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則과 着語】
거擧 거론하다.
릉엄경운楞嚴經云 <능엄경>에 이르기를
오불견시吾不見時 하불견오불견지처何不見吾不見之處
“내(부처)가 보지 않을 때에 왜 (그대는)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보지 못하는가?
호개소식好箇消息 좋은 소식이다.
용견작십마用見作什麼 보아서 무엇 하려고
석가로자루두불소釋迦老子漏逗不少 석가 늙은이도 허물이 적지 않군.
약견불견若見不見 만일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본다면
자연비피불견지상自然非彼不見之相 자연 저 (여래가) 보지 않는 모습이 아닐 것이다.
돌咄 쯧쯧!
유심한공부有甚閑工夫 무슨 부질없는 수고냐?
불가교산승작량두삼면거야不可教山僧作兩頭三面去也
산승(원오)을 이랬다저랬다 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약불견오불견지지若不見吾不見之地 만일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보지 못한다면
향십마처거야向什麼處去也 어느 곳으로 가느냐
정철궐상사釘鐵橛相似 쇠말뚝을 박는 것과 같다.
돌咄 쯧쯧!
자연비물自然非物 결코 물상物相 이 아닐 것이어 늘
안우두끽초按牛頭喫草 어거지로 소머리를 짓눌러 풀을 먹이는구나.
갱설십마구두성색更說什麼口頭聲色 다시 무슨 언어 경계를 말하는가.
운하비여云何非汝 어찌 네가 아니랴.”
설이설아총몰교섭說爾說我總沒交涉 너니 나니 하는 것 모두 관계가 없다.
타운打云 (원오는) 치면서 말한다.
환견석가로자마還見釋迦老子麼 석가노인을 보았느냐?
쟁내고인불긍승당爭奈古人不肯承當 옛사람(아난존자)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야 어찌하랴!
타운打云 (원오는 다시) 치면서 말한다.
각근하자가간취腳跟下自家看取 스스로 발밑을 보아라.
환회마還會麼 알았느냐!
►릉엄경운楞嚴經云 <首楞嚴經>2권을 가리킨다.
‘首楞嚴’은 Suramagama의 음역어이며
一切事竟(一切 일의 완성) 健相, 健行 등으로 漢譯.
불타의 一切事竟三昧의 표현을 서술한 經이란 뜻이다.
이 경전은 密敎界의 사상을 많이 담고 있으며 漢譯은 唐 中宗皇帝 神龍 元年(705)에
中印度의 승려 반랄밀제般剌密帝가 廣州의 制止道場에서 완성했다.
►오불견시吾不見時 내가 視覺을 써서 사물을 보지 않을 때,
불타가 아난에게 한 말. ‘吾’=불타.
►오불견지처吾不見之處 내가 보지 않는 곳. 즉 활용시키지 않는 視覺.
‘吾不見時 何不見吾不見之處’
우리의 보는 능력이 객관적 존재라면 그 반대로
내가 사물을 보지 않는다는 것도 객관적 존재이다.
그렇다면 내가 보지 않는 곳을 어째서 너도 보지 못하는가?
►약견불견若見不見 자연비피불견지상自然非彼不見之相
만약 내가 不見하는 곳을 네가 본다면 그것은 이미 不見의 相이라 할 수 없다.
보인다면 不見이 아니다. 정말로 不見이면 ‘不見의 相’도 없을 것이다.
본다는 性 즉 見이라는 작용은 누구나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으므로
석가와 아난 사이에 차이가 없다.
그 본다는 작용은 제3자가 객관적으로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다.
‘彼’ 저쪽이 남의 눈에 보이는 처지.
‘不見之相’ 객관화된 시각.
►약불견오불견지지若不見吾不見之地 자연비물自然非物
나에게 보이지 않는 곳을 네가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본다’는 작용이 사물에 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객관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우리 본성의 작용이다.
無位眞人 또는 本來面目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보는 주체이다.
►운하비여云何非汝 어찌 네가 아니랴.
어찌 그것이 自己(見性)가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보고 듣는 일이 모두 너 자신의 것이다.
‘아난아, 그 사물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너의 본성이다’
원오가 着語 했다.
타운打云 한 대 후려치고는
각근하자가간취腳跟下自家看取 딴 데 보지 말고 네 발밑을 보라.
환회마還會麼 그래 이제 알겠느냐?
►고인古人 아난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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