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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도연명陶淵明

소疏 제문祭文 1. 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

제문祭文 

1. 여자엄등소與子儼等疏 아들 엄 등에게 주는 글

 

고엄사빈일동告儼俟份佚佟 엄儼. 사俟, 빈份, 일佚, 동佟에게 알린다.

천지부명天地賦命 천지가 생명을 내려 줌에

생필유사生必有死 태어나면 반드시 죽음이 있다.

 

자고성현自古聖賢 옛날부터 성현이라도

수능독면誰能獨免 누가 홀로 벗어날 수 있었던가.

 

자하유언子夏有言 자하가 말하기를

사생유명死生有命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고

부귀재천富貴在天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라고 하였다.

 

사우지인四友之人 (공자의 제자였던)네 사람은

친수음지親受音旨 직접 공자의 말씀과 뜻을 받들었으니

발사담자發斯談者 이 말을 낸 것은

장비궁달불가외구將非窮達不可外求 아마도 빈궁과 영달은 분수 이상으로 구할 수 없고

수요영무외청고야壽夭永無外請故也 장수와 요절도 끝내 분수 이상으로는 청할 수 없기 때문에 아니었겠느냐.

 

오년과오십吾年過五十 내가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

소이궁고少而窮苦 젊어서는 곤궁하였고

매이가폐每以家弊 매번 집안이 피폐하여

동서유주東西遊走 동서로 떠돌아다녔다.

 

성강재졸性剛才拙 성정은 강직하고 재능은 변변치 못하여

여물다오與物多忤 남과 어긋남이 많았다.

 

자량위기自量爲己 스스로 나의 됨됨이를 헤아려 보니

필이속환必貽俗患 반드시 속세의 재난을 남길 것이라서

민면사세僶俛辭世 힘써 세상을 버려

사여등유이기한使汝等幼而飢寒 너희들로 하여금 어려서부터 굶주리고 춥게 하였다.

 

여상감유중현처지언余嘗感儒仲賢妻之言 (그러나)내가 일찍이 유중의 훌륭한 아내의 말에 감동한 적이 있으니

패서자옹敗絮自擁 해진 솜옷을 직접 두르고 있은들

하참아자何慙兒子 어찌 아이들에게 부끄럽겠는가.

차기일사의此旣一事矣 이것이 이미(유중과)같은 일이 되었구나.

 

단한린미이중但恨隣靡二仲 다만 이웃에 구중求仲 양중羊仲 같은 친구가 없고

실무래부室無萊婦 집에는 노래자老萊子의 부인 같은 아내가 없음이 한스럽다.

 

포자고심抱玆苦心 이 고통스러운 마음을 갖게 되니

량독내괴良獨內愧 진실로 혼자서 내심 부끄럽다.

 

소학금서少學琴書 어려서부터 거문고와 책을 배웠고

우애한정偶愛閒靜 우연히 한 적합과 조용함을 좋아하게 되었다.

 

개권유득開卷有得 책을 펼쳐 보다가 터득하는 것이 있으면

변흔연망식便欣然忘食 곧 기뻐하며 밥 먹는 것도 잊었다.

 

견수목교음見樹木交蔭 나무들이 교대로 그늘을 만들고

시조변성時鳥變聲 철새들이 소리를 달리함을 보고

역복환연유희亦復歡然有喜 또한 즐거워서 기뻐함이 있었다.

 

상언常言 항상 하는 말에

오육월중五六月中 오뉴월 중에

북창하와北窓下臥 북쪽 창 아래에 누워

우량풍잠지遇凉風暫至 시원한 바람이 잠시 불어오게 되면

자위시희황상인自謂是羲皇上人 스스로 이르기를 ‘복희伏羲시대 이전사람’이라고 하였다.

 

의천식한意淺識罕 뜻은 옅고 식견은 적지만

위사가이보謂斯可以保 이 말이 간직할 만하다고 여겼다.

 

일월수왕日月遂往 세월이 마침내 가서

기교호소機巧好疎 기심機心과 교심巧心이 아주 드물어졌으나

면구재석緬求在昔 멀리 옛날을 추구해 봄에

묘연여하眇然如何 아득 아니 어쩌겠는가.

