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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도연명陶淵明

도연명陶淵明 시선詩選

도연명陶淵明 시선詩選

송용준(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중어중문학과 교수)

 

1.

도연명陶淵明(365∼427)은

동진東晉(317∼420) 중기에서 남조南朝 송宋(420∼479) 초기에 걸쳐 살았던 인물이다.

 

서기 317년에 중원이 흉노에 점령되고 서진西晉(265∼317)이 멸망하자

317년에 낭야왕琅邪王 사마예司馬睿(276∼322)가 왕돈王敦(266∼324)과 왕도王導(276∼339)의 보좌를 받아

건업建業(지금의 난징南京)을 도읍으로 삼고 왕위에 오르니 이것이 동진이다.

그러나 동진은 왕돈의 반란(322)을 시작으로 100여 년 동안 내우외환이 계속되었다.

 

327년에는 소준蘇峻의 반란이 일어났고

365년에는 양주자사梁州刺史 사마훈司馬勛이 반란을 일으켰고

372년에는 전前 호군장군護軍將軍 유희庾希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383년에는 북방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이 대군을 이끌고 침공했는데 비수淝水의 전투에서 사현謝玄이 격퇴했다.

 

그 뒤에도 지방 군벌의 반란과 농민 봉기가 계속 일어나

397년에 연주자사兗州刺史 왕공王恭과 예주자사豫州刺史 유해庾楷가 반란을 일으켰고

399년에는 손은孫恩이 주도하는 농민 봉기가 일어나 411년까지 계속되었다.

 

402년에는 환현桓玄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함락시키고 이듬해에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초楚라고 했다.

404년에 건무장군建武將軍 유유劉裕가 환현을 토벌하고 폐위되었던 안제安帝를 다시 복위시켰다.

 

그러나 418년 유유는 결국 안제를 유폐하고 공제恭帝를 즉위시켰다가

420년에 공제를 폐위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니 이로써 동진은 멸망하고 송宋이 시작되었다.

 

도연명은 이처럼 사회가 어지럽고 백성이 고통을 겪으며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기에 살았다.

이 같은 시대적 상황이 도연명의 개인적 성향과 맞물려

그는 결국 현실 정치에 대한 강한 거부감 속에서 은둔의 길을 택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그가 전원으로 회귀한 것은 소극적 도피가 아닌 적극적 선택이었다고 하겠다.

그가 중국 시사에서 일반적으로 ‘은일시인’ 또는 ‘전원시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 및 그의 개인적 성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2.

도연명의 작품으로 현재 전해지는 것은 시 126수, 사부辭賦 3편, 산문 10편 정도다.

 

그의 시 126수는 당대나 송대 시인에 비하면 그 수가 적은 편이지만

한대漢代부터 진대晉代에 이르기까지의 문인 작품으로는 수량이 가장 많으며

여러 가지 면에서 새로운 시적 세계를 창출해 후대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소박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면서 인생과 사회에 대한 사색을 시로 써냈기 때문에 당시의

다른 시인들과는 달리 수사에 힘을 쏟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시대 조류와는 다른 개성적인 시를 쓸 수 있었다.

 

중국 시단은 동진에 들어서면서 손작孫綽과 허순許詢 등의 현언시玄言詩¹가 유행했는데

그들의 시는 대부분 지나치게 심오한 철학적 이치를 논해 시로서의 풍부한 맛이 없다.

 

►1) 위진魏晉시대 청담가淸談家들이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언어를 모방해 쓴 시.

 

도연명의 시에도 다른 시인들처럼 철학적 이치를 다룬 것이 여러 편 있지만 자신이 일상생활 속에서

생각하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했으므로 현언시와는 모습과 내용을 달리했다.

 

도연명이 평생을 두고 거듭 고심한 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였다.

그는 이에 대해 <형영신形影神 몸과 그림자와 정신> 3수에서 한 개인을 육체, 그림자, 정신이라는

세 가지 주체로 객관화시켜 각자의 입장에서 생사관이나 인생관을 피력했다.

 

이 시는 정신이 육체와 그림자의 논쟁에 끼어들어 그 논쟁을 해결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세 요소 모두 도연명의 분신이며 따라서 세 주장 모두 도연명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연명이 살아가면서 시시각각으로 닥치는 현실에 대해 반응하는 방식을

세 가지 방향에서 각도를 달리해 보여주었을 뿐이다.

