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집 제4권 13-5
13 서화書畫 글씨와 그림
5 독좌씨춘추讀左氏春秋 <좌씨춘추>를 읽고서
방휼상지미가기蚌鷸相持未可期 조개와 도요새는 서로 도움을 기약할 수 없는 것
분분성패기다시紛紛成敗幾多時 분분하게 成敗가 몇 번이나 되었더냐?
불건저혈유교인不乾詛血猶交刃 맹세한 피 마르기도 전에 칼날 서로 맞대고
미예상해우찬구未瘞殤骸又鑽龜 어린 주검 묻지도 않아 다시 거북을 뚫네.
왕실세어단루긴王室細於單縷緊 왕실王室은 한 가닥 실 꿴 것보다도 가늘고
패공급사루기위覇功岌似累碁危 패覇의 功 뒤뚝거려 바둑돌 포갠 듯 위태롭네.
애재니부명부곤哀哉尼父明斧衮 슬프다! 이보尼父는 도끼와 곤룡포 밝혔지만
쇠봉상린내가추衰鳳傷麟耐可追 쇠약한 봉황 상傷한 기린으로 차마 쫓을 수 있으리.
►좌씨춘추左氏春秋 <춘추春秋>를 해설한 책.
전국시대 좌구명左丘明(?-?)이 지었다고 하나 명확하지 않으며
<곡량전穀梁傳><공양전公羊傳>과 함께 춘추삼전春秋三傳의 하나이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한나라 때에 유흠劉歆(BC53?-25)이 편찬한 것으로 30권으로 되어 있다.
►방휼蚌鷸 방합蚌蛤과 도요새.
‘방합 방蚌’ 방합蚌蛤. 펄조개(석패과의 하나)
‘도요새 휼, 물총새 술鷸’ 도요새. 새매(수릿과의 새)
►‘저주할 저(조)詛’ 저주詛呪하다. 맹세盟誓하다
►‘묻을 예瘞’ 묻다. 희미稀微하다. 제터, 제사祭祀 지내는 곳
►찬구鑽龜 거북점.
주낙시찬구周洛始鑽龜
周 성왕成王이 洛邑으로 천도하기 위하여 周公에게 명하여 東都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에 주공이 낙읍을 완성한 다음 낙고洛誥를 지어 바쳤는데 여기에
“나는 간수澗水의 동쪽과 전수瀍水의 서쪽에 대하여 거북점을 쳤더니 낙읍이 길하다.”
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방언放言 5首/백거이白居易(772-846)
其三
증군일법결호의贈君一法决狐疑 자네에게 의심 없앨 방법 하나 알려 줌세
불용찬구여축시不用鑽龜與祝蓍 거북점도 산가지점도 볼 필요가 없다네
시옥요소삼일만試玉要燒三日滿 옥돌인지 알려면 불로 사흘을 달궈야 하고
변재수대칠년기辨材須待七年期 재목 판별에도 7년 세월이 필요하다네
주공공구유언일周公恐懼流言日 주공도 조정의 유언비어를 두려워했고
왕망겸공미찬시王莽謙恭未纂時 왕망도 찬탈 전까지 겸손했다 하는데
향사당초신편사向使當初身便死 만약에 그 사람들이 일찍 죽어버렸다면
일생진위부수지一生眞僞復誰知 평생의 참과 거짓 누가 알 수 있었겠나
<찬구鑽龜와 축시祝蓍>
거북의 등껍질에 구멍을 뚫거나 ‘톱풀’이라 하는 시초蓍草의 줄기를 늘어놓아
길흉과 일기에 관해 점을 치던 것을 가리킨다.
상음양相陰陽 점침조占祲兆 음과 양을 살펴 길흉에 관한 여러 가지 조짐들을 점치고
찬구진괘鑽龜陳卦 거북 껍질에 구멍을 뚫거나 산가지를 늘어놓고
주낭택오복主攮擇五卜 점괘를 살펴서 불결한 것을 쫓고 길한 것을 취하며
지기길흉요상知其吉凶妖祥 날씨의 변화와 그 길흉, 요상妖祥을 알아내는 것이
구무파격지사야傴巫跛覡之事也 곱사등이 무당과 절름발이 박수가 하는 일이다.
/<순자荀子⋅왕제王製>
►니보尼父 공자孔子의 존칭.
하사월기축夏四月己丑 공구졸孔丘卒
公誄之曰
旻天不弔 不憖遺一老 俾屏余一人以在位 煢煢余在疚 嗚呼哀哉尼父 無自律
子贛曰 君其不沒於魯乎
夫子之言曰
禮失則昏 名失則愆
失志爲昏 失所爲愆
生不能用 死而誄之 非禮也 稱一人 非名也 君兩失之
◉하사월기축夏四月己丑 공구졸孔丘卒
<예기·단궁상>에서는 공구의 임종 전과 임종 시의 기사가 있다.
►공구졸孔丘卒 <춘추>의 경문은 여기서 끝난다.
