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주述酒 술이란 이런 것
중리조남륙重離照南陸 한낮의 해 다시 남녘 땅 비추고
명조성상문鳴鳥聲相聞 우는 새 소리 여기저기 들려온다.
추초수미황秋草雖未黃 가을 풀들 채 누렇게 시들지 않았으나
융풍구이분融風久已分 봄바람과는 이미 오래전 달라져 있도다.
소력효수저素礫皛修渚 흰 조약돌이 긴 물가에서 반짝이더니
남악무여운南嶽無餘雲 남쪽 큰 산에는 남은 구름 없어졌도다.
예장항고문豫章抗高門 <예장>은 높은 문으로 막았지만
중화고령분重華固靈墳 <중화>는 본래 신령한 무덤이어라.
류루포중탄流淚抱中歎 눈물 흘리며 마음속에 비탄함 안고(歎↔獗)
경이청사신傾耳聽司晨 귀 기울여서 새벽닭 울음소리 듣는다.
신주헌가속神州獻嘉粟 신주에서는 좋은 곡식 바치고
사령위아순四靈爲我馴 사방의 신령은 나를 위해 길들어졌다.
제량동사려諸梁董師旅 <심제량>이 군대 거느리고 나가자
양승상기신羊勝喪其身 <양승>은 그의 몸을 잃었다.(羊↔芊)
산양귀하국山陽歸下國 <산양공>은 작은 나라로 돌아갔지만
성명유불근成名猶不勤 이름 얻는 데는 여전히 힘쓰지 않았도다.
복생선사목卜生善斯牧 목숨을 살리느라 목민관 자리 좋아하고
안락불위군安樂不爲君 편안히 지내며 임금노릇 하지 않았도다.
평왕거구경平王去舊京 <평왕>은 옛 도읍지 떠나가 버렸으나
협중납유훈峽中納遺薰 <협중>에서는 남은 향기 받아들였도다.
쌍릉보운육雙陵甫雲育 <쌍릉>이 겨우 살아나는가! 했는데(陵↔陽)
삼지현기문三趾顯奇文 세발 새가 기이한 글을 나타내었도다.
왕자애청취王子愛淸吹 왕자 진은 맑은 생황 불기 좋아하여
일중상하분日中翔河汾 대낮에 물 위를 날았도다.
주공련구치朱公練九齒 <도주공>은 9년 동안 수련 하면서
한거리세분閒居離世紛 한가히 살며 세상의 어지러움 떠나버렸도다.
아아서령내峨峨西嶺內 높고 높은 서령의 안쪽은
언식상소친偃息常所親 누워 쉬는 데 항상 가까이하는 곳이도다.
천객자영고天客自永固 천객의 용모는 저절로 영원히 굳어질 것이니(客↔容)
팽상비등륜彭殤非等倫 <팽조>와 <상자>는 같은 부류의 사람은 아니도다.
●<술주述酒> 해석
의적조두강윤색지儀狄造杜康潤色之 의적(우임금 때 사람)이 술을 빚고 두강이 그것을 맛좋게 하였다.
중리조남륙重離照南陸 태양이 남녘땅을 비추니
명조성상문鳴鳥聲相聞 지저귀는 새소리 곳곳에서 들려오네.
추초수미황秋草雖未黃 가을 풀 아직 시들지 않았으나
융풍구이분融風久已分 봄바람은 이미 오래전에 흩어졌네.
소력효수저素礫皛脩渚 흰 조약돌 긴 물가에서 빛나는데
남악무여운南嶽無餘雲 남악에는 상서로운 구름 사라졌다네.
첫 구절의 분위기는 자연경관과 계절을 노래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동진의 황실이 점차 쇠약해져서 간사한
무리인 환현桓玄이 강릉에 자리 잡고서 정권 탈취의 음모를 꾸며 왕실이 위험에 처함을 우의寓意하고 있다.
불의가 득세하고 정의가 사라지는 상황이다.
예장항고문豫章抗高門 예장이 조정과 대항하니
중화고령분重華固靈墳 순임금은 무덤만 남기네.
‘예장豫章’은 작위를 받은 유유劉裕를 가리킨다.
환현이 반란을 일으켜 자칭 황제가 되자 404년에 유유는 곳곳의 호걸들과 연계해 환현을 토벌하는 군사를 일으켰다.
유유의 군대는 비록 2천 명에 불과했지만 용맹하여 복주산 싸움에서 환현의 군대를 대패시켰다.
유유에게 황제 자리를 선양한 공제는 죽임을 당하여 억울한 무덤이 남아 있다.
‘중화重華’는 본디 우虞나라 순임금의 호이지만 여기서는 동진東晉(317-420)의 공제를 가리킨다.
류루포중탄流淚抱中歎 눈물 흘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경이청사신傾耳聽司晨 귀 기울여 새벽닭 울음소리 듣네.
공제를 생각한 도연명은 눈물을 흘리며 속으로 탄식한다.
슬픔에 젖어 뒤척이다 보니 새벽닭이 운다. 밤을 꼬박 새운 것이다.
신주헌가속神州獻嘉粟 나라 안에서는 좋은 곡식 바치고,
사령위아순四靈爲我馴 신령스런 네 동물도 나를 따른다 말하네.
