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로李仁老의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화답하여 읊다
귀거래혜歸去來兮 돌아가자!
도잠석귀오역귀陶潛昔歸吾亦歸 도잠이 옛날에 돌아갔거니 나도 또한 돌아가리라!
득황록이하희得隍鹿而何喜 사슴을 얻은 해자의 꿈을 얻은들 무엇이 기쁘며
실새마이혜비失塞馬而奚悲 새옹塞翁이 말을 잃은들 무엇이 슬프랴!
아부촉이불오蛾赴燭而不悟 불나방이 불에 덤벼들어 제 죽을 줄 모르고
구화극이막추駒過隙而莫追 망아지 틈을 지나는 것을 따르지 못하네.
재악수이상서纔握手而相誓 겨우 손을 잡고 서로 맹세하였더니
미전두이개비未轉頭而皆非 머리도 돌리기 전에 모두 틀어지네.
적잔국이위찬摘殘菊以爲飡 시들은 국화를 따서 먹고
집파하이위의緝破荷而爲衣 부서진 연잎을 모아 옷을 만들자
기득반어하유旣得反於何有 이미 무하유향에 돌아 왔거니
수복동어현미誰復動於玄微 오묘하고 미세함을 뉘 다시 움직이리.
와사수착蝸舍雖窄 달팽이집이 비록 좁다고 할지라도,
의진쟁분蟻陣爭奔 개미 떼는 다투어 달려오네.
주사망선蛛絲網扇 거미줄이 문짝을 얽으며
작라설문雀羅設門 참새 그물을 문에 칠 만하구나!
장곡구망臧穀俱亡 장藏과 곡穀을 함께 잃었으니
형범숙존荆凡孰存 형 나라 범 나라 어느 것이 존재하는가?
이신위마以神爲馬 정신으로 말을 삼고
파호위준破瓠爲樽 큰 박을 쪼개어 뒤웅박을 삼으려네.
신장로어면구身將老於莬裘 몸이 도구에 늙는다면
락불감어상안樂不減於商顔 즐거움은 진의 상산사호가 머물던 상안商顔 못지않으리.
유어물이무오遊於物而無忤 사물을 초월하여 거슬림이 없으니
재소우이개안在所寓以皆安 몸 붙이는 곳마다 편안키만 하구나
린고잠어척택鱗固潛於尺澤 물고기는 못물에 잠겨야만 하는데
시기절어천관翅豈折於天關 새가 멋모르고 높이 뜬들 하늘 문에 날개 꺾여 질손가
긍축정이외획肯逐情而外獲 왜 정욕을 쫓아 밖에서 얻으려 하리
방수시이내관方收視以内觀 바야흐로 눈 감고 안을 보고 있네.
도개촉이무애途皆觸而無礙 길은 다 닥치는 데마다 걸림이 없고,
흥구진즉방환興苟盡則方還 흥이 다하면 곧 돌아오리.
붕만리이혜적鵬萬里而奚適 붕새는 만리萬里를 무얼 하러 가나?
초일지이상관鷦一枝而尙寬 메추리는 한 가지로도 넉넉한 것을.
신해우지오혜信解牛之悟惠 소를 잡는 백정이 문혜군文惠君을 깨우쳤고
지착륜지대환知斵輪之對桓 바퀴 깎는 대목이 제환공齊桓公에게 대답했네.
귀거래혜歸去來兮 돌아가련다.
문로담지소유問老聃之所遊 노자老子가 노닌 곳을 물어보자.
용필기어무용用必期於無用 쓰임은 꼭 무용을 기하고
구불과어무구求不過於無求 구함은 구함 없음에 지나지 않는 것
화접시이유열化蝶翅而猶悅 나비 날개가 됨사 기쁘거니와
속부족즉가우續鳬足則可憂 오리다리를 연결시키는 것은 걱정거리
열허백어유실閱虛白於幽室 그윽한 방에서 흰빛 보고
종령단어량주種靈丹於良疇 좋은 밭에 신령한 단을 심자.
