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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도연명陶淵明

牧隱 李穡의 漢詩에 나타난 陶淵明의 隱逸觀

목은牧隱 이색李穡漢詩에 나타난 陶淵明의 은일관隱逸觀

/김주순金周淳 대구가톨릭대학교

 

<국문초록>

도연명은 彭澤令이라는 낮은 小官吏로서 당시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부정부패가 만연된 사회에서

녹을 받고 사는 것은 선비의 처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성품과 어긋난 벼슬길을 떠나

 

천하유도즉견天下有道則見 무도즉은無道則隱

천하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물러나 숨는다./<論語․泰伯篇>

 

달즉겸선천하達則兼善天下 궁즉독선기신窮則獨善其身

달통하면 나서서 천하를 구제하고 막히면 할 수 없이 물러나 자신을 착하게 한다./<孟子盡․心上篇>

라는 儒家의 가르침인 隱逸觀에 의해 전원으로 歸去來하여 詩酒로써 자연을 벗 삼아 몸소 논밭을 경작하고

전임 지방의 小官吏로서 주위 농민들에게 농사를 권장하는 勸農詩를 지으며 田園閑居 하였다.

 

牧隱 李穡이 살았던 시대는 중국에서는 元나라를 이어 明나라가 들어서고

우리나라에서는 高麗와 朝鮮의 易姓革命이 이루어진 역사적 전환기였다.

 

이 시기에 李穡은 정치적․사상적․문학적으로 고려 말기를 대표하는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인물이었으며 이 땅에

性理學의 뿌리를 내린 고려 儒學의 으뜸으로서 麗末․鮮初 유학사상의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李成桂가 위화도 回軍 후 그는 門下侍中이 되어

생生 역아소욕야亦我所欲也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義 역아소욕야亦我所欲也 의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자불가득겸二者不可得兼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 진댄

사생이취의자야舍生而取義者也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孟子 告子>上篇라는 儒家의 가르침인 出處觀에

의해 禑王과 昌王을 등극시키는 데 큰 공로를 하였고 明의 도움을 받아 이성계를 퇴출시켜

고려의 왕권을 수호하고자 하였지만 오히려 역부족으로 이성계의 세력에 의해 배척을 받아 유배생활을 하였다.

 

李穡이 고려 왕실의 충성스런 신하임을 표명하고 이성계 일당과 손을 잡지 않은 것은 도연명이 東晉의

충신 집안 子孫으로서 劉宋이 들어서자 晉代의 忠節을 나타내기 위해 그가 써 오던 ‘晉代年號’를

‘甲子題詩’하고 그의 마지막 벼슬인 彭澤令을 사직한 후에는 劉宋의 조정에서 벼슬을 주어 불러도 다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田園歸居한 도연명의 忠義와 節操에 비길 수 있다.

 

兩人은 일천년이라는 공시적 시대 차이가 있고 서로 다른 국가의 정치 ․사회 현실의 통시적 정황에서

도연명은 자신의 신분에 적합한 儒家의 가르침인 隱逸觀으로 歸去來하였고

목은 이색은 門下侍中의 높은 벼슬의 위치에서 고려 왕실을 보호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로써

도연명의 인품과 생활을 흠모하며 儒家의 가르침에 의한 出處觀을 실행하였다.

 

결국 兩人의 隱逸觀과 出處觀은 道家思想이나 佛家思想에 의해 성립된 것이 아니라

儒家思想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서 兩人의 同質性을 발견할 수 있다.

 

1. 序言

 

이색李穡(1328~1396)은 字가 영숙穎叔이고 號는 목은牧隱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다.

그는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아들로 태어나서 14세에 進士¹가 되고 父親 李穀이 元나라에서

중단사전부中端司典簿로 재직함에 따라 朝官의 자제로서 國子監 生員이 되었다.

 

►1) 高麗史․列傳 第28 李穡 연십사年十四 중성균시이유성中成均試已有聲

 

그는 중국에 체류하는 3년 동안 학교에서 淵源있는 학문을 받아들여 깊이 심취하였고

性理學에 관한 글에 더욱 조예가 깊었다.²

 

►2) 권근權近 목은행장牧隱行狀

以朝官子 補國子監生員 在學三年 得受中國淵源之學 切磨涵漬 益大以進 尤邃於性理之書

 

그 뒤 귀국하여 1353년 (恭愍王 2) 鄕試에 1등으로 합격 書狀官으로서 다시 元나라로 들어가

1354년 회시會試․전시殿試에 급제하여 元의 翰林院에 등용되었다.

 

1356년 귀국하여서는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등을 역임하다가

1373년에 韓山府院君으로 봉해지고 이듬해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375년 禑王의 청으로 다시 관직에 나와 1377년 禑王의 師傅가 되었다.

1389년(恭讓王 1)에는 李成桂의 위화도 回軍 후 昌王의 등극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崔塋이 물러난 자리인 門下侍中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明의 힘을 빌어 李成桂의 세력을 견제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1392년 7월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10월에 석방되었다.

 

그 후 隱逸하여 杜門不出하던 중에 1395년에 李成桂의 出仕 종용이 있었다.

그러나 이색은 끝내 “노부무좌처老夫無坐處 이 늙은 사람은 앉을 자리가 없구료”³라는 말로 거절하고

1396년에 驪江에서 피서 중에 69세의 일기로 배 안에서 죽었다.

 

►3) 高麗史 列傳 第28 이색李穡 권근權近 목은행상牧隱行狀

 

그의 저서로는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가 전한다.

本稿는 牧隱 李穡의 漢詩에 나타난 도연명의 隱逸觀을 探討함에 있어 도연명의 隱逸觀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이색이 도연명의 인품과 생활에 대하여 어떻게 동경하였는지를 알아보고 당시 李穡의 出處觀은 도연명의 歸去來

의식과 외면상에서 달리 나타났지만 兩人의 隱逸觀과 出處觀은 同質性이 있음을 비교문학적인 관점⁴에서

고찰하고자 한다.

 

►4) M.F. 기야르 著, 全圭泰 譯. 比較文學 序, 서울: 正音社, 1979, 8쪽.

“비교문학이란 비교가 아니다. 이것은 부당하게 이름 지어진 과학적 방법의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국제간의 문학적 관계의 역사’라고 정의한다면 그 편이 훨씬 정확할 것이다.

 

2. 隱逸의 槪念

 

‘隱’은 ‘숨는다’ ‘숨기다’라는 뜻으로 ‘顯’의 반대어이다.

원래 ‘隱’은 道家의 관념에서 나온 것이지만 儒家에서는 ‘隱’의 관념을

천하유도즉견天下有道則見 무도즉은無道則隱 “천하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물러나 숨는다.”⁵

 

►5) <論語 泰伯篇>

 

달즉겸선천하達則兼善天下 “달통하면 나서서 천하를 구제하고

궁즉독선기신窮則獨善其身 막히면 할 수 없이 물러나 자신을 착하게 한다.”⁶라는 의미로써 활용하였다.

 

►6) <孟子 盡心上篇>

 

‘逸’은 원래 토끼(兎)가 ‘달아난다.’로 쓰였으나

‘잃는다’ ‘즐긴다’ ‘편안하다’ ‘놓아주다’ ‘뛰어나다’ ‘빠르다’ 등의 뜻이 있고 

<論語․微子篇>에 “은일자로는 백이伯夷 숙제叔齊 우중虞仲 이일夷逸 주장朱張 유하혜柳下惠 소연少連이다.”

라는 글귀가 있어 ‘숨는다’라는 뜻도 있다.