백성들이 잘 익은 벼를 바치자 유유가 그것을 공제에게 드렸다.
그러자 공제가 다시 그것을 유유에게 돌려주었다.
공제가 유유에게 곡식을 다시 돌려주었다는 것은 자신이 유유보다 실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윽고 유유는 상서로운 조짐인 사령四靈 즉 기린·봉황·거북·용을 거짓으로 만들어 왕위 찬탈을 꾀했다.
제량동사려諸梁董師旅 심제량이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자
미승상기신羋勝喪其身 미승은 자신의 목숨을 잃었다네.
‘제량諸梁’은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인 심제량沈諸梁 즉 섭공葉公을 가리킨다.
‘미승羋勝’(羊勝)은 백공승白公勝을 일컫는데 초나라 태자인 건建의 아들이다.
사마천의 <史記>를 보면 미승이 스스로 왕위에 오른 지 한 달 남짓 지나자 섭공葉公이 와서 초나라를 구했다.
여기서 심제량과 미승 이야기는 왕위를 찬탈한 환현桓玄이 유유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가리킨다.
산양귀하국山陽歸下國 산양공山陽公이 작은 나라로 돌아가니
성명유불근成名猶不勤 이름 뿐 오히려 할 일이 없었다네.
‘산양공山陽公’은 한나라 헌제獻帝인 유협劉恊을 가리킨다.
위왕魏王 조비曹丕가 황제를 자칭하고 헌제를 내쫓아 산양공으로 삼았다.
이에 도연명은 유유가 진나라 공제를 내쫓아 이름뿐이고 할 일이 없는 영릉왕으로 삼은 것에 우의하고 있다.
그런데 조비는 헌제를 내쫓아 산양공으로 삼았지만 여생을 누릴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유유는 공제를 폐위하고 나서 바로 시해했다.
복생선사목卜生善斯牧 복식은 양치는 일을 잘했으며
안락불위군安樂不爲君 안락은 충성을 다하지 않았네.
‘복생卜生’은 복식卜式인데 서한西漢 무제武帝 때의 사람이다.
그는 양들을 기르면서 나쁜 양을 없애버려 다른 양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였다고 한다.
‘안락安樂’은 한나라 때 창읍왕昌邑王을 지낸 유하의 신하이다.
그는 임금이 교만한데도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평왕거구경平王去舊京 주나라 평왕은 옛 도읍을 떠나고
협중납유훈峽中納遺薰 골짜기 가운데로 연기가 스며들었네
‘平王’은 동주東周를 개국한 임금이다.
기원전 770년에 견융犬戎의 침입을 받아 동쪽의 낙읍洛邑 즉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로 수도를 옮겼다.
‘구경舊京’은 호경鎬京 즉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안제安帝가 환현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평고왕平固王으로 강등되어 건업建業을 떠나 심양으로 옮겨간 것을 가리킨다.
둘째 구절의 ‘훈薰’은 연기이다.
옛날 월越나라에서 임금이 3대에 걸쳐 피살당하자 왕자 수搜가 골짜기의 굴로 도망쳤다.
그러자 월나라 사람들이 쑥을 태운 연기를 굴속으로 보내어
그를 밖으로 나오게 해 수레에 태워 데리고 가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여기서는 유유가 황제의 자리를 노리며 안제를 목 졸라 죽인 뒤 공제를 억지로 세운 것을 의미한다.
쌍릉보운육雙陵甫云育 남은 것 겨우 두 개의 능뿐이지만
삼지현기문三趾顯奇文 세 발 달린 새 기이한 글을 나타냈다네
‘쌍릉雙陵’은 낙양에 있는 진晉 무제武帝와 혜제惠帝 두 황제의 무덤이다.
여기서는 관중關中과 낙양洛陽 일대의 중원 지역을 가리키는데
유유가 북쪽으로 진군하여 잃었던 관중과 낙양 일대를 수복한 것을 뜻한다.
‘삼지조三趾鳥’는 세 발 달린 새이다. 이 새는 상서로운 조짐을 나타낸다.
왕자애청취王子愛淸吹 왕자 진은 피리 불기 좋아해,
일중상하분日中翔河汾 대낮에 황하와 분수汾水에서 날아올랐네.
‘왕자王子’ 진晉은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이다.
생황(피리의 일종) 부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나중에 학을 타고 승천하여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왕자 진이 신선이 되어 떠나간 일은 동진의 멸망을 은근히 말하고 있다.
주공련구치朱公練九齒 도주공은 9년 동안 장생술 수련하여
한거리세분閒居離世紛 한가로이 살며 세상의 분란을 떠났네.
‘도주공陶朱公’은 범려范蠡를 가리킨다.
그는 전국시대 월越나라 대부大夫로 있으면서 월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킨 뒤 도陶,
지금의 산동성 정도현定陶縣 서북쪽에 이르러 이름을 도주공이라 바꾸고 장사하여 부자가 되었다 한다.
범려는 신선술을 수련하였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부를 축적하여 자신의 힘을 기르고 한가로이 살았다.
아아서령내峨峨西嶺內 높고 높은 서산西山 안에
언식상소친偃息常所親 내 항상 존경하던 분 누워 쉬고 있구나
‘서산西山’은 백이伯夷와 숙제叔弟가 은거했던 곳이다.