 

병환이래病患以來 병든 이래

점취쇠손漸就衰損 점차 쇠약하고 손상되어 가자

친구불유親舊不遺 친구들이 버리지 않고

매이약석견구每以藥石見求 매번 약으로 구해 주지만

자공대분장유한야自恐大分將有限也 스스로는 수명이 장차 한계가 있을 것이 두렵구나.

 

여치소가빈汝穉小家貧 너희들은 어린데 집은 가난하여

매역시수지로每役柴水之勞 매번 나무하고 물 긷는 노고를 하고 있으니

하시가면何時可免 언제나 벗어날 수 있겠는가.

 

념지재심念之在心 마음속에 이것을 생각하니

연여등수부동생然汝等雖不同生 그러나 너희들이 비록 한 어머니의 태생은 아니라도

당사사해개형제지의當思四海皆兄弟之義 마땅히 사방의 사람들이 모두 형제라는 끗을 생각해야 한다.

 

포숙관중鮑叔管仲 포숙아와 관중은

분재무시分財無猜 재물을 나누면서 의심이 없었고

귀생오거歸生伍擧 귀생과 오거는

반형도구班荊道舊 싸리나무를 깔고 앉아 옛정을 말하였다.

 

수능이패위성遂能以敗爲成 마침내 실패를 가지고 성공으로 만들었고

인상립공因喪立功 도망을 계기로 공적을 세웠지.

 

타인상이他人尙爾 남들도 오히려 이러한데

황동부지인재況同父之人哉 하물며 아버지를 같이하는 형제간임에랴.

 

영천한원장潁川韓元長 영천의 한원장은

한말명사漢末名士 한나라 말기의 명사로

신처경좌身處卿佐 몸이 집정대신의 자리에 있었고

팔십이종八十而終 팔십이 되어 죽었는데

형제동거兄弟同居 형제들이 함께 살면서

지어몰치至於沒齒 수명이 다할 때까지 이르렀다.

 

제북범치춘濟北氾穉春 제북의 범치춘은

진시조행인야晋時操行人也 진晋나라 시기에 행실을 조심했던 선비이다.

 

칠세동재七世同財 7대에 걸쳐 재물을 함께 하였으나

가인무원색家人無怨色 부인들이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시왈詩曰 <시경>에 이르기를

고산앙지高山仰止 “높은 산은 우러르고

경행행지景行行止 큰길은 걸어간다.”라고 하였다.

 

수불능이雖不能爾 비록 잘 할 수는 없더라도

지심상지至心尙之 지극한 마음으로 이것을 숭상할 것이다.

 

여기신재汝其愼哉 너희들은 바라건대 삼가 행할 것이니

오복하언吾復何言 내가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도연명 산문집 김창환 역주

 

►자하子夏(BC507-BC420?)

춘추시대春秋時代 공문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

본명本名은 복상卜商, 자하子夏는 자字. 문학文學에 뛰어났음.

공자가 죽은 뒤에 서하西河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으며 위魏나라 문후文侯에게 초빙되어 스승이 되었다.

 

자하는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여읜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하다 실명失明하였다고 전해진다.

 

공문孔門 中에서 後世에까지 가장 많은 영향影響을 끼쳤다.

주관적 내면성을 존중하는 증자曾子 등과 달리 예禮의 객관적 형식을 존중하는 것이 특색이다.

 

그의 학문은 시와 예에 통하였으며 공자의 <春秋>를 전하여 <公羊傳><穀梁傳>의 원류源流를 이루었다.

孔子가 산정刪定한 <詩經>과 <易經> 및 <春秋)>를 전傳했다고 한다.

 

►음지音旨 말의 뜻.

►‘거스를 오忤’ 거스르다, 거역拒逆하다, 반대反對하다. 미워하다. 어지럽다,

►민면僶俛 면력勉力 노력努力

►유중儒仲

동한東漢의 왕패王霸 자字 유중孺仲(유중儒仲/<後漢書) 태원 사람. <後漢書 逸民列傳>참고.