공구의 생년에 대해 <좌전>에는 기사가 없다.
<공양>과 <곡량>은 모두 노 양공 21년에 태어났다고 하고
<사기·공자세가>는 양공 22년이라고 말한다.
전자에 따르면 공자는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후자에 따르면 72세에 타계한 것이다.
한 해의 차이에 대해 고금 2천여 년 동안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시비를 확정지을 수 없었으므로 논쟁은 불필요하다.
◉공뢰지왈公誄之曰
공영달의 <소>는 정중의 <주례·대축>의 주석을 인용
“뢰誄는 생전의 덕행으로 인해 그에게 하사하는 것이다.
당사자를 위한 글을 내린다.”
‘뢰’는 오늘날의 추도사이다.
◉민천부조旻天不弔 조弔는 금문의 숙叔자로서 선善의 뜻이다.
◉불은유일로不憖遺一老 은憖은 고차姑且, 잠시. <좌전·애공11년>에서 공자를 국로라고 일컫고 있다.
◉비병여일인이재위俾屏余一人以在位
두예: “비俾는 사使. 병屏은 폐蔽.”
<좌전·희공24년>의 고봉건친척이번병주故封建親戚以蕃屛周
“그러므로 친척을 봉건하여 주나라를 보호하는 울타리로 삼았다.”
본문의 병屏도 보호하다의 뜻.
◉경경여재구煢煢余在疚 양리승의 <보석>은 <로사발휘>5를 인용,
“부조민천不弔旻天은 <절남산>의 시구이고
‘불은유일로不憖遺一老’는 ‘비수아왕俾守我王’와 같은 말로서 <시월지교>의 시구이며
현현재구嬛嬛在疚는 <민여소자>의 시구이다.
애공은 <시>를 보고 공자를 추모한 것이다.”
◉오호애재니부嗚呼哀哉尼父
‘니보’라고 칭한 것은 공구의 자가 중니이고 보父자는 중산보仲山甫의 보와 같다.
또 당시 애공의 나이가 어렸다.
<좌전>에는 그의 즉위 당시 연령이 나와 있지 않지만
그 부친 정공이 소공의 아우이고 양공의 아들이다.
양공이 31년간 재위했고 소공이 32년, 정공이 15년 재위했다.
애공이 비록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70여세의 원로를 ‘보’라고 칭한 것은 자연스럽다.
◉무자률無自律
두예: “율은 법이다. 니보를 잃어 스스로 법을 지킬 수 없다.”
<단궁상>: “노 애공은 공구를 추모하여 말했다.
‘하늘이 원로를 남겨 두지 않으니 나를 보좌할 사람을 잃었구나.
오호라 슬프도다 니보여!’”
손희단의 <예기집해>: “<단궁>의 記述과 <좌전>과 같지 않은 경우
모두 <좌전>이 보다 정확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공왈子贛曰
군기불몰어로호君其不沒於魯乎 부자지언왈夫子之言曰
‘례실즉혼禮失則昏 명실즉건名失則愆’
실지위혼失志爲昏 실소위건失所爲愆
생불능용生不能用 사이뢰지死而誄之 비례야非禮也
칭일인稱一人 비명야非名也
일인은 여일인의 생략이다.
당시 천자의 자칭이다.
그러나 제후종박의 명문에
여부여우간술女敷余于艱卹 건술불이虔卹不易 좌우여일인左右余一人
“너는 내가 공적을 쌓는 일이 어렵고 널리 백성을 구휼할 수 있도록 하며,
왕의 위엄을 유념하여 방종하지 말고 여일인을 보좌하라”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제후 역시 여일인으로 칭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군량실지君兩失之 실례는 또한 실명이다.
<공자세가>는 <좌전>의 이 단락을 인용했는데 “군량실지君兩失之”라는 문구는 없다.
/춘추좌전 블로그
<예기 단궁檀弓> 上에 “오호애재니부嗚呼哀哉尼父”라 하였는데
注에 “尼父 因其字 以爲之諡也 父 同甫 丈夫之美稱”이라 하였다.
►‘곤룡포 곤衮’ 곤룡포衮龍袍. 상공相公의 예복禮服. 三公(太尉, 司徒, 司空),
●<논어論語> 태사공 사마천의 공자세가孔子世家
/할아버지가 읽어주는 고전이야기
명세明歲 자로사어위子路死於衛 공자병孔子病
다음 해 자로가 위나라에서 죽었으며 공자는 병이 들었다.
자공청견子貢請見 자공이 뵙기를 청했다.
공자방부장소요어문孔子方負杖逍遙於門 공자는 지팡이를 짚고 문 앞에서 거닐고 있었다.
왈曰 사賜 여래하기만야汝來何其晚也 공자가 '사야 너는 왜이리 늦게 왔느냐?'고 하였다.
공자인탄孔子因歎 가왈歌曰 공자가 탄식하며 노래를 부르기를
태산괴호太山壞乎 '태산이 무너지려 함인가!