백이, 숙제의 삶은 도연명의 이상이었다.
천용자영고天容自永固 임금의 훌륭한 그 모습 영원할 것이니
팽상비등륜彭殤非等倫 팽조를 요절한 아이와 똑같이 볼 수 없다네
‘팽상彭殤’은 팽조彭祖와 상자殤子이다.
팽조는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그는 요임금 때부터 주나라에 이르기까지 8백 살을 살았다고 한다.
반대로 ‘상자殤子’는 요절夭折한 어린아이를 가리킨다.
도연명은 ‘천용天容’ 곧 임금이 모습이 영원할 것이라고 하였다.
임금이 모습이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왕도를 행하였기 때문이다.
도연명이 말한 임금은 왕위를 찬탈한 사람 유유劉裕가 아니라 왕위를 찬탈 당한 공제恭帝이다.
부정한 행위로 왕위를 찬탈한 사람의 나라는 그 수명이 짧지만
정도正道를 행하다가 힘이 약해 왕위를 빼앗긴 사람은 길이 역사에 빛날 것이다.
●화도연명술주和陶淵明述酒/김종직金宗直(1431 세종13-1492 성종23)
김종직(1431-1492)은 도연명(365-427)의 <술주述酒>詩를 읽고
도연명의 술주시에 화답하는 시 <화도연명술주和陶淵明述酒>를 지었다.
김종직은 도연명의 시를 음미하면서 세조와 단종을 떠 올렸으리라.
김종직은 이 시를 지으면서 서문을 썼다.
서문은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7일 4번째 기사에 나온다.
“나는 젊어서 <술주> 시를 읽고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뒤에 도연명의 시에 화답한 탕동간湯東磵의
주소註疏(본문에 해석을 붙인 것)를 보고서야 소상히 영릉零陵을 애도하는 시임을 알게 되었다.
아아, 탕공湯公이 아니었다면 유유劉裕)의 찬시纂弑한 죄와
도연명의 충분忠憤 어린 뜻이 거의 숨겨질 번하였도다.
그렇게 은어隱語를 쓰기 좋아한 것은 바로 도연명의 생각에 당시는 유유가 한창 날뛰는지라
그의 힘이 용납될 수가 없는 형편이니 그는 다만 몸이나 깨끗하게 할 뿐이요,
언어言語 가운데 그런 일을 드러내서 멸족滅族의 화를 자초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던 때문이나
지금의 나(김종직)는 그렇지 않다.
나는 천년 뒤에 태어났으니 어찌 유유가 두러울소냐.
그러므로 유유의 흉역凶逆을 모조리 폭로하여 탕공의 주소注疏 끝에 붙이노니,
후세의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나의 시를 보고 두려워 할 줄을 알게 된다면
이 또한 외람되이 “춘추春秋”의 일필一筆에 견준다 하리라.” 하였는데 그 詩는 없어졌다.
”김종직이 도연명의 술주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 도움을 준 사람은 송나라 때의 학자인 동간東澗 탕한湯漢이다.
그는 이 탕동간의 주소注疏(해석)를 보고 나서야 이 시가 영릉零陵을 애도한 시라는 것을 알았단다.
영릉零陵은 동진東晋(317-420)의 공제恭帝를 가리킨다.
그는 유유劉裕(363-422)에게 선위의 형식으로 왕위를 빼앗기고 끝내 목숨까지 빼앗긴 비운의 군주였다.
남조 송宋나라의 태조太祖가 된 유유는 공제恭帝 원희元熙 元年(419)에 공제를 폐하여 영릉왕으로 삼았다가
그 다음 해에는 공제를 시해하고 제위帝位를 찬탈하여 국호를 송宋으로 했다.
이어서 김종직은 이 시를 지은 이유는 두 가지라고 밝힌다.
첫째, 유유劉裕가 왕위를 찬탈하고 동진東晋의 공제恭帝을 죽인 죄와
도연명이 공제의 죽음을 애도한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고
둘째 유유의 흉역한 행위를 고발하여 후세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이 시를 보고 두려워하게 하기 위함이라면서 공자가 지은 역사서 “춘추”를 언급한다.
그러나 <연산군일기>에는 김종직의 詩는 없어졌다고 적혀 있다.