 

실제로 그는 현실의 고난과 번민을 잊기 위해서 ‘음주’에 기대기도 했고 공을 세워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망도 있었고 자연의 섭리에 몸을 맡기고 유유자적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 3수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상은 도교의 장생불사를 부정하고

인간은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도연명은

 

이처럼 도교적 수행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었지만 노장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정의위운거正宜委運去 ‘마땅히 자연에 맡겨서 살아가야 하리’와 같은 달관적인 인생관을 지닐 수 있었다.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정신이 육체와 그림자에 대해 비판한 대목이다.

<신석神釋 정신의 해명>에서 그는 음주를 통한 근심 해소 및

‘급시행락及時行樂 시기를 놓치지 않고 환락을 추구하는 것’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 도연명의 평소 생각과는 다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정신의 입장에서 육체를 비판한 내용이기 때문에 음주를 통해 몸을

상하게 하고 나아가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이 육체의 본성과는 어긋난다는 것을 지적했을 따름이다.

 

도연명에게 있어서 술은 근심 해소의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암담한 현실과 개인적 번민에서

빠져나와 사물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게 하는 매개체 역할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 점은 그의 유명한 <음주飮酒>(제5수)에 잘 나타나 있다.

 

결려재인경結廬在人境 마을 안에 엮어놓은 오두막집이지만

이무거마훤而無車馬喧 수레와 말의 시끄러운 소리가 없다.

 

문군하능이問君何能爾 그대에게 묻노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심원지자편心遠地自偏 “마음이 초연하니 사는 곳이 절로 외지다오.”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다가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 (허리를 펴니) 편안히 남산이 보인다.

 

산기일석가山氣日夕佳 산의 모습은 저녁 되어 아름다운데

비조상여환飛鳥相與還 새들도 함께 보금자리 찾아 돌아간다.

 

차중유진의此中有眞意 여기에 진실의 암시가 담겨 있어서

욕변이망언欲辨已忘言 따져서 말하려다 이미 말을 잊었다.

 

시인은 서두에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농촌 마을에 얼기설기 짚을 엮어 지은

오두막집에 살고 있는데도 수레와 말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시인이 속세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아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말이며 설혹 관리가 찾아와

다시 관직에 복귀할 것을 권해도 전혀 그럴 뜻이 없음을 표명한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속세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사는 곳이 어디든 그곳은 외진 곳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시인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에 대한 대답으로 시인은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딴다고 했다.

그가 관직을 내던지고 전원으로 돌아가 직접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여느 농부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일어나 밭으로 나가

경작에 열중하다가 해 질 무렵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당연히 휴식을 취해야 하겠지만 시인은 그날 그럴 수가 없었다.

경작지가 넉넉하지 못해 울타리 밑에도 밭을 일구어 작물을 재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 가을걷이가 한창일 때라 동쪽 울타리 밑에 심어두었던 국화도 수확해야 했다.

 

따라서 시인이 “국화를 딴다”고 한 것은 감상을 위해 국화를 한두 송이 꺾었다는 말이 아니고

국화 밭에서 국화를 수확하는 노동을 한다는 말이다.

 

저녁 무렵 바깥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국화를 따느라

허리를 굽히고 계속 일했더니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파온다.

 

잠시 쉬려고 허리를 펴니 울타리 밖으로 남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순간 시인은 힘들게 농사를 지으며 사는 전원생활의 즐거움과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시인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돌아본다.

벌써 황혼이 되어 석양의 정경이 아름다운데 마침 새들이 짝지어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시인의 눈에는 저 새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 광경을 보면서 시인은 아침에 일어나 밖에 나가 일하고 저녁이 되면 보금자리를 찾아 돌아와 쉬는

농부의 생활이 자연의 섭리이며 따라서 가장 자연스럽고 보람 있는 삶임을 체득했을 것이다.

 

마지막 두 구절은 시인의 그와 같은 깨달음을 확인시켜 준다.

“말을 잊었다”는 표현은 참된 뜻을 체득했다는 말로서 <장자莊子 외물外物>의

 

전자소이재어筌者所以在魚 “통발은 그 목적이 물고기에 있으므로

득어이망전得魚而忘筌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고

제자소이재토蹄者所以在兎 올무는 그 목적이 토끼에 있으므로

득토이망제得兎而忘蹄 토끼를 잡고 나면 올무를 잊고

언자소이재의言者所以在意 말은 그 목적이 뜻에 있으므로

득의이망언得意而忘言 뜻을 얻고 나면 말을 잊는다.”에서 빌려온 것이다.