 

이렇게 ‘隱’과 ‘逸’은 처음에는 각각 다른 뜻으로 사용되다가 ‘隱逸’로 함께 쓰인 例⁷는 漢 以後에 나타나

後漢書의 <태동전台佟傳>에서

“수거은일종불견遂去隱逸終不見 마침내 가서 은일하더니 끝내는 나타나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어

‘隱’‘과 ‘逸’이 함께 쓰여 ‘숨는다’의 뜻을 더욱 분명하게 하였다.

 

►7) <漢書 何武傳>에 “행유무이行有茂異 민유은일民有隱逸”라는 기록이 보이고

<후한서後漢書 잠팽전岑彭傳>에

증손기曾孫杞 천위군태수遷魏郡太守 초빙은일招聘隱逸 여참정사與參政事 무위이화無爲而化”라는 기록이 있다.

 

正史에는 後漢書에 ‘일민전逸民傳’이라는 말이 보이다가 진서晉書 송서宋書 수서隋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구당서舊唐書 당서唐書 송사宋史 금사金史 원사元史 명사明史에서는 모두 ‘은일전隱逸傳’이란 말로 바뀌었다.

 

隱逸을 주제로 삼은 최초의 시는 詩經의 <위풍衛風 고반편考槃篇>과 <진풍陣風 형문편衡門篇>에서 볼 수 있는데

이 두 작품은 賢者의 은거생활을 묘사하였다.

 

<楚辭>에는 <초은사招隱士>라는 작품이 있는데

이 작품의 내용은 隱士에게 은거생활을 그만 두고 속세로 나올 것을 권유하는 의미로 쓰였다.

 

이들 詩經과 楚辭에 나오는 隱逸詩는 은거생활에 대한 단순한 묘사이거나 산속에서의 은거생활에 대한

어려움을 읊은 것으로써 진정한 隱逸詩로서의 가치 있는 작품은 아니다.

 

그러다가 東漢 末에 와서 장형張衡(78〜139)이 <귀전부歸田賦>를 지어 은일의 의미를 현실화시켰다.

장형張衡의 <귀전부歸田賦>는 그가 벼슬하여 뜻을 얻지 못하자 농촌으로 돌아가 歸田하고자 하는 뜻을 읊었다.

 

그리고 그의 隱居地를 배경으로 산수자연의 아름다운 정경을 묘사하여

은거생활의 정취를 드높이는데 중시하여 묘사하였다.

 

그 후에 山水自然을 읊은 사령운謝靈運(385〜433)의 山水詩가 출현하였지만

謝靈運의 山水詩는 전원의 情景을 감상하는데 그쳤을 뿐이다.

 

전원의 활발한 정취를 생동감 있게 眞情으로 묘사하여 생명의 힘이 솟구치는 田園美를 읊은 시인은 陶淵明이다.

도연명의 田園詩는 다른 隱士들의 전원시와는 달리 전원에서 그가 몸소 체험한 農耕생활을 바탕으로

‘참성정․참생명’의 시를 읊었기에 우리로 하여금 깊은 감동을 준다.

 

이에 齊․梁代의 詩文 비평가인 종영鍾嶸(?〜552)은 도연명을 “고금 은일시인의 으뜸”⁸이라고 칭송하였다.   

隱逸人과 隱逸觀은 왜 발생하였는지의 원인을 살펴보면 그 시대의 정치․사회의 혼란상과 깊은 관계가 있다.

 

►8)종영鍾嶸 시품詩品 “고금은일시인지종야古今隱逸詩人之宗也”

 

중국에서 隱逸人으로 보는 최초의 인물로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의 故事를 들 수 있는데 堯임금이 巢父에게

왕위를 부여한다는 말을 듣자 巢父는 듣지 못할 말을 들었다 하여 냇물에 가서 귀를 씻었다.

 

이때 소에게 물을 먹이러 온 동생 許由는 듣지 못할 소리를 들어 귀를 씻은 더러운 냇물에서는 자기의 소에게

물을 먹일 수 없다고 하여 소를 끌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한 伯夷․叔齊의 故事로써 周武王이 君臣關係를 저버리고 殷을 치러 가는 도중에 신하로써 殷을 치는 것은

君臣의 도리가 아니라고 伯夷叔齊가 周武王의 말고삐를 잡고 간곡히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자 周나라에서

나는 곡식은 먹지 않겠다며 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고 살다가 굶어죽은 이야기가 전한다.

 

그리고 秦나라 말년에 戰亂을 피하여 陝西省 商山에서 은거한 商山四晧,

魏晉時代의 정치․사회 혼란기에 竹林으로 들어가 老莊思想에 의한 음주시를 읊으며 은일한 竹林七賢,

晉·宋年間에 儒家 본연의 깨끗한 자태로 田園으로 歸去來하여 자연을 벗 삼아 詩酒로써 田園閑居를 읊으며

은일한 陶淵明 등은 중국의 대표적인 隱逸人들로 일컫는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시대에 敬順王이 千年社稷을 고려 王建에게 바치자 금강산에 들어가 베옷을 입고

칡을 캐먹으며 은일한 麻衣太子가 있고, 高麗時代에 武臣政權이 들어서자 당시 문인들로서 竹林에 들어가

중국의 竹林七賢처럼 詩酒로 생활한 李仁老를 비롯한 竹林高會, 그리고 고려 말에 와서 자신의 호를 ‘隱’으로

삼아 은일을 실천하고자 했던 도은陶隱 포은圃隱 목은牧隱 야은野隱이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정치적 격동시대에 살면서 出仕와 隱退를 20여 회 반복하며 마침내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한 퇴계退溪 이황李滉, 높은 학문을 가지고 있으면서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지리산에 은거하여

후진 교육에만 힘쓴 남명南冥 조식曹植은 조선을 대표하는 은일자라고 말할 수 있다.

 

3. 陶淵明의 隱逸觀과 牧隱의 出處觀

 

3.1 陶淵明의 隱逸觀

陶淵明의 傳記는 <宋書·隱逸傳><晉書·隱逸傳><南史·隱逸傳><蓮社·高賢傳> 등에서 보이고

특히 도연명이 살아 있을 때 절친한 친구였던 안연지顔延之(384~456)의 <도징사뢰陶徵士誄>와

梁의 昭明太子 蕭統(501~531)이 지은 <陶淵明傳>의 序文이 중요한 기록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도연명 자신이 그의 자서전처럼 쓴 <五柳先生傳>을 소홀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陶淵明(365~427)은 晉宋年間에 활동했던 시인으로 유송劉宋이 들어서자 이름을 잠潛이라 고쳤고

字는 원량元亮이며 號는 五柳先生 또는 靖節先生이라고 한다.

 

그의 曾祖父는 晉의 大司馬를 역임한 도간陶侃이고 外祖父는 당시에 風流客으로서 이름이 높았던 맹가孟嘉였다.

도연명은 江西省 九江市 潯陽縣 柴桑이라는 마을에서 출생하여 가숙家塾으로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그의 조국에 대한 충절과 도연히 술에 취해 속세를 해탈하며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니, 유연히 남산이 눈에 들어오네.⁹

라는 시구를 읊는 은일의 풍류 자태는 바로 名宰相인 증조부와 묵객墨客이었던 외조부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9) 도잠陶潛 찬撰 도주陶澍 주注 <정절선생집靖節先生集>卷3 <음주飮酒>其5

 

도연명의 시를 보면

소무적속운少無適俗韻 성본애구산性本愛邱山 어려서부터 세속에 어울리지 못하고 성품이 본시 산을 사랑했거늘¹⁰

소년한인사少年罕人事 유호재육경游好在六經 어려서부터 속세의 일을 멀리하고, 오직 육경을 배웠다.¹¹

약령기사외弱齡寄事外 위회재금서委懷在琴書 어려서부터 저속한 일을 도외시 하고 뜻을 책과 거문고에 두고

피갈흔자득被褐欣自得 누공상안여屢空常晏如 헤어진 옷을 걸치고도 자득했고, 식량이 떨어져도 태연했노라.¹²

 

병뢰환시무秉耒歡時務 쟁기를 들고 철따라 즐겁게 농사를 짓고 미소 지으며

해안권농인解顔勸農人 농군들에게 격려를 한다.

