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 당시 정치적 인물 환온桓溫
<환온桓溫의 북벌>
환온桓溫은 동진시대의 초국 용항龍亢(안휘성 회원현) 사람이다.
환온의 아버지 환이桓彛는 소준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소준의 부하인 한황에게 살해당했다.
그때 환온은 겨우 15살이었다.
아버지가 피살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슬프고 분하여
주먹을 불끈 쥐며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환온이 18살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데 가담했던 강파江播가 죽었다.
그는 칼을 품고 강파의 영당靈堂에 뛰어들어 강파의 아들 강표를 비롯한 식구 6명을 죽였다.
영가 연간의 난세에서 성장한 환온은 젊었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목제穆帝 영화 2년(347년)에 이미 안서장군이 된 환온은 어명을 받고 촉 땅의 李世를 토벌하기 위해 행군했다.
초기에는 환온이 불리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참군 공호龔護가 전사하고 환온이 탄 말이 화살에 맞았다.
환온은 급히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북 치는 병사가 이를 잘못 알아듣고 전진하는 북을 세차게 울렸다.
그러자 삼군이 일제히 앞으로 맹 돌격을 했다.
환온의 공세가 이렇게 맹렬할 줄은 생각도 못했던 이세는 그 기세를 막지 못하고 가맹관葭萌關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나중에 사람을 보내어 항복했다.
환온의 대군은 기세당당하게 성도로 들어갔고 이렇게 해서 성한 왕조는 멸망했다.
그 공로로 환온은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승격되었으며 임하군공臨賀郡公으로 책봉되었다.
그렇게 해서 환온의 이름은 조정과 민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354년, 환온은 북벌을 재개했다.
그는 이번에도 강릉에서 출발했는데 북벌의 대상은 강족 통치자인 요양姚襄이었다.
군대를 이끌고 북상한 환온은 하남 이수伊水에 이르러 요양의 주력부대와 결전을 벌였다.
용감무쌍한 환온의 군사들은 요양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승세를 타고 낙양으로 쳐들어갔다.
369년,
환온은 다시 북벌을 시작하여 군사 5만을 거느리고 모용씨慕容氏의 나라인 전연前燕을 공격했다.
환온의 군대는 하남 저방두柢枋頭에서 수성장 모용수慕容垂와 격전을 벌였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환온은 큰 실수를 저질렀다.
군량을 수로로 운반하게 했던 것이다.
연나라군은 석문 나루터를 점령하고 환온 군대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식량이 바닥나자 환온은 하는 수 없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퇴각하는 도중에 모용수에게 습격을 당했다.
환온의 군대가 산양(강소성 회안시)까지 퇴각해서 보니 장병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북벌의 실패로 인하여 그동안 중천에 뜬 해 같던 환온의 명성은 일락천장一落千丈이 되었다.
그러나 동진의 군권을 쥐고 있던 환온의 야심만은 날로 커졌다.
370년, 그는 ‘우매 무능’하다는 이유로 사마혁司馬奕을 폐위시키고 사마욱司馬昱을 황제로 올려놓았다.
그가 바로 간문제簡文帝인데 즉위한 지 2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환온은 간문제가 임종시에 황제 자리를 자신에게 넘겨줄 줄 알았다.
그런데 간문제는 그를 새 황제의 보정대신補政大臣으로 임명했다.
환온은 울화가 치밀 수밖에 없었다.
사마요司馬曜가 즉위하여 효무제孝武帝가 되었다.
효무제는 사안을 보내어 환온을 보정대신으로 임명하고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도성으로 올라온 환온은 선제의 능묘를 참배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병상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얼마 후 북벌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환온은 야망을 실현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간문제
자는 도만道萬으로 하내 온현 사람이다.
원제의 작은아들로 원제 대흥 3년(320년)에 태어나서 건안 2년(372년)에 죽었다.
재위 기간은 2년이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중국상하오천년사
●환온桓溫(312-373)
환온桓溫은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동진의 명장, 권신, 정치가이다.
