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經/비파사나 수행

고엔카의 지혜의 계발 1. 탐구

고엔카의 지혜의 계발 

2013-12-30 22:15:42

 

1. 탐구

 

우리 모두는 평화와 조화를 갈망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이것들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을 원한다.

사실 행복은 우리가 누릴 당연한 권리이다.

 

그러나 행복은 쉽게 얻어질 수 없다.

반대로 싸워야 얻을 수 있다.

 

매 순간 마다 우리는 불안, 동요, 초조, 고통 등을 경험한다.

비록 어느 한 순간에 우리가 이런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해도

우리는 괴롭던 시간을 기억하고 그런 불안이 언젠가 다시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안다.

 

더욱이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음의 고통에 직면한다.

우리는 이런 불안들을 개인적 차원으로 한정시키지 않는다.

사건은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그 불만을 전가시킨다.

 

불행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환경은 불안하고 그 불안한 환경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 역시 불행과 심적 동요를 느낀다.

이런 개인적 긴장들이 모여 사회적 긴장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삶의 기본적인 문제이다.

 

사건은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원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탄생과 죽음을 모르듯이 사건의 과정이 어떻게, 왜 일어나는지를 알지 못한다.

 

2천5백 년 전 북인도의 한 사람이 인간의 고통을 탐구해 보기로 결심했다.

결국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본 몇 해 동안의 탐구 끝에

그는 자신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방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참다운 자유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붓다,

“깨달은 사람”이라고 알려진 이 사람은 그 이상의 무엇을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위대한 스승들처럼 그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비록 붓다의 전생에 관한 놀라운 사건과 위력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을지라도

결코 붓다는 신이라든가 신에 의해서 힘을 받았다던가 하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붓다가 지닌 특별한 힘들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은 그를 완벽하게 만든 탁월한 인간적 자질이었다.

그러므로 붓다가 성취한 것은 인간이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인간의 이해력 내에 있는 것이다.

 

붓다는 어떤 종교나 철학 혹은 믿음 등을 가리키지 않았다.

붓다는 그의 가르침을 法(dhamma) 즉 “법칙”이라고 불렀다.

 

그는 어떤 교리나 공론, 어설픈 사변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본질적 문제에 대한 보편적이고 실제적인 해결을 제공했다.

 

그는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고통(苦)과 고통의 소멸(滅)을 가르친다.”(상응부)

 

그는 고통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이 가르침은(法)은 붓다가 발명한 것도 신에 의해서 계시된 내용도 아니며 단순하게 붓다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또 전대의 사람들이나 후대의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도 발견되어질 수 있는 실재하는 진리일 뿐이다.

 

붓다는 진리의 독점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진리에 관하여 사람들이 가지는 마음이나 가르침의 논리적 성격과 같은 어떤 권위도 주장하지 않았다.

다만 붓다는 인간의 경험을 초월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마땅히 의심하고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이든 함부로 믿지 말라.

과거의 세대로부터 전해 오는 상식이든 경전에서 이야기된 것이든 단순하게 연역된 것이든

추론되어진 것이든 외적인 형식이나 어떤 견해에 의해서든 그럴듯한 설득이나 스승의 말이든

그것을 단순히 진리로써 인정하지 말라.

 

그러나

‘이 원리들은 건전하지 못하다.

현인들에 의해서 비난받을 만하다.

만약 이것대로 실행한다면 피해와 고통을 야기할 것이다.’

라고 당신이 스스로 깨달았을 때 그것들을 주저 없이 포기하라.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이 원리는 건전하고 현자들이 비난하지 않고 칭찬할 만하다.

이것을 채택하여 적용시키면 번영과 행복이 올 것이다.’

라고 직접적으로 느꼈다면 그때 그것들을 실천하라.”(증지부)

 

최상의 권위는 그 자신이 직접 경험한 진리이다.

단지 믿음만으로 인정하고 채용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그것이 논리적인가 실제적인가 유용한가를 알기 위해 경험해야만 한다.

또 이성이거나 지성에 의해서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도 충분하지 못하다.

 

만약 진리가 우리에게 유용한 것이라면 직접 경험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이것이 진실로 진리임을 알게 된다.

 

붓다는 항상 강조했다.

그는 직접적 체험에 의해 경험된 것만을 가르쳤으며

사람들에게 그들 스스로의 권위가 되는 그와 같은 지식을 몸소 개발하라고 권장했다.

 

“그대들 각자는 그대들의 섬이며 자신의 의지처이다.

또 다른 귀의처는 없다.

진리를 그대들이 의지할 섬으로 삼고

진리를 그대들의 귀의처로 삼으라,

또 다른 의지처는 없다.”(장부)

 

인생에 있어 참다운 귀의처,

딛고 설 수 있는 굳건한 대지,

올바르게 인도하고 보호해 줄 유일한 권위는 몸소 경험하고 검증한 法, 진리, 자연의 법칙이다.

그리고 붓다가 가르침에서 최고로 중시한 것이 진리에 대한 직접적 경험이다.

 

붓다는 스스로 경험한 진리를 가능한 한 명료하게 설명해서

다른 사람들도 몸소 진리를 실현할 수 있도록 안내자 역할을 했다.

 

“내가 제시한 가르침은 안팎이 없다.

감추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상계서)

 

붓다는 선택된 몇 사람을 위한 비밀스런 가르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반대로 붓다는 法이 가능한 한 아주 쉽고 편리하게 널리 가르쳐져서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혜택을 받았으면 했다.