(····)

일입상여귀日入相與歸 호장노근린壺漿勞近鄰 해가 지면 함께 돌아와 술을 마시며 이웃과 피로를 푼다.

장음엄시문長吟掩柴門 료위롱무민聊爲隴畝民 사립문 닫고 시를 읊으며 농민생활 즐기리.¹³

라고 읊었듯이 그의 천성은 자연을 좋아하고 벼슬길과는 맞지 않은 성품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어린 시절에 읊은 다른 시를 보면

억아소장시憶我少壯時 무락자흔예無樂自欣豫 돌이켜 보건대 어려서 나는 속세의 낙이 없어도 혼자 흥겨웠고,

맹지일사해猛志逸四海 건핵사원저騫翮思遠翥 세찬 뜻을 사해에 떨치어 내고, 날개를 펴고 멀리 날고자 했다.¹⁴

 

►10) 도잠陶潛 찬撰 도주陶澍 주注 <정절선생집靖節先生集>卷2 <歸園田居>其1

►11) 도잠陶潛 찬撰 도주陶澍 주注 <정절선생집靖節先生集>卷3 <飮酒>其16

►12) 도잠陶潛 찬撰 도주陶澍 주注 <정절선생집靖節先生集>卷3 <始作鎭軍參軍經曲阿作>

►13) 도잠陶潛 찬撰 도주陶澍 주注 <정절선생집靖節先生集>卷3 <癸卯歲始春懷古田舍>其2

►14) 도잠陶潛 찬撰 도주陶澍 주注 <정절선생집靖節先生集>卷4 <雜詩>其5

 

소시장차려少時壯且厲 무검독행유撫劍獨行遊 젊어서 세차고 억센노라, 칼을 차고 멀리 갔노라.

수언행유근誰言行遊近 장액지유주張掖至幽州 누가 가까운 곳을 다녔다 하는가? 장액에서 유주까지 돌았노라.

기식수양미飢食首陽薇 굶주리면 백이와 숙제처럼 수양산에 가서 고사리 따서 먹고

갈음역수류渴飮易水流 목마르면 형가처럼 이수의 강물을 마셨노라.¹⁵

라고 읊으며 장차 큰 뜻을 품고 국가를 위해 학문으로써 큰일을 해 보겠다는 의지를 보였었다.

 

►15) 도잠陶潛 찬撰 도주陶澍 주注 <정절선생집靖節先生集>卷34 <擬古>其8

 

그러나 이민족의 침입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고 기근과 굶주림으로 인해 농민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그의 집안은 父代에 이르러 家門이 몰락됨으로 인해 그가 몸소 농사를 지으며 가족의 생계를 돌보아야 함에 이르자

그의 청운의 꿈은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그는 먼저 집안의 가난을 해결하고자 29세가 되던 해에 叔父의 권유를 받아들여 江州의 祭酒 벼슬을

시작으로 13년 동안 다섯 차례의 出仕와 隱退를 반복¹⁶하며 그의 본성에 맞지 않은 벼슬생활을 하느라고

방황과 모순의 갈등¹⁷을 겪었다.

 

►16) 도연명의 첫 번째 出仕는 29세 때 강주제주江州祭酒 두 번째는 35세때 유뢰지劉牢之의 참군參軍,

세 번째 출사는 37세때 환현桓玄의 幕下가 되었고 네 번째는 40세때 유경선劉敬宣의 參軍,

다섯 번째는 41세때 팽택령彭澤令이 되었다.

 

►17)

도잠陶潛 찬撰 도주陶澍 주注 <정절선생집靖節先生集>卷3 <辛丑歲七月赴假還江陵夜行塗中>

商歌非吾事 依依在耦耕 投冠旋舊墟 不爲好爵縈 養眞衡茅下 庶以善自名

 

도잠陶潛 찬撰 도주陶澍 주注 <정절선생집靖節先生集>卷2 <歸園田居>其1

羇鳥然舊林 池魚思故淵 開荒南野際 守拙歸園田

 

도잠陶潛 찬撰 도주陶澍 주注 <정절선생집靖節先生集>卷3 <始作鎭軍參軍經曲阿作>

望雲慙高鳥 臨水愧游魚 眞想初在襟 誰謂形迹拘 聊且憑化遷 終返班生廬

 

도잠陶潛 찬撰 도주陶澍 주注 <정절선생집靖節先生集>卷3 <乙已歲三月爲建威軍使都經錢溪>

伊余何爲者 勉勵從玆役 一形似有制 素襟不可易 園田日夢想 安得久離析 終懷在歸舟 諒哉宜霜柏

 

도잠陶潛 찬撰 도주陶澍 주注 <정절선생집靖節先生集>卷5 <歸去來辭幷序>

及少日 眷然有歸歟之情 何則 質性自然 非矯勵所得 飢凍雖切 違己交病

 

도연명은 막대한 힘과 軍閥을 거느린 유유劉裕가 군사를 일으켜 수도 건강建康을 점령하고 정권을 장악한 후

東晉의 哀帝를 弑害하고 마지막 황제 恭帝를 유폐시켜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나라를 빼앗아 劉宋을 세우자

晋代 충신 집안의 자손인 그는 질서와 명분이 사라진 부패한 정치 풍토에서 관직을 수행할 수 없다고 단정하여

晉代에 충절을 표하는 뜻으로 그의 詩題로 써오던 ‘晋代年號’를 ‘甲子題詩’로 바꾸고¹⁸ 마지막 벼슬인 彭澤令을

사직한 후 전원으로 歸去來하였다.

 

►18)<宋書·隱逸傳>

자이증조진세재보自以曾祖晉世宰輔 치복굴신후대恥复屈身後代 자고조왕업점강自高祖王業漸降 불복긍사不复肯仕

소저문장所著文章 개제기년월皆題其年月 의희이전義熙以前 즉서진씨년호則書晉氏年號

자영초이래유운갑자이이自永初以來唯云甲子而已

 

그런 후 그는 조정에서 불러도 다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¹⁹ 자연을 벗 삼아 農事와 詩酒로써 田園閑居하다가

63세²⁰의 일기로 그의 여생을 마쳤다.

 

►19)도연명陶淵明 저著 장기근張基槿 역譯 新譯 陶淵明(명문당 2002), 30쪽

도연명은 55세 때 조정으로부터 저작랑著作郞이란 벼슬에 초청된 일이 있었고

62세 때 강주자사江州刺史 단도제檀道濟로 부터 출사를 요청 받은 일이 있으나

그는 깨끗이 거절하고 보내온 예물을 말끔히 돌려주었다. 다시는 벼슬에 흔들리지 않고 ‘固窮節’을 잘 지켰다.”

 

►20) 도연명의 나이에 대하여는 안연지顔延之의 <陶徵士誄><宋書·隱逸傳> 소통蕭統의 <陶淵明傳>

<晉書·隱逸傳>을 보면 모두 63세로 기록되어 있고

<南史·隱逸傳>에도 도연명은 원가元嘉 4年(427)에 죽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를 근거하면 도연명은 진晉 애제哀帝 흥령興寧 3年(365)에 태어났다.

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에도 도연명의 출생연대를 원가元嘉 4年이라고 특별히 써서

‘진징사도잠졸晉徵士陶潛卒’이라 하여 63세로 확정했다.

