도 아니라네.

 

기심유가설其心猶可說 그 마음은 오히려 이야기할 만하니

자진기광생刺秦豈狂生 진왕 찌른 것 어찌 미친 삶이겠나.

 

일비수허척一匕雖虛擲 하나의 비수 비록 실패했으나

차이천하경此已天下驚 이 일에 이미 천하가 놀랐는데

 

고정엄서법考亭嚴書法 考亭의 엄정한 서법으로

내하도이명奈何盜以名 어찌 도적이라 이름 하였나.

(····)

산동중호걸山東衆豪傑 산동의 많은 호걸들이

절치지소영切齒之所營 이를 갈며 도모하던 바를

지경천가수止竟天假手 마침내 하늘이 손을 빌려주어

기공득내성奇功得乃成 기이한 공을 이룰 수 있었네.

 

절부연명의竊附淵明意 도연명의 뜻에 부쳐서

부차사오정賦此寫吾情 이렇게 나의 뜻을 펴보네.¹¹

 

►11)河謙鎭 <晦峯先生遺書>권8 <和詠荊軻>

 

회봉은 <영형가>에서 형가와 연나라 태자 단이 진정한 영웅은 아니라 평했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실패하였지만 그가 보여준 의연한 기개에 이미 천하가 놀랐다고 표현하며

나라와 민족을 생각한 그들의 높은 기개를 칭송하며 朱熹가 도적이라 이름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자신은 이들을 山東의 많은 호걸들이 切齒腐心하며 이루고자 한 일을 이루어낸 사람들로 평가하며

도연명의 뜻과 함께하며 자신의 심정에 대해 읊는다고 하였다.

 

시에 나타난 회봉의 정서로 보아 도연명과 그 뜻을 같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회봉이 형가를 이렇게 본 데에는 아마도 亡國이라는 시대가 미친 영향도 상당부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회봉은 파리장서사건에 직접 참여하는 등 항일정신을 실천한 인물로

항일운동가의 활동이 형가와 태자 단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형가와 태자 단에 대한 평가는 어쩌면 항일운동가들에 대한 평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소동파는 형가와 태자 단에 대해 세세한 논변을 하며 ‘狂生’이라 표현하였다.¹²

►12) 蘇軾 <東坡全集>권31 <和詠荊軻>

沙丘一狼狽 笑落冠與纓 太子不少忍 顧非萬人英 魏韓裂智伯 肘足本無聲 胡為棄成謀 託國此狂生

 

회봉이 ‘어찌 狂生이겠나?’ 하고 반문한 것이 소동파의 시로 기인한 것이다.

멸신회유시滅身㑹有時 서관가안행徐觀可安行(‘모일 회㑹=회會의 속자俗字. 會의 本字’)

즉 ‘죽는데도 때가 있으니 천천히 그 때를 기다려야 하는데’ 형가와 태자 단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형가불족설荆軻不足説 형가는 말하기도 부족하고

전자로가경田子老可驚 전광이라는 노인도 놀랍네.

연조다기사燕趙多竒士 연과 조에는 奇士가 많다는데(기특할 기竒)

석재역허명惜哉亦虛名 안타깝도다! 이 역시 허명이구나.

 

살부수기모殺父囚其母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가둠이

차기용천정此豈容天庭 이 어찌 하늘에 용납 받을 일인가?

망진지삼호亡秦只三户 진나라 망하는 것은 三戶로도 될 일인데

황아수십성况我數十城 하물며 우리 수 십 개의 성에 있어서랴.¹³

 

►13)蘇軾 <東坡全集>권31 <和詠荊軻>

 

소동파는 진나라가 세워진 배경에 있는 부도덕과 진나라의 부패,

지도자의 무능력과 타락에 따른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논변하듯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자멸하게 될 진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아까운 청춘의 목숨을 버린 것은 무모한 행동이라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소동파는 진시황이 자신의 생부인 여불위를 죽이고, 어머니를 연금시킨 것에 대해 언급하며

천륜을 저버린 사람이 황제의 자리에 있는 이상 진나라가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예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주 적은 사람으로도 진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데 큰 희생이 있었음을 안타까워하며

이런 이치를 간파하지 못한 연나라 조나라 자객들의 자세를 신중치 못함으로 인식하였다.

 

소동파 시의 특징 중 하나가 사변적이고 철리적이라는 것이다.

사변성이란 시의가 정서의 묘사를 넘어서 깊은 사색과 철학의 색채를 띠고 있다는 말이다.

 

후대 사람들은 소식의 사변성 짙은 이런 경향을 “논변하듯 시를 지었다”고 지적하였지만 그의 이러한

사변성 농후한 시적 특징은 그 자신이 말한 이른바 ‘언어를 넘어선 의미의 세계’를 시 창작에 부여하며

인생과 예술에 대한 한층 성숙된 관점을 드러낸 것이다.¹⁴

 

►14) 안희진(2009) <소동파에게 시를 묻다> 청동거울.

 

소식의 이러한 시적 특징을 고려하여 위의 시를 볼 때 상당히 논변적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소동파는 자신의 감정은 자제하고 절제된 어조로 하나하나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논변하듯 시를 썼다.

이 시에서는 형가와 연나라 태자 丹 이외에도 진시황ᆞ여불위ᆞ李斯ᆞ태자扶蘇ᆞ智伯ᆞ田光ᆞ高漸離 등

많은 역사적 인물을 거론하면서 형가와 태자 단이 좀 더 이성적이면서 냉정한 선택을 했어야 하는 당위성을

시로 나타내었다.