 

法의 실현자로서 그의 개인적 신앙이나 종교적 교단을 설립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가르치는 사람의 인격은 가르침의 내용과 상응하여 아주 중요하다고 붓다는 말했다.

 

붓다의 가르침(法)은 따르는 사람들을 눈 먼 신도로 만들기보다

그들에게 어떻게 그들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붓다에게 과도한 숭배를 나타내는 사람들에게 그는 말했다.

“곧 붕괴되고 말 이 몸뚱이만을 보고서 그대는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法을 보려는 사람은 나를 보고 나를 보려는 사람은 法을 보라.”(상응부)

 

다른 사람을 향한 헌신은 비록 거룩하다 할지라도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지는 못한다.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 없이 자유나 구원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진리는 그것을 말하는 사람보다 선행한다.

 

모든 존경은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나 최상의 존경은 진리를 몸소 실현하는 일이다.

 

지나친 존경이 붓다에게 바쳐지자 붓다는

“이것은 깨달은 사람을 온당하게 존경하는 방법이 아니다.

최고의 존경은 스스로 올바른 방법으로 마지막 목적지까지 흔들리지 않고 법의 길을 가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붓다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붓다는 이 길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8가지의 수행 성스러운 팔정도(the Noble Eightfold Path)라고 부른다.

 

이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든지 거룩한 마음,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이 된다는 의미에서 성스럽다.

그것은 진리 실현의 길이고 실재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통찰의 길이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진실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한다.

이 자유인 진리를 열반涅槃(Nibbana), 천국 그 외에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을 경험하는 일이다.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의 유일한 길은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일이다.

우리 대부분은 외부 세계를 관찰하는 데에만 너무나 익숙해 있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이나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우리의 정신과 신체적 구조, 자신의 행동, 자신의 참다운 성품 등을 검토해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을 무지의 영역에 계속 남겨 둘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무지가 얼마나 해로우며 알지 못하는 우리 내부의 힘에 의해

얼마나 오랫동안 노예상태로 남아 있었던가를 깨닫지 못한다.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본성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붓다가 제시한 길은 자기 관찰의 길이며 내관의 통로이다.

 

붓다는 말한다.

“관찰함으로써 마음을 담고 있는 바로 이 몸뚱이 속에서 나는 우주와 그 기원,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게 되었다.”(증지부)

 

우주와 그 작용은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경험된다.

그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안에서 경험될 뿐이다.

 

또한 이 길은 마음을 정화하는 길이다.

우리는 무익한 지적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관찰함으로써

정신적 통찰을 방해하는 편견, 참다운 실재를 은폐하고 고통을 야기하는 충동 등을 일순간에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동요시키고 비참하게 만드는 축적된 내적 긴장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것들을 제거할 수 있다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점차 우리는 그것들을 해소시키는 방법을 배우고 마음은 순수하고 행복하며 평화로워진다.

 

수행은 계속적인 정진이 요구되는 과정이다.

갑자기 깨침의 순간이 올지라도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이다.

 

단계적인 노력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모든 단계들은 축복의 순간이다.

 

우리는 오직 미래에 기대되는 어떤 즐거운 이익이나 죽은 다음에 얻을 수 있다는

천국에 대한 희망 때문에 이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수행의 효능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그리고 개인적으로 경험된다.

 

무엇보다 우선 수행은 실천적 가르침이다.

단순하게 붓다에 대한 믿음이나 가르침에 대한 믿음만으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명상 수행은 지적 이해의 길이 아니다.

믿음이나 지적 이해는 실천적으로 그 생명력을 부여받을 때만 유용한 가치를 가진다.

붓다가 가르친 실제적인 수행의 실천은 구체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우리의 삶을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시킨다.

 

붓다는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많은 양의 경전을 암송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남의 집의 소만 세는 목동과 같다.

그는 진리를 찾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내적 보상을 받을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경전의 몇 구절만을 암송할 수 있을지라도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수행의 길을 위해서 法대로 살아간다면 그는 진리를 찾는 사람만이 맛 볼 수 있는 보상을 받는다.”(법구경)

 

수행의 길은 밟아 가야만 하고 가르침은 실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미 없는 수행이 된다.

 

이 수행법을 실천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불교도라고 부를 필요도 없다.

고통은 차별 없이 모두에게 공통된다.

그러므로 치료법은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수행은 속세와 절연한 은둔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물론 일정 기간 동안 한적한 곳에서 확실하게 수행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그 가르침을 일상생활에 적용시켜야 한다.

 

수행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 세속적인 책임과 가정을 버린 사람은

집중적인 수행의 기회를 갖기 때문에 깊은 이해와 보다 바른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

반면에 많은 세속적인 책임을 가진 일반 사람들은 수행할 시간이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정을 가지든 출가를 하든지 우리는 法을 실천해 가야 한다.

오직 法의 실천만이 어떤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온다.

 

만약 진실로 이것이 고통으로부터 평화를 이끄는 길이라면 그때 수행의 진보에 따라 우리도 일상생활 가운데서

보다 행복해 질 것이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보다 평화롭고 화합된 장을 마련할 것이다.

 

사회적 긴장을 증가시키기보다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번영에 기여할 것이다.

수행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 우리는 법 즉 진리의 순수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며 정확하게 실천되는 법이야말로 삶의 기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