그런데도 송대宋代 장연張縯은 그의 <도정절년보변정陶靖節年譜辨正>에서 76세라 했고

청대淸代 오여륜吳汝綸은 그의 <고시초주古詩鈔注>에서 51세라고 했으며

양계초梁啓超는 그의 <도연명년보陶淵明年譜>에서 56세, 고직古直은 그의 <도정절년보陶靖節年譜>에서 52세,

록흠립逯欽立은 그의 <도연명년보고陶淵明年譜槀>에서 52세라고 했으나

나중에 그의 <록흠립교주逯欽立校注·도연명집부록陶淵明集附錄>에서 63세로 고쳐 정하였다.

또 곽은전郭銀田은 그의 <전원시인여도잠田園詩人與陶潛>에서 61세라고 언급하였다.

이처럼 도연명의 나이에 대하여 학자들 간의 異說이 紛紜하나 本稿에서는 舊說인 63세에 따랐다.

 

그는 다른 중국의 유명 시인들에 비해 126수²¹라는 많지 않은 시를 남겼지만 篇篇마다 不朽의 名作으로 중국

田園詩의 귀감龜鑑이 되어 후인으로부터 “은일 시인의 으뜸”²²이요, 田園詩의 개척자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한편 도연명은 다섯 차례의 出仕²³ 길에서 방황하였으나 그가 隱逸觀을 결정적으로 실행에 옮긴 때는

그의 마지막 벼슬인 彭澤令에 부임해서였다.

 

►21) 방조신方祖燊 도잠시전주교증논평陶潛詩箋註校證論評(臺北: 蘭臺書局, 1977) 21쪽.

도잠적시구설유일백오십수좌우陶潛的詩舊說有一百五十首左右

개후대속본매장도시수권적사언시일수분작수수蓋後代俗本每將陶詩首卷的四言詩一首分作數首

여장명자시분작십수如將命子詩分作十首 귀조시분작사수歸鳥詩分作四首

저종분법시불대타당적這種分法是不大妥當的

현재의거정복보도시전주소수적現在依據丁福保陶詩箋注所收的 계산타적편목計算它的篇目

제거기수시타인적작품섬입지외除去幾首是他人的作品摻入之外 환유일백이십육수還有一百二十六首

기중제구수시사언시외其中除九首是四言詩外 기여균위오언其餘均爲五言

 

►22) 앞의 주8)

►23) 앞의 주16)

 

<宋書·隱逸傳>을 보면

군견독우지郡遣督郵至 군에서 감찰관을 현에 파견하자

현리백응속대견지縣吏白應束帶見之 현리가 아뢰기를 마땅히 의관을 정제하고 뵈어야 한다 하니

 

잠탄왈潛歎曰 도잠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아불능위오두미我不能爲五斗米 내 어찌 다섯 말의 쌀 때문에

절요향향리소인折腰向鄕里小人 촌뜨기 아이놈에게 허리를 굽힐 수 있겠느냐!라 말하고는

 

즉일해인수거직卽日解印綬去職 부귀거래賦歸去來

그 날로 관인과 끈을 풀어 놓고는 관직을 떠났으며 <귀거래>라는 글을 지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도연명은 당시 彭澤令의 지방 小官吏로서는 상위층의 부정부패를 척결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부도덕한 사회에서 녹을 받고 벼슬 생활을 하는 것은

선비로서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벼슬인 彭澤令을 自意에 의해 사직하고 전원으로 돌아가 몸소 논밭을 경작하며

田園생활의 즐거움을 시로써 읊었다.

 

특히 그가 지은<歸去來辭>는 그의 위대한 작품으로써 구양수歐陽修가

진무문장晉無文章 유도연명귀거래혜사일편이이惟陶淵明歸去來兮辭一篇而已

진에는 문장이 없고 오직 도연명의 <귀거래사> 한 편이 있을 뿐이다.²⁴라고 극찬極讚하였다.

 

►24) 臺灣中華書局 編 <이공환전주도연명집인李公煥箋註陶淵明集引 도연명시문휘평陶淵明詩文彙評

(臺北: 臺灣中華書局 1974) 327쪽.

 

이 작품은 不正과 腐敗, 爭鬪와 非理로 얼룩진 晉·宋 年間에 도연명 자신의 田園생활에 대한 情趣와

자기 본연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널리 人口에 회자膾炙되어 왔다.

 

도연명은 魏晉時代에 風靡하였던 淸談이나 佛家思想 등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에 깊이 물들지 않고

이들 사상을 유가儒家로 정화淨化하여

천하유도즉견天下有道則見 무도즉은無道則隱 천하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물러나 숨는다.²⁵와

달즉겸선천하達則兼善天下 달통하면 나서서 천하를 구제하고

궁즉독선기신窮則獨善其身 막히면 할 수 없이 물러나 자신을 착하게 한다.²⁶라는 儒家의 가르침인 隱逸觀에 따라

歸去來하여 玄學과 老莊思想이 만연한 魏晉時代에서 儒家思想에 의해 삶을 살아간 대표적인 인물²⁷이다

 

►25) <論語·泰伯>篇

►26) <孟子·盡心> 上篇

►27) ① 도연명은 그의 <雜詩>其1 시에서

성년부중래盛年不重來 젊은 시절 거듭 오지 않으며

일일난재신一日難再晨 하루 중에 새벽이 두 번 있기는 어렵다네.

급시당면려及時當勉勵 때를 놓치지 말고 부지런히 힘써야 할지니

세월부대인歲月不待人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라 읊었고 그의 <神釋> 시에서

 

팽조애영년彭祖愛永年 욕류부득주欲留不得住 불로장생을 자랑하던 팽조도, 결국 죽어 살아남지 못했노라.

와 그의 <連雨獨飮>시에서

세간유송교世間有松喬 적송자와 왕자교가 신선되었다고 전하나

어금정하문於今定何聞 지금 그들의 소식 듣지 못하노라.

라고 읊은 시구들을 음미해보면 그는 道家의 不老長生을 믿지 않았고 神仙世界를 부정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의 ㅡ歸去來辭>에서는

제향불가기帝鄕不可期 죽은 후에 천제가 사는 천국에 가서 살 것이라 기대도 하지 않는다.

라고 하여 佛家에서 말하는 극락세계를 부정하였고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도연명을

백련결사白蓮結社를 하기 위해 술을 대접하겠다며 東林寺로 초청하였을 때 술을 내놓지 않은데다가

이때 법당 누각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는 도연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갔다는 故事가 있음을 보면

도연명은 佛家에도 깊이 심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도연명은 그가 생존했을 당시 魏晉時代에 風靡하였던 道家思想과 佛家思想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들 사상을

儒家思想으로써 淨化하여 儒家의 가르침에 따라 참삶을 살아간 魏晉時代의 대표적 儒家思想家라고 말할 수 있다.

 

②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철학으로서 윤리나 질서의식에 속한다.

이러한 윤리와 질서의식은 儒家思想과 道家思想 및 佛家思想 등에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사회에서 제정한 법률과 공공 규범 및 규칙에도 있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서 와서,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의 문제는

사회윤리와 질서를 초월한 철학으로서 종교의 범주에 속한다.

 

도연명은 당시 혼탁한 정치사회에서 현실 적응이 어려움을 느끼고 自意에 의해 전원으로 귀거래하여

스스로 논밭을 경작하며 詩酒로써 자연을 벗 삼아 신선이나 귀신 및 사후의 세계를 완전 부정하고

儒家의 은일 방식에 따라 自然歸依하였다.