 

이렇게 보면 도연명의 이 시는 ‘술 마시는 시’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 시에는 술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며 그가 묘사하고 서술한 것은

전원생활과 그 속에 담겨 있는 생활철학이다.

 

그런데 도연명은 왜 시 제목을 ‘음주’라고 했을까?

이 의문점을 풀기 위해 기원전 1세기경에 초楚나라 시인 굴원屈原(BC 340?∼BC 278?)의

이름을 빌려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어부사漁父辭>를 살펴보자.

 

조정에서 쫓겨나 초췌한 몰골로 강가를 헤매고 있는 굴원에게 한 어부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소?”라고 묻자,

 

굴원은

“중인개취아독성衆人皆醉我獨醒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었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분명 ‘취醉’는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져 있다는 의미를 함유한 말이었는데

기원후 100년경 후한後漢의 허신許愼이 유가 경전의 해설을 위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이 글자를

“졸기도량卒其度量 부지어난야不至於亂也 예의에 어그러짐이 없이 자신의 주량이 한계에 도달한 것”이라고

풀이한 이래 음주 행위는 서서히 고대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일상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면에 빠져드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 후 위진魏晉 교체기에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지자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인

유영劉伶(225?∼280?)이<주덕송酒德頌>을 지어 술의 미덕을 찬미했는데 이때부터 중국의 시인들은

술 마시는 행위를 ‘암담한 현실과 개인적인 번민으로부터 빠져나가는 수단’으로 서술하기 시작했다.

 

도연명이 관직을 내던지고 농사지으며 사는 것을 선택한 동기가

“암담한 현실과 개인적인 번민으로부터 빠져나가 유유자적한 생활 속에서 인생을 사색하는”데 있었으므로

시의 제목을 ‘음주’라고 붙인 것이다.

이와 같이 도연명의 시는 바로 일상생활에서 깨닫는 철학적 이치와 서정성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3.

도연명의 시는 제재 방면에서 전원시를 새롭게 개척했다.

그는 가족의 생계 문제와 유가적 이상의 실현을 위해 출사했다가 이상의 실현이 벽에 부딪치면

퇴은하는 처세를 거듭하다가 결국 41세에 이르러 고향으로 돌아와 완전히 은거했다.

 

도연명의 당시 심경을 잘 나타낸 시가 <귀원전거歸園田居 전원으로 돌아와>(제1수)다.

그는 이 시에서 관리 생활의 고통과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했는데 마지막 2구

“오랫동안 새장에 갇혀 있다가 드디어 자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라는 표현에 전원생활의 기쁨이 잘 드러나 있다.

 

도연명을 전원시인이라고 부를 때 흔히 그가 속세를 떠나 전원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즐겁게 생활한 것같이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짧지만 여러 차례 관직에 있었던 그는 농사에 서툴러 작황이 탐탁지 않았으며

그 결과 종종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이는 <전원으로 돌아와>(3수)에서 “콩을 남산 기슭에 심었더니 풀만 무성하고 콩 싹은 드물다”라고 한 것이나

<음주>(16수)에서 “빈궁 속에서도 꿋꿋이 절개 지키며 굶주림과 추위를 실컷 겪었다.

허물어진 초가에 슬픈 바람 불고, 무성한 잡초가 앞뜰을 뒤덮었다”라고 한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원시초조시방주부등치중怨詩楚調示龐主簿鄧治中

초조곡의 ‘원시행’을 모방해 방 주부와 등 치중에게 주는 시>에서는

이런 궁핍한 생활이 운명에 대한 원망의 감정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풍우종횡지風雨縱橫至 게다가 비바람이 종횡으로 들이쳐서

수렴불영전收斂不盈廛 수확한 양식은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다.

 

하일장포기夏日長抱飢 여름날엔 언제나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한야무피면寒夜無被眠 추운 밤에는 덮고 잘 이불이 없다.

 

조석사계명造夕思鷄鳴 저녁이 되면 새벽닭이 울기를 기다리고

급신원오천及晨願烏遷 아침이 되면 해가 빨리 지기를 바란다.