환지포영幻知捕影 그림자를 잡음이 곡두와 같음을 알겠으며
응사각주癡謝刻舟 뱃전에 표시함은 어리석은 일이네.
보부재어력사保不材於櫟社 참나무 사당인 역사櫟社의 못난 재목 목숨을 보전하고
안심혈어신구安深穴於神丘 신이 앉은 언덕인 신구神丘의 깊은 구멍에 몸을 편히 할 것이네.
공명수대명功名須待命 공명功名은 천명天命을 기다릴 것이고
지막의귀휴遲暯宜歸休 늘그막에는 돌아가 쉬어야 하리
임부운지무적任浮雲之無迹 뜬 구름 자취 없이 가는대로
약고차지범류若枯槎之泛流 마른 등걸이 물에 둥실 떠 흐르듯이
이의호已矣乎 어허, 그만두자
천지영허자유시天地盈虛自有時 천지간이 차고 비는 것이 스스로 때가 있네.
행신감작가호류行身甘作賈胡留 처신을 장사치인 가호賈胡처럼 하랴?
황황접석욕안지遑遑接淅欲安之 밥 지으려던 쌀을 건져서 부산히 어디로 가려뇨?
풍근사영질風斤思郢質 바람내는 도끼는 영 땅의 바탕을 생각하고
유수억종기流水憶鍾期 흐르는 물 곡조의 거문고는 종자기를 그리워하네.
요사회혜해난尿死灰兮奚暖 식은 재에 오줌 눈들 더워질 건가?
파초곡혜하자播焦穀兮何耔 그을린 곡식을 뿌린들 싹 돋으랴?
제관심어음주第寬心於飮酒 술 마시며 회포를 풀고
요견흥어작시聊遣興於作詩 시를 지으며 흥을 붙이리
망홍진이축두望紅塵而縮頭 홍진을 바라보면 고개가 움츠려 들고
인심대면진구의人心對面眞九疑 사람의 마음이란 대면해도 정작 구의산인 걸
(사람의 마음이란 대면해도 정작 순임금을 장사지낸 비슷비슷한 아홉 봉우리의 구의산이네)
►사辭 시詩도 아니요 산문散文도 아니면서 운문韻文이다.
말하자면 시와 병려문騈儷文의 중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부賦와 비슷하나 사가 음절音節과 정서情緖를 위주로 한데 대하여 부는 서술敍述을 위주로 한 점이 다르다.
►귀거래사
진晉나라 도잠[淵明은 字]이 팽택령彭澤令으로 있을 때 순시하러 온 상관인 독우督郵에게 머리 숙이기 싫어 즉일로
벼슬을 버리고 전원으로 돌아가면서 지은 것인데 여기서는 그 귀거래사의 운韻과 글자 수에 맞추어 화답한 것이다.
►해자[隍]의 사슴
정鄭나라 때 어떤 사람이 나무를 하다가 사슴을 잡아 해자[隍]에 감춰두고 기뻐하며 돌아왔는데 얼마 후에
감춰둔 곳을 깜박 잊어 그 일이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거니 생각하고 중얼거리며 돌아오는 것을 다른 사람이 듣고
그곳을 찾아가 보니 사슴이 있었다.
집으로 가져 와서 그의 아내에게 그 내력을 얘기하고는
“내가 사슴을 얻었으니 그 사람은 참 꿈을 꾼 것이다.” 하니
그 아내가 “당신이 실제로 그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니라 꿈속에서 만난 것이며
이제 사슴을 얻었으니 당신이 참 꿈을 꾸었소.” 하였다.
그날 밤에 사슴을 잃은 나무꾼이 정말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따라 사슴을 가져 간 사람을 찾아내어
송사를 일으켰더니 재판관이 그 사슴을 각각 반분하도록 하였으며
뒷날 정군鄭君이 이 얘기를 듣고 “그 재판관도 꿈속에서 그 사슴을 반분하라 한 것이 아니냐.”
하였다는 고사故事/<열자列子>
►구화극이막추駒過隙而莫追 망아지 틈을 지나는 것을 따르지 못하네.