 

③ 도연명의 歸去來 이념을 따른 우리나라의 학자로서는 고려시대에 본고에서 논술하는 牧隱 李穡을 비롯하여

陶隱·圃隱·野隱이 있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도연명처럼 성품이 자연을 좋아하여 出仕와 隱退를 20여 차례

반복하다가 마침내는 自意에 의해 벼슬을 사직하고 歸去來하여 陶山書院에 은거한 후 저술과 후진 양성에

힘쓴 退溪 李滉을 들 수 있다.

 

그리고 首陽大君이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여 왕위에 오르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금오산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金鰲新話 등을 저술하고 만년에는 鍊丹術을 익혀 仙家에도 접근하였지만

죽을 때는 佛家의 신분이면서 儒家精神에 의해 火葬을 하지 않고 묻혔다가 3년 후에야 佛家의 의식에 따라

화장을 한 梅月堂 金時習, 높은 학문의 자질이 있으면서 평생 지리산에 은거하여 벼슬을 멀리하고 후진

교육에만 힘쓴 南冥 曹植을 들 수 있다.

 

④ ‘自然愛好’나 ‘隱逸’은 일반적으로 道家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되지만 道家의 專用語라고 말할 수 없다. 

<論語·先進篇>에

모춘자暮春者 춘복기성春服旣成 늦봄에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관자오육인冠者五六人 동자육칠인童子六七人 관을 쓴 어른 5~6명과 童子 6〜7명과 함께

욕호기浴乎沂 풍호무우風乎舞雩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舞雩에서 바람 쐬고

영이귀詠而歸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

라는 글이 있는 것을 보아도 ‘自然愛好’는 儒家에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 보면 隱逸과 自然愛는 현실적이며 公理的인 儒家思想보다는

超世間的 비현실적인 道家思想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조선왕조에서 他意에 의해 전원으로 폄적貶謫당한 후 <思美人曲>을 짓고 궁중에 다시 입궐하기를

갈망하다가 결국에는 좌의정의 높은 벼슬에 오른 松江 鄭澈이 있으며

근대에 와서는 3.1독립선언서에 儒家 대표들이 참여하여 서명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파리 藏書 사건’을 주도한 心山 金昌淑, 일제 강점기에 끝까지 대한을 조국으로 삼아 변절하지 않았던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같은 분들은 儒家의 가르침인 隱逸觀과 出處觀을 그들의 형편에 맞게 활용하여

실천한 대표적인 儒家思想家들로 꼽을 수 있다.

 

3.2 牧隱의 出處觀

李穡은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는 격동기를 당하여 忠義와 節操를 지키기 위해 隱逸한 도연명의 歸去來

이념에서 감명 받은 바가 크고 도연명의 인품과 생활을 평소에 동경하였다.

 

그리고는 그의 自號를 “牧에 隱한다”라고 하여 ‘牧隱’이라 하였다.

한편 그가 자신의 호를 牧隱이라고 정한 동기에 대하여 적은 기록으로 내가 말하기를

여왈予曰 오문은자부독은기신吾聞隱者不獨隱其身 내가 듣기로 은자는 자신의 몸을 감출뿐만 아니라

우필명지은又必名之隱 부독은기명不獨隱其名 또 반드시 이름을 감추며, 이름을 감출뿐만 아니라

우필심지은又必心之隱 차무타此無他 또 반드시 마음을 감춘다 하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외인지이불사인지야畏人知而不使人知也 남이 아는 것을 두려워하여 남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²⁸

라고 술회하였다.

 

►28) 이색李穡 <목은시고牧隱詩藁>卷1 <南谷記>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의 호를 牧隱이라고 지은 것조차 마음에 개운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벼슬에 있을 때 ‘隱’자를 그의 호로 책정한 것은 그가 벼슬을 버리고 은일을 꼭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벼슬 중에도 은일한 마음으로 정치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隱’를 사용하였다.

 

그가 말한 隱의 의미는 鄕村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현실과 완전히 등진 도피적 염세적 태도를 가지지 않고

현실에 적응하며 은일의 정치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조정이나 鄕村에 있을 때를 막론하고 언제나 山林에 隱居하는 것 같이 생각하였으며 집 주변에는

작은 길을 만들어 소나무와 국화를 심어 忠節을 생각하였고 내면에는 언제나 은일의 정취를 가지고자 하였다.

 

그리므로 그는 반드시 전원으로 歸去來하는 것만이 隱逸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벼슬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不義를 개혁하며 隱逸觀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도연명이 自意에 의해 歸去來하여

은일한 것과는 다른 일면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환관宦官의 자리에 있던 他意에 의해 은일의 자리에 있던 그의 出處觀은 儒家의 가르침인

생生 역아소욕야亦我所欲也 의義 역아소욕야亦我所欲也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자불가득겸二者不可得兼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 진댄

사생이취의자야舍生而取義者也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

에 의해 정해졌으므로²⁹ 도연명이 儒家의 가르침에 따른 隱逸觀³⁰을 가진 것과 일치한다.

 

►29)<孟子·告子>上篇

►30) 천하유도즉견天下有道則見 천하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무도즉은無道則隱 도가 없으면 물러나 숨는다./<論語·泰伯>篇

 

달즉겸선천하達則兼善天下 궁즉독선기신窮則獨善其身

달통하면 나서서 천하를 구제하고 막히면 할 수 없이 물러나 자신을 착하게 한다./<孟子·盡心>上篇

 

앞서 언급했듯이 牧隱 李穡은 최영이 이성계에 의해 살해당하자 최영의 뒤를 이어 국무총리에 상당하는

門下侍中의 직책을 맡으므로 彭澤令의 小官吏인 도연명의 낮은 벼슬과는 달라

전국의 정치·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통치의 힘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혼란한 시대에 上古시대의 隱者였던

산림장왕무소부山林長往無巢父 巢父와 같이 산림으로 영원히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악중흥재후기禮樂重興在后夔 후직后稷과 같이 禮樂을 중흥시키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생각하였다.³¹

 

그러므로 그가 鄕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당시 이규보 등처럼 불교에 歸依하여 寂滅·虛無의 세계를 지향하지

않았고 功名을 하늘에 맡기고 평생토록 성인이 세운 義理로써 자오自娛하고자 하였다.³²

 

►31)이색李穡 <목은시고牧隱詩藁> 卷7 <자영自詠>

►32)이색李穡 <목은시고牧隱詩藁> 卷18 <효음曉吟>

명지적멸여허무明知寂滅與虛無 우부장신향오호又不將身向五湖

종시공명천소부終始功名天所賦 평생의리일위오平生義理日爲娛

 

이렇듯 그의 出處觀은 성리학으로 다진 학문을 통해 혼탁한 정치현실을 개혁하고자 그의 의지를 모았다.

그러나 그는 李成桂의 세력에 밀려 개혁의 성취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억울한 유배를 당하였다.

이런 渦中에서 그는 세상을 버리고 정치에서 물러나 자연에 묻히고자 하는 심정으로 지은 글이 있다.

 

부득어세즉필민우심不得於世則必悶于心 구소이오심지술求所以娛心之術

세상에 자신의 뜻을 성취하지 못하면 반드시 마음으로 고민하게 되는데

마음을 즐겁게 하는 방법을 구해 보면

 

막여산야지자적莫如山野之自適 최혼지자양언最昏之自養焉

산야에서 자적하여 밤낮으로 스스로를 함양하는 것 만한 것이 없다.³³

 

위의 글은 벼슬에 뜻을 두었다가 과거에 낙방하여 실의에 잠긴 친구가 정자를 지어 은거한 모습을 보고

李穡이 山野에 歸隱하여 스스로 마음을 즐겁게 지내는 것도 좋다는 뜻으로 지어준 위로의 글이다.