 

재기하원천在己何怨天 다 내 탓이니 어찌 하늘을 원망하랴만

리우처목전離憂悽目前 닥치는 근심에 눈앞이 캄캄하기만 하다.

 

그는 <음주>(19수)에서 “지난날 오랜 굶주림에 시달린 끝에, 쟁기 내던지고 벼슬살이 흉내 냈다.

가족 부양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추위와 굶주림이 날 꽁꽁 얽어맸다”라고 하면서 애초에 자신이

관직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오랜 굶주림을 견디기 어려워서였다고 밝혔다.

 

이와 같이 그는 전원으로 돌아온 뒤에 생활의 어려움에서 오는 우울과 탄식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내적 갈등을 수없이 겪으면서도 결국은 전원생활을 택한 자신의 뜻을 바꾸지 않았으니

그것은 그가 <영빈사詠貧士 가난한 선비>(5수)에서

“어찌 정말로 고생스럽지 않을까마는 두려운 건 춥고 배고픈 게 아니다.

빈천과 부귀가 늘 서로 싸우지만 도의가 이기니 얼굴에 근심이 없다”라고 토로했듯이

곤궁에 처해서도 자신의 뜻을 굳게 지키는 ‘고궁절固窮節’을 삶의 가치로 보았기 때문이다.

 

4.

가난하고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고궁절을 지키며 살았던 도연명이지만 그의 내적 갈등은 수시로

그를 괴롭혔는데 그것은 주로 ‘겸제천하兼濟天下’⁵의 이상 실현에 대한 미련과

‘인생의 유한함’이 주는 고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이 말은 <맹자孟子 진심盡心ㆍ上>의 궁즉독선기신窮則獨善其身 달즉겸제천하達則兼濟天下

“곤궁하게 되면 홀로 자신의 몸을 닦고, 영달하게 되면 천하를 두루 잘 다스린다.”에서 나왔다.

 

그가 <음주>(16수)에서

“어려서부터 사람들과 교제 드물고, 육경을 읽는 것만 좋아했더니,

세월이 흘러 마흔이 되어가건만, 오래 머물렀어도 끝내 이룬 것 없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는 어린 시절 六經을 공부하면서부터 유가적 이상의 실현을 인생 목표로 설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암담한 정세로 인해 그는 자신이 품은 정치적 이상 실현이 요원한 일임을 깨닫게 된다.

<잡시雜詩>(5수)에 그와 같은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억아소장시憶我少壯時 왕성하던 젊은 시절을 돌이켜보면

무락자흔예無樂自欣豫 기쁜 일 없어도 스스로 즐거웠다.

맹지일사해猛志逸四海 웅대한 포부는 사해를 뛰어넘고

건핵사원저騫翮思遠翥 날개 활짝 펴고 멀리 날아오르려 했다.

 

임염세월퇴荏苒歲月頹 조금씩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차심초이거此心稍已去 그 마음도 점차 사라져갔다.

치환무부오値歡無復娛 기쁜 일 만나도 더 이상 즐겁지 않고

매매다우려每每多憂慮 언제나 근심 걱정만 많아질 뿐이다.

 

도연명은 궁극적으로 은거를 택함으로써 평소의 소원을 이루긴 했지만 여전히 못다 이룬 꿈이 있었다.

그 꿈은 은거 생활에서 아무리 큰 만족을 얻는다 해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자신의 이상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은거 생활도 최상의 선택이 아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는 밤잠을 이루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내적 갈등을 잘 보여주는 시가 <잡시>(2수)다.

 

일월척인거日月擲人去 세월이 사람을 내던지고 가버리니

유지불획빙有志不獲騁 뜻을 품고서도 펼칠 수가 없다.

념차회비처念此懷悲悽 이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처량해져

종효불능정終曉不能靜 날이 밝도록 진정되지 않는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정세로 정치적 좌절을 겪은 도연명은

은거 생활을 하면서도 겸제천하에 대한 미련으로 괴로워했다.

그러한 미련이 생길 때마다 그는 자신이 은거 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던 때의 심경을 돌이켜보며 마음을 다잡았을 것이다.

 

한편 도연명의 시에는 인생의 유한함을 읊은 시가 많다.

