寒山詩 85
거가일만리去家一萬里 집 떠나 아득히 먼 곳에서
제검격흉노提劍擊匈奴 칼 뽑아 들고 흉노匈奴를 치네.
득리거즉사得利渠卽死 싸움에서 이기면 곧 그들이 죽고
실리여즉조失利汝卽殂 싸움에서 지면 이제 너희들이 죽게 되네.
거명기불석渠命旣不惜 그들의 생명 이미 소중히 여기지도 않는데
여명유하고汝命有何辜 너희들의 목숨 또한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교여백승술敎汝百勝術 언제든지 이기는 계략計略을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니
불탐위상모不貪爲上謨 탐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計策이라네.
집에서 만리나 떨어진 곳에 가서
칼 뽑아 높이 들고 흉노를 치네
그대가 이기면 그들이 죽고
그들이 이기면 그대가 죽을 테지
그들의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는데
그대 생명 취하는 게 무슨 허물되겠나.
싸워서 이기는 법 가르쳐 줌세
욕심 부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네
집 떠나 만리 밖에서
검을 들어 흉노를 치네.
네가 이기면 그들은 죽을 것이고
그들이 이기면 네가 죽을 것이다.
그들의 목숨 아끼지 않지만
네 목숨도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늘 이기는 법 네게 가르쳐 주노니
탐하지 않음이 최상의 계책이니라.
►흉노匈奴 기원전 4세기에서 1세기 사이에 몽고蒙古 지방에서 세력을 떨쳤던 유목 민족.
기원전 2세기에 묵특 선우單于가 대제국을 세우고 서역의 통상로를 지배하여
한漢나라와 대항하였으나 후에 후한後漢에게 토벌당하여 서쪽으로 이동,
훈족(Hun族)으로서 남 러시아에 나타났다고 함.
►이利 이기다.
►거渠 그(3인칭).
►즉조卽殂 즉시 죽음. ‘殂’ 죽다.
►고辜 허물. 죄.
모든 싸움의 원인은 욕심이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싸움이 일어날 수가 없다.
전쟁은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들의 탐욕에서 비롯된다.
일찍이 노자는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화禍는 없고
욕심을 내어 얻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고 했다.
욕심을 내어 남의 것을 빼앗으려니 남에게도 화를 입히고 자신도 화를 입는다.
그래서 그는 “만족할 줄 아는 만족이야말로 영원한 만족이다.”고 했다.
그렇게 말한 노자는 만족하는 법을 어디에서 찾았는가?
바로 도道에서 찾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천하에 도가 있으면 군마軍馬를 끌어다 밭을 가는 데에 쓰지만
천하에 도가 없으면 군마가 성城 밖(전쟁터)에서 새끼를 낳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두 도를 체득해 마음을 도에 깊이 뿌리박고 살아간다면 항상 스스로
만족하기 때문에 다툼이나 전쟁 없이 서로들 평화롭게 살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만족하니 탐심이 일지 않아 남과 싸울 일이 없을 것이다.
평화로운 세상, 아니 지상낙원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탐심貪心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지략智略이요 전략戰略이지 않은가?
그래서 한산은
“늘 이기는 법 네게 가르쳐 주노니
탐하지 않음이 최상의 계책이니라.” 하고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노래한다.
<법구경法句經>에도 탐욕을 경계하는 말이 있다.
“탐욕만 좇으면 원수를 봉양하고 무덤을 이롭게 하는 결과가 된다.”
/innerlight34님의 블로그
한산자의 한산시를 읽으면 의심되는 점이 많다.
우선 한산자는 상세불명의 사람이다.
이 詩의 출처도 여구윤이라는 사람에 의해
절의 중이 한산자가 거주했던 곳을 중심으로 채록한 것이라 한다.
나무, 바위 등에 쓰여진 것이고 더러는 세월의 풍상에 훼손된 것도 있으리라.
암튼 이후로 선가의 사람들이 하나 둘 인용하므로 역사적으로 되기 시작한다.
의심 없이 고증 없이 살이 붙어 흐느적거리자 골격까지 세운다.
그리고 신격화 된다.
<寒山詩 85>는 산 속에서 道를 닦는 수행자의 마음가짐이 아니라
전형적 유가 출신의 불교 수행자가 교화목적의 시이다.
만약 한산자 자신의 글이라 해도 깨닫기 전의 수행을 다잡기 위한 글이다.
한산자는 불교 입문한 比丘가 아니라 주변인이다.
悟道 후 중생을 위한 글이라 하기에는 미흡하다.
한마디로 禪家人들의 입에 발린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