 

왕망이 전한을 찬탈하고 신국新國이라 하며 15년의 통치를 하다 전한실의 후예 유수에게 패하여

막을 내렸는데 그 사이 신국 왕망에게 붙좇기를 거부한 은자隱者들이 많이 나온다.

왕패王霸라는 인물이 후한서에 두 사람이 나오는데 다른 한 사람은 후한서 열전 20에 보이는

‘패빙호하霸冰虖河’ 고사를 낳은 왕패王霸다./<後漢書 王霸>

 

자가 유중儒仲이며 태원太原 광무廣武현 출신인 왕패는 젊어서부터 청고淸高한 지조가 있었다.

왕망이 한실을 찬탈했을 때 왕패는 관직을 버리고 관리의 연을 끊었다.

건무建武(25~56, 후한 최초의 연호) 연간에 광무제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유사有司가 이유를 묻자

천자유소불신天子有所不臣 천자도 신하로 두지 못하고

제후유소불우諸侯有所不友 제후도 친구로 사귀지 못한다.

라는 이전의 곽태郭泰의 고사를 들었다.

처음에 왕패는 같은 고향에서 영고자백令孤子伯과 친구였는데 후에 영고자백이 초楚 땅의 재상이 되고

그의 아들이 군의 공조功曹 벼슬에 이르자 왕패는 은거하였다.

 

영고자백의 아들은 화려한 비단옷을 입었는데 반해

자신의 아들은 봉두구면蓬頭垢面(쑥대머리에 때가 낀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왕패가 이로 인해 부끄럽고 낙심하는 모습을 본 아내가

군소수청절君少修清節 당신이 소시부터 청고한 지조를 닦아

불원영록不願榮禄 영록榮祿을 구하지 않았는데

금자백지귀숙여군지고今子伯之貴孰與君之高 이제 자백은 부귀하고 그대는 청고하다 해서

내하망숙지奈何忘宿志 어찌 숙지宿志를 잊고

이참아녀자호而慙兒女子乎 어린아이처럼 부끄러워하시오?

하자 왕패는 드디어 더욱 은일隱逸 하기에 전념하였다.

왕패는 부름이 있을 때마다 병을 핑계 삼고 은거하며 지조를 지키며 천수天壽를 누렸다.

부귀 영예를 지상주의로 여기는 현세에서는 이런 벼슬, 부귀 명예에 눈을 팔지 않는 현상도 없거니와

그런 남편에 일심 내조하는 양처도 보기 어려울 것이다.

 

►패서자옹敗絮自擁 ‘솜 서, 간 맞출 처, 실 헝클어질 나絮’ ‘낄 옹擁’

►미이중靡二仲 다만 이웃에 구중求仲 양중羊仲

양구羊求는 한漢 애제哀帝 때 단정하고 청렴하기로 이름난 양중羊仲과 구중求仲의 병칭竝稱이다.

당시에 그들의 벗 장후蔣詡가 왕망王莽이 섭정을 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외부와

통하는 길 세 가닥을 터놓고 하나는 자기가, 나머지는 그들이 각기 다니는 길로 삼아 서로 왕래하며 살았다 한다.

 

<삼경三徑>

前漢 말에 왕망王莽이 황권을 찬탈하자 연주자사兗州刺史였던 장후蔣詡는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두릉杜陵에 은거하면서 가시나무로 만든 문을 닫아 두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의 집안 대숲에는 세 갈래 샛길이 있었는데 평소에는 문을 닫아 두고 손님을 사양하다가

친구 求仲과 羊仲 두 사람이 올 때만 이 길을 통해 안으로 들게 했다.

 

두 사람은 모두 입신양명을 멀리한 高士였다.

이후로 ‘三徑(三逕)’은 출사하지 않고 은거한 사람들을 뜻하게 되어 장사삼경蔣舍三徑이라는 말을 낳았다.

 

►래부萊婦 노래자老萊子의 아내

‘노래자老萊子’ 春秋時代 초楚나라의 현인賢人. 中國 24孝子의 한 사람.

난亂을 피避하여 몽산蒙山 남쪽에서 농사農事를 지으면서 살았는데 70세에 어린아이 옷을 입고

어린애 장난을 하여서 늙은 父母를 위안慰安하였고 <노래자老萊子> 15편을 지었다고 전傳함.