 

그야말로 ‘논변하듯’ 시를 쓴 것이다.

또 다른 경우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차생태산중此生太山重 이 목숨 태산처럼 무거운데

홀작홍모유忽作鴻毛遺 홀연히 기러기 깃털이 되었네.

 

삼자사일언三子死一言 세 사람이 말 한마디에 죽었는데

소사량이미所死良已微 죽은 것이 참으로 너무 미미하네.

 

현재안평중賢哉晏平仲 어질도다. 안평중은

사군불이사事君不以私 임금을 섬기되 사사로움으로써 하지 않았네.

(····)

위과진효애魏顆真孝愛 위과는 참으로 효성스러웠으니

삼량안족희三良安足希 삼량을 어찌 바랄 수가 있겠는가?

 

사환기불영仕宦豈不榮 벼슬살이가 어찌 영예롭지 않겠냐마는

유시전우비有時纒憂悲 때때로 근심과 슬픔에 얽히네.

소이정절옹所以靖節翁 그러므로 정절옹은

복차검루의服此黔婁衣 이렇게 검루의 옷을 입었네.¹⁵

 

►15) 蘇軾 <東坡全集>권31 <和詠三良>

 

이 시는 신하로서 자신이 모시는 왕을 위해 죽은 三良에 대해 읊은 시다.

삼량은 엄식奄息ᆞ중행仲行ᆞ침호ᆞ鍼虎로 춘추 시대 秦나라 穆公을 따라 죽은 子車氏의 세 아들이다.

진목공이 죽었을 때 177명을 순장했는데 이들도 같이 순장되었으며

진나라 백성들은 이 세 사람의 죽음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하며 애도를 표했다.

목숨을 바쳤다는 점에 있어서는 <영형가>와 같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상황이 또 다르다.

 

형가는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죽음이지만 이들 삼량은 선택이 아니라 따라야 하는 명령이었다.

소동파는 이 세 명의 순장자들에 대해서도 아주 이성적으로 그 부당함을 하나씩 논변하였다.

 

그는 목숨을 깃털처럼 가볍게 여김은 참으로 미미한 죽음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같은 상황에서 명분을 찾아 죽음을 면한 안평중晏平仲을 현명하다고 하였다.

 

안평중은 자신이 모시는 군주인 제齊 장공莊公이 죽었으나

따라 죽지 않고도 자신의 의리와 절개를 지킴으로써 賢人으로 존중 받았다.

 

바로 이 점을 들어 삼량도 죽음보다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음을 시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道에 따라 죽는 것이 옳으니 세 신하가 보여준 의리는 大節이 아니며

도에 따라 따를 수도 따르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그 현명한 길을 선택해야 함을 말하였다.¹⁶

 

►16)蘇軾 <東坡全集>권31 <和詠三良>

殺身故有道 大節要不虧 君為社稷死 我則同其歸 顧命有治亂 臣子得從違

 

그리고 마지막에서 벼슬살이가 어찌 명예롭지 않겠냐마는 그것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우비憂悲’에 휘말릴 수 있으므로 도연명이 黔婁처럼 검약하고 청빈한 삶을 선택한 것이라고 마무리 했다.

같은 시를 회봉은 어떻게 화답했는지 보도록 하자.

 

의벽림말명懿辟臨末命 아름다운 왕 생을 마침에

특용현인유特用賢人遺 특별히 현인 쓰라 유언 남겼네.

현인감차골賢人感次骨 현인은 감동이 뼈에 사무쳐

욕보기기미欲報豈其微 보답하려함 어찌 미미하리오.

(····)

상관림혈시想觀臨穴時 무덤에 임했을 때 상상해보면

췌률정가비惴慄情可悲 두려워 떨었을 마음 슬프다네.

백신수가속百身誰可贖 몸을 백 번 바친다 한들 누가 되살리리

천재공첨의千載空沾衣 천년 뒤 부질없이 옷깃 적시네.¹⁷

 

►17)하겸진河謙鎭 <회봉선생유서晦峯先生遺書>권8 <和詠三良>

 

회봉도 세 사람의 죽음이 옳지 못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회봉은 소동파처럼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근거를 들어 논하기 보다는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세 사람의 정황을 온정적인 입장에서 헤아리고 있다.¹⁸

 

►18) 河謙鎭 <晦峯先生遺書>권8 <和詠三良> 其初三子意 豈願同此歸 君令迫如火 微命固難違

 

그리고 그들의 입장에서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을 헤아리며

시인으로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같이 아파하며 논변이나 사변은 없다.

 

‘몸을 백 번 바친다 한들 누가 되살리리’라고 한 구에서는

의미 없이 죽어간 생명에 대해 되돌릴 수도 없는 안타까움을 읊고 있다.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죽음을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 되는 일임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형가의 경우는 의롭게 자신이 목숨을 바친 경우이나 삼량의 경우는 죽임을 당한 것이다.

소동파는 삼량의 선택이 어질지 못한 것이라 비판하였지만 회봉의 시에서는 비판은 없고 동정이 있다.

즉 통치자의 입장에서 아랫사람의 목숨을 존중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은 있지만

삼량이 그 命을 거절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은 없다.