다행히도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 종합DB”의 점필재집(시집 제 11권)에는
‘화도연명술주和陶淵明述酒 도연명의 술주시에 화답하다’시가 수록되어 있다
정당유유이鼎鐺猶有耳 솥에도 오히려 귀가 있는데
인호부자문人胡不自聞 사람이 어찌 듣지를 못하리오
군신수존비君臣殊尊卑 임금과 신하는 존비尊卑가 달라서
건곤위유분乾坤位攸分 하늘과 땅의 자리가 나누어졌네
간명사불궤奸名斯不軌 간악한 이름은 반역을 했기 때문이라
적족무래운赤族無來雲 멸족이 되어 후손이 끊어져 버리고
당시마남도當時馬南渡 당시에 사마씨는 남쪽으로 건너갔으니
신주여구분神州餘丘墳 중원에는 무덤만 남았을 뿐이었네
천심상미염天心尙未厭 천심은 아직 떠나지 않았기에
유약일재신有若日再晨 마치 새벽이 두 번 온 듯했는데
처중수작얼處仲首作孼 처중이 맨 처음 난을 일으키었고
랑자비인순狼子非人馴 이리 새끼는 길들일 수 없었으며
치치유취부蚩蚩遺臭夫 악명을 남긴 어리석은 사나이는
효아장궐신斅兒戕厥身 자식에게 그 몸을 죽게 하였네
사효자하공四梟者何功 네 올빼미가 무슨 공이 있으랴
천보량은근天報諒殷懃 하늘의 보답을 참으로 자상했도다
완완안여공婉婉安與恭 온화하였던 안제와 공제는
내시류씨군乃是劉氏君 바로 이 유씨들의 임금이었는데
창천위가기蒼天謂可欺 푸른 하늘을 속을 수 있다고 여겨
고파요순훈高把堯舜薰 높이 요순의 훈풍을 끌어댔으나
수선졸반적受禪卒反賊 선위를 받는 게 끝내는 역적이였네
사씨교기문史氏巧其文 사씨는 글을 교묘하게 꾸미어
위이사령응諉以四靈應 사령이 응했다고 핑계를 대서
종대차사분宗岱且祠汾 태산에 봉선하고 분음에 제사하니
위명수능조僞命雖能造 거짓 천명을 만들 수는 있으나
세란당분분世亂當紛紛 세상의 혼란은 의당 분분하였지
호환리즉연好還理則然 천리란 본디 순환하길 좋아하기에
소야멸천친劭也蔑天親 소劭가 마침내 천친을 멸하였도다
술주다은사述酒多隱辭 술주시에는 은어가 하도 많으니
팽택무비륜彭澤無比倫 팽택에게 비할 자가 없겠구려
이 화답시는 김종직이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한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원인이 되었다.
1498년(연산군 4) “성종실록”이 편찬될 때 당상관 이극돈李克墩이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史草에 삽입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라는 글이 세조의 찬위를 헐뜯은 것이라고 하여
총재관總裁官 어세겸魚世謙에게 고하였다.
그러나 어세겸이 별다른 반응이 없자 이를 유자광柳子光에게 고하였다.
유자광은 김종직과 사감이 있었고 이극돈은 김일손과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유자광은 이 사실을 세조의 총신寵臣이었던 노사신盧思愼에게 고해 그와 함께 왕에게 아뢰어
“김종직이 세조를 헐뜯은 것은 대역무도大逆無道”라고 주장하였다.
연산군이 유자광에게 김일손 등을 추국하게 하여 많은 유신들을 죽이고
김종직을 두 번 죽게 한 부관참시란 형을 내렸던 것이다.
김종직의 ‘화도연명술주和陶淵明述酒 도연명의 술주시에 화답하다’ 시를 한 구절씩 음미하여 보자.
점필재 김종직의 <화도연명술주>시는 다섯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그 구성은 6구, 8구, 8구, 6구, 2구로 이루어졌다.
시의 특징은 많은 고사故事를 사용하고 우의寓意가 많다는 점이다.
먼저 첫 단락이다.
정당유유이鼎鐺猶有耳 솥에도 오히려 귀가 있는데
인호불자문人胡不自聞 사람이 어찌 듣지 못하리오.
군신수존비君臣殊尊卑 임금과 신하는 존비가 달라서
건곤위유분乾坤位攸分 하늘과 땅처럼 자리 나누어졌네
간명사불궤奸名斯不軌 간악한 이름은 반역을 한 때문이라
적족무래운赤族無來雲 멸족되어 후손이 끊어져 버렸네.
정당유유이鼎鐺猶有耳 솥에도 오히려 귀가 있는데
인호불자문人胡不自聞 사람이 어찌 듣지 못하리오.
‘솥 정鼎’은 발이 세 개이고 귀가 둘 달린 음식을 익히는데 쓰는 도구이다.
그런데 귀가 달린 솥은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사물이기 때문에 인지認知능력이 없다.
사람은 인지 능력이 있다.
사람은 귀로 듣고,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판단 능력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라도 염치廉恥가 없으면 잘못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죄의식이 전혀 없다.
요즘 말로 잘못을 저지르고도 ‘내로남불, 남 탓만 하는’ 몰염치이다.
김종직은 윤리倫理가 실종된 시대를 걱정하고 있다.
군신수존비君臣殊尊卑 임금과 신하는 존비尊卑가 달라서
건곤위유분乾坤位攸分 하늘과 땅의 자리가 나누어졌네
그리고 본집本集에서
주류유찬시지죄誅劉裕纂弑之罪 유유의 찬시(임금을 죽이고 왕위를 뺏음)의 죄를 치고
발연명충분지지發淵明忠憤之志 연명의 충분의 뜻을 펴도다. 하였다.
조선 시대는 전제군주 국가였다.
임금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따라서 임금이 하늘이고 신하는 땅이라는 신분의 높낮이가 있다.
하지만 임금과 신하는 각기 직분이 나누어져 있었다.
임금은 하늘의 덕 즉 원융圓融한 덕을 지니고 신하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래야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진다.
간명사불궤奸名斯不軌 간악한 이름은 반역을 했기 때문이라
적족무래운赤族無來雲 멸족이 되어 후손이 끊어져 버리고
여기에는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이 드러난다.
