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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도연명陶淵明

기記 전傳 술述 찬贊

►기記 사실을 그대로 적는 한문의 문체.

사물을 객관적인 관찰과 동시에 기록하여 영구히 잊지 않고 기념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을 두는 글이다.

옛사람이 기記라고 이름을 한 문장은 너무나 광범하여 일체의 기사문記事文과 기물문記物文을 포괄하고 있다.

 

현존하는 기의 문장을 분석하면 인물을 적기도 하고 사건이나 물품, 또는 산수풍경을 적기도 하였다.

그래서 기는 대각명승기臺閣名勝記·산수유기山水遊記·서화잡물기書畫雜物記·인사잡기人事雜記 등으로 구분한다.

 

대각명승기는 옛사람이 누각이나 정자를 신축 또는 개축하거나 명승고적을 관람할 때를 기념하여 쓰는 것이다.

돌에 새기기도 하고 현판으로 만들어 걸기도 한다.

중국 북송시대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 왕우칭王禹偁의 <황강죽루기黃岡竹樓記>

구양수歐陽脩의 <취옹정기醉翁亭記> 소식蘇軾의 <희우정기喜雨亭記> 등이 명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의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 이제현李齊賢의 <운금루기雲錦樓記>

조선 말기에 김택영金澤榮의 <남폭정기攬瀑亭記> 등이 대표적이다.

 

산수유기는 앞의 대각명승기와 비슷하지만 꼭 같지는 않다.

대각명승기의 경우는 작자가 그 장면을 보지 않고 자료를 얻어 쓰는 수도 있지만

산수유기는 작자가 직접 그 장면을 보고 기록한다는 차이가 있다.

 

당나라 유종원柳宗元의 <영주팔기永州八記>

조선 후기 박지원朴趾源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 등이 명작이다.

 

서화잡물기는 서화書畫·기물器物·물품 등만을 적은 것이다.

서序로 명명한 것도 있다.

당나라 백거이白居易의 <여지도서荔枝圖序> 한유韓愈의 <화기畫記>

고려시대 임춘林椿의 <화안기畫雁記> 조선시대 박지원朴趾源의 <표구기(豹裘記> 등이 명문이다.

 

인사잡기는 기인記人·기사記事를 중심으로 쓴 것이다.

박지원의 <이존당기以存堂記> 이건창李建昌의 <수당기修堂記>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지志’는 이름을 기라고 하지 않았지만 기인記人의 내용을 한 경우가 있다.

 

명나라 귀유광歸有光의 <항척헌지項脊軒志>와

조선 중기 이식李植의 <택풍당지澤風堂志>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명목은 다르지만 목적은 하나이고 체제 또한 동일하다.

 

기의 명칭은 <주례周禮>의 <고공기考工記>와 <예기禮記>의 <학기學記><악기樂記><방기坊記>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예기>의 기는 대체로 논체論體이고 기체記體가 아니다.

<주례>의 <고공기>가 전적인 사실寫實의 필체이므로 기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단편의 기체로는 미비한 점이 적지 않다.

 

양웅揚雄의 기에 이르러 기체가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뒤에 기문체가 유행되지 않아서 <문선文選>에 기의 문체가 등재되지 않았고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도 다루지 않았다.

 

기는 당대唐代 이후에 와서야 한유의 <화기> 유종원의 <영주팔기> 등의 출현으로 완성을 보게 되었다.

송대宋代 구양수·소식 등에 이르러 기를 서사체가 아닌 논설체로 썼다.

당시대의 진사도陳師道는 “한퇴지는 기를 기사체로 썼는데 지금은 기를 의론체로 쓴다.”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후대는 개선되지 않고 많은 사람이 의론체로 썼다.

그래서 서사체의 기를 정체正體, 의론체의 기를 변체變體라고 하였다.

실물로는 정자도 재각도 없는데 그 이름을 가정하여 의론화한 기를 별체別體라고 하기에 이른 것이다.

 

기의 문체는 부賦와 같으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논論과 같으면서도 단정을 짓지 않고

서序와 같으면서도 드날리지 않고 비碑와 비슷하면서도 칭송을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전傳 사람의 평생사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내용의 한문문체.

전은 원래 문자 그대로 사람의 평생사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다.

본래 史家에 의하여 채택되었다.

 

사마천司馬遷이 <史記>를 편술할 때에 백이열전伯夷列傳 이하

70여 편의 전을 남긴 이후에 역대의 <25史> 사가들이 이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정사正史의 필체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전은 차츰 정사뿐만 아니라 문인들에게도 보급되어 정사에 수용되지 못한 처사處士·일민逸民의 드러나지 않은

덕행이나 서인 천민의 본받을 만한 행실을 골계滑稽를 섞어가며 기교적으로 서술하여 후대에 드리우려 하였다.

그 수용되는 인물의 성격과 문장의 형태가 매우 다양하였다.

 

<문체명변文體明辨>에서는 전을 ① 사전史傳 ② 가전家傳 ③ 탁전托傳 ④ 가전假傳으로 나누었다.

설봉창薛鳳昌의 <문체편文體編>에서는 전을

① 사전史傳 ② 가전家傳 ③ 소전小傳 ④ 별전別傳 ⑤ 외전外傳으로 각각 분류하였다.

 

사전史傳은 정사의 열전을 뜻한다.

가전家傳은 정사와 구별되는 사가에 간직할 목적으로 된 전을 말한다.

가전과 탁전托傳은 가탁한 필법을 사용한 것이다.

소전小傳은 체재가 간략한 것이다.