노자老子와 동일인同一人이라고도 한다.

 

►포자抱玆 회차懷此 이런 생각을 하다

►한정閒靜 한가롭고[閒] 고요하다[靜]

 

►기교호소機巧好疎 기심機心(간교한 심보)과 교심巧心(교묘한 생각)

►포숙관중鮑叔管仲

‘포숙아鮑叔牙(?-?)’ 춘추시대 제齊나라 사람.

젊어서 관중管仲과 친하게 사귀었는데 관중의 집이 가난하고

어머니가 연로하여 항상 관중을 도와주면서 막역지교莫逆之交를 나누었다.

 

제齊 양공襄公 때 公子 소백小白의 사부가 되었다.

나중에 제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공자 소백을 따라 거莒로 달아났고

관중은 공자규公子糾를 따라 노魯나라로 달아났다.

 

양공이 피살되자 규와 소백이 군주의 자리를 다투었는데

관중이 소백의 귀로를 습격하여 소백의 대구帶鉤(허리띠)를 맞추었다.

 

소백이 죽은 척하고는 먼저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니 그가 제齊 환공桓公이다.

환공이 그를 재상으로 삼으려고 하자 사양하고 투옥된 관중을 석방해

그를 재상의 자리에 앉히라고 권했다.

환공이 그 말을 따라 관중을 재상에 임명했다.

 

‘관중管仲(?-BC645)’

관경중管敬仲. 이름은 이오夷吾, 자는 중仲이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영상潁上 사람.

 

가난했던 소년시절부터 평생토록 변함이 없었던 鮑叔牙와의 깊은 우정은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하여 유명하다.

 

처음에 공자규公子糾를 섬겨 노魯나라로 달아났다.

제齊 양공襄公이 피살당하자 공자규와 공자소백公子小伯(桓公)이 자리를 두고 다투었는데

실패하고 공자규는 살해당하고 자신은 투옥되었다.

 

그때 포숙아는 소백의 편에 섰는데 그가 추천하자 환공이 지난날의 원한을 잊고 발탁하여

노장공魯莊公 9년 경卿에 오르고 높여 중부仲父라 불렸다.

 

환공을 도와 제도를 개혁하고 국토를 효율적으로 구분했다.

도성 또한 사향士鄕 15군데와 공상향工商鄕 6군데로 나누고

지방을 五屬으로 구획해 五大夫가 나눠 다스리도록 했다.

 

염철관鹽鐵官을 두고 소금을 생산하면서 돈을 제조하게 했다.

이렇게 군사력을 강화하고 상업과 수공업의 육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했다.

 

대외적으로는 동방이나 중원의 제후와 아홉 번 회맹會盟하여 환공에 대한 제후의 신뢰를 얻게 했고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초楚나라를 누르려고 했다.

제환공은 춘추오패春秋五)의 한 사람이 되었다.

 

저서로 알려진 <관자管子>는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가필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귀생오거歸生伍舉/<左傳·襄公 26年> <國語·楚語>班

아래 ‘반형도구班荊道舊’ 참고

 

►반형도구班荊道舊=반형도고班荊道故 옛 친구親舊를 만나 情을 나누는 것을 이르는 말.

옛친구를 우연히 만나서 지난 일을 이야기하며 옛 정을 나누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좌씨전左氏傳> 양공襄公 26년조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초楚나라의 오거伍擧와 채蔡나라의 성자聲子는 친분이 두터웠으며

오거의 아버지 오삼伍參과 성자의 아버지 자조子朝도 서로 매우 가깝게 지냈다.

 

초나라의 대부였던 오거는 초거椒擧라고도 불리는데 그의 아내는 죄를 짓고 달아난 왕자모王子牟의 딸이었다.

그런데 사위인 오거가 왕자모를 빼내어 다른 곳으로 보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에

오거는 정鄭나라로 몸을 피하였다.

