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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寒山詩

寒山詩 86

寒山詩 86

진시심중화瞋是心中火 성내는 것은 곧 마음속에서 북받쳐 일어나는 화火이니

능소공덕림能燒功德林 능히 공덕功德으로 쌓은 것들을 불태우네.

욕행보살도欲行菩薩道 보살菩薩의 길을 행하려거든

인욕호직심忍辱護直心 그 어떤 모욕이라도 참으며 곧은 마음을 지켜야 하네.

 

 

화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불길

애써 키운 공덕의 숲을 태워버리네

보살이 가야 할 길 가려 하거든

욕된 일 참아내 참마음 지켜야 하네

 

 

성냄은 마음속의 불

공덕 숲을 태울 수 있네.

보살도를 행하려거든

인욕忍辱하여 직심直心을 지켜야 하네.

 

►진瞋 성내는 마음으로 탐貪, 치癡와 함께 삼독三毒의 하나이다.

 

​당지진심當知瞋心 심어맹화甚於猛火 화를 내는 마음은 맹렬한 불길보다 더 심하다.

상당방호常當防護 무령득입無令得入 그것이 마음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잘 지켜야 한다.

겁공덕적劫功德賊 무과진에無過瞋恚 겁의 공덕을 해치는 것으로 화를 내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불유교경佛遺敎經>

 

관악언觀惡言 시공덕是功德 차즉성오선지식此卽成吾善知識

나쁜 말을 관찰하는 것이 공덕이며 이것이 내게는 스승이 된다

/영가현각永嘉賢覺 증도가證道歌

 

►공덕림功德林 선근공덕善根功德을 많이 쌓음이 수풀의 무성茂盛함과 같다는 말.

►보살도菩薩道 불과佛果를 구求하는 보살菩薩이 닦는 길.

 

►인욕忍辱

욕된 것을 참아내는 것을 말하며

보시布施, 지계持戒,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등과 함께 六波羅蜜의 하나이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행의 기본이다.

 

►직심直心 진여眞如를 바로 헤아려 생각하는 마음.

 

 

이 시는 성불成佛하고자 수행하는 자들에게 큰 교훈이 되는 훌륭한 시이다.

수행자가 화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화내는 것을 다반사茶飯事로 생각하여 가벼이 여기는 경우가 흔하지만

그것이 그동안 무성한 수풀처럼 공들여 쌓아놓은 功德을 불살라 없애버린다면

오랫동안 애써 수행한 결과가 삽시에 수포水泡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화를 내는 것은 참으로 경계해야 할 일이다.

어떤 모욕侮辱이나 핍박逼迫을 참지 못할 때 화가 난다.

그런데 보살도를 닦는 수행자가 그럴 때 인내심을 잃고 화를 내면

직심直心 곧 진여眞如를 바로 헤아려 생각하는 마음을 잃게 된다고 한산은 경계한다.

 

인욕에 관한 불경의 한 대목을 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욕하고 비방하며, 몽둥이로 때리고 살을 도려내어

그 몸을 괴롭게 하여 목숨이 끊어지기에 이른대도

이 일 때문에 어지러운 마음이나 노여운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며

또한 뜻이 물러서지 않아 대비홍서大悲弘誓(큰 자비에서 나오는 불보살의 서원)를

더욱 강화해서 휴식이 없어야 한다./<화엄경華嚴經>

 

성냄을 경계해야 할 자들이 어디 불법佛法을 닦는 사람들뿐이겠는가?

일반인들도 화를 내면 정신이 흐려져 사고력과 판단력이 저하될 뿐만 아니라

그 화가 독이 되어 종내에는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성냄은’ 가히 ‘공덕 숲을 태울 수 있’는 ‘마음속의 불’인 것이다.

/innerlight34님의 블로그

 

 

►공덕功德 Guna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공덕功德’이란 산스크리트 구나(Guna)를 번역한 말로

공양供養하는 덕德 즉 선행을 해서 쌓은 업적과 어진 덕이란 뜻이다.

선한 행동에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힘. 공능功能이 덕으로 갖추어져 있음을 말한다.