 

이색이 隱逸을 憧憬하며 읊은 아래의 시가 있다.

노불귀전매자상老不歸田每自傷 늙어서 전원으로 돌아가지 못함을 매번 스스로 상심하노니

중동음우역비상仲冬陰雨亦非常 한 겨울 컴컴하게 내리는 비 또한 평범한 것 아니로다.

야상등영음중냉夜床燈影吟中冷 밤중 책상 위 등불 그림자 읊조리는 가운데 차갑더니

효침첨성몽리장曉枕簷聲夢裡長 새벽녘 베개에서 들리는 처마 끝 낙수소리 꿈속에 길도다.

 

원기저시능득순元氣底時能得順 원기가 어느 때나 순조로울 수 있을까

잔년하책최위량殘年何策最爲良 쇠잔한 나이 어떤 계책이 가장 좋을까

추호욕사처량의抽毫欲寫凄凉意 붓을 들어 처량한 마음 쓰려 하니

심천수장해수량深淺須將海水量 그 깊이는 바닷물로 재어야 하겠다.³⁴

 

이색은 위의 시에서 벼슬 중에 歸隱하지 못하는 심정으로 번민하였지만

그는 현실에서의 은일의 실천방법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독서를 통해 전원으로 歸隱한 도연명을 ‘연명천재일고사淵明千載一高士 천고의 고상한 선비³⁵’

라고 하여 크게 흠모하고 그의 出處觀은 도연명이 歸去來하여 몸소 농사를 지으며 현실을 개혁해 나가고자 하는

隱逸觀에서 영향을 받아 더욱 굳게 형성되었다.

 

►33)이색李穡 <목은시고牧隱詩藁> 卷5 <六益亭記>

►32)이색李穡 <목은시고牧隱詩藁> 卷27 <枕上聞雨>

►35)이색李穡 <목은시고牧隱詩藁> 卷12 <種菊未訖雨又作作短歌>

 

특히 그가 만년에 실의했을 때 지어진 시들은 自然과 親和하고 歸田하고 싶다는 표현이 대부분이었지만

실제 은일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吉再가 恭讓王 2년에 고려가 망할 것을 예측하고 은퇴하면서 그를 찾아가 함께 隱逸하자는 뜻을 전하자

이색은 “공은 떠날 수 있지만 나는 대신이니 나라와 함께 休處를 같이 해야 하므로 떠날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시만 주어서 작별한 것³⁶을 보면 그 자신은 門下侍中이라는 막중한 위치에서 고려가 망하는 것에 속수무책 할 수

없다는 책무 때문에 歸去來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36) 하회봉河晦峰 <동시화東詩話 야은행상冶隱行狀>

 

한편 이색은 그가 25세(恭愍王1) 때인 父親喪中에도 上書해서 田制改革 등 정책을 임금에게 건의하기도 한

충신이며 고려 왕조를 지키려고 애쓴 충절은 후세에도 깊이 숭앙되었다.

 

그가 門下侍中의 직책에서 물러났을 때 이후의 고려에 대한 충절로

혁명지후革命之後 공상착초립백의세조公常着草笠白衣細條 위거상지복爲居喪之服

혁명 후 공은 초립 삿갓을 쓰고 흰옷 차림으로 喪에 거하는 服을 하다.³⁷ 라는 후세인의 기록은

李成桂의 易姓革命에 동의하지 않고 고려에 죽기까지 충성를 다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37) 이기李墍 <송와잡설松窩雜說>

 

그리고 전목재錢牧齋가 이색의 忠節에 대하여 쓴 글을 보면

자현능불군自玄陵不君 공민왕이 임금이 아니 된 후부터

정귀이씨政歸李氏 정권이 이성계에게 돌아가자

색여몽주입창옹穡與夢周立昌擁 이색은 정몽주와 더불어 창왕을 세워 옹립하고

사탈사직우성계지수思奪社稷于成桂之手 사직을 이성계의 손으로부터 찾아서

이연왕씨일선지서而延王氏一線之緖 왕씨의 맥을 잇고자 하였다.

 

東史에 일컫기를

동사칭기여몽주동심불변東史稱其與夢周同心不變 그가 정몽주와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변치 않았으니

신절가불위충호臣節可不爲忠乎 그의 절조가 가히 충성이라 하지 않겠는가!³⁸

라고 하여 李穡의 高麗에 대한 충절에 대해 높이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38) 전목재錢牧齋 <열조시집列朝詩集>第6 李穡

 

이것은 동진東晉이 유유劉裕에게 찬탈簒奪되여 유송劉宋이 들어서자 도연명이 彭澤令을 사직하고 전원으로

歸去來한 후 조정에서 저작랑著作郞이라는 벼슬을 내려 불러도 다시는 유유劉裕가 세운 宋에서 벼슬의 뜻을

두지 않은 도연명의 東晉에 대한 忠義와 節槪³⁹에 비길 수 있다.

 

►39) 장기근張基槿신역新譯 陶淵明서울: 명문당, 2002, 30쪽.

도연명은 彭澤令에서 歸去來한 후 55세 때 朝廷으로부터 著作郞이란 벼슬에 초청된 일이 있었고 62세 때

江州刺史 단도제檀道濟로부터 출사를 요청 받은 일이 있으나 그는 깨끗이 거절하고 보내온 예물을 말끔히 돌려주었다.”

 

►40) 이색李穡 <목은시고牧隱詩藁>卷5 유거幽居

 

4. 牧隱의 漢詩에 나타난 陶淵明의 隱逸觀

 

牧隱 李穡은 도연명의 隱逸 이념에 깊이 영향을 받아

그의 시 도처에서 도연명의 은일생활을 동경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아래에서는 이색이 도연명의 隱逸 이념을 어떻게 그의 시에 반영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최애유거벽最愛幽居僻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은둔하고픈 성벽으로

임천흥유여林泉興有餘 임천에서의 흥취 넉넉하네.

출문산옹마出門山擁馬 문을 나서면 산이 말을 에워싸고

입실주부저入室酒浮蛆 방에 들면 술에 고두밥이 뜨네.

 

원정의부책園靜宜扶策 동산이 고요하여 산책하기에 마땅하고

창명쾌독서窓明快讀書 창이 밝아 글읽기에 좋네.

도연시진은陶然是眞隱 도연히 참되게 은일하니

하필부귀여何必賦歸歟 어찌 반드시 귀거래를 지을까?⁴⁰

 

이색은 이 시에서 비록 歸去來하여 향촌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문을 나서면 산이 마을을 감싸고

방에 들어가면 술이 있으며 고요한 정원을 산책하다가 창 아래에서 책을 읽을 수가 있다면

조정에 몸을 담고 있어도 隱逸의 실천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색은 隱逸해야 할 때를 만나면 늘 歸去來하지 못한 것을 自嘲하였지만 隱逸의 실천은 전원에 꼭 歸居하지

않아도 현실에서 은일의 정취를 찾을 수 있다는 견해는 도연명이 도를 상실한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전원으로 歸隱한 도연명의 결단과는 다른 일면을 보여준다.

 

이것은 兩人의 벼슬 지위로 인한 책무 역량의 차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욕서경과소溽署經過少 무더위 다소 지나자

정거장단음靜居長短吟 조용히 살아가며 시구나 읊조리네.

우연관물화偶然觀物化 우연히 사물의 변화를 관망하노라니

역복명아심亦復明我心 내 마음 다시금 새로워지네.

 

의진도백우蟻陣跳白雨 소나기 오자 개미떼 분주히 달아나고

앵사현녹음鶯梭懸綠陰 꾀꼬리는 녹음 속을 오고가네.