 

정나라에 가서 숨어 지낸 오거가 또다시 진晉나라로 피신할 무렵 오거의 친구로 채나라의 대부인 성자가

진나라로 가려던 중에 정나라의 도읍 가까운 곳에서 오거를 우연히 만났다.

 

"반형상여식班荊相與食 성자와 오거는 풀밭에서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으면서

이언부고而言復故 지나간 옛 이야기를 하였다."

 

그 뒤 오거는 성자의 도움을 받아서 초나라로 되돌아갔다고 전해진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춘추좌씨전 노선공魯宣公 4년(BC605)>에 귀생歸生에 대해서 나온다.

자가子家는 공자 귀생歸生이고 자공子公은 공자 송宋이다.

 

민지실덕民之失德 백성의 인심을 잃는 것은

건후이건乾餱以愆 마른 밥 한 덩이 때문에 잘못되는 것이다/<詩經>

 

선현들은 인색함의 의미를 ‘부족함’으로 풀이하였다.

기氣가 부족한 것이든 마음 한구석이 불안한 것이든 부족한 것이 인색함을 불러오는 것으로 본 듯하다.

그러기에 부족하면 채우려고 하고 불안하면 비축하려고 한다.

결국은 자신과 타인에게 인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은 인색과 관련하여 두 가지 예를 들었다.

하나는 자신에게 인색한 경우로

잘 먹지도 잘 입지도 못하고 제때에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마지막까지 움켜쥐고 있다가 타인에게 좋은 일만 시키는 경우이다.

 

또 다른 하나는 타인에게 인색한 경우로

자기에게 필요치 않은 것이라도 타인에게 주는 것은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이다.

자기 배는 부르고 남겨두면 음식이 상해도 다른 사람에게 주지는 않는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성호는 인색한 2명의 사람에 대해 예를 들었다.

‘화원華元’과 ‘자가子家’라는 사람이다.

 

화원이 어느 날 염소를 잡아서 그 부하들을 맛있게 먹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의 마부 양짐羊斟이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해 음식을 먹지 못했다.

이에 마음이 상한 양짐은 훗날 전투에서

“지난번에는 당신 마음대로 염소를 처리했으니 오늘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

라고 하면서 수레를 몰고 적진으로 투항해 버렸다.

 

두 번째 예는 자가이다.

자가는 공자公子 귀생歸生이라는 사람이다.

귀생이 임금을 뵈러 갔을 때 일이다.

함께 간 자공子公이 진귀한 음식을 먹게 되면 식지食指가 동하는 습관이 있다고 말을 했다.

식지가 동한다는 말은 먹을 생각이 간절해서 손가락이 절로 음식이 있는 쪽으로 움직이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임금이 일부러 자라탕을 나누어주지 않자 원한을 품고 자공과 함께 그 임금을 시해弑害하고 말았다.

 

위의 두 경우처럼 음식 때문에 나라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자신을 호위하며 따라오던 두 병사를 보고 물었다.

“너희는 내가 특별히 은혜를 베푼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왜 끝까지 남아있는 것이냐?”

 

병사가 말하였다.

“임금님께서는 굶어 죽어가던 저희 아비에게 밥 한 덩이를 내려 살려주신 적이 있으십니다.

저희는 나라가 위태롭게 되면 목숨을 바치라고 한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탄식했다.

“베풀어주는 것은 그 양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상대가 얼마나 절박한가에 달렸고

원한을 사는 것은 그 정도가 깊고 옅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느냐에 달린 것이구나.”

 

덕德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좋든 나쁘든 살아가면서 쌓이는 것이다.

성실하고 후덕하게 살면 이해도 지식도 사리분별력도 자신의 나이만큼 쌓이면서

그것으로 후덕한 인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후덕한 사람은 늘 인자하고 겸손하다.

그리고 부지런하며 텅 빈 마음으로 항상 자신을 낮춘다.

남을 공경恭敬하며 덕화德化로써 상하와 좌우를 두루 포용하고 끊임없이 관심으로 베푼다.

또한 아무리 낮고 천한 사람이라도 경외심敬畏心을 갖고 대한다.

 

대중의 마음은 덕 있는 사람을 따르기 마련이고, 하늘의 뜻도 역시 사私없는 이에게 돌아간다.