 

공덕은 좋은 일을 행한 덕으로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능력(공능)을 말한다.

그러나 선행을 행함에 장차 좋은 과보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과보를 바라지 않고 베풂의 덕만 가지고 쌓는 선행을 말한다.

 

그리하여 종교적으로 순수한 것을 진실공덕眞實功德이라 하고

세속적인 것을 부실공덕不實功德이라 한다.

또한 무공용無功用의 덕을 진실공덕이라 한다.

 

공용功用이란 공들여 하는 일이나 수행, 혹은 작용을 말하는데

身口意로 짓는 모든 동작과 말과 생각 등을 말한다.

 

그런데 무공용無功用이란 공용功用)이 없애는 말이 아니라

功의 효과를 기대하지 않는 활동을 무공용無功用이라 해

남몰래 선행을 쌓는 것을 말한다.

이를 음덕陰德이라고 한다.

 

공용은 유위법有爲法이고 무공용無功用은 분별이나 사량심, 조작이 없다는 말로서

사량계교나 인위적인 조작을 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진리의 작용을 말한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세속적인 공덕을 초월한 곳에 참 공덕이 있는 것이다.

요컨대 공덕이란 자기가 공덕을 쌓았다는 의식뿐만 아니라 아무 공덕이 없다는

의식마저 비워 버리고 오직 무심으로 선행을 쌓는 것을 말한다.

 

공용이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무공용無功用은 공용을 하고 난 뒤엔

무엇을 하든 물 흐르듯이 이루어지는 자연스런 삶을 말한다.

 

공용 없이 무공용은 없다.

중생의 삶은 공용이요, 보살의 삶은 무공용이다.

무공용의 삶이 진실공덕의 경지이다.

 

►공양供養 산스크리트어 pujana

공양은 보통 음식ㆍ의복 등을 불ㆍ법ㆍ승 3寶에게 공급해 바친다는 뜻을 지닌다.

그리하여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을 불공佛供(Buddha-puja)이라 한다.

그 외에 여러 뜻이 있다.

 

첫째, 불佛⋅법法⋅승僧 삼보에 음식, 옷, 꽃, 향 등을 바치는 것이다.

둘째, 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이란 뜻이다.

셋째, 봉사함을 말한다.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도 포함된다.

넷째, 절에서 음식을 먹는 일 등을 말한다.

여기서 공양은 불ㆍ법ㆍ승 삼보를 공경함, 찬탄함, 칭송함, 예배함의 뜻이다.

 

►공능功能 산스크리트어 samartha

어떤 法 즉 존재가 지니고 있는 어떤 결과를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 외에 작용作用, 기능機能, 능력. 잠재력, 수련법의 효능, 즉 효과 등의 뜻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공덕이라 하면 남에게 베푸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보시布施(dana)가 중요한 공덕이기는 하나

행한 행위의 결과에 집착을 하면 오히려 선업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결과를 기대하고 베푸는 보시는 공덕이 될 수 없다.

 

업業이든 복福이든 효과를 기대하고 ‘짓는 행위’는 공덕이 아니다.

공덕을 쌓고자 의도한 행위는 공덕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공덕을 쌓고자 한다면 겸손과 下心으로 남을 공경하고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깨끗한 보시여야 한다.

즉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여야 한다.

 

그리고 베풀기에 앞서 자기 자신이 안으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밖으로 하심과 겸손으로 일관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공덕으로 은혜를 갚으라.’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진 신세나 빚을 착한 일로 되돌려 주어라는 뜻이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보시를 행하면서도 보시라는 행위에 집착하지 않고

내가 보시를 한다는 데에 마음이 머물지 않고

공덕의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것을 무주상보시라 하는데

무주상보시가 곧 보시바라밀이다.

 

원칙적으로 공덕이란 방편이다.

공덕이란 선행을 쌓는 것인데 이것의 근본은 자비심과 보리심이다.

선행의 근본이 바로 자비심인 것이다.

그래서 공덕을 방편이라 한 것이다.

 

공덕이란 자비심이 바탕이 된 행위로 축적돼야 한다.

공덕을 쌓기 위해 자비심을 갖고 선행도 같이 병행해야만 한다.

