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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詩/매월당집梅月堂集

매월당 시집 제5권 10-20

매월당 시집 제510-20

10 화초花草

20 서향화瑞香花 서향나무 꽃

 

교철섬포색천심巧綴纖苞色淺深 예쁘게 엮인 가냘픈 꽃망울 색은 옅고 짙은데

방형복복출운잠芳馨馥馥出雲岑 꽃답게 풍기는 그윽한 향기 높은 구름에 나가네.

자유흡사정향수紫蕤恰似丁香樹 자주 빛의 꽃은 흡사 정향나무와 비슷한데다

농운승어첨복림濃韻勝於簷蔔林 짙은 정취는 뛰어난 데가 첨복나무 숲이로다.

 

선파별전광부정禪派別傳匡阜頂 선종의 유파 특히 전하니 언덕 머리 편안하고

청분점단동정심淸芬占斷洞庭心 맑은 향기는 골짜기 뜰의 마음 점쳐 판단하네.

아유수우천주재我有殊友千株在 나에겐 또한 뛰어난 벗 무성한 그루가 있으니

하용초호고원심何用招呼苦遠尋 어찌 괴롭게 멀리서 불러 찾을 필요가 있을까.

 

►서향화瑞香花=천리향千里香

서향瑞香 상서로운 향기가 나는 나무. 원산지는 중국.

늘푸른잎을 달고 있으며 2미터를 넘기 어려운 작은 나무다.

 

서향은 추위에 약해 남부지방 외엔 심을 수 없고 3~4월 피는 꽃의 향기는

1~2km 밖에서도 향기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진하여 천리향이라 부른다.

 

송나라 도곡이 쓴 <청이록淸異錄>에 따르면 중국의 영산인 의무려산에서 수도하고 있던 한 여승이

너른 바위에서 낮잠을 자다 꿈속에 강렬한 꽃향기를 맡고 깨어나 그 꽃을 찾아 헤맨 끝에

잠 깨운 꽃을 발견하고서 수화睡花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수화를 상서로운 꽃으로 여겨 집에다 널리 심으며 서향화瑞香花라 불렀다.

/네이버 블로그 : 대전광역시교육청

 

►복복馥馥 복욱馥郁, 풍기는 향기가 그윽함. ‘향기 복, 화살 꽂히는 소리 벽馥’

►정향丁香 청향나무의 꽃봉오리. 성질性質이 덥고 독이 없음.

►첨복簷蔔 인도에서 나는 꽃 이름.

 

 

●영가원댁서향詠可遠宅瑞香 가원可遠 권근權近 댁宅의 서향화瑞香花를 읊다/이숭인李崇仁

 

명창오목궤明窓烏木机 볕이 잘 드는 창窓에 흑단黑檀의 책상冊床

연좌악유독宴坐樂幽獨 조용히 앉아서 참선參禪하며 쓸쓸한 외로움을 즐기네.

사인대차화斯人對此花 이 사람이 이 꽃을 마주하는 모습

직수관패적直須冠佩覿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보아야 하리라.

 

►권근權近(1352 공민왕1-1409 태종9)

조선 전기에 중추원사, 정당문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권진權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소오자小烏子.

권보權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권고權皐, 아버지는 검교정승 권희權僖이다.

 

성리학자이면서도 사장詞章을 중시해 경학과 문학을 아울러 연마했다.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정도전 등

당대 석학들과 교유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정진해 고려 말의 학풍을 일신하고

이를 새 왕조의 유학계에 계승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학문적 업적은 주로 <입학도설入學圖說>과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으로 대표된다.

<입학도설>은 뒷날 이황李滉 등 여러 학자에게 크게 영향을 미쳤고

<오경천견록> 가운데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은 태종이 관비로 편찬을 도와

주자鑄字로 간행하게 하고 경연經筵에서 이를 진강進講하게까지 했다.

 

이밖에 정도전의 척불문자斥佛文字인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에 주석을 더하기도 했다.

저서에는 시문집으로 <양촌집陽村集> 40권을 남겼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숭인李崇仁(1347 충목왕3-1392 태조1)

고려 숙옹부승 직책을 지낸 고려 말의 시인, 대학자이다. 호는 도은陶隱, 자는 자안子安,

본관은 성주이며 길재 대신 삼은으로 꼽히기도 한다. 권신 이인임의 7촌 조카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진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숙옹부승肅雍府丞이 되고

이어서 장흥고사겸진덕박사長興庫使兼進德博士가 되었다.

 

文士를 뽑아 명나라에 보낼 때 수석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25세에 미달하여 보내지 않았다.

이후 예의산랑禮儀散郎·예문응교藝文應敎·문하사인門下舍人을 지냈고 우왕 때 전리총랑典理摠郎이 되어

김구용金九容·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北元의 사신을 돌려보낼 것을 청하다가 귀양을 갔다.

 

귀양에서 돌아와 성균사성이 되고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전임하여

동료와 함께 소를 올려 국가의 시급한 대책을 논하였다.

이어서 밀직제학이 되어 정당문학政堂文學 정몽주와 더불어 실록을 편수하고 동지사사同知司事로 전임하였다.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어서는 원나라 서울에 가서 新正을 축하하고 돌아와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창왕 때 박천상朴天祥·하륜河崙 등과 더불어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의 진위를 변론하다 무고로 연좌 되었고

헌사憲司가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자 피해 다니다가 시중 李成桂의 도움으로 다시 서연書筵에 시강하게 되었다.

 

그러나 간관 구성우具成佑·오사충吳思忠·남재南在·심인봉沈仁鳳·이당李堂 등이

상소를 올려 탄핵하여 경산부로 유배되었다.

 

당시 첨서밀직사사 권근權近이 이숭인을 구출하기 위하여 무죄를 상소했으나

간관이 도리어 권근의 상소가 거짓을 꾸민 것이라 상소하여 우봉현牛峯縣으로 이배되었다.

 

공양왕 때 간관이 이숭인을 다시 논죄하여 다른 군으로 이배되었고

후에 청주옥淸州獄에 수감되었으나 수재로 인하여 사면되었다.

 

얼마 뒤 소환되어 지밀직사사·동지춘추관사가 되었으나 정몽주의 당이라 하여 삭직당하고 멀리 유배되었다.

조선의 개국에 이르러 자기와 함께 처세하지 않은 데 앙심을 품은 정도전이

심복 황거정黃居正을 보내어 유배지에서 장살杖殺(형벌刑罰로 매로 쳐서 죽임) 되었다.

 

이숭인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문사文辭가 전아典雅하여 이색은

“이 사람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할지라도 많이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칭찬하였고

 

명나라 太祖도 일찍이 이숭인이 찬한 表文을 보고 “표의 문사가 참으로 절실하다.”라고 평가했으며

중국의 사대부들도 그 저술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다.

 

저서로는 <도은집陶隱集>이 있다.

그 서문에 의하면 생존시에 <관광집觀光集>·<봉사록奉使錄>·<도은재음고陶隱齋吟藁>

등을 지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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