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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도연명陶淵明

도연명 당시 정치적 인물 사현謝玄

도연명 당시 정치적 인물 사현謝玄

 

사현謝玄(343?-388)

진군陳郡 양하陽夏 사람으로 자는 유도幼度, 환도幻度(현도玄度), 시호는 헌무獻武.

 

동진東晉 시기의 군사가로 사부謝裒의 손자이자 사혁謝奕의 아들이며 사안謝安의 조카이다.

경국經國의 지략을 갖추고 있었다. 일찍이 대사마大司馬 환온桓溫의 부장部將이었다.

 

전진前秦이 여러 차례 침략하자 이에 대항하고 379년, 병사들을 이끌고 전진군前秦軍의 공격을 막아

관군장군冠軍將軍이라고 불렀고 서주자사徐州刺史가 되었다.

 

<비수대전淝水大戰>

383년 중국 동진東晉의 사현謝玄이 전진前秦의 부견을 격파한 전투

 

5胡16國時代.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8년(383)

전진前秦왕 부견符堅이 천하통일을 목표로 100만 대군으로 남하하여 진晋나라에 쳐들어 올 때에

사안謝安의 명을 받아 숙부叔父인 사석謝石과 더불어 8만 명의 군사로 1백만 대군을 비수淝水에서 격파하였다.

 

비수는 지금의 안후이성[安徽省]에 있는 화이허강[淮河]의 지류이다.

전진의 왕위를 계승한 저족[면족免族]인 부견은 한인漢人의 명신 왕맹王猛을 등용하여 치적을 쌓았고

당시 화북에 난립한 전연前燕·전량前凉·대代 등 여러 나라를 병합하여 화북을 통일하였다.

 

그 여세를 몰아 강남을 통일하려던 부견은 그에 반대하는 왕맹이 죽자

90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에 경구京口(江蘇省 鎭江市)에 포진하여 용맹을 떨치던

동진의 사현이 이끈 8만의 군사에게 비수 부근에서 패하였다.

 

부견 밑에서 통일을 유지하던 화북華北은 부견이 패하자 각 민족이 이반하여

제각기 나라를 세우는 혼란에 빠졌으며 결국 남북 분립의 형세가 굳혀졌다.

 

 

384년에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연주兗州와 청주靑州, 사주司州, 예주豫州 등을 수복하고

강락현공康樂縣公에 봉해졌다.

 

산기상시좌장군散騎常侍左將軍 회계내사會稽內史의 벼슬에 이르렀다.

후에 거기장군개부의동삼사車騎將軍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당시 사마도자司馬道子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사씨 집안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꺼려하여

그에게 회음淮陰을 지키라고 보냈고 나중에 회계내사會稽內史로 옮겼다.

재직 중에 죽었다.

 

사안에게 말하기를 ‘부형이 아름다운 자제 두기를 원하는 것은

비여지란옥수譬如芝蘭玉樹 욕사기생어정계이欲使其生於庭堦耳

비유하자면 지란과 옥수가 내 뜰에 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라 하여 훗날 한 집안에서 인재가 많이 배출됨을 비유하여 ‘지란옥수생정계芝蘭玉樹生庭堦’라 하게 되었다.

/<진서晉書 사안전謝安傳>

 

빈종임임무가선賓從林林無可選 자리에 가득 찬 인재들 가릴 수 없을 만큼 빼어나니

진교도리간난손盡敎桃李間蘭蓀 복숭아와 오얏 사이에 난초 지초로구나.

/윤혁尹奕 <하이통헌제현학사연賀李通憲齊賢學士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