양주최호梁柱摧乎 기둥이 부서지려 함인가!
철인위호哲人萎乎 철인이 죽으려 함인가!'
인이체하因以涕下 하더니 눈물을 흘렸다.
위자공왈謂子貢曰 자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천하무도구의天下無道久矣 '천하가 무도한지 오래되었구나.
막능종여莫能宗予 나를 종주로 받드는 사람도 없구나.
하인빈어동계夏人殯於東階 하나라 사람은 동쪽 계단에 시신을 모시고
주인어서계周人於西階 주나라 사람은 서쪽 계단에 모시며
은인량주간殷人兩柱閒 은나라 사람은 양 기둥 중간에 모신다.
작모여몽좌전량주지간昨暮予夢坐奠兩柱之閒 어제 저녁 내 꿈에 양 기둥 사이에 존위가 있더구나.
여시은인야予始殷人也 나는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후칠일졸後七日卒 7일 후에 공자가 죽었다.
공자년칠십삼孔子年七十三 공자의 나이 73세,
이노애공십육년사월기축졸以魯哀公十六年四月己丑卒 노애공 16년 4월 기축일에 죽은 것이다.
(註) 자로의 죽음에 대하여 공자는 하늘이 나를 끊는구나! 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애공뢰지왈哀公誄之曰 애공이 애도하여 말했다
민천부조旻天不弔 ‘하늘이 무심하여
불은유일로不憖遺一老 한 노인을 남겨주지 않으시고
비병여일인이재위俾屏余一人以在位 경경여재구煢煢余在疚
외롭게 이 몸 홀로 재위에 남겨두게 하시니 의지할 곳이 없고 괴롭구나.
오호애재嗚呼哀哉 니부尼父 오호라 슬프도다. 니부여!
무자률無自律 스스로 얽매임이 없었구나.'
(註) 니부라는 존칭은 노애공이 처음 헌명 했고 존경하는 국가의 스승이라는 뜻.
자공왈子貢曰 자공이 말하였다.
군기불몰어로호君其不沒於魯乎 '임금이 노국에서 죽지 못하리라.
부자지언왈夫子之言曰 선생님이 말하길
례실즉혼禮失則昏 예를 잃어 어둡고
명실즉건名失則愆 명분을 잃어 어지럽다.
실지위혼失志為昏 뜻을 잃으면 혼란해지고
실소위건失所為愆 그렇게 잃으면 방자해진다.
생불능용生不能用 살았을 때는 등용하지 못하고
사이뢰지死而誄之 비례야非禮也 죽어서 애도하니 예가 아니다.
칭여일인稱余一人 비명야非名也 ‘나 혼자 남겨두고’라고 하였으니 명분도 없구나.'
공자장로성북사상孔子葬魯城北泗上 공자는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 강변 위에 묻혔다.
제자개복삼년弟子皆服三年 제자들이 모두 3년 상복을 입었고
삼년심상필三年心喪畢 3년 심상을 마쳤다.
상결이거相訣而去 즉곡則哭 서로가 헤어져 갈 때도 곡을 하였다.
각부진애各復盡哀 혹부류或復留 각자 다시 극진하게 애도하였고 혹은 머무르기도 하였다.
유자공려어총상唯子贛廬於冢上 범륙년凡六年 연후거然後去
유일하게 자공이 무덤 옆에서 여막을 짓고 6년을 지킨 후 떠났다.
제자급로인弟子及魯人 공자의 제자들과 노나라 사람들이
왕종총이가자往從冢而家者 무덤 옆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백유여실百有餘室 백여 가구나 되었다.
인명왈공리因命曰孔里 이로 인해 공리라고 불렸다.
로세세상전이魯世世相傳以 세시봉사歲時奉祠 공자총孔子冢
노나라에서는 대를 이어 새해마다 공자 무덤에 제사를 받들었다.
이제유역而諸儒亦 강례향음講禮鄉飲 대사어공자총大射於孔子冢
제 유생들이 강예를 하고 향음하며 대사례를 공자의 무덤 옆에서 하였다.
공자총대일경孔子冢大一頃 공자의 무덤이 일경에 달하는 크기가 되었다.
고소거당제자내故所居堂弟子內 공자가 살던 집과 제자들이 있던 내실은
후세인묘장後世因廟藏 후세에 묘당으로 꾸며
공자의관금거서孔子衣冠琴車書 공자의 의관, 비파, 수레, 책을 보관하였다.
지우한이백여년부절至于漢二百餘年不絕 한나라에 이를 때까지 이백여 년간 끊어짐이 없었으니
고황제과로高皇帝過魯 이태뢰사언以太牢祠焉 고황제가 노에 들러 태뢰로 제사를 올렸으며
제후경상지諸侯卿相至 제후와 공경과 제상들에 이르기까지
상선알연후종정常先謁然後從政 먼저 참배한 후에 정사를 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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