관인후덕한 사람은 어질고 너그럽고 덕이 두터운 사람이다.

자신에게는 어렵더라도 따르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심적, 물질적으로 베풀며 산다.

그리고 그들이 어려움에 부닥치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뛰어든다.

 

나는 혹여 인색한 소인이 되어가지는 않은지 내 삶을 반추해본다.

매일, 매순간 도움이 필요했던 이에게 인색한 적은 없었는지 살펴볼 것이다.

현실이 힘들어도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인색한 소인이 되지 말고 ‘관인후덕’한 대인으로 살아가면 좋겠다.

/강릉박사 배선식

 

►영천한원장潁川韓元長

‘영천穎川’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우현禹縣

‘한원장韓元長’ 동한東漢 시대 사람으로 이름은 융融, 자字는 원장元長

 

►범치춘氾穉春

서진西晉 시대 사람으로 성은 우禹 이름은 육毓 자字 추춘椎春

 

<晉書·儒林傳>에 따르면

그의 집안은 대대로 유학자였으며 9개 씨족이 화목하게 살았고

범우가 태어나기까지는 7대가 이어졌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가족이

"영구적인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과 영구적인 주인이 없는 옷"을 가졌다며 칭찬했다.

 

 

진晉 의희義熙 3년(407) 도연명 51세에 지었다.

글의 구성은 먼저 자신의 생애 역정과 평소에 가졌던 뜻을 회고하고 있다.

 

다음으로 친구 간에 우정이 돈독했던 이들이나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던 이들의 전례를 들어

다섯 아들에게 이들을 본받아 우애할 것을 바라고 훈계하고 있다.

 

‘소疏’는 문체의 이름으로 도리를 설명하거나 분석하는 방식의 문장이다.

 

 

●경經 전傳 주註 소疏 전箋

경經

儒敎 13經
3經 3禮 3傳 其他






春秋
左氏傳
春秋
穀梁傳
春秋
公羊傳




 

​"경經"은 경우에 따라 경전, 경서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경은 성인이 저술한 것을 말하고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서적들을 말한다.

이 개념을 그대로 써서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중요한 책은 "성경"이라 부르고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중요한 책은 "불경"이라 부른다.

 

<3경? 5경? 13경??>

經은 시대와 나라의 정치 성향에 따라 중시한 경전이 달랐으므로 삼경 오경 등 그 수 또한 달랐다.

 

經을 가장 먼저 확립한 漢나라다.

시대에 따른 경의 변화는 쓰다 보니 길어져서 표로 정리해본다.

時代 經典
5經 3經(易 詩 書) + 禮 春秋
9經 3經 + 周禮 儀禮 禮記 春秋左氏傳 春秋穀梁傳 春秋公羊傳
南宋 13經 9經 + 論語 孟子 爾雅 孝經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속담 중에 "소 귀에 경 읽기" 가 바로 이 경전들은 말한다.

소 귀에 경 읽기를 사자성어로는 우이독경牛耳讀經이라 하는데 중국에는 없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대우탄금對牛彈琴, 소에게 대고 거문고를 탄다고 말한다.

 

전傳

傳은 經을 해설한 것이다.

우리가 경을 공부하다 보면 "경전"이라는 단어를 자주 듣는데 經傳은 "성경현전"의 줄임말이다.

"성인이 남긴 경에 현인이 전을 달았다"는 의미다.

 

"春秋"라는 經에 대해서 左氏가 해설을 달아 놓으면 "春秋左氏傳"이 되는 것이다.

원래의 의미를 알고 나면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니다.

 

경전은 또 발음 때문에 經典, 經傳으로 헷갈리는 경우도 있다 .

전자는 經을 말하고 후자는 經과 傳을 합친 말이니 주의하자.

 

주註 소疏 전箋은 모두 전傳과 같이 해설한 것을 말한다.

쉽게 생각하면 아래와 같다.

 

경經 ☞ 전傳 ☞ 주註 ☞ 소疏 ☞ 전箋

그래서 서적에 이름만 봐도 서적의 시기를 대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

/네이버 블로그 : 빅터의 다국어 고전문학

 

 

<아들 엄, 사, 빈, 일, 동에게 주는 글>

 

천지가 만물에 생명을 부여하여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기 마련이다.