세월의 빠름을 말하는 것으로 이 천지간의 사람의 한 평생이란
흰 망아지[白駒]가 작은 틈[隙]을 지나가는 것과 같이 잠깐이라는 뜻/<장자莊子>
►적잔국이위찬摘殘菊以爲飡 시들은 국화를 따서 먹고
집파하이위의緝破荷而爲衣 부서진 연잎을 모아 옷을 만들자!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서 나온 말로 그의 고결高潔함을 나타낸 말.
►무하유향無何有鄕 아무 것도 없는 곳.
무위無爲의 빈 경지로 장자莊子가 그리워하던 이상향理想鄕을 말한다.
►참새 그물
한漢나라 적공翟公이 정위廷尉가 되자 손님이 문에 가득하더니 파직되자
문 밖에 참새 그물을 칠 수 있을 만큼 손이 끊어져 한산했다 한다.
►장藏과 곡穀
장藏과 곡穀 두 사람이 함께 양羊을 치다가 모두 양을 잃었는데 장은 책을 끼고 글을 읽었고
곡은 쌍륙雙六을 치며 놀았으니 두 사람의 소업所業은 같지 않았으나 양을 잃은 것은 마찬가지다.
►형범숙존荆凡孰存 형荊 나라 범 나라 어느 것이 存在하는가?
초왕楚王이 범군凡君과 같이 앉았는데 초왕의 左右에서 범凡이 망하였다고 세 번 외쳤더니
범군이 “범凡이 망했다는 것이 나의 존存한 바를 상실喪失시키지 못하며
초楚의 존存한 것도 왕의 존한 바를 존하게 하지 못한 것이니
이로써 본다면 범이 망한 것도 아니고 초가 존한 것도 아니다.” 하였다./<장자>
►이신위마以神爲馬 정신으로 말을 삼고
나를 변화시켜 엉덩이를 수레바퀴로 삼고 신神을 말[馬]로 삼아서 내가 탈 것이다./<장자>
►파호위준破瓠爲樽 큰 박[瓠]을 쪼개어 뒤웅박을 삼으려네.
혜자惠子가 장자莊子에게 말하기를
“내가 큰 박[瓠]의 씨앗을 심었더니 열매가 열렸는데 닷 섬[五石]을 담을 만큼 크고
물을 담자니 바가지가 찌그러질까봐 들 수도 없으며 쓸모가 없네.” 하였더니
장자가 답하기를
“그런 큰 바가지가 있다면 왜 띄움박[樽]을 만들어 江湖에 띄우지 않는가.” 하였다./<장자>
►토구菟裘
벼슬을 내놓고 은거隱居하는 곳이나 老後에 餘生을 보내는 곳을 이르는 말.
노魯나라 은공隱公이 토구菟裘의 땅에서 은거隱居하였다는 데서 유래由來한다.
노魯[지금의 산동성 사수현泗水縣 북쪽]의 노은공魯隱公이 말하기를
“도구에 별장別莊을 경영하라. 내 장차 거기에 가서 늙으리.” 하였으므로 은퇴해 살 곳을 말한다./<좌전左傳>
►상안商顔 상산商山의 꼭대기
진秦나라 말기에 은사隱士인 사호四皓가 있던 곳으로 지금 섬서성陝西省 상현商縣 동남쪽에 있다.
►흥구진즉방환興苟盡則方還 흥이 다하면 곧 돌아오리.
진晉나라 왕자유王子猶가 눈 오는 밤에 배를 타고 섬계剡溪로 대안도戴安道를 찾아 갔으나
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왔는데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승흥이래乘興而來 흥진이거興盡而去 하필견何必見
“흥이 나 왔다가 흥이 다해 돌아가니 하필 안도를 보아선 무엇 하리오.” 하였다.
►붕만리이혜적鵬萬里而奚適 붕새는 만리萬里를 무얼 하러 가나?
초일지이상관鷦一枝而尙寬 메추리는 한 가지로도 넉넉한 것을.