 

‘秦穆公이 세 신하의 목숨을 사사로이 여김은 공자가 木偶人 만든 사람을 비판한 것

[秦穆胡爲哉 三子視爲私 作俑猶無後 況爾重臣帷]’보다

심하다고 한 것을 보더라도 人道를 벗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존중되지 못하고 강자에 의해 자유의지를 갖지 못하는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모습이다.

삼량의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에 대한 생각은 회봉과 소동파가 같으나 회봉은 유가의 道에 근거하여

위정자에 대한 비판을 하였고 소동파는 개인의 소신과 지혜로운 판단이 부족한 것에 대한 결과로 보았다.

 

회봉은 도의 실천을 강조한 유학자이며, 재도載道와 정명精明의 문학관을 가진 문학가이고,

소동파는 문학적 기예와 정신적 깊이가 함께해야 한다는 소위 ‘도기병진道技竝進’의 생각을 가진 문학가이다.

이러한 미묘한 생각의 차이들이 시에서 회봉은 도를 강조하는 방면으로

소동파는 문학적 기예와 정신적 깊이를 강조하는 방면으로 다르게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회봉의 입장에서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 또한 강자에게

억압받고 탄압받는 민족에 대한 동정을 하도록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이대부賢哉二大夫 어질구나 두 대부여!

위지저군부位至儲君傅 지위가 태자의 사부에 이르렀는데,

일조걸해골一朝乞骸骨 하루아침에 물러나길 청하여

용퇴심향로勇退尋鄕路 과감히 물러나 고향으로 떠났네.

(····)

연명작차시淵明作此詩 도연명은 이 시를 지어서

지위후세려秖爲後世慮 후세 사람들 위해 염려하였고

자기미상사自己未嘗仕 자신은 일찍이 벼슬하지 않아서

천재의우저千載義尤著 천년의 의로움 더욱 드러나게 했다네.¹⁹

 

►19) 河謙鎭 <晦峯先生遺書>권8 <和詠二疏>

 

이 시는 西漢 때 동해 난릉蘭陵 사람인 소광疏廣과 소수疏受 두 사람이

각각 太子太傅와 太子少傅라는 벼슬을 맡아 5년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간 것을 기리는 내용이다.

 

소광과 소수는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공을 이루었으니 몸은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조금의 미련도 없이 자리에서 물러났다.²⁰

 

►20)반고班固 <전한서前漢書>권71

廣謂受曰 吾聞 知足不辱 知止不殆 功遂身退 天之道也 今仕官至二千石 宦成名立 如此不去

懼有後悔 豈如父子相隨出關 歸老故郷 以壽命終 不亦善乎 受叩頭曰 從大人議 即日父子俱移病

滿三月賜告 廣遂稱篤 上疏乞骸骨 上以其年篤老 皆許之 加賜黄金二十斤 皇太子贈以五十斤

 

회봉도 이 두 사람의 행동을 기리며 어질다 칭송하였으며 도연명과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두 사람의 행동이 凡人으로서는 하기 힘든 일임을 기리며 의리를 선택한 것에 대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소동파는 여기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졌을까?

 

(····)

중흥다명신中興多名臣 유도독량부有道獨兩傅 중흥에는 명신이 많은데, 유독 두 사부만 말을 하네.

세도방곡격世途方轂撃 수긍행차로誰肯行此路 세상길 바야흐로 번화하지만, 누가 즐겨 이 길을 가겠는가?

(····)

연명작시의淵明作詩意 묘상비속려妙想非俗慮 도연명이 이 시를 지은 뜻은 오묘한 생각이지 속된 뜻은 아니라네.

서기이대부庶㡬二大夫 견미이지저見微而知著 아마도 두 대부는 은미함을 보고서 드러날 것을 알았구나.²¹

‘몇 기㡬=(同字)기畿 기畿’

 

►21)蘇軾 <東坡全集>권31 <和詠二疏>

 

소동파도 회봉과 같이 두 대부의 결정을 대단하다 여기고 칭송하고 있다.

세상길이 번화하지만 두 대부의 길을 즐겨 선택할 사람은 없음을 말하고

그 길을 선택한 두 대부를 세상 사람들이 칭송함을 당연하게 여겼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할 것은 도연명과 회봉이 지적하지 않은 점으로 두 대부를 칭송하였다는 것이다.

소동파는 서기이대부庶㡬二大夫 견미이지저見微而知著

“아마도 두 대부는 은미함을 보고서 드러날 것을 알았구나.”라고 두 대부를 칭송하였다.

 

단순하게 그칠 때를 알아 그쳤다고 칭송한 회봉과 도연명의 입장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인다.

漢나라 선제宣帝 때 황태자 석奭은 겨우 12세에 논어와 효경을 통달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태자가 선제에 이어

27세에 등극하여 親政했지만 오히려 정사를 살피지 못하고 師傅인 소망지蕭望之를 정위廷尉에 불러다가

하옥시켜 두 번이나 사부를 감옥에서 욕되게 하였고 끝내 죽인 인물이다.

 

그러므로 소동파는 소광과 소수가 태자의 12세에

그 자질과 지취志趣를 이미 알고 떠남으로써 미래에 닥칠 화를 예방했다고 보았다.

 

단순한 청렴과 소신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先見之明을 갖춘 현명함으로 본 것이다.