“착한 일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를 남기고 착하지 않은 일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을 남긴다.”
즉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을 지은 뒤의 결과가 복福과 화禍이다.
악업 가운데서 가장 나쁜 것은 반역叛逆이다.
전제왕조專制王朝에서 신하는 임금에게 복종하여야 한다.
신하는 그 임금이 좋은 정치를 하도록 의견을 개진할 수는 있어도 왕권에 도전하여 왕조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역성혁명은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설령 반역하여 권력을 잡았을지언정 세월이 지나면 그 간사한 이름은 영원히 역사에 남는다.
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은 멸족이 되어 대가 끊어진다.
그만큼 조상이 잘못했기 때문이다.
하늘이 그들에게 벌을 주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신하가 임금을 내쫓거나 죽이고 왕위에 오른 경우가 가끔 있다.
그 사례로 도연명과 김종직은 유유劉裕(363-422)가 東晋(317-420)의 공제恭帝를
419년에 선위의 형식으로 왕위를 빼앗고 다시 공제를 시해한 사실을 언급했다.
이는 우의寓意에 지니지 않는다.
실제 의도는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하고 그를 죽인 세조世祖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유유를 세조, 공제를 단종에 비유한다면 세조는 단종을 시해한 간악한 이름의 반역자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같은 사육신이 나와 절개를 지킨 것이다.
반면에 신숙주는 변절자로 역사에 남았다.
첫째 단락 6구가 서사序詞라면 둘째 단락부터는 본사本詞에 해당한다.
우선 두 번째 단락 8구를 읽어보자.
당시마남도當時馬南渡 당시에 사마씨는 남으로 건너갔으니
신주여구분神州餘丘墳 중원에는 무덤만 남았을 뿐이었네
천심상미염天心尙未厭 천심은 아직 떠나지 않았기에
유약일재신有若日再晨 마치 새벽이 두 번 온 듯했는데
처중수작얼處仲首作孼 처중이 맨 처음 난을 일으키었고 원주) 왕돈王敦이다.
랑자비인순狼子非人馴 이리 새끼는 길들일 수 없었으며 원주) 소준蘇峻이다.
치치유취부蚩蚩遺臭夫 악명을 남긴 어리석은 사나이는
효아장궐신斅兒戕厥身 자식에게 그 몸을 죽게 하였네 원주) 환온桓의 父子이다.
그러면 김종직의 시를 한 구씩 자세히 음미해보자.
당시마남도當時馬南渡 당시에 사마씨는 남으로 건너갔으니
신주여구분神州餘丘墳 중원에는 무덤만 남았을 뿐이었네
사마씨司馬氏는 위魏·오·촉나라가 다투는 三國시대 위나라의
명장인 사마의司馬懿(179-251 사마중달로 잘 알려짐)의 손자 사마염司馬炎(236-290)이다.
서기 265년에 위나라 원제元帝 조환曹奐(246-303)은 성대한 의식을 베풀고 사마염에게 양위 조서를 발표하였다.
위나라는 조조가 화북을 통일하고 죽은 후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후한의 마지막 임금인 헌제獻帝의 자리를 빼앗아 220년에 세운 나라이다.
“고대의 성군 요·순의 교훈에 따라 임금의 자리를 어진 신하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은퇴하겠노라.”
양위식에서 사마염은 조비가 후한의 헌제로부터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은 때와 마찬가지로
세 번 사양의 뜻을 표한 후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진晋이라 일컫고 수도를 낙양에 정하였다.
진나라는 280년에는 동오東吳를 멸망시키고 3國을 통일했으나
316년에 이르러 한漢의 유요劉曜의 침략을 받아 진은 멸망하였다.
이러자 317년에 황실의 후예인 낭야왕琅琊王 사마예司馬睿(276-323)가
건강建康(지금의 난징)에서 진晉왕조를 다시 세웠는데 이를 '동진東晉'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사마염이 세운 진을 ‘서진西晉’이라고 부른다.
천심상미염天心尙未厭 천심은 아직 떠나지 않았기에
유약일재신有若日再晨 마치 새벽이 두 번 온 듯했는데
천심은 말할 것도 없이 한나라의 부흥을 두고 한 말이다.
한나라의 유요劉曜가 진을 멸망시킨 것은 正統이었다.
중국은 한나라 황실을 정통으로 여겼다.
처중수작얼處仲首作孼 처중이 맨 처음 난을 일으키었고 원주) 왕돈王敦이다.
랑자비인순狼子非人馴 이리 새끼는 길들일 수 없었으며 원주) 소준蘇峻이다.
시에 ‘처중은 왕돈王敦이다, 이리 새끼는 소준蘇峻’이라고 김종직은 원주原註를 달았다.
김종직은 왕돈과 소준을 내세워 반역의 대가가 어떠한 것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처중은 왕돈王敦의 자인데 그는 동진의 원제元帝 사마예를 도와 공을 세웠으나 뒤에 공을 믿고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면서 마침내 난을 일으켰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다.
소준蘇峻은 동진의 원제를 도와 공을 세우고 관군장군冠軍將軍이 되었는데 3대인 成帝 때에 반역하여 官軍을
차례로 물리치고 임금을 석두성石頭城에 내쫓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도간陶侃 등의 군대에게 패하여 죽었다.