<독산해경讀山海經 산해경을 읽으며>(8수)에서

“자고로 모든 사람이 죽을 운명이었으니 누가 신선처럼 오래 살 수 있겠는가?”라고 했고,

 

<만가시挽歌詩 나의 죽음을 애도하며>(1수)에서는

“태어나면 반드시 죽게 마련이니 일찍 죽어도 명이 단축된 것은 아니다.

엊저녁만 해도 똑같이 산 사람이었는데 오늘 아침엔 귀신 명부에 이름이 올랐다”

라고 하여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임을 설파했다.

 

<전원으로 돌아와>(4수)에서는

“사람 사는 것이 허깨비 같아서, 끝내는 무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지”라며 인생무상을 읊고 있는데

이 시가 <전원으로 돌아와> 나머지 시들과 주제의 연결성이 떨어진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전체적으로 전원으로 돌아온 기쁨을 읊는 와중에 느닷없이 인생무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포함시켰다는 것은 이 문제야말로 언제든지 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화두였음을 증명해 준다.

 

도연명은 삶의 유한성이야말로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현재에 충실하고 자신의 마음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그는 <음주>(11수)에서 “죽고 나면 무엇을 알겠는가? 마음에 맞게 사는 게 가장 좋은 것이지”라고 했고,

<경자세오월중종도환조풍어규림庚子歲五月中從都還阻風於規林

경자년 5월 서울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규림에서 바람에 발이 묶이다>(2수)에서는

“한창때가 얼마나 되겠는가? 마음 가는 대로 살아야지 다시 무엇을 의심하리?”라고 했다.

 

그러나 ‘마음을 따르는 것’도 그가 허무감을 극복할 수 있는 삶의 방식으로 제시한 것일 뿐

그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가 비록 여러 수의 시에서 삶과 운명에 초탈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삶의 유한성이라는

문제와 끊임없이 씨름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코 이 문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가 <나의 죽음을 애도하며>(2수)에서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면서

“막걸리에 거품이 뽀글뽀글 일지만, 언제 다시 이 술을 맛볼 수 있을까?”,

 

“어느 날 대문을 나와 떠나버리면, 돌아올 날은 참으로 기약이 없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인생의 유한함을 완전히 달관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5.

도연명이 전원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처럼 갈등과 고뇌를 겪으며 살았다면

그가 궁극적으로 고궁절을 지켜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다음에 그의 시 2수를 들어본다.

 

상가비오사商歌非吾事 상가 불러 벼슬 얻는 건 내 일이 아니요

의의재우경依依在耦耕 여전히 미련이 남는 건 밭 가는 일일 뿐.

투관선구허投冠旋舊墟 관모 내던지고 옛집으로 돌아가

불위호작영不爲好爵縈 좋은 벼슬에 얽매이지 않으리라.

 

양진형모하養眞衡茅下 초가 아래서 참된 본성을 기르면

서이선자명庶以善自名 아마도 착하다는 이름을 절로 얻으리라.

/6)<신축세칠월부가환강릉야행도구辛丑歲七月赴假還江陵夜行塗口

신축년 7월 휴가를 갔다가 강릉으로 돌아가며 밤에 도구를 지나다.>

 

역람천재서歷覽千載書 천년을 내려오는 책 두루 펼쳐보며

시시견유렬時時見遺烈 때때로 옛 어진 이들을 만나누나.

고조비소반高操非所攀 높은 지조를 따를 수는 없겠지만

요득고궁절謠得固窮節 그런대로 곤궁 속의 굳은 절조는 배웠다.

 

평진구불유平津苟不由 내가 벼슬길을 걷지 않을 바에는

서지거위졸栖遲居爲拙 은거함이 어찌 못나다고 하겠는가?

기의일언외寄意一言外 한마디 말밖에 뜻을 부치지만

자계수능별玆契誰能別 이내 마음 누가 알아줄 수 있을까?

/7)<계묘세십이월중작여종제경원癸卯歲十二月中作與從弟敬遠

계묘년 12월 시를 지어 사촌동생 경원에게 주다>

 

이 두 시는 모두 벼슬에 대한 뜻을 단념하고 은거를 택했음을 말하면서도

고궁절을 지키며 본성에 따라 살다 보면 언젠가는 ‘이름 남김’이 실현될 것에 대한 믿음을 말했고

동시에 이러한 고궁절을 지키는 삶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데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이와 같이 그의 시에는 ‘죽은 후의 이름 남김’에 대한 고민이 곳곳에 나타나며 이를 통해

그도 ‘신후명身後名’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인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기에

그와 같은 세상에서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난세에서 고궁절을 지키며 본성에 따라 살아간다면 죽은 뒤에

후세 사람들이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었음을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믿음은 당대 지식인들의 현실 인식과 속세를 떠나는 삶의 지향에 대한

심리적 공감대에 암묵적으로 의지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와 같은 믿음과 당시의 정치 현실에 대한 환멸은 도연명으로 하여금

사람이 진정 살 만한 이상 세계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생각해 보게 했다.