 

그래서 육조 혜능慧能 대사는 공덕을 한마디로 말하면

눈을 안으로 돌려 자기 자신의 성품을 보는 것이라 했다.

 

“성품을 보는 것이 功이요, 평등 이것이 德이니 생각 생각이 막힘없어

항상 본성의 진실묘용眞實妙用을 보는 것이 공덕이 되는 것이니라.”고 했다.

 

그리하여 달마達磨 대사가 처음 양무제梁武帝를 만났을 때

무제가 묻기를 짐이 일생동안 절을 많이 짓고 스님을 공양하고

널리 보시를 하고 재齋를 베풀었는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하니

달마 대사의 말이 “실로 공덕이 없음이라.” 했다는데

그 이치가 무엇입니까> 하는 물음에 육조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절을 짓고 보시하며 공양을 올리는 것은 다만 복을 짓는 것이다.

복을 공덕이라 할 수는 없다.

무제가 마음이 삿되어 정법을 알지 못하고 절을 짓고 공양을 올리고

보시를 하며 재를 베푸니 이것은 복을 구하는 것이라.

이런 복이 공덕이 될 수는 없느니라.

공덕은 法身 중에 있는 것이요, 복 밭[福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法性에 공덕이 있으니 성품을 보는 것이 功이고 평등하고 곧은 것이 덕德이다.

안으로 불성을 보고 밖으로 공경하라.

만약 모든 사람을 가볍게 여겨 我相을 끊지 못하면

곧 스스로 공덕이 없고 자성은 허망하므로 법신에도 공덕이 없다.

 

생각마다 덕을 행하고 마음이 평등해 곧으면 공덕이 곧 가볍지 않다.

항상 공경하고 스스로 몸을 닦는 것이 功이 되고 스스로 마음을 닦는 것이 곧 德이다.

공덕은 자기 마음으로 짓는 것이다.

복과 공덕이 다르니라.”

 

절을 크게 짖고 보시를 하거나 재齎 올리는 것은 복을 구하는 것이지 공덕이 아니라는 뜻이다.

복을 구하는 행위는 공덕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공덕은 법신 중에 있는 것이고 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공덕이 법신 중에 있다는 말은 공덕은 진리 자체에 있다는 말이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공덕이라는 뜻이다.

 

진리는 깨닫지 않고 물질적인 보시만 해서는 아무 공덕이 없다는 뜻이다.

연기와 윤회를 근본으로 하는 불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행위의 하나가 공덕이다.

 

공덕의 종류는 많다.

냇물에 징검다리를 놓아 다른 사람들이 쉽게 건널 수 있게 하는 월천공덕越川功德,

가난한 사람에게 옷과 음식을 주는 구난공덕救難功德,

병든 사람에게 약을 주는 활인공덕活人功德,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급수공덕汲水功德 등 매우 많으며

선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모든 행위와 마음 씀씀이가 모두 공덕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공덕은 불법에 귀의해 깨달음을 닦는 것이고

이러한 사람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도 큰 공덕이 된다.

그래서 바르게 수행 정진하는 스님께 공양하고 존경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덕은 끝이 없어서 수천 사람이 횃불 하나에서 저마다 홰를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 가더라도 원래의 횃불은 사그러들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절과 탑을 세우고 경전을 옮기며 불상을 모시며 명절이나 절기와 재일에 남을 돕고

액막이를 하며 방생하는 풍속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절과 탑을 세우고 경전을 옮기는 조사造寺, 조불造佛, 사경寫經과

기도 등의 선행은 현재 또는 미래에 행복, 이익을 가져오는 능력이 있다고 본다.

그러면 왜 달마 대사는 양무제의 조사, 조불 행위를 공덕이 없다고 했는가.

그것은 공덕의 참뜻은 모르고 물량의 업적만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덕을 이루는 원인으로서의 선행을 가리켜서 善根功德 또는 功德善根이라고 하는데

공덕선근이라는 것은 복 짓는 근본이 되는 선근이라는 의미이다.