역사적 인물의 평가를 통해서 회봉과 소동파의 현실인식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면

회봉은 유가적 의리에 입각한 상당히 규범적인 평가를 하는 것에 비해

소동파는 상당히 냉철하면서 현실적인 모습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 회봉에게서는 일제강점기를 감내하며 求道와 講學으로 생을 보내게 하였고

소동파에게서는 도연명을 존모하고 동일시하면서도 끝내는 隱者로의 삶을 살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2. 農事와 農民에 대한 인식

농사는 국가의 大本이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농민은 위정자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계층으로

농민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위정자의 인품을 읽을 수 있다.

 

농사와 농민을 소재로 한 시를 통해 회봉과 소동파는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화도시 중에서 농사에 대한 시는 <화권농> 6수로, 도연명은 시 6수만 지었지만

회봉과 소동파는 간단한 서문을 써서 설명을 부가하였다.

 

이도 회봉이 소동파의 화도시를 본받았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이다.

먼저 두 인물의 서문을 비교해 보자.

 

우리나라는 예부터 ‘農國’이라 일컬어졌다.

나라가 망한 뒤로 이른바 농사를 장려하는 자들은 오로지 농사를 어지럽게만 할 뿐이다.

거기다 자신들의 요구를 더해서 날마다 농민을 번거롭게 하니 삶도 보전치 못하고 굶주려 떠돌다가

해외에서 먹는 것을 해결하는 사람이 해마다 몇 천ᆞ 몇 백인지 알 수 없다.

 

내가 이 시에 화답하여 그런 사실들을 슬퍼한다.²²

해남에는 거친 땅이 많아 풍속에는 향을 파는 것을 업으로 하며,

생산하는 벼는 먹기에도 부족해 고구마나 잡미로 죽을 만들어 배를 채웠다.

나는 그것이 애닮아 도연명의 권농이라는 시에 화답하여 지혜 있는 자들에게 알린다.²³

 

►22)河謙鎭 <晦峯先生遺書>권8 <和勸農>

吾邦古稱農國 自革運之後 所謂奬勵農作者 適所以撓之而已 加以微求 日煩民

不聊生 飢餓轉徙 以糊口於海外者 歲歲不知幾千百人 余爲和此詩 以哀之

 

►23)蘇軾 <東坡全集>권31 <和勸農>

海南多荒田 俗以貿香為業 所産秔稌不足於食 乃以藷芋雜米

作粥糜以取飽 余既哀之 乃和淵明勸農 以告其有知者

 

서문만을 비교해보면 <화권농>이라는 시에서는 두 사람 모두 愛民意識의 발로로 시를 짓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두 인물이 처한 시대와 상황이 다르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먼저 회봉은 힘들여 농사를 짓는 것은 농민이지만 그 수확에 대한 혜택은 누리지 못하고 모두 일제의 수탈의

대상이 되어 농사만으로는 생계를 해결하지 못한 농민들이 농사를 버리고 공장의 노동자 또는 해외 이주자 대상이

되어 떠돌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삶을 살게 된 일제강점기 농민들의 현실을 개탄하여 시를 짓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소동파는 자신이 유배와 다름없이 좌천된 儋州 즉 지금의 海南島에서 습한 기후와 풍토병에 시달리며

기후가 나빠 농사를 짓지 못하는 탓에 먹는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사는 그 지역 주민들의 삶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읊은 것이다.

 

두 사람이 <화권농>의 대상을 농사로 본 점,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읊은 점,

그리고 농민들의 삶이 조금은 더 나아지기를 바랐던 점 등은 공통적으로 나타난 정서라 할 수 있겠다.

‘농사’는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대가 이루어지는 주제였다.

 

석서식묘碩鼠食苗 호사아궤胡使我匱 큰 쥐가 밭에 난 싹을 먹어, 어찌 우리로 하여금 궁핍하게 하는가.

담석무저甔石無儲 지경해기砥京奚冀 항아리엔 한 섬의 곡식도 없는데, 태평함을 어찌 바라겠나.

호구우외糊口于外 무원부지無遠不至 밖에 나가면 입에 풀칠이라도 하니, 멀어도 이르지 못할 곳이 없네.

사연수유思延須臾 녕불내괴寧不內媿 잠깐이라도 연명할 것만 생각하니, 어찌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나.²⁴

►24)河謙鎭 <晦峯先生遺書>卷8 <和勸農>

 

천화이토天禍爾土 불맥부직不麥不稷 하늘이 너희들 영토에 재앙을 내려, 보리도 안 되고 피도 안 되네.

민무용물民無用物 괴진시식怪珍是殖 백성들은 쓸 물건이 없고, 괴이한 보배만 번식하네.

파궐훈목播厥薫木 부여시색腐餘是穯 그 향기 나는 나무를 번식시켜, 썩은 나머지를 거두어들이네(거둘 색穯)

탐부오리貪夫汚吏 응지랑식鷹鷙狼食 탐욕 많은 사람과 더러운 관리는, 매같이 먹고도 이리같이 먹네.²⁵

►25) 蘇軾 <東坡全集>卷31 <和勸農>

 

위의 시에서 회봉과 소동파는 같은 목소리로 관리들의 부패를 질타하고 있다.

회봉은 부패한 관리를 큰 쥐에 비유하였고 동파는 ‘탐부오리貪夫汚吏’가

자신들의 욕심을 다 채우는 바람에 농부들은 생계를 해결하기가 힘듦을 말하고 있다.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와 공간은 많이 다르지만 그 시공을 초월하여 농민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현실의 비극임을 알 수 있다.