오려신가애吾慮信可愛 내 오두막 정말 사랑스러우이

즉시진도잠卽是晉陶潛 이런 게 곧 도연명과 같은 생활일거야.⁴¹

 

►41) 이색李穡 <목은시고牧隱詩藁>卷4 하일즉사夏日卽事

 

이 시에서 李穡은 자연 속에서 閑居하는 즐거움을 도연명의 전원생활과 비겨서 흡족하다고 하였다.

그가 실의했을 때나 곤경에 처했을 때 읊은 시를 보면 도연명의 인품과 생활에 대한 흠모의 정이 잠재의식으로

저변에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시에서 이색은 자신이 도연명처럼 歸去來를 당장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현실에서 실의와 좌절을

겪으면서 도연명의 隱逸觀으로부터 慰安을 받고자 하였다.

 

비재구사진여광非才求仕眞如狂 재주 없는 이 벼슬을 구하기 참으로 미친 짓

입사욕은환여사入仕欲隱還如詐 사환仕宦에 들고서 隱逸을 바라는 것은 사기詐欺와 같으네

비광비재일량심非狂非才一良心 미치지 않고 재주 없음이 하나의 양심이라

영친양친난상하榮親養親難上下 어버이 빛내고 어버이 공양함은 모두가 어려운 일.

 

괘관경향천동주掛冠徑向天東走 벼슬 버리고 오솔길로 천동을 향해 달리니

자단차생수체주自斷此生誰掣肘 스스로 끊은 이 삶 누구 팔을 끌 것인가.

귀래귀래호귀래歸來歸來好歸來 돌아가자 돌아가자 기쁘게 돌아가자

하육처노상유모下育妻孥上有母 아래로 처자를 양육하고 위로는 부모를 봉양하리.⁴²

 

►42)이색李穡 <목은시고牧隱詩藁>卷3 歸來

 

이 시에서 이색은 복잡한 벼슬길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며 벼슬길에서 속히 벗어나 부모를 봉양하고 가정의

家長으로서 자식들을 양육하는데 충실하고 싶은 심정으로 도연명이 전원으로 歸去來한 생활을 연상하며 읊었다.

 

락부천명복해의樂夫天命復奚疑 천명을 감수해 즐긴다면 그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일 것이냐

차노유연귀거시此老悠然歸居時 이 늙은이 유연히 돌아가 은거할 때

일점하증한고고一點何曾恨枯槁 한 점이라도 야위고 파리해짐 어찌 거듭 한 하리오.

문항요요일월지門巷寥寥日月遲 작은 문 골목이 고요하고 일월이 더디더라.

장소백두오이의長嘯白頭吾已矣 긴파람 흰머리가 일찍이 나의 모습

폐문공독거래사閉門空讀去來辭 문을 닫고 빈방에서 귀거래사를 읽는다.⁴³

 

►43)이색李穡 <목은시고牧隱詩藁>卷24 독귀거래사讀歸去來辭

 

李穡은 이 시에서 <歸去來辭>에 나오는

락부천명복해의樂夫天命復奚疑 천명을 감수해 즐긴다면 그 무엇을 의심하고 망설일 것이냐?

라는 辭句를 원용하여 도연명의 歸去來 정신을 본받고자 문을 닫고 빈방에서 <歸去來辭>를 암송한다고 하였다.

 

귀거래혜천재인歸去來兮千載人 귀거래사를 지은 일천년 전 사람

고풍당일유수친高風當日有誰親 높은 풍도 당일에 누가 있어 친하리.

중흥시도비타술中興詩道非他術 시도를 중흥시키는 것 다른 방법이 아니라

상합천심시차진上合天心是此眞 위로 천심에 합하는 것 이같이 참되구나.

 

임수등고시종목臨水登皐時縱目 물에 임하고 언덕에 올라 때로 눈을 높이 보고

의창입실자이신倚窓入室自怡神 방에 들어가 창에 의지하니 절로 정신이 화평하네.

직서처사잉서진直書處士仍書晉 바로 처사라 쓰고 이어서 진이라 쓰니

강목명명필법신綱目明明筆法新 강목이 밝음에 필법도 새로워라.⁴⁴

 

►44)이색李穡 <목은시고牧隱詩藁>卷8 讀歸去來辭

 

위의 시는 이색이 도연명의 <歸去來辭>를 읽은 감흥을 읊은 것이다.

일천년 전 <歸去來辭>의 작가인 도연명과 일천년 후에 태어난 이색 자신은 정신적 교감이 있음을 밝히고

詩道를 中興시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위로 천심과 합하는 것만이 참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천성과 정서에 바탕을 두고 지어진 시가 오래도록 사람의 마음을 밝게 하고

새로운 감흥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고 읊었다.

 

우흥시성이遇興詩成易 흥을 만나 시 쉽게 이루고

구정필하지求精筆下遲 정교함 구하니 붓 내리기 더디구나.

자감전배소自甘前輩笑 스스로 선배의 비웃음을 달게 여기니

수망후인지誰望後人知 누가 뒷사람 알아주기 바라랴.

 

악지분붕제嶽漬分崩際 큰 산의 물 나뉘어져 무너지는 때이고

천원정려시川原淨麗時 샘물의 근원은 맑고 깨끗한 때이로구나.

유회도경경有懷徒耿耿 회포가 있어 오로지 경경하니

팽택시오사彭澤是吾師 팽택령이 바로 내 스승이구나.⁴⁵

 

►45)이색李穡 <목은시고牧隱詩藁>卷19 우흥遇興

 

이 시에서 이색은 흥취가 원동력이 되어야 시를 쓸 수 있고 자유롭게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창작할 수

있으며 이를 근간으로 작품을 쓸 때 바로 情景과 조화를 이루고 자연경물과 동화될 수 있다는 입장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도연명이 내 스승이라 하여 도연명의 인품과 생활을 흠모하며 그의 인생을 기탁한다고 읊었다.

이러한 표현은 이색이 도연명의 隱逸觀을 깊게 수용하였음을 알게 한다.

 

오생오자성吾生吾自省 내 생애 내 스스로 살펴보니

쌍발경중추雙髮鏡中秋 두 귀밑머리 거울 속에 가을이네.

급급명겸리汲汲名兼利 명예와 이익에 급급하고

구구락차우區區樂且憂 즐거움과 근심에 급급하네.

 

동파탄여기東坡嘆如寄 동파는 삶이 더부살이 같음을 탄식하고

팽택감행휴彭澤感行休 팽택은 인생의 덧없음 탄식했네.

풍월무애처風月無涯處 바람 달 끝없는 곳에

고음독의루高吟獨倚樓 높이 읊조리며 홀로 누각에 의지하네.⁴⁶

 

►46)이색李穡 <목은시고牧隱詩藁>卷17 吾生

 

이 시는 李穡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며 감회를 읊은 시로

도연명과 소식의 인생살이에 대한 회포를 그 자신에게 견주어 읊었다.

名과 利, 樂과 憂를 상응시켜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색은 시간이 빠르게 흘러 버린 가운데 여태껏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며 名利를 탐하면서 쓸데없이 세월을

보내버린 것을 탄식하고, 도연명과 소식이 세상살이가 덧없고 부질없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그도 동감을 표시하였다.

 

팽택심위형역彭澤心爲形役 팽택은 마음이 육체에 사역되었고

창려명여구모昌黎命與仇謀 창려는 운명이 원수와 더불어 모의했는데.