별전別傳과 외전外傳은 명칭은 비록 다르지만 모두 정사인 정전正傳에 누락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전은 서술하는 방법과 태도에 따라 정체正體와 변체變體로 구분된다.

정체는 서사를 주로 하고 변체는 의론을 주로 한다.

정체는 사적을 기록하여 후대에 전시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사실 자체를 생각하여 법론을 금하게 된다.

대상도 달라서 정체는 달관귀인達官貴人을 많이 다룬다.

 

변체變體는 문인·기사奇士·창부娼婦·협녀俠女의 유가 많다.

후대에 낙척(어렵거나 불행한 환경에 빠짐.)한 선비들이 변체를 유희문遊戱文으로 여겨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들의 전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자전적自傳的이다.

둘째는 우언적寓言的이다.

 

자전적 전은 실제로는 글쓴이 자신의 흉금과 회포를 서술하면서 객관적으로 인물화한 것이다.

사실史實 자체는 징실徵實하지 못하다.

설사 사실을 증거 하였다 하더라도 종래의 정체처럼 사실위주가 아니다.

문학적인 윤색을 더하여 자기의 사상과 생활상태를 객관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방법으로 지었다.

 

우언적 전이란 주인공이 실제인물이 아니고 허구적 인물이다.

설사 실존인물이라 하더라도 많은 과장과 윤색을 더하였기 때문에 기록을 사실적인 진면목으로 간주할 수 없다.

그러나 주인공의 용심과 처사는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고 그로써 저자의 인생관과 이상을 영출한다.

 

고려시대의 가전假傳이나 박지원朴趾源의 9전은 인물의 성격이나

서술방법으로 보면 이 두 가지 전의 범주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온달전溫達傳>은 어디까지나 정사이므로 소설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이다.

 

 

►술述

'펼 술述' 펴다. 서술敍述하다. 따르다. 짓다 등을 뜻한다.

 

‘술이부작述而不作’ 기술記述(述)하되(而 접속사) 지어내지(作) 않았다(不)는 말.

공자가 자신의 저술이 옛일을 따라 기록했을 뿐 스스로 창작한 것은 아니다고 설명한 말이다/<논어 述而>편

 

'술이'라는 편명 자체가 이 술이부작에서 나왔다.

이 말을 겸사로 보는 의견도 있으나 공자는 자신이 옛 문화를 계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서들은 "자불어子不語 괴력난신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에 입각해 제작되었다.

다만 사기나 삼국사기에서도 민족의 자긍심 고취 등을 이유로

기록이 존재하지 않던 고대사나 국가 창설 설화 등은 그대로 기입해 놨다.

 

삼국사기의 경우 삼국사기 초반부에 김부식이 "중국도 탄생설화가 기이한데 우리라고 없으란 법 있냐!"라며

주몽, 박혁거세 등의 탄생 설화를 상세히 기록하기는 했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곤 원칙에 충실히 작성되었다.

 

하지만 작가의 창작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되어온 설화를

글로 옮겨 적은 것이라면 술이부작을 어겼다고 보기는 힘들다.

 

 

►찬贊=찬讚. 인물이나 서화를 찬미하는 한문문체.

‘도울 찬贊=기릴 찬讚’

 

인물이나 서화를 찬미하는 글체로 남의 좋은 점을 칭송할 때 사용한다.

찬은 ‘송頌’과 성격이 같아서 제사에 쓰던 송축사(唐의 안사고顔師古 주)로 신명神明에게 고하던 것이다.

 

후대에 오면서 점차 그 성격이 달라져 신명에게 고하는 것은

도외시되고 인물의 덕을 찬미하는 데로 흐르게 된 듯하다.

 

찬은 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형가荊軻의 찬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 작품이 전하지 않아 형태가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여타의 작품을 통하여 볼 때에 형가의 인물됨을 찬미한 정도의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에 이 체를 모방하여 찬을 짓는 사람이 많았고 唐代에 이르러서는 이 체로 과거까지 보았다고 한다.

찬의 체는 매구가 4언으로 격구隔句하여 운韻을 다는 운문으로 짓는 것이 상례이다.

 

5∼7언 또는 8·9언 등의 장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 같은 경우에도 운자는 꼭 단다.

그러나 초기 사마천司馬遷이 <史記>를 짓고 반고班固가

<漢書>를 지을 때 편말에 붙인 찬은 운어가 아니라 산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송나라의 범엽范曄이 <後漢書)>의 찬에서 운문으로 지은 것이다.

그 뒤로 그를 본받게 되어 정식으로 정착된 것이다.

 

찬의 종류로는 서사증徐師曾의 <문체명변文體明辨>에서 3종류로 나누고 있다.

① 잡찬雜贊으로 인물이나 문장 그리고 서화 등을 찬미한 것,

② 애찬哀贊으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여 그의 덕을 기리는 것,

③ 사찬史贊으로 인물의 잘잘못에 포폄을 가하여 논평하는 것 등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애찬과 사찬이 수용은 되었다.

그러나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잡찬만이 위세를 떨쳤다.

 

찬의 저작은 신라 때에 최치원崔致遠의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 석가여래釋迦如來 수상번찬繡像幡贊>에서 시작되었다.

 

그를 이어서 영찬影贊·진찬眞贊·상찬像贊·자찬自贊과 같이 인물의 영정 옆에

그 덕을 찬미하여 쓴 것이거나 서화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찬이 주종을 이룬다.

그러나 <삼국유사> 등에서 보이는 찬은 승려의 불덕을 칭송한다는 말로 쓰인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