 

일부 탐욕 많은 관리와 地主의 손에 들어 가버린 그 양식은 농민들의 생존을 담보로 하는 식량이기에

그것을 잃어버린 농부들은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생존수단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회봉과 소동파는 거기에 대해 함께 개탄하고 있다.

 

자이려서咨爾黎庶 균시천민均是天民 아 너희 백성들은, 모두 하늘의 백성이다.

궐초부성厥初賦性 왈정이진曰靜而眞 너희가 처음 타고난 품성은, 고요하면서도 진실하다네.

무감요이無敢撓爾 호악시인好惡是因 감히 그러한 본성을 꺾으려 말게나, 좋아하고 싫어함이 이로 인해 생기네.

주자능시疇玆能是 오왕성인吾王聖人 누가 곧 이에 능하겠는가, 우리 왕이신 성인이시라네.²⁶

►26) 河謙鎭 <晦峯先生遺書>권8 <和勸農>

 

자이한려咨爾漢黎 균시일민均是一民 아 너희 漢 백성들은, 모두 하나의 백성이라.

비이불훈鄙夷不訓 부기기진夫豈其真 비루한 오랑캐라 가르치지 않았다니, 그 어찌 진실이겠는가?

원분겁질怨忿刼質 심과상인尋戈相因 원망과 분노로 바탕을 없애서, 싸우는 데 서로 원인이 되네.

기만막소欺謾莫訴 곡자아인曲自我人 속이는데도 호소할 곳 없어, 우리들을 왜곡하게 되네.²⁷

►27)蘇軾 <東坡全集>卷31 <和勸農>

 

이 시에서도 회봉과 동파가 백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일치하고 있다.

회봉은 백성을 ‘天民’이라 표현하고 있으며 동파는 오랑캐라 불리는 비루한 변방에 사는 백성이라도

모두 같은 ‘하나의 백성[一民]’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백성의 존재는 ‘천민’ ‘일민’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존중받아야할 존재이지

신분의 귀천으로 주거지의 귀천으로 천대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봉은 위정자들이 백성들이 타고난 품성을 잘 지켜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고

동파는 비천한 지역에 사는 백성일지라도 하나의 백성이므로 그곳까지 통치력이 미치도록 해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킬 수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 밖에도 <화권농>이라는 다른 시에서 회봉은 농부들의 선한 본성을 기리며

그들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神과 같다고 말한다.²⁸

►28)河謙鎭 <晦峯先生遺書>권8 <和勸農>

擧世訾農 謂爲朴鄙 驅若禽犢 勿齒冠優 誰知至愚 與神一軌 靜爾俟時 無汙德美

 

그리고 동파는 무지한 해남도지역의 농민들을 위하여 교화하고 계몽시켜

그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어 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 준다.²⁹

►29)蘇軾 <東坡全集>卷31 <和勸農>

聽我苦言 其福永久 利爾鉏耜 好爾鄰偶 斬艾蓬藋 南東其畝 父兄搢梃 以抶游手

 

<화권농>이라는 시에서는 회봉과 소동파가 시공을 초월한 愛民意識으로 서로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회봉의 <화권농>에는 일제강점기 피폐한 농민의 일상이, 그리고 소동파의 <화권농>에는 변방으로 좌천되어

말단관리로 살아가는 소동파의 일상과 중앙에서 벗어난 변방지역 주민들의 피폐한 삶이 나타나 있다.

 

시대는 분명 다르지만 현실의 고난을 극복해가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회봉과 동파가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 술을 통해서 본 내면의 정회情懷

술이라는 것은 윤리에 기반한 인간의 이성을 해제시키고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문학에는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나타낼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 술이며 인간은 이 술에 기탁하여

내면에 누적된 자신의 감정들을 솔직하게 토로해 내고 또 현실에서의 고뇌를 해소해 가기도 한다.

 

그러므로 술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이 많으며 특히 시가 많은 것이다.

회봉과 소동파가 술을 통해 풀어낸 개인적인 소회들도 다른 시에 나타난 정서보다는

좀 더 솔직하고 거짓 없는 내면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이 장에서는 술에 나타난 두 사람의 소회를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소동파는 술을 아주 좋아한다기보다 술을 마시는 그 분위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이는 그가 지은 <화음주>의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오음주지소吾飮酒至少 상이파배위락常以把杯爲樂

내가 술을 마시는 것은 지극히 적어서 항상 술잔을 잡고 있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왕왕퇴연좌수往往頹然坐睡 종종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앉아 졸고 있으면

인견기취이오중료연人見其醉而吾中了然 사람들이 보고 취했다고 하지만 나의 정신은 또렷하여

개막능명기위취위성야蓋莫能名其爲醉爲醒也 취했다고도, 취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재양주시在揚州時 양주에 있을 때

음주과오첩파飲酒過午輒罷 술을 마시다 오후가 지나서야 파하게 되었는데

객거해의반박客去解衣盤礴 손님들이 가고난 뒤 옷을 벗고 잔들은 널려 있는데

종일환부족終日歡不足 이적유여而適有餘 종일토록 감흥이 가시지 않고 여흥이 있어

인화연명음주因和淵明飲酒 20首 도연명의 음주 20수에 화답했네.³⁰

►30)蘇軾 <東坡全集>권31 <和飮酒>

 

여기서 소동파는 자신의 주량이 지극히 적으며 그냥 술잔 잡고 있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고 말하고 있다.