치치유취부蚩蚩遺臭夫 악명을 남긴 어리석은 사나이는
효아장궐신斅兒戕厥身 자식에게 그 몸을 죽게 하였네 원주) 환온桓의 父子이다.
악명을 남긴 어리석은 사나이는 진晉 나라 환온桓溫이다.
그는 권세가 극에 달하자 반역할 생각을 품고서 일찍이 말하기를
“사나이가 백세에 좋은 명성을 전하지 못할 바엔 또한 악명이라도 만년에 남겨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환온은 은밀히 왕위 찬탈을 꾀하다가 끝내 이루지 못하고 병들어 죽었다.
그의 아들 환현桓玄 또한 막대한 권력으로 동진의 안제安帝에게 선위禪位를 받고 자칭 황제가 되었다.
404년에 유유劉裕는 곳곳의 호걸들과 연계해 환현을 토벌하는 군사를 일으켰다.
유유의 군대는 비록 2천 명에 불과했지만 용맹하여 복주산 싸움에서 환현의 군대를 대패시켰다.
그런데 환현을 토벌한 유유劉裕(363-422 재위 420-422)는
420년 7월에 동진의 공제恭)를 시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송나라를 세웠다.
도연명(365-427)은 동진東晋(317-420) 말기부터 남조南朝의 송宋(420-479)나라 초기에 걸쳐 살았는데
그는 유유가 공제를 시해한 일에 대하여 분개하는 마음을 은밀하게 나타내는 <술주述酒> 시를 지었다.
김종직의 <화도연명술주> 시의 셋째 단락을 살펴보자. 셋째 단락은 8구이다.
사효자하공四梟者何功 네 올빼미가 무슨 공이 있으랴
천보량은근天報諒殷懃 하늘의 보답을 참으로 자상했도다
완완안여공婉婉安與恭 온화하였던 안제와 공제는
내시류씨군乃是劉氏君 바로 이 유씨들의 임금이었는데
창천위가기蒼天謂可欺 푸른 하늘을 속을 수 있다고 여겨
고파요순훈高把堯舜薰 높이 요순의 훈풍을 끌어댔으나
수선졸반적受禪卒反賊 선위를 받는 게 끝내는 역적이었네
사씨교기문史氏巧其文 사씨는 글을 교묘하게 꾸몄다네.
그러면 한 구절씩 살펴보자.
사효자하공四梟者何功 네 올빼미가 무슨 공이 있으랴
천보량은근天報諒殷懃 하늘의 보답을 참으로 자상했도다
올빼미는 어미 새를 잡아먹는다 하여 패륜과 불효의 상징이다.
올빼미는 흉조凶鳥로 간신, 악인을 의미한다.
즉 올빼미는 떳떳하지 못하게 얻은 권세를 뜻한다.
여기서 네 마리 올빼미는 바로 앞에서 말한 왕돈王敦·소준蘇峻·환온桓溫·환현桓玄을 가리킨다.
그런데 사욕에 눈이 멀어 자신이 모시던 임금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빼앗으려 했던 네 올빼미의 말로는 패가망신敗家亡身이었다.
완완안여공婉婉安與恭 온화하였던 안제와 공제는
내시류씨군乃是劉氏君 바로 이 유씨들의 임금이었는데
안제와 공제는 유유劉裕가 모시던 황제였다.
안제(재위 396-418)는 동진의 10대 황제 사마덕종이고
공제(재위 419-420)는 동진의 11대의 마지막 황제 사마덕문이다.
그런데 유유는 황제를 내쫓고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공제는 단종에, 유유는 세조에 해당한다.
창천위가기蒼天謂可欺 푸른 하늘을 속을 수 있다고 여겨
고파요순훈高把堯舜薰 높이 요순의 훈풍을 끌어댔으나
이 시구에는 주어가 없다.
문맥으로 미루어 보면 그 시구의 주어는 유유劉裕이다.
유유는 자신의 악행을 숨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요순임금과 같이 백성들을 위해서 仁義政治를 행한다고 착각하였다.
그만큼 유유는 예의와 염치가 없다.
수선졸반적受禪卒反賊 선위를 받는 게 끝내는 역적이었네
사씨교기문史氏巧其文 사씨는 글을 교묘하게 꾸몄다네.
역적 유유는 선위禪位의 형식을 빌려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史官이 역사를 교묘하게 기술하여 유유에게 正統性을 부여했다.
한마디로 역사왜곡이다.
<세조실록>에는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 간 단종이 자살했다고 되어 있다.
“노산군이 스스로 목매어서 자살하자 예禮로써 장사 지냈다.”/세조실록 1457년 10월 21일
그런데 단종의 죽음을 직필한 이는 무오사화의 희생자 김일손(1464-1498)이었다.
그는 성종실록 사초史草에
‘노산의 시체를 숲속에 던져버리고 한 달이 지나도 염습하는 자가 없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서 쪼았는데
한 동자가 밤에 와서 시체를 짊어지고 달아났으니, 물에 던졌는지 불에 던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기록했다.