붕새가 9만리를 낢을 보고 메추리가 웃기를 “저 붕새는 뭘하러 만 리나 남으로 가는고.” 하였고
“메추리는 깊은 수풀에 집을 지어도 한 가지[枝]로 짓는다.” 하였다./<장자>
►신해우지오혜信解牛之悟惠 소를 잡는 백정이 문혜군文惠君을 깨우쳤고
지착륜지대환知斵輪之對桓 바퀴 깎는 대목이 제환공齊桓公에게 대답했네.
백정이 소를 잡아 뼈를 가르는 기술을 道에 비유하여 문혜군文惠君에게 양생養生의 도를 깨닫게 했고
나무를 깎아 바퀴를 만드는 목수가 제齊 환공桓公에게
“바퀴를 깎을 새 천천히도 말고 빠르게도 않고 손어림으로 알아 마음에 응하나니
臣이 아들에게 이를 수가 없고 신의 아들도 신에게 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임금께서 읽고 있는 옛 글도 역시 그 깊은 참뜻을 전하지 못하고 옛 사람의 찌꺼기에 불과합니다.”
하였다./<장자>
►용필기어무용用必期於無用 쓰임은 꼭 무용을 기期하고
“무용無用은 참으로 유용有用이 된다.”는 장자莊子의 사상에서 나온 말이다.
►화접시이유열化蝶翅而猶悅 나비 날개가 됨사 기쁘거니와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다.
마음에 흐뭇하여 주周인 줄을 몰랐더니 문득 깨고 나니 에그, 장주였다./<장자>
►속부족즉가우續鳬足則可憂 오리다리를 연결시키는 것은 걱정거리
장자莊子는 “오리 다리가 비록 짧으나 이으면 근심이요, 학의 다리는 비록 기나 끊으면 섧다.” 하였다.
이것은 자연自然 그대로 두자는 것이다.
►열허백어유실閱虛白於幽室 그윽한 방에서 흰빛 보고
빈 방이 훤히 빛나는데 길상吉祥이 머무른다. 마음이 비는 것을 이른다./<장자>
►종령단어량주種靈丹於良疇 좋은 밭에 신령한 단을 심자.
사람의 배꼽 밑에 단전丹田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仙家의 養生法에 단전에 결단結丹한다는 말이 있다.
►응사각주癡謝刻舟 뱃전에 표시함은 어리석은 일이네.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다가 물에 칼을 떨어뜨리고 그 떨어뜨린 뱃전에 금을 새겨
칼을 찾으려 하나 배는 떠서 자리를 옮겼으니 찾을 길이 없다.
우활迂闊ㆍ고집의 비유이다./<여씨춘추呂氏春秋>
►보부재어력사保不材於櫟社 참나무 사당인 역사櫟社의 못난 재목 목숨을 보전하고
력사櫟社의 큰 나무는 재목이 못되는 까닭으로 수명壽命을 오래 보전한다./<장자 人間世>
►안심혈어신구安深穴於神丘 신이 앉은 언덕인 신구神丘의 깊은 구멍에 몸을 편히 할 것이네.
들쥐[鼷鼠]가 신구神丘 밑에 깊이 구멍을 파고 있어서 사람의 해침을 피한다./<장자>
►행신감작가호류行身甘作賈胡留 처신을 장사치인 가호賈胡처럼 하랴?
장사하는 되놈[賈胡]이 보배 구슬을 감추기 위하여 제 배를 가르고 그 속에 넣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재물을 탐하여 제 몸이 죽을 것을 모르는 사람들을 비유한 것이다.
►황황접석욕안지遑遑接淅欲安之 밥 지으려던 쌀을 건져서 부산히 어디로 가려뇨?