적은 양으로도 취하기 때문에 잔만 들고도 취한 듯 있으면 사람들이 취했다고 여기지만

자신은 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동파는 주량이 적어 적은 양의 술에도 취하는 사람이며

술을 마시는 그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감흥은 풍부하였기에 그 여흥으로 시를 짓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화음주>도 이런 과정에서 나온 시다.

 

아불여도생我不如陶生 세사전면지世事纒綿之 나는 도연명 같지 않아, 세상일들 나를 옭아매네.

운하득일적云何得一適 역유여생시亦有如生時 언제 한번 기회를 만나서, 나도 선생같이 살 때 있을까.

 

촌전무형극寸田無荆棘 가처정재자佳處正在茲 뙈기밭에 잡초가 없으니, 좋은 곳이 바로 여기라네.

종심여사徃縱心與事徃 소우무부의所遇無復疑 마음대로 일을 하며 지내도, 닿는 곳마다 다시 의심 없다네.

우득주중취偶得酒中趣 공배역상지空杯亦常持 우연히 술 속에서 의취 얻으니, 빈 잔도 언제나 들고 있다네.³¹

►31)蘇軾 <東坡全集>권31 <和飮酒> 其一

 

이 시에서 소동파는 도연명과 같은 생을 사는 것이 바램이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여 미천한 지방관직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것에 대한 회의감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현실에 대한 회의감을 소동파는 술로써 풀어내었다.

<화음주> 시는 그가 양주에서 지방관생활을 할 때 지은 시로 귀향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소동파가

현실에서는 그 꿈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도연명은 五斗米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없다며

彭澤縣令의 자리를 물리치고 20여 년간 고향에서 은거하다 생을 마쳤다.

 

소동파는 이러한 도연명의 隱者로서의 삶을 동경하였지만

그 자신은 끝까지 현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백년륙십화百年六十化 백년 인생 중 육십이 되고 보니

념념경비시念念竟非是 생각하고 생각해도 결국엔 잘못됐네.

시신여허공是身如虛空 이내 몸 허공과 같으니

수수예여훼誰受譽與毁 누구에게 명예와 욕을 받겠는가.

득주미거배得酒未舉杯 술 얻으면 잔을 들기도 전에

상아고망이喪我固忘爾 나도 잃고 너도 잊었네.

도상자감침倒牀自甘寢 침상에 쓰러져 단잠에 빠지니

불택관여기不擇菅與綺 거적이던 비단이던 가리지 않는다네.³²

►32)蘇軾 <東坡全集>권31 <和飮酒> 其六

 

인생의 노년에 접어들어 지나온 생을 반추하는 소동파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생각하고 생각해도 결국엔 잘못됐다.’라는 표현은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끝까지 부지하고 있었던 자신에 대한 자조 어린 표현이라 하겠다.

 

66세로 생을 마친 소동파의 일생을 두고 보았을 때

만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다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비웠으므로 다른 사람의 기림도 비방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술을 통해서 모든 것을 잊고 잠에 들며 그렇게 되고나면

인생의 부귀와 빈천에 대한 구분이 자신에겐 무의미한 것임을 마지막 구에서 읊고 있다.

 

표면적으로 자신을 자조하고 있는 듯하지만 세상의 물욕과 타인의 평가에 초연하며

자신의 호방한 기질대로 살아가는 소동파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준연식엽충蠢蠕食葉蟲 꿈틀거리며 나뭇잎 갉아먹는 벌레

앙공모고비仰空慕高飛 하늘의 바라보며 높이 날기를 바랐지.

일조부양시一朝傅兩翅 하루아침에 양쪽 날개 돋더니

내득점망비乃得黏網悲 끝내 거미줄에 걸리는 슬픔 당하네.

(····)

행차미화간幸此未化間 다행히 이렇게 되지 않는 중에도

유주군막위有酒君莫違 술 있으니 그 사양하지 말게나.³³

►33)蘇軾 <東坡全集>권31 <和飮酒> 其四.

 

이 시에서도 세상에 좌절한 소동파의 모습이 시의 초반부에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점망비黏網悲’는 소신을 펴지 못하고 좌절하게 된 소동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동파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마지막엔 술을 통해 이 모든 좌절과 갈등을 해소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현실참여를 추구하는 儒者로 겪은 좌절을 세속과의 거리를 두고자 하는 隱者의 자세로

치유하면서 유자와 은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 ‘飮酒詩’에 나타난 소동파의 모습이다.

 

그러면 회봉에게 있어 술은 어떤 의미를 나타낼까?

회봉은 소동파만큼 술을 즐기는 편도 그리고 문학에 적극 활용하는 편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에는 술과 飮酒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이 나타나는 편은 아니며

술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작품의 주가 되기보다는 간단한 소재로 언급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의 음주시를 한번 살펴보자.

 

무주고야장無酒苦夜長 유주갱음지有酒更飮之 술이 없어 긴 밤이 괴롭더니, 술이 있으니 다시 마시게 되네.

위환당진음爲歡當盡飮 단차소환시但此少歡時 기뻐지려면 마땅히 다 마셔야 하나, 다만 이는 조금 기쁠 때라네.

 

침음무류광沈吟撫流光 세월량여자歲月良如玆 조용히 읊조리며 흐르는 빛 어루만지니, 세월이 진실로 이와 같구나.

인생백년내人生百年內 하부유시의何復有猜疑 인생은 백년도 못 되는데, 어찌 시기하고 의심하겠는가.