 

그가 53세(417)에 쓴 <도화원기병시桃花源記幷詩 복사꽃 마을의 이야기와 시>의 일단을 보자.

토지는 평탄하고 넓었으며 가옥이 가지런하게 늘어서 있고,

비옥한 밭과 아름다운 못과 뽕나무며 대나무 같은 것들도 있었다.

 

밭 사이의 길은 사방으로 통하고 닭과 개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 가운데에서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밭을 경작하는데 남녀의 옷차림이 모두 외부 사람들과 같았다.

노인과 어린이 모두 기쁜 듯이 저마다 즐거운 기색을 하고 있었다.

 

도연명이 꿈꾸는 세계는 전쟁이나 권력투쟁이 없고 물질적 풍요는 없지만

누구나 한데 어울려 화기애애하게 지내는 소박하고 균등한 삶을 살고,

사계절의 흐름에 따라 농사를 지으면서 가을에 곡식을 수확해도 군주에게 조세를 바칠 필요가 없는 사회다.

 

이 같은 세상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속이거나 미워하지 않고 현실에 만족하며 즐겁게 살아간다.

그가 원한 것은 소통하고 협동하는 삶이다.

 

그는 “맑고 얕은 계곡물에 발을 씻고 갓 익은 술을 걸러놓고 닭을 잡아 이웃을 초대하며”⁸ 살고 싶어 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대충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며 부화뇌동해 칭찬했다 비방했다가”⁹를 일삼지 않고

“대문을 지나다 번갈아 불러내어 술이 있으면 서로에게 따라준다.

 

농사로 바쁠 때에는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가도 한가해지면 곧바로 생각이 난다.

생각이 나면 옷 걸치고 나서서 웃음 짓는 대화가 물리지 않는”¹⁰ 생활을 한다.

그가 원한 것은 결국 문명에 의해 변질되고 왜곡되기 이전의 자연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8) <전원으로 돌아와>(제5수) ►9) <음주>(제6수) ►10) <이거移居>(제2수)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회는 어떻게 가능할까?

도연명은 우선 이와 같은 이상적인 사회는 마음속으로 바라기만 해서는 갈 수 없는 곳일뿐더러

국가나 외부의 힘으로 완성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그것은 <복사꽃 마을의 이야기와 시>에서 도연명이 어부와 유자기劉子驥를 통해

이상 세계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에서 드러난다.

먼저 어부는 고기를 잡으려고 배를 타고 가던 중에 우연히 도화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반면 유자기는 이상 세계를 꿈꾸던 중에 도화원이 존재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찾아 나서려 했지만 죽음 앞에서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어부 또한 도화원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온 후에 태수에게 도화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다시 그곳을 찾아가려 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도화원’은 어부가 처음 그곳에 가게 되었을 때와 같이 자신의 삶 속에서 노동하며

본분을 다할 때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가 있게 되는 곳이다.

이는 도연명이 전원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자연에 몸을 맡기고자 했던 것과도 연결된다.

 

이와 같이 도연명이 그려내는 이상 세계는 이념적인 공간만이 아니다.

참된 본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발적인 ‘몸의 노동’이 필요했듯이

이상 세계로 가기 위해서도 직접 몸을 움직여 자신의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자신의 삶과 당시의 사회를 되돌아보고 성찰할 줄 알며 그 성찰 속에서 자신의 삶을 전면적으로

바꿀 수 있을 때 이상적인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것은 곧 생명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6.

중국 문학사상 문인이 전원생활을 시에 담아 표현한 것은 도연명이 처음인데 그는 이러한 새로운 제재의 개척과

더불어 한말漢末 이래 점차 미약해진 서정抒情의 전통을 다시 회복했고 표현의 측면에서는 화려한 언어와 수식을

중시하는 당시의 풍조에서 벗어나 간결하고 구어에 가까운 언어를 구사했고 대우對偶를 중시하는 대신 비교적

산문에 가까운 구법句法을 사용했으며 특별한 경우¹¹를 제외하면 별로 전고典故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11) 이를테면 <술주述酒 술을 말하다>에는 수많은 전고가 동원되었다.