1516년 11월 23일자 중종실록에도 노산군이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찍이 듣건대 노산이 세조께 전위傳位하였는데 세조께서 즉위한 뒤 인심이 안정되지 않으므로
부득이 군君으로 강등하여 봉하였다가 죽임을 내렸다 합니다.”
또한 현종실록 1669년 1월 5일 자에는 진실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노산군이 살해당한 후 아무도 시신을 거두어 돌보지 않았었는데 그 고을 아전 엄흥도가 곧바로 가서 곡하고
관곽을 준비해 염하여 장사를 치렀으니 지금의 노산군 묘가 바로 그 묘입니다.”
한편 ‘음애일기’에는
‘노산군이 자진自盡했다는 것은 당시 여우같은 무리들이 권세에 아첨하느라고 지은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진실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는 없다.
당시의 사람들은 말을 안 하지만 다 알았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 단종을 ‘살해’한 임금이라는 것을.
김종직의 <화도연명술주시>의 네째 단락을 살펴보자. 넷째 단락은 6구이다.
위이사령응諉以四靈應 사령四靈이 응했다고 핑계를 대어
종대차사분宗岱且祠汾 태산에 봉선하고 분음에 제사했네.
위명수능조僞命雖能造 거짓 천명을 만들 수는 있으나
세란당분분世亂當紛紛 세상의 혼란 의당 분분하였네.
호환리즉연好還理則然 천리란 본디 순환하길 좋아하기에
소야멸천친劭也蔑天親 소가 마침내 천친을 멸하였도다.
그러면 한 구씩 살펴보자
위이사령응諉以四靈應 사령四靈이 응했다고 핑계를 대어
종대차사분宗岱且祠汾 태산에 봉선하고 분음에 제사했네.
사령은 네 가지 신령스런 동물인 기린[麟]·봉황새[鳳]·거북[龜]·용龍을 말하는데
사령이 나타나는 것은 곧 제왕帝王이 출현할 상서로운 조짐이라고 한다.
제왕이 될 상서로운 조짐이 있는 이가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하여야 하고 또 분음汾陰에 제사하여야 한다.
태산은 중국 산동성에 있는 산이고 분음은 산서성山西省 만영현萬榮縣에 있는 분수汾水의 남쪽 지명이다.
태산에선 진시황이 봉선하고 분음에선 한나라 무제가 제사를 지내어 황제가 되었다.
위명수능조僞命雖能造 거짓 천명을 만들 수는 있으나
세란당분분世亂當紛紛 세상의 혼란 의당 분분하였네.
거짓 천명은 조작할 수 있지만 백성들은 세상의 난리를 다 안다는 의미이다.
거짓 의식을 행한 사람은 유유가 세운 남조南朝 송宋(420-479)나라의 문제文帝이다.
그는 진시황이나 漢 무제의 의식을 흉내 내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이 사실을 백성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중국만 그런가?
김종직은 조선의 정국이 마치 중국의 그것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부당한 방법으로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는 세조는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봉선하고 제사지내는 의식을 행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진실이 아니라 가식이다.
호환리즉연好還理則然 천리란 본디 순환하길 좋아하기에
소야멸천친劭也蔑天親 소劭가 마침내 천친을 멸하였도다.
천리 즉 자연의 이치는 악한 사람을 위해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착한 사람을 위해 순환한다.
처음에는 악한 사람이 부귀를 얻으니 천리가 존재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지만 결국은 천리로 돌아간다.
송나라 문제文帝의 거짓 천명은 그의 큰아들인 유소劉劭로부터 대가를 받는다.
유소는 일찍이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나 문제를 무고한 사실이 발각되어 폐태자廢太子가 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고 유소는 동생인 차남 유준劉濬과 함께 문제를 시해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유소는 3개월 만에 의병義兵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리하여 유소는 중국 황제 역사상 최초로 황제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가 되었다.
한편 역사를 두루 훑어보면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인륜人倫이 말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 단락이다. 이 단락은 달랑 2구이다.
술주다은사述酒多隱辭 술주시에는 숨겨놓은 뜻 많나니
팽택무비륜彭澤無比倫 팽택에게 비교할 사람 없겠구려.
중국 팽택현에 살았던 도연명의 <술주>시에는 숨겨놓은 뜻이 많다.
시는 우의寓意가 함축含蓄되어 독자들에게 교훈을 준다.
김종직은 숨은 뜻을 많이 감춘 이는 도연명이 단연 압권이라고 칭송하면서 시를 마무리한다.
김종직이 도연명의 시에 화답한 이유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도연명의 <술주>시나 김종직의 <화도연명술주>시는 강한 교훈성을 지니고 있다.
그가 이 시를 지은 목적은 후세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그의 시를 보고 두려워할 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그는 서문의 끝부분에 “외람되이 춘추春秋의 한 필법筆法에 견준다 하리라.”고 적었다.
1498년(연산군 4년) 7월 17일에 윤필상 등은 김종직(1431-1492)이 지은
<화도연명술주和陶淵明述酒 도연명(365-427)의 술주述酒시에 화답하다>란 시에 관해 아뢰었다.
“김종직의 시는 조의제문보다 더 심한 점이 있어서 차마 말을 못하겠습니다.”
윤필상 등은 시권詩卷을 올린 뒤 서문의 뜻을 해석하였다.