성한 정벌, 수차례의 북벌을 통한 군사적 성공을 거듭해 전권을 장악,
국가를 좌지우지하며 선양을 통해 황제의 자리까지 넘봤지만 본인의 주저함과 주변의 저항으로 무산되었다.
자는 원자元子, 시호는 선무공宣武公이다.
아버지는 환이桓彝, 동생은 환운桓雲, 환활桓豁, 환비桓祕, 환충桓沖이 있다.
후에 아들 환현桓玄이 환초를 건국, 선무황제로 추존되었다.
<벼락 출세>
초국譙國 용항龍亢(현재의 안휘성安徽省 회원현懐遠縣)출신으로
그의 가문은 화북지방에서 남하한 명문귀족이었다.
아버지 환이桓彝는 명제明帝 원년에 일어난 왕돈王敦의 난을 진압하는 큰 공을 세웠지만
곧이어 일어난 소준蘇峻의 난에서 전사했다.
아버지 환이의 목에 칼을 찔러 넣은 자의 이름은 강번江播이라는 인물이었는데 3년 후 그가 급살을 맞자
당시 18세였던 환온은 조문을 빙자해 강씨 유족들의 집에 침입, 자식 3형제를 살해하고 아비의 원수를 갚았다.
환온은 당시 공신의 유복자면서 南康長公主와 혼인한 황제의 사위였으므로 해당 사건은 불문에 붙여졌다.
343년에 낭야태수琅邪太守, 서주자사徐州刺史로 벼슬에 나갔다.
345년, 유량庾亮(도간陶侃이 창설한 西府軍團:양쯔강 중류지역 방비군의 군단장)의 동생 安西將軍 유익庾翼이 죽자
환온은 그의 후임으로 안서장군 겸 형주자사荊州刺史에 기용되어 무창武昌을 수비했다.
강대한 군사력을 거머쥔 실력자로 성장한 환온은 347년에 손성孫盛 대도독의 지휘를 받아 四川의
성한국成漢國을 멸망시키는 개가를 올렸다.
►성한국成漢國(304-347)
성한국은 5胡16國의 하나로 저족氐族의 일파인 파종족巴賨族의 이웅李雄이 건국한 나라.
후촉後蜀이란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國號는 초기엔 '成'이었지만 후에 '漢'으로 변경해서 이를 합쳐 성한成漢이라 불렸다.
이때의 공훈으로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 승차陞差(임금이 벼슬을 높여줌)했다.
351년 음력 12月에는 북벌군을 독자적으로 결성, 무창에 집결만 시켰는데도 그 위세에 놀란
염위국冉魏國(350-352. 염위국은 5胡16國의 하나로 漢族인 염민冉閔이 건국한 나라. 國號는 魏 한 글자였지만
위魏를 국호로 내세운 나라가 많았기 때문에 건국자인 염민冉閔의 성을 붙여 다른 위魏나라와 구분한다)의
서주자사徐州刺史, 연주자사兗州刺史, 예주목豫州牧, 북형주자사北荊州刺史가 싸워보지도 않고
환온에게 차례차례 귀순했다. 또한 형설지공의 고사로 유명한 차윤車胤이 형주에 부임 중이었는데 학문도 높고
백성들 사이에 명성 높은 그를 측근으로 등용함으로써 대권을 위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파죽지세로 불어나는 환온의 힘에 위기감을 느낀 회계왕會稽王 사마도자司馬道子(간문제簡文帝 사마욱司馬昱의
7남이자 차기 황제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馬曜의 친동생. 황실에 위협이 되는 강력한 신하가 나올 때마다
황제 대신 견제를 하고 중심을 잡아주는 중요한 인물. 환온桓溫의 위협도 잘 방어했고 뒤이은 사안謝安의
잠재적 위협 역시 미연에 잘 방지해내 종묘사직을 지켜냈다.
그러나 환온과 사안의 사후死後 환온의 아들 환현에게 기습을 당해 살해된다)가 환온의 죽마고우인
은호殷浩를 등용, 북부군北府軍(동진東晉이 북벌을 위해 창설한 군대) 대장에 추천하여 환온의 대항마로 삼았다.