 

그러나 그의 시를 자세히 살펴보면 글자의 선택과 배치, 구절의 짜임새, 작품 전체의 완성도 면에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한 것이 없어 그가 말하는 것처럼 손쉽게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시로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매우 고심해서 시를 썼음을 알 수 있다.

 

도연명의 시는 이처럼 당시의 일반적 조류와 방향을 달리 했기 때문에

그가 살아 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상당 기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런 점은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에 그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이나

종영鍾嶸의 <시품詩品>에서 그의 시를 중품에 배치한 점에서도 드러난다.

 

도연명의 시는 당대唐代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널리 추앙받게 된다.

왕유王維와 맹호연孟浩然을 비롯한 자연시파 시인들을 비롯해

이백李白, 두보杜甫, 백거이白居易 등이 모두 도연명의 시를 칭찬하고 애호했다.

 

송대宋代에 이르러서는 도연명의 지위가 더욱 높아져서 그의 시품과 인품 모두 학습의 모범이 되었다.

소식蘇軾은 “나는 시인들 중에 좋아하는 이가 없고 오직 도연명의 시를 좋아한다. ···

조식曹植, 유정劉楨, 포조鮑照, 사영운謝靈運, 이백, 두보 등의 여러 시인이 모두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¹²

라고 했고 또한 도연명에 대한 애호에서 촉발되어 <화도시和陶詩> 109수를 짓기도 했다.

 

►12) 소식蘇軾 <추화도연명시인追和陶淵明詩引>

 

남송南宋의 주희朱熹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학자이면서도

도연명의 인격과 시를 좋아해 도연명에 대한 후인들의 존경심을 돋우었다.

그 뒤에도 도연명의 작품은 金, 元, 明, 淸에 이르는 모든 시기에 수많은 시인들의 학습 대상이 되었다.

 

명대의 하맹춘何孟春은 중국 역사상 도연명이 최고의 인격을 갖추었고 최상의 시문을 남겼다고 극찬했고

현대의 문학가 주광첸朱光潛은 <중국시사中國詩史>에서 도연명과 견줄 만한 시인으로 굴원과 두보를 들면서도

그 두 사람에게는 도연명의 진순미眞醇美와 세련미는 없다고 했다.

 

도연명은 중국의 문인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시문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는 <문선文選>의 전래에 의해서지만

그 영향이 구체적 작품으로 드러난 것은 고려 중엽에 소식의 작품이 전래되어 유행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도연명 시의 평담하고 진실한 면모와 끝내 절개를 지켰던 인격을

높이 평가했고¹³ 이색李穡(1328∼1396)은 도연명을 “천고의 고상한 선비”¹⁴라고 극찬했다.

 

►13) <독도잠시讀陶潛詩>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23.

►14) <종국미흘우우작작단가種菊未訖雨又作作短歌

국화 심기를 끝내지 못했는데 비가 다시 내려 단가를 짓는다>

 

또한 이인로李仁老(1152∼1220)는 한국 최초로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화운和韻한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를 지었으며 만년에는 도연명을 흠모해 자신의 거처를 와도헌臥陶軒이라고 명명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사림파의 태두였던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도연명의 <술주述酒>에 빗대어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실려 있다.¹⁵

 

►15)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권30, 연산군燕山君 4년 무오戊午 7월.

 

김시습金時習(1435∼1493)은 혼탁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벼슬길에서 물러나 전원에 살면서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삶의 이치를 깨달았던 도연명을 추앙해 66수의 화도시를 남겼고

이황李滉(1501∼1570)은 도연명의 시와 인격을 높이 평가해 <이주> 2수와 <음주> 20수에 화운하기도 했다.

 

도연명의 시가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꾸준히 읽힐 수 있었던 이유는

가난한 지식인이 혼란과 불의의 시대에 처해 이상과 현실의 모순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뇌하면서도 끝내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고궁절의 길을 포기하지 않은

‘인간 승리’의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인들은 도연명이 문학에서 이룬 성취 못지않게

‘인간 도연명’에 강한 공감을 느껴 애호한 측면이 강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