"그 ‘이는 영릉零陵을 애도하는 시다.’라고 한 것은 영릉을 노산魯山에 비한 것이요,
그 ‘유유의 찬시纂弑의 죄’라 함은 유유를 세조에게 비한 것이요,
그 ‘<춘추>의 일필에 비교한다.’함은
맹자孟子가 ‘<춘추>가 지어지자 난신적자가 두려워했다.’ 말했으므로 <춘추>에 비한 것이요,
그 ‘창천을 속일 수 있다 생각하여 높이 요·순의 훈업을 읍한다.’ 함은
유유의 수선受禪(선양 받음)을 세조에게 비한 것이옵니다."
영릉은 동진東晉(317-420)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恭帝(재위 418년-420년)이다.
유유劉裕(363-422 재위 420-422)는 자칭 황제가 된 환현桓玄을 토벌한 후 중앙에 진출하여
공제로부터 황제 자리를 선양받았는데 공제를 시해한 후에 송宋(420-479)나라를 세웠다.
그런데 중국 동진 말기부터 송나라 초기에 걸쳐 살았던 도연명은 유유가 공제를 선위의 형식으로
왕위를 빼앗고 시해한 일에 대하여 분개하여 은유적으로 <술주述酒> 시를 지었다.
이러자 연산군이 전교하였다.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으랴!
그 제자마저 모조리 추핵推覈(죄인을 추궁하여 죄의 실상을 조사함)하는 것이 어떠한가?”
이에 노사신이 앞장서서 윤필상ㆍ한치형과 함께 아뢰었다.
“연루자는 마땅히 국문해야 할 것이오나 만약 제자라 해서 모조리 추핵한다면 소요를 이룰까 걱정이옵니다.
동한東漢(후한)이 당인黨人 다스리기를 너무 심하게 하여 종말에 쇠란衰亂하였으니
지금 만연蔓延(널리 퍼지게 함)시킬 수 없습니다.”
동한은 후한後漢의 다른 명칭이다.
후한은 전한前漢이 신나라의 왕망에 의하여 멸망한 이후
한나라 왕조의 일족인 광무제 유수가 한나라 왕조를 부흥시킨 나라이다.
수도를 낙양에 두었는데 그 위치가 전한의 수도 장안보다 동쪽에 있기에 동한東漢이라고 불렀다.
이윽고 연산군은 대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임희재가 말한 善人이란 자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고 국문하라.”고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7일 5번째 기사)
그러면 임희재가 말한 선인善人이란 자가 누구인가?
1898년 7월 14일에 연산군은 사초 사건에 관련된 자들을 잡아올 때는 그 집의 문서까지 수색하라고 명령했다.
이러자 의금부는 이목李穆(1471-1498)의 집을 수색하여 임희재(1472-1504)가 이목에게 준 편지를 발견했다.
임희재는 조선시대 간신의 대명사 임사홍의 둘째 아들로 김종직의 문인으로 이목과도 교류가 있었다.
이날 발견된 임희재의 편지 일부를 읽어보면 선인善人은 ‘정석견, 강혼, 강백진, 권오복, 김굉필’을 말한다.
“지금 물론物論(논의나 평판)이 심히 극성스러워 착한 사람[善人]이 모두 가버리니 누가 그대를 구원하겠는가?
부디 詩를 짓지 말고 또 사람을 방문하지 마오. 지금 세상에 성명을 보전하기가 어렵습니다.
근일近日에 정석견이 동지성균에서 파직되었고 강혼은 사직장을 올려 하동의 원님이 되었고
강백진은 사직장을 올려 의령의 원님이 되었고 권오복도 장차 사직을 올려 수령이나 도사都事가 될 모양이며
김굉필도 이미 사직장을 내고 시골로 떠났으니 그 밖에도 많지만 다 들 수가 없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4일 기사)
선인을 모두 잡아들여 국문하라는 전교에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선인善人 가운데도 정석견 같은 사람은 나이가 늙고 지위가 높아서 그 동류가 아니온데
이 사람이 파직당해 갔다는 것을 듣고서 이른 것이옵니다."
연산군이 다시 전교하였다.
"알겠으나 김종직의 문집을 간행한 것만은 그르다.”
다시 윤필상 등이 아뢰었다.
"정석견을 어떻게 처치해야 타당하옵니까?”
연산군은 "지만遲晩 다짐을 받아 아뢰도록 하라."고 전교했다.(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7일 5번째 기사)
지만은 죄인이 벌을 받을 때에 오래 속여서 잘못했다고 자복하는 반성문이다.
/한국농어촌방송 <길 위의 역사> 김세곤 칼럼니스트
►편집의 노트
和陶詩를 어떻게 편집해야 이해가 쉬울까?
중국과 우리나라의 和陶詩는 엄청나게 많다
도연명의 시와 和陶詩를 같이 비교하면 좋겠지만 지면이 그렇지 못하고 도연명의 詩 아래에 붙혀 놓으면
분량이 많아져 글이 길어진다 그래서 도연명의 詩가 끝나면 싣기로 했지만 여기 김종직의 화도시는
도연명 시대와 조선시대의 이해력을 돕기 때문에 글이 길어짐에도 불구하고 아랫단에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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