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哲學/中國哲學

공자의 제자들 6 중유仲由

중유仲由(BC543-BC480)

 

성은 중仲, 이름은 유由, 자字는 자로子路이며 계로季路라고도 불린다.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쓰수이현泗水縣인 노국魯國 변읍卞邑 출신이다.

'孔門十哲' 중 한사람이며 '孔門72賢'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공자의 사당에 배향되어 있다.

 

성격이 강직하고 용맹했다.

자로는 공자보다 나이가 9세 어려서 공자를 수행하던 제자들 가운데는 가장 연장자로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노나라의 세 경대부卿大夫 가문인 삼환三桓 가운데 하나인 계씨系氏의 읍재邑宰를 지냈으며

처음에는 공자를 업신여기고 포악하게 굴었으나 점차 공자의 가르침을 받으며 교화되었다.

사람됨이 곧고 순진하여 다른 제자들의 요청으로 공자의 문하로 받아들여져 헌신적으로 공자를 섬겼다.

 

<사기>에는 자로에 관해

"성격이 거칠고 용맹스러운 일과 힘쓰는 일을 좋아하고 의지가 강하고 정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자는 그의 꾸밈없고 소박한 인품을 칭찬하였으나 성급하고 거친 성정은 주의케 하였다.

 

예컨대 공자는 자로를

"닳아빠진 솜옷을 걸치고 여우와 담비 가죽을 입은 사람과 함께 서 있어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자"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일을 잘 헤아려 사리에 맞게 하는 것이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자로는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 각국을 떠돌 때 그를 수행하다가

지금의 허난성河南省 창위안[長垣]인 위衞나라 포읍蒲邑의 읍재가 되었다.

 

그러다 기원전 480년 위나라 出公의 아버지인 괴외蒯聵가 영공靈公의 외손자인 大夫 공회孔悝와 함께

정변을 일으켜 출공을 쫓아내고서 장공莊公으로 들어서는 정변이 일어났다.

 

이때 자로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는데 친구 자고子羔가 이미 끝난 상황이니 자리를 피하라고 충고했지만 그는

“출공의 녹을 먹었다면 그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피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성안으로 들어가 장공에게 역적 공회孔悝를 내달라고 요구했다.

 

장공이 거절하자 그들이 있던 대를 불태우려고 했는데 그때 장공의 부하인 석걸石乞과 호염壺黶에게 죽임을 당했다.

적군의 칼에 갓끈이 끊어지자 “君子는 죽더라도 관은 벗지 않는다.”면서 갓끈을 다시 매고는 죽었다.

 

<사기>에는 공자는 위나라에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로가 뜻을 굽히지 않고 목숨을 잃을 것을 예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로는 죽은 뒤에 시신이 소금에 절여지는 해형醢刑을 당했다고도 전해진다.

 

성격이 솔직 담백하며 용맹하고 위세가 있었다.

또한 신의를 성실히 지키고 직분에 충실했다.

또한 지극한 효자로 그가 옛날에 어버이를 모시고 있을 적에 가난했기 때문에

자기는 되는대로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도 어버이를 위해서는 백리 바깥에서 쌀을 등에 지고 오곤 했다.

어버이가 돌아가시고 난 후 높은 벼슬에 오르자 솥을 늘어놓고 진수성찬을 맛보는 신분이 되었지만 당시에 거친 음식을

먹으며 어버이를 위해 쌀을 등에 지고 왔던 그때의 행복을 다시는 느낄 수 없게 되었다고 술회한 고사가 전한다.

 

당나라 현종 개원開元 27년(739)에 '위후衛侯'로 추봉되었으며

송나라 진종 대중상부大中祥符 2년(1009)에 '하내공河内公'으로 봉해졌다.

남송 함순咸淳 3년(1267)에 위공衛公으로 봉해졌고

명나라 가정嘉靖 9년(1530)에 ‘선현중자先賢仲子’로 명칭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