예로부터 어진 이도 성스러운 이도 이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공자의 제자였던 자하(복상)는

“삶과 죽음은 운명 속에서 벌써 정해진 것이며, 부귀는 하늘이 안배하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공자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하께서 이런 생각을 하셨다는 것은

곤궁과 영달은 멋대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수명의 길고 짧음도 정해진 수가 있어 달리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겠느냐?

 

내 나이 벌써 50이 넘었다.

젊어서부터 궁하고 힘들게 살다보니 집안이 가난하여 늘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살았단다.

하지만 성격은 강하고 재주는 아둔하여 항상 세상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렇게 끝까지 가다간 세속의 환란을 피할 길이 없을 것 같아 억지로

관직을 사퇴하고 세상을 피해 은거하다보니 어려서부터 너희들을 춥고 배고픈 생활로 내몰고 말았구나.

 

언젠가 유중有衆(민중이나 백성)의 현명한 아내가

“담담하게 자신의 지조를 지킨다면 생활이 빈곤하여 헤어진 솜이불을 덮고 산다한들

자식들에게 무슨 부끄러움이 있을 소냐?”라고 한 말에 깊이 감동을 받았단다.

 

그건 그렇고 청렴결백하게 명예와 세상을 피한 이중 같은 이웃도 없고 집안에 어질고 후덕한

래부 같은 아내도 없는데 쓸데없이 자기 혼자 이런 고민을 안고 있으니 이것이 정말 부끄러울 뿐이구나!

 

어려서 거문고를 배웠고 책을 읽었다.

조용하게 혼자 있는 것이 좋았단다.

 

책을 읽고 깨닫는 바가 있으면 너무 기뻐 밥 먹는 것조차 잊었단다.

잎사귀 무성한 나무와 나무 그늘을 보거나 때맞추어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면 마음이 절로 들떴단다.

 

그래서 늘 5월이나 6월에 북쪽으로 난 창 아래에 누워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맞으면

내가 바로 ‘복희 이전의 태고적 사람이구나.’ 했단다.

 

마음속에 품은 뜻이 차분하고 담담하여 굳이 무엇을 만들거나 구하는 바가 없다면

스스로를 깨끗하고 높게 지킨다고 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르면 재치와 속임수도 점점 멀어지고 오로지 고인의 경지를 추구하게 되니

이런 유유자적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 줄 아느냐!

 

병을 얻은 뒤로 몸이 점점 쇠약해졌으나

다행히 친척과 옛 친구들이 버리지 않고 약을 마련하여 나를 도왔단다.

 

다만 내가 죽은 뒤 어린 너희들이 가난 때문에 늘 생계를 걱정하고 힘들게 일해야 할 테니

언제 그것을 면할 수 있을까 이것이 걱정될 뿐이다.

마음속에 깊이 맺혀 있으니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이 비록 같은 어미에게서 난 형제들은 아니지만

‘사해의 모든 사람이 형제다’라는 이치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포숙과 관중은 모은 재물을 나눌 때 터럭만큼도 셈을 따지지 않았고 서로 시기하지 않았다.

귀생과 오거는 정과 의리가 돈독하여 서로 기대고 돕고 살았단다.

그래서 그들은 끝내는 실패를 성공으로 바꿀 수 있었단다.

친척이 아닌데 이렇게 할 수 있거늘 하물며 너희들은 모두 한 아버지에게서 난 형제 아니냐!

 

영천의 한원장韓元長은 동한 시대의 명사로 재상이란 높은 자리에 있었고

80까지 사시다가 세상을 뜨셨는데 형제들이 끝까지 함께 살았다.

 

북조 사람 치춘稚春은 진 왕조에서 덕행으로 이름이 높은 분이셨는데

7대가 분가하지 않고 함께 살면서도 누구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詩經>에 “높은 산은 사람이 우러러보고 큰길은 가려 한다”는 구절이 있다.

이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충심으로 그렇게 하려면 너희들은 삼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제 더 할 말이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