안자여우종일顔子如愚終日 안회는 종일 어리석은 듯하나

단표누항청유簞瓢陋巷淸幽 단표누항에 맑고 그윽하더라.⁴⁷

 

►47)이색李穡 <목은시고牧隱詩藁>卷7 卽事 其1

 

위의 시는 도연명이 彭澤令을 한 것은 부질없이 마음에 수고로움을 끼쳤고 韓愈의 운명도 또한 술 마시고

잡다히 떠들고 顔子는 하루 종일 어리석은 듯이 있으나 단표누항簞瓢陋巷에서 즐거움을 누렸다고 하여

이 세 사람의 행적을 예로 들어서 각각 人物에 대한 삶을 묘사描寫하였다.

 

성벽거항궁性僻居恒窮 성품이 궁벽하여 항상 궁하게 거처하니

가빈미한겸家貧味罕兼 집이 가난하여 맛을 내기는 드무네.

음비정정陰悲鼎鼎 세월이 빠름을 슬퍼하고

기상모암암氣像慕巖巖 기상은 높고 높음을 흠모한다.

 

문정래유조門靜來幽鳥 문이 고요함에 그윽한 새는 날아오고

첨허괘냉섬簷虛掛冷蟾 처마가 비었으니 찬 두꺼비가 걸렸네.

추풍취벽류秋風吹碧柳 가을바람이 푸른 버들에 부니

천재억도잠千載憶陶潛 일천년 전의 도잠을 생각하네.⁴⁸

 

►48)이색李穡 <목은시고牧隱詩藁>卷9 기구작記舊作

 

이 시의 전반부에서 李穡은 자신의 궁벽한 생활 모습을 묘사하고 “鼎鼎”과 “巖巖”이라는

첩어疊語의 사용으로 절주節奏의 美가 있게 음악성 있는 표현을 하였다.

 

후반부는 쓸쓸한 자신의 집 뜨락 모습을 처다 보고 일천년 전에 ‘固窮節’로써

선비의 志操를 지키며 생활한 도연명의 은일자세를 회상하며 읊었다.

 

연명천지활무애淵明天地闊無涯 연명의 천지는 끝없이 넓어

농월음풍기자화弄月吟風氣自華 음풍농월 시 지으며 기개 절로 빛내었네.

일점고심마불진一點苦心磨不盡 한 가지 고심한 건 끝없는 연마일 뿐

귀래하처시오가歸來何處是吾家 돌아오니 그 어디나 나의 집일세.⁴⁹

 

►49)이색李穡 <목은시고牧隱詩藁>卷6 淵明

 

이색이 고려의 社稷을 李成桂의 易姓革命으로부터 수호하려다가

도리어 그들 일당으로부터 유배를 당하였을 때 지은 시다.

이때 이색은 자신의 처지를 도연명의 귀거래에서 위안을 받고자 <淵明>이라는 詩題로 지은 것이다.

도연명이 자기 의지로 귀거래한 것에 반하여 자신은 도연명과 달리 타의에 의한 귀거래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하더라도 평소 도연명의 隱逸觀을 동경하며 생활하여 왔기에 자신의 타의에 의한 歸去來가 도연명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표현하였다.

 

5. 結語

 

本稿는 牧隱 李穡의 漢詩에 나타난 陶淵明의 隱逸觀에 대한 연구로서 그 결과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隱逸’은 원래 道家에서 나온 말로 속세를 멀리하여 조용한 산속에 들어가

자기 수양으로 神仙의 경지에 이른다는 의미로 쓰였다.

 

2. 儒家에서는 선비가 정치․사회의 혼란에 처해 있을 때

천하유도즉견天下有道則見 무도즉은無道則隱 천하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물러나 숨는다.

/<論語 泰伯篇>

달즉겸선천하達則兼善天下 궁즉독선기신窮則獨善其身

달통하면 나서서 천하를 구제하고 막히면 할 수없이 물러나 자신을 착하게 한다./<孟子 盡心>上篇

라는 隱逸觀으로 활용하였고 또한 孟子는 달리 ‘隱逸’이 仁義와 결부되어 힘이 감당할 경우

생生 역아소욕야亦我所欲也 의義 역아소욕야亦我所欲也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자불가득겸二者不可得兼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 진댄

사생이취의자야舍生而取義者也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孟子 告子>上篇

라고 선비들의 出處觀에 대해 언급하였다.

 

3. 도연명이 활동하던 때의 시대배경을 살펴보면 東晉의 왕실이나 士族들의 세력이 약화되고

차츰 무력적 신흥 군벌들의 대두로 서로 각축을 다투어 군벌세력에 의해 사회가 좌우되었다.

이때 외부로부터는 이민족의 침입, 내부에서는 농민봉기 등이 끊이지 않아 국가사회와 백성들의 생활은

문자 그대로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다.

 

4. 도연명은 彭澤令이라는 낮은 小官吏로서 당시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부정부패가 만연된 사회에서

녹을 받고 사는 것은 선비의 처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성품과 어긋난 벼슬길을 떠나

천하유도즉견天下有道則見 무도즉은無道則隱 천하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물러나 숨는다.

/<論語 泰伯>篇

 

달즉겸선천하達則兼善天下 궁즉독선기신窮則獨善其身

달통하면 나서서 천하를 구제하고 막히면 할 수 없이 물러나 자신을 착하게 한다./<孟子 盡心>上篇

라는 儒家의 가르침인 隱逸觀에 의해 전원으로 歸去來하여 詩酒로써 자연을 벗 삼아 몸소 논밭을 경작하고

전임 지방의 小官吏로서 주위 농민들에게 농사를 권장하는 勸農詩를 지으며 田園閑居 하였다.

 

5. 牧隱 李穡이 살았던 시대는 중국에서는 元나라를 이어 明나라가 들어서고

우리나라에서는 高麗와 朝鮮의 易姓革命이 이루어진 역사적 전환기였다.

 

이 시기에 李穡은 정치적․사상적․문학적으로 고려 말기를 대표하는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인물이었으며 이 땅에

性理學의 뿌리를 내린 고려 儒學의 으뜸으로서 麗末·鮮初 유학사상의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李成桂가 위화도 回軍 후 그는 門下侍中이 되어

생生 역아소욕야亦我所欲也 의義 역아소욕야亦我所欲也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자불가득겸二者不可得兼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 진댄

사생이취의자야舍生而取義者也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孟子 告子>上篇

라는 儒家의 가르침인 出處觀에 의해 禑王과 昌王을 등극시키는 데 큰 공로를 하였고 明의 도움을 받아

이성계를 퇴출시켜 고려의 왕권을 수호하고자 하였지만 오히려 역부족으로 이성계의 세력에 의해 배척을 받아

유배생활을 하였다.

 

李穡이 고려 왕실의 충성스런 신하임을 표명하고 이성계 일당과 손을 잡지 않은 것은 도연명이 東晉의 충신

집안 子孫으로서 劉宋이 들어서자 晉代의 忠節을 나타내기 위해 그가 써 오던 ‘晉代年號’를 ‘甲子題詩’하고⁵⁰

그의 마지막 벼슬인 彭澤令을 사직한 후에는 劉宋의 조정에서 벼슬을 주어 불러도 다시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田園歸居한 도연명의 忠義와 節操에 비길 수 있다.

 

►50) 앞의 주18)

 

6. 兩人은 일천 년이라는 공시적 시대 차이가 있고 서로 다른 국가의 정치·사회 현실의 통시적 정황에서

도연명은 자신의 신분에 적합한 儒家의 가르침인 隱逸觀으로 歸去來하였고 목은 이색은 門下侍中의 높은

벼슬의 위치에서 고려 왕실을 보호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로써 도연명의 인품과 생활을 흠모하며 儒家의

가르침에 의한 出處觀을 실행하였다.

 

7. 결국 兩人의 隱逸觀과 出處觀은 道家思想이나 佛家思想에 의해 성립된 것이 아니라

儒家思想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서 兩人의 同質性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