 

차공환차주且共歡此酒 주진난중지酒盡難重持 이 술로 함께 기뻐하노니, 술이 다하면 다시 얻기 어렵다네.³⁴

먼저 ‘술이 없어 긴 밤이 괴롭다’는 첫 번째 구는 회봉이 처한 현실을

►34)하겸진河謙鎭 <회봉선생유서晦峯先生遺書>권8 <和飮酒>

 

대변하는 구절이라 하겠다.

일제강점기 ‘亡國’이라는 현실이 그에게는 평생의 한이므로 괴롭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면서

그 현실 속에서 시대를 긍정할 수 있는 무엇을 술을 통해 찾으려 한다.

 

그는 세월의 有限함을 인식하고 그 유한한 인생을 ‘시기와 의심’으로 채우기 보다는 술을 통해 기쁨을 얻고

그것을 통해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타고난 본성을 훼손하지 않고

지켜가는 유자로서의 자세를 그는 시 속에 나타내고 있다.

 

결려재궁항結廬在窮巷 초가가 궁벽한 시골에 있으니

가목상위경佳木相緯經 아름다운 나무 서로 위경을 이루었네.

우로지소유雨露之所濡 비와 이슬로 적셔져

소대각생성小大各生成 작은 대로 큰대로 각자 살아가네.

 

장석불일고匠石不一顧 장석이 한번 돌아보지 않아,

한서루변경寒暑屢變更 한서가 번갈아 찾아오네.

량풍감서황凉風撼書幌 서늘한 바람이 서당의 휘장을 흔들고

락엽몰전정落葉沒前庭 낙엽은 앞뜰을 뒹구네.

 

장야불능면長夜不能眠 긴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신계재삼명晨鷄再三鳴 새벽닭 두세 번 우는구나.

주진군막사酒進君莫辭 술을 내어 올테니 그대 사양 말게나,

아차진오정我且盡吾情 나 또한 내 정을 다하려 한다네.³⁵

►35)河謙鎭 <晦峯先生遺書>권8 <和飮酒> 其十六

 

회봉이 거처하는 주변의 경관과 그것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관조하고 있는 회봉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遠景을 느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회봉은 점차 시선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 뜰 앞의 낙엽에까지 시선을 옮기며 주변의 경관을 읊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술을 통해 자신과 객의 회포를 풀고자 하는 의중을 드러내었다.

회봉에게 있어서 술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는 수단이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서로의 속내를 가식 없이 드러내게 해주는 수단이며, 교류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내기 보다는

유학자로서의 바람직한 이상을 나타내고자 노력한 모습이 보인다.

 

‘飮酒’를 소재로 한 시도 이러한데 다른 시는 어떠할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는 부분이며

이러하기에 정인보鄭寅普는 그의 시를 ‘온유돈후溫柔敦厚’하다고 표현했을 것이다.³⁶

►36)하겸진河謙鎭 <동시화東詩話>권1 <동시화서東詩話序>

普 所見當今洛江東西 先生最爲耆儒 而詩古文 世無逾先生 其於詩 凡群所競尙 皆不屑焉

獨好櫟霞數公 語不迫而意己至者 戴記所云 溫柔敦厚 先生近之 今老矣 歎玆道危無繼緖

 

추운참장모秋雲慘將暮 가을 구름 쓸쓸히 저무려 하는데

악작동남비鸑鷟東南飛 악작鸑鷟은 동남쪽으로 날아가네.

서서구실려棲棲久失侶 쓸쓸히 짝을 잃은 지 오래되어

철야명성비徹夜鳴聲悲 온 밤 내 우는 소리 슬프네.

 

수가벽랑간誰家碧琅玕 누구 집의 푸른 낭간에는

중조흔상의衆鳥欣相依 뭇 새들이 기쁘게 서로 의지하네.

정인사아거情人辭我去 정인은 나를 버리고 떠나가서

삼세부지귀三歲不知歸 3년이 지나도 돌아올 줄 모르네.

 

란고류역절蘭枯柳亦折 난초가 마르고 버들도 꺾이어

좌상년광쇠坐想年光衰 앉아서 해가 갈수록 쇠해짐을 생각하네.

침탄부하익沈歎復何益 침울하게 탄식한들 다시 무슨 이익이 되리오.

만사여심위萬事與心違 만사가 마음과 어긋나 있는 것을.³⁷

►37)하겸진河謙鎭 <회봉선생유서晦峯先生遺書>卷8 <和飮酒>其四

 

이 시에는 술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飮酒라는 제목 아래 지어진 시이므로

음주와 연관된 것은 분명한데 술은 등장하지 않고 시에 쓸쓸하고 처연한 느낌이 든다.

 

자연 속에서의 일상을 담담하게 표현하거나

일상의 소회를 淸淡하게 풀어내는 것이 회봉 시의 특징 중 하나이다.

하지만 곳곳에 이런 傷心의 분위기가 등장하는데 이는 그가 겪고 있는 亡國이라는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실려失侶’ ‘나를 버리고 떠난 情人’ ‘란고蘭枯’ ‘류역절柳亦折’ ‘년광쇠年光衰’

등의 詩語가 모두 상실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회봉이 화도시를 지은 시기는 1934년 그의 나이 65세 때로 일제강점기가 25년 가까이 지속된 시기이다.