공자가 제齊나라를 떠날 때에 바쁘게 떠나느라고 밥 지으려고 담근 쌀을 익히지 못한 채 출발했다./<맹자>
►풍근사영질風斤思郢質 바람내는 도끼는 영 땅의 바탕을 생각하고
춘추시대 초楚나라 서울인 영郢 땅의 사람이
백토를 그 코끝에 매미 날개만큼 엷게 바르고 대목더러 깎으라 하니
대목이 도끼를 휘둘러 바람을 내며 깎되 백토만을 깎고 코는 상하지 않았으며
영 사람은 선 채로 얼굴빛도 변치 않았다. 여기의 바탕은 도끼질을 받는 나무 바탕이란 뜻이다./<장자>
►유수억종기流水憶鍾期 흐르는 물 곡조의 거문고는 종자기를 그리워하네.
춘추春秋 때 초楚나라 사람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며
뜻을 높은 산 혹 흐르는 물에 두니 자기子期가 거문고를 듣고 백아의 뜻을 다 알았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세상에 다시 知音이 없음을 설워하여
거문고 줄을 끊고 평생 다시 거문고를 치지 않았다 한다./<여씨춘추>
►구의산九疑山
일명 창오산蒼梧山으로 순舜 임금을 장사한 곳인데
그 아홉봉위가 비슷비슷하여 바라보는 過客의 의심을 자아내므로 그리 일컬음이다./<한서>
여기서는 의심이 많다는 뜻으로 썼다.
●이인로李仁老(1152 의종6-1220 고종7)
고려시대 때, 예부원외랑, 비서감우간의대부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경원慶源. 초명은 득옥得玉. 자는 미수眉叟, 호는 와도헌臥陶軒.
증조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이오李䫨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을 볼 수 없다.
이인로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었다.
화엄승통華嚴僧統인 요일寥一이 그를 거두어 양육하고 공부를 시켰다.
그래서 유교 전적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1170년 그의 나이 19세 때에 정중부鄭仲夫가 무신란을 일으키고
“문관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 하며 횡행하자 피신하여 불문佛門에 귀의하였다.
그 뒤에 환속하였다.
이인로는 25세 때에 태학에 들어가 六經을 두루 학습하였다.
1180년(명종 10) 29세 때에는 진사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명성이 사림에 떨쳤다.
31세 때인 1182년 금나라 하정사행賀正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다.
다음해 귀국하여 계양군桂陽郡 서기로 임명되었다.
그 뒤에 문극겸文克謙의 천거로 한림원에 보직되어 사소詞疏를 담당하였다.
한림원에서 고원誥院에 이르기까지 14년간 그는 조칙詔勅을 짓는 여가에도 시사詩詞를 짓되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복고腹藁’라는 일컬음을 들었다.
이인로는 임춘林椿·오세재吳世才 등과 어울려 시와 술로 즐기며 세칭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이루어 활동하였다.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아들 세황世黃의 기록에 의하면
“문장의 역량을 자부하면서도 제형提衡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다가
좌간의대부에 올라 시관試官의 명을 받았다.
그러나 시석試席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역임한 최후의 관직은 좌간의대부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열전列傳>에서 이인로에 대하여
성편급性偏急 오당세忤當世 불위대용不爲大用
“성미가 편벽하고 급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려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라고 평하였다.
그 자신은 문학 역량에 대하여 자부가 컸으나 크게 쓰이지 못하여 이상과 현실간의 거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인로의 문학사상의 골자는 시의 본질과 그 독자적 가치에 대한 인식
그리고 ‘어의구묘語意俱妙’를 강조한 작시론作詩論이라 하겠다.
또한 어묘를 위해서는 무부착지흔無斧鑿之痕의 자연생성의 경지를,
의묘意妙를 위해서는 신의新意를 중시하였다.
이인로는 <은대집銀臺集>·<파한집>을 짓고 <쌍명재집>을 편찬했다고 하나 <파한집>만이 전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漢詩 > 도연명陶淵明'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연명陶淵明 시선詩選 (0) | 2025.02.21 |
---|---|
부賦 사辭 3. 귀거래사歸去來辭 ⓷ (0) | 2025.02.21 |
부賦 사辭 3. 귀거래사歸去來辭 ⓵ (0) | 2025.02.21 |
부賦 사辭 3. 귀거래사歸去來辭 (0) | 2025.02.21 |
부賦 사辭 2. 한정부閑情賦 (0) | 2025.0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