352년 음력9월,
은호는 동진의 숙원이었던 북벌을 환온 보다 먼저 상주上奏하여 허가를 받고 정식으로 군을 북쪽에 진군시켜
허창許昌까지 밀고 올라갔으나 부하가 적에 내통을 하여 후진後秦의 대장 요양姚襄에게 참패했다.
환온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패장 은호를 탄핵해 실각시켰다.
<군권의 장악>
환온은 후조後趙가 염민冉閔 때문에 혼란한 틈을 타 북벌을 결행했지만 354년 전진前秦의 정복엔 실패했다.
다만 356년에 4년 전 은호를 꺾었던 요양姚襄의 군세를 격파, 동진이 아직 서진西晋이던 시절
(서진西晋이 이민족의 침입으로 양쯔강 이남으로 쫓겨난 것이 동진東晉이다.
그래서 동진 사람은 누구나 원래 고향을 수복하고 싶어 했고 중국의 재통일을 원했다.)
구舊 도읍인 낙양洛陽 수복까진 성공했다.
환온은 동진의 원래 도읍인 낙양 천도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수비대만 남기는 것으로 결정 났다.
당시 낙양은 동진의 변경에서 너무 가까웠고 그 근방의 치안이나 안전이 전혀 담보돼 있지 않았기 때문인데
실상 환온 자신조차 천도가 받아들여질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다.
단지 자신의 공적을 조정에 확인시키고 입지를 더욱 다지고자 협상 카드의 하나로 꺼냈을 뿐이다라고 생각되고 있다.
전진前秦을 재침공 때 군사 전략가로써 명성을 떨쳤던 적장 왕맹王猛(전진前秦의 세조世祖는 왕맹王猛을 등용하여
화북을 통일할 수 있었다. 화북의 헤게모니를 두고 다퉜던 전연前燕과의 세력다툼에서 늘 불리했었는데
이를 한 번에 뒤엎고 화북을 통일했으며 전진前秦은 왕맹을 통해 최대 판도를 자랑할 수 있었다)의
영입에 실패하는 등 결국 철수했다.
동진의 숙원이었던 북벌을 일부나마 실현시킨 환온은 그 공으로 大司馬 겸 대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에
올라 364년에 이미 갖고 있던 형주자사에서 揚州刺史(동진의 수도 낭야琅邪 근처의 모든 병권을 갖게 됐다는 뜻)로
전임됐고 369년에는 연주자사 겸 서주자사를 더해 양쯔강 하류의 모든 군세를 수중에 넣었다.
여기에 자신의 정예 군세인 서부군단을 합쳐 동진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또한 친구이며 동진의 명문 귀족 유담劉淡이 가세했다.
동진은 화북 지방으로부터의 유민流民과 화중, 화남의 원주민이 섞여 건국된 나라였다.
그러나 동진으로 유입되는 유민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호구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제대로 파악이 안 돼 조세나 병역의 부과가 효과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환온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 현재 거주지를 중심으로 호구 조사를 실시하는데 이를 토단土斷이라 한다.
동진의 이후 약 100년 역사동안 토단은 약 아홉 차례 기록돼 있고
환온이 대사마 재직시 가장 거국적으로 실행됐다.
이를 바탕으로 동진의 국력은 엄청나게 확대될 수 있었다.
<만년晩年>
그 후 화북 지방에선 전연前燕이 세력을 확대하여 365년에 낙양을 뺏겼다.
369년에 환온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북벌을 감행하지만 전연前燕 모용慕容 황제에게 대패한다.
여기서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371년에 황제를 폐위하고 간문제簡文帝를 옹립하지만
새로 세운 황제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이듬해 병사했다.
간문제簡文帝의 임종을 맞아 환온은 자신이 황제가 되려고 계략을 꾸미지만 사안謝安, 왕담지가 이를 간파하고
환온에게 당시 황태자였던 효무제孝武帝의 섭정이 되어달라고 선수를 친다.
사안謝安이 환온에게 보낸 서간書簡에는 '대사마大司馬께서 제갈무후諸葛武侯가 되어 주십시오'라고 했다한다.