 

선한 행위에는 복덕, 이익을 가져오는 가치 있는 특질, 뛰어난 덕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원인으로서의 선행위와 결과로서의 이익에는 종교적으로 순수한 것과 세속적인 것이 있다.

종교적으로 순수한 것이 참된 공덕이다.

 

‘功德’은 중요한 불교 용어이므로 여러 학승들에 의해 각기 정의가 내려졌다.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北魏의 담란曇鸞(476-542)의 말을 검토 해보자.

 

담란曇鸞은 <왕생론주往生論註 권상>에서

공덕을 허위虛僞와 진실眞實의 두 가지 종류로 구별했다.

 

그의 해석을 요약하면 유루심有漏心에서 나온 것은 허위이기 때문에 불실공덕이고

보살의 지혜청정심智慧淸淨心에서 나온 것이야말로 진실공덕이라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달마대사는 양무제梁武帝에게 ‘공덕이 없다[無功德]’라고 했던 것이다.

양무제의 불사는 유루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덕의 깊고 넓음을 바다에 비유해 공덕해功德海(guna-sagara)

그 귀중함이 보배와 같다고 해서 공덕보功德寶(guna-ratna)라고도 한다.

 

그 밖에도 공덕장功德藏, 공덕취功德聚, 공덕장엄功德莊嚴, 공덕전功德田, 공덕림功德林과 같이

공덕이란 말이 워낙 좋은 말이어서 공덕을 관사로 사용하는 단어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善行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과보를 공덕이라고 지칭하기도 하며

善果, 福果(punna-phala), 善根(kusala-mula) 등도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 공덕에 관한 빈녀貧女 난타難陀(Nanda)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가난한 노파 난타는 비록 궁핍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 착한 누나처럼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현우경賢愚經>이라는 불경은 그녀의 아름다운 행적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코살라(Kosala)국 수도 사위성舍衛城의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계실 때의 일이다.

국왕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정성어린 공양을 올렸다.

특히 기원정사를 환히 밝히는 고관대작들의 화려한 공양 등불은 이를 지켜보는

가난한 여인 난타에겐 부러움을 넘어 안타까운 마음까지 들게 했다.

 

그녀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 없었다.

‘나는 전생에 무슨 업보를 지었기에 부처님을 뵙고도 등 하나 공양할 수 없을까.’

이렇게 한탄했다.

 

하루 구걸하여 하루를 먹고사는 난타는 그날 온종일 구걸한 한 푼의 돈으로

굶주림을 해결하는 대신 부처님께 등불 공양을 올릴 기름을 사러 갔다.

 

구걸하던 노파가 기름을 사러온 것을 이상하게 여긴 기름가게 주인은

그 사연을 듣고 감동해 두 푼 어치가 넘는 기름을 주었다.

 

난타는 그 기름으로 정성껏 등불을 만들어 기원정사의 부처님 계신 곳 언저리 화려한

등불들 한쪽 구석진 곳에 비록 초라한 등불이지만 정성을 다해 밝히고 설법을 들었다.

 

밤이 깊어 사람들이 흩어지자 등불도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새벽이 돼도 꺼지지 않고 점점 더 밝은 빛을 내는 등불 하나가 있었다.

난타가 깨끗하고 정성스런 마음으로 밝힌 그 등불이었다.

 

당번을 맡은 목련 존자는 날이 밝아오자 기름을 아끼려고 등불을 끄려 했으나 꺼지지 않았다.

부처님은 꺼지지 않는 난타의 등불을 보고 이를 이상히 여기는 아난다(Ananda)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그 등불은 한 가난한 여인이 간절한 정성으로 켠 것이기에 아직까지도 그리 밝은 것이니라.

설령 네가 그 등불을 입으로 불어 끄려 해도 끌 수가 없을 것이니

그 여인이 굶주림을 무릅쓰고 밝힌 정성이기 때문이다.

그 여인이 지금은 비록 가난한 노파지만 이 공양이 인연이 돼 그 공덕으로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어 수미등광여래須彌燈光如來가 될 것이다.”라고 수기하셨다.

 

이것이 가난한 여인의 깨끗한 정성을 뜻하는

‘빈자일등貧者一燈’이라는 고사성어의 배경이 되는 설화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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