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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비파사나 수행

위빠사나 수행의 문제점

위빠사나 수행의 문제점

/마성스님 동국대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14-01-20 18:33:13

 

앞에서 간화선 수행법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 대안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위빠사나 수행법이 국내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법도 붓다가 가르친 초기불교의 수행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미얀마에서 정치적 여러 사정에 의해 나름대로 고안된 수행법이다.

 

황순일은 구스타프 하우트만(Gustaaf Houtman)의 글을 인용하여

“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민족적인 자긍심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식민지 미얀마에서 명상수행이 대중화되는 계기를 만든 것이었다.”

 

또한

“미얀마 군부는 국내에서 군부의 입김이 강해지자 미얀마의 국민들에게 위빠사나 수행을 권유하여

나와 주변과 세계가 무상하며 공하고 자아가 아니란 것(無我)을 끊임없이 알아차릴 것을 강조했다.

그렇게 해서 국민이 세속적 정치적 문제에 무관심해지도록 유도하였고

심지어는 교도소에서까지도 위빠사나 수행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위빠사나 수행의 가장 큰 단점은 사마타 수행(samatha, 止)의 중요성을 의도적으로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학자는 위빠사나 수행만으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때의 위빠사나는 선정을 머금고 있는 통찰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찰라삼매刹羅三昧라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법이 이처럼 초기불교의 수행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얀마의 정치적 여러 배경에서 태어난 변형된 수행법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이러한 전후 사정도 모른 채 무비판적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받아들여 열광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어떠한 수행법이라도 모두 기본적으로 삼학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초기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알려져 있는 四念處觀(身受心法)도

크게 사마타 수행(samatha, 止)과 위빠사나 수행(vipassanā, 觀)의 둘로 이루어져 있다.

 

사마타 수행은 ‘평온 수행’이라고 하고 위빠사나 수행은 ‘통찰 수행’이라고 하는데 止觀으로 한역된다.

역대로 수행은 지관겸수止觀兼修야말로 진정한 수행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의 수행은 모두 지止와 관觀의 수행을 통해 성자의 네 가지 계위階位,

즉 예류과·일래과·불환과·아라한과에 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초기불교의 수행법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약간 변형되었다.

 

이를테면 “초기불교의 수행 관련 논의에 따르면, 니까야(Nikāya)와 주석서(Aṭṭhakathā) 사이에 일정한 간극이 존재한다.

예컨대 니까야에서는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 수행을 동시에 병행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후대의 주석 문헌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이들 양자를 개별적인 것으로 해설한다.

또한 니까야에는 나타나지 않은 술어들이 후대의 주석서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찰나삼매(khaṇikasamādhi)라든가 본삼매(appanāsamādhi) 따위의 수행 관련 용어들을 비롯하여 마음부수법(心所, cetasika)에 관련된 중간적인 상태(tatramajjhattatā), 마음의 경쾌(cittalahutā), 마음의 작용(cittakammaññatā) 따위가 그러하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사마타(samatha, 止)와 위빠사나(vipassanā, 觀)가 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평범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상좌부의 스님들이 위빠사나 수행에 집착하는 것이나

한국의 선객들이 간화선에 집착하는 것이나 똑같다.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수행법이야말로 최상의 수행법이라는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수행법에 확신을 갖고 수행에 전념하는 것은 수행하지 않는 것보다는 매우 훌륭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부심이 지나쳐 다른 수행법을 아주 낮은 근기의 사람들이 행하는 수행법이라고 비하하거나

잘못된 수행법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간화선만이 최상의 수행법이라는 집착은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비대승적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수행도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과 그 다양한 방식이 중생들의 능력과 의향에 달려 있다는 자각이 요구된다.

이에 대해 안 성두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수행이란 하나의 치료약과 같은 것으로 자신의 능력과 관심에 맞는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모든 사람에 맞는 모든 이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만능의 치료약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러한 사고방식은 지극히 비역사적일 뿐 아니라 교리적으로도 극히 위험한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반야와 방편(또는 대비)이라는 대승의 두 기둥 중에서

방편을 제거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보살도를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은 <Anāpānāsati-sutta 安般隨意經>에 바탕을 둔 수식관법數息關法을 닦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Mahāsati-paṭṭhāna-sutta 大念處經>에 근거한 四念處觀을 닦을 수도 있다.

 

어느 한 수행법이야말로 최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도그마에 빠지는 것이다.

그 사람의 근기와 수준에 따라 선택의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불교의 폭을 넓히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최상의 수행법은 아닐까?

 

한편 어떤 사람은 한국불교의 수행법을 타력신앙으로 승화시키자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초기 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타력신앙을 권장하는 것은

붓다의 근본 가르침에서 벗어날 염려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대승불교적 가르침에 의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편적인 세계의 불교도들에게 권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타력신앙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붓다의 본래 가르침에서 벗어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보리수 11.09.18. 22:30

마성스님께서 오류를.........

<Anapanasati-sutta 安般隨意經>에 바탕을 둔 수식관법(數息觀法)은 ··· 數息關法이 아니라 隨息關法임

 

제가 <佛說大安般守意經>과 <大念處經><入出息念經>을 풀이한 정태혁 번역 <붓다의 호흡과 명상>을 가지고 있는데<佛說大安般守意經>원문에도 '數息'으로 되어있는데 '隨息' 출처가 어딘지 궁금합니다.

 

카페 <禪道會 看話禪 修行>에 <수식관數息觀> 해설도 이 책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하였습니다.

 

호흡법을 가르친 경전이 佛說大安般守意經불설대안반수의경인데 원어로는 '아나파나사티anapanasati'라고 하고, 안반수의安般守意라고 번역되었다.

'아나ana'는 들숨이고 '아파나apana'는 날숨이며 '사티sati'는 의식의 집중을 말한다.

이 방법이 붓다가 가르친 오정심관 중의 하나로서 흔히 수식관數息觀이라고 한다.

 

►전원 11.09.19. 00:00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에 따르면 안반수의법에는 다섯 가지 단계가 있는데

들숨과 날숨을 헤아리는 수식數息,

호흡에 의식이 따라 하나가 되는 상수相隨,

마음이 호흡을 의식하지 않고 고요히 안정되는 지止,

사물을 관찰하게 되는 정신집중 상태인 관觀,

다시 고요한 자기 주체로 돌아가는 환還,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청정한 세계인 정淨이 있다.

/전원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