諸葛武侯란 유비劉備의 아들 유선劉禪의 섭정이었지만 결코 황위를 뺏지는 않았던 제갈량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온은 계획을 계속 진행시킨다.
환온은 조정에 명하길 자신에게 '구석九錫의 예禮'(대권을 노리는 신하가 황제 자리를 찬탈하기 직전에 황제에게
요구하는 9가지의 예. 조조曹操가 헌제獻帝에게 요구했었다)를 허하라고 요구했다.
사안謝安은 어떻게든 이를 지연시켜보려고 애를 썼고 환온은 373년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그 후 사안謝安이 상서복야尙書僕射(승상丞相을 비롯 3公이 어디까지나 최고 권력자들이었으나 3공의 힘이
약해질 때는 내조內朝에 속한 상서령尙書令이 권력을 대표했고 부副상서령에 해당하는 상서복야尙書僕射가
실질적인 권력을 휘둘렀다)에 올라 정권을 거머쥐었다.
사후 아들인 환현이 공제에게 양위 받아 환초를 건국하자 선무제宣武帝로 추존되었다.
본래 새 왕조를 개창한 건국군주는 3대조 이상을 추존해야 하는데 환현이 황고인 환온만을 추존하니
여러 신하가 예의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산기상시 서광이 칠묘를 세울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자 환현이 증조부 代 이상은 별 다른 名位가 없음을 이유로 배향하는 것을 거부했고 왕망이 구묘九廟나
배향한 전례를 비웃으며 환온을 태조太祖로 간주한 후 일묘一廟만을 설치하여 2일만 제사를 지냈다.
<환온桓溫이 관련된 고사성어>
죽마고우竹馬故友란 고사성어는 환온이 은호殷浩를 실각시키던 그 날
"은호와 나는 소꿉친구로 죽말(竹馬)을 타며 노는 사이었지만
항상 그 녀석은 내가 타다버린 죽말을 주워서 노는 처지였지"
(<진서晋書 은호전殷浩傳>)라고 말했던 데서 유래했다 한다.
지금 우리가 쓰는 죽마고우란 말은 사이가 좋은 어린 시절 친구란 뜻만 가지지만 원래는 어디까지나
골목대장과 부하 같은 상하관계의 의미를 포함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또한 죽마竹馬는 지금 우리가 흔히 아는 죽마가 아닌 단순히 잘린 대나무나 빗자루를
가랑이 사이에 끼고 뛰어다니던 것을 '죽마를 탄다'고 했다한다.
애(내장)를 끊는다란 뜻의 '단장斷腸'이란 말은 환온이 성한成漢을 정벌하러 촉蜀에 들어갈 때의 일에서 유래했다.
환온의 부하 하나가 새끼 원숭이를 잡아 애완용으로 데려가고 있었는데
어미 원숭이가 백리를 울며 멀찍이 따라오다가 제 풀에 지쳐 죽었길래 배를 갈라보니 내장이 전부 끊어져 있었다.
보고를 받은 환온이 크게 화를 내며 해당 병사를 파면하고 벌을 줬는데 이를 기록한
세설신어世說新語(송宋의 유의경劉義慶이 지은 책. 후한後漢부터 동진東晋에 이르는 귀족貴族ㆍ학자學者ㆍ문인文人
ㆍ승려僧侶들의 덕행德行ㆍ언어言語ㆍ문학文學 等에 관한 일화를 엮었다)의 '단장斷腸'이란 구절에서
현재의 '애를 끊는다'는 표현이 유래됐다고 한다(이와 유사한 얘기가 <수신기搜神記>에도 실려 있다)
<진서晋書 환온전桓温伝>에
'후세에 처음의 꽃 같은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악취가 만권의 책에 실어도 모자르네'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는데 후일 자치통감資治通鑑이나 18史略에 나온 '유방백세流芳百世 유취만년遺臭萬年
(아름다운 이름은 백년을 가고 더러운 오명汚名은 만년을 간다')라는 표현은
환온전桓温伝의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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