이렇게 지속된 이민족 지배하의 나라는 그에게 상실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고

그는 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이렇게 내면의 상심을 표현해 내었다.

 

이 밖에도 회봉은 술에 대해

‘담리유자미淡裏有滋味 담박함 속에 참 맛이 있다[’

‘주중묘리다酒中妙理多 술 속에 묘리가 많다’

라는 말로 술에 대해 긍정하는 모습을 나타내었는데 술을 통해 감정면에 있어

좀 더 유가적 의식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적인 면의 회봉을 만날 수 있다.

 

Ⅳ. 마무리

 

회봉과 소동파는 몇백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화도시’라는 하나의 시형식으로 조우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도연명이라는 인물의 도덕적 청렴함과 인품의 고결함, 은자로서의 삶에 같은 공감대를 느끼며 ‘화도시’를

짓게 되었고 특히 회봉은 소동파에게도 상당히 경도되어 있었는데 이도 화도시를 짓는 하나의 동인이 되었다.

 

시대의 간극을 뛰어넘고 ‘화도시’로 만난 이들은 각자 처한 시대와 현실에

고민하고 갈등하며 그 내면적 고뇌들을 시에 가감 없이 담아내었다.

 

그러므로 ‘화도시’는 그들의 정신적 고뇌의 산물이면서

한편으로는 현실의 고민과 갈등을 해소해가는 일종의 정신적 해방구이기도 하였다.

 

두 인물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면서 각자 자신들의 소회를 담은 ‘화도시’를 지었다.

<和詠荊軻><和詠二疏><和詠三良> 등 역사적 인물을 평가한 부분에서

소동파는 자신의 감정은 자제하고 절제된 어조로 하나하나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논변하듯 시를 썼다.

 

그리고 도연명과 회봉보다는 냉정하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상황을 분석하여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좀 더 입체적으로 했다.

 

반면 도연명과 회봉은 유가적 의리에 입각한 자세로 그 당위성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하고 그들의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의 <和陶詩>와 東坡 蘇軾의 <和陶詩>比較硏究•143)

功過에 대해 읊으며 세세한 논변은 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동파와 회봉의 차이는 선명하게 나타났다.

농사와 농민에 대한 인식에서는 두 인물 모두 농민에 대한 애정을 갖고

그들의 삶과 입장을 대변하였으며, 농민들의 피폐한 삶을 동정하고 함께 고뇌하였다.

 

회봉에게는 일제강점기 억압받는 농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으며 동파에게는 변방에서

중앙의 행정력에 의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피폐하게 사는 농민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다.

 

술을 통한 내면의 정회에서는 그들의 시에 등장하는 술이 조금은 다름을 보여주었다.

소동파는 술을 많이 마시기보다 술을 마시는 분위기를 좋아했던 인물로

빈 술잔을 들고도 술에 취하였으며 그렇게 취한 흥을 문학으로 풀어내었다.

 

술이 등장하는 그의 시에는 현실참여를 추구하는 儒者와

세속과의 거리를 두고자 하는 隱者사이의 갈등이 나타나 있다.

 

회봉은 술 마시는 것이 좋아 흥에 취하기보다는 주로 교유의 수단으로 술을 등장시켰으며

술을 창작 활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개인적인 소회를 읊으면서 유가적 의리에 충실한 선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차분한 어조로 시를 지어 온유돈후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의 술에 대한 시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현실에 대한 내면적 상실감이 나타났으며

그는 이러한 상실감을 술에 의탁하여 문학으로 풀어내었다.

 

이 세 분야의 비교에 의해 회봉과 동파를 말하자면 회봉은 유학자의 자세로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에

좌절하고 갈등하며 화도시를 통해 현실을 타개하고자 노력했다면

 

동파는 현실적이고 냉정한 지식인으로 시대에 아파하고 갈등하며

인생에 대한 사색과 고민을 화도시를 통해 표현해 내었다고 할 수 있다.

 

농민들의 피폐한 현실에 같이 동정하고 아파하며 그들의 현실을 타개하고자

위정자들의 失政을 질타하였지만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현실의 좌절과 고난은(144 •南冥學硏究 제39집) 초탈하고 극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화도시>는 그 초탈의 과정과 현실에 대한 갈등이 담긴 시이다.

 

몇 백년이라는 시대의 간극을 뛰어 넘어 ‘화도시’라는 같은 형식의 시를 지은

회봉과 동파는 같으면서도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들이 ‘화도시’를 통해 동경했던 것은 도연명과 같이

청빈하게 절개를 지키며 현실의 고뇌를 잊을 수 있는 ‘固窮節’의 삶이었다.

 

이는 시대적 아픔과 상실감에 대한 고뇌를 초탈할 수 있는 시공을 초월한 공감대로 이러한 공감대가 있었기에

‘화도시’는 화운시로서의 생명력을 지니고 끊임없이 창작되었다.

 

일제강점기는 한문학의 종식기로 인식되는 시기이다.

민족문학으로의 국문학에 밀려 점점 그 설 자리를 잃게 된 한문학은 그 중심적 위치는 잃게 되었으나

명맥을 유지하며 국문학이 담당하지 못한 공백을 메우며 해방 후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현대까지 이어진 한문학 명맥의 중심에 회봉이 있음을 우리는 ‘화도시’ 하나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화도시’와 연관된 지속적인 연구를 통하여 일제강점기

‘근대한문학’으로 불리어지는 한 시기의 중심에 회봉이 있음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