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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도연명陶淵明

도연명 당시 정치적 인물 사안謝安

도연명 당시 정치적 인물 사안謝安

사안謝安(320-385)

동진東晋 중기의 명신名臣으로 자字는 안석安石, 시호諡號는 문정文靖. 하남성河南省 진군陳郡)출신.

 

원래 은자隱者로 유명하여 왕희지王羲之 등과 회계會稽에 은거하였는데

조정에서 여러 번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40세에 처음으로 출사出仕하였다.

 

그 후 무제武帝 때 건창현공建昌縣公에 봉작되었으며

죽은 뒤 태부太傅에 추증追贈되었으므로 사태부謝太傅라고도 하였다.

 

►사안謝安은 중국 동진東晋의 정치가이다.

대사마 환온桓温의 황위 찬탈 기도를 저지하고 비수淝水 전투에서 백만 대군을 막아내는 등 동진의 국난을

몇 번이나 구해낸 재상이면서 당대의 문화인이자 풍류인으로 백성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대사마: 3公의 하나. 승상丞相, 대사마大司馬, 어사대부御史大夫.

한나라 이후 고대, 중세 중국의 최고 권력기관.

주대周代의 천자를 보필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에서 비롯.

우리나라 조선조는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우의정右議政. 다른 말로 삼괴三槐. 삼정승三政丞

 

▪비수淝水 전투

전연前燕을 정복해 화북지방을 통일한 전진前秦이 동진東晋과 벌인 전투

 

재상을 지내면서도 짬짬이 기녀技女를 데리고 동산東山을 노닐며 지은

시부詩賦(경치를 읊은 시)가 즉시 온 장안에 유행될 정도였다.

 

►<생애>

명문 양하陽夏 사씨謝氏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총명해 주위의 큰 기대를 받았으나 젊은 시절에는

출사하지 않고 명필로 유명한 왕희지王羲之 등과 깊은 교분을 나누며 청담清談만 탐구했다.

 

그가 40세가 되던 360년에야 벼슬길에 나와 당시 동진의 최고 권력자 환온의 사마司馬가 됐으나

곧 환온과 대립하고 시중侍中, 이부상서吏部尚書 등을 지냈다.

 

▪사마司馬 : 군사軍事의 일을 맡은 벼슬. 주周 나라 때 육경六卿의 하나에서 비롯

 

당시 환온은 동진을 완전히 장악한데다가 간문제簡文帝까지 붕어했다.

곧 그는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갓 즉위한 효무제孝武帝를 폐하고 자기가 황제가 되려 일을 꾸미고 있었다.

그러나 사안은 왕담지王坦之 등과 반기를 들고 공작을 시작했다.

 

이미 노령이었던 환온이 얼마안가 의문사하자 사안은 373년에 상서복야尚書僕射에 올라 동진의 실권을 거머쥐었다.

 

▪상서복야尚書僕射

승상丞相을 비롯 3公이 어디까지나 최고 권력자들이었으나 3공의 힘이 약해질 때는 내조內朝에 속한 상서령尚書令이

권력을 대표했고 부副상서령에 해당하는 상서복야尚書僕射가 실질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383년 화북을 통일한 전진前秦의 세조 부견苻堅은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백만 대군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동진 조정은 사안을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으로 임명하고

그의 동생 사석謝石과 조카 사현謝玄 등과 함께 전진前秦에 맞서 승리했다.

 

승전의 공훈으로 사안은 태보太保에 올랐고 양하 사씨는 당시 동진의 최고 명문이었던

냥야琅邪[동진의 수도] 왕씨王氏와 동격으로 대우받게 됐다.

 

▪태보太保 : 周나라 때 三公의 하나

 

이 여세를 몰아 사안은 계속 북벌을 주창했지만 그의 성장을 경계한 황족 사마도자司馬道子의 방해로 좌절됐다.

 

▪사마도자司馬道子 간문제簡文帝 사마욱司馬昱의 7남이며 차기 황제 효무제孝武帝 사마요司馬曜의 친동생.

황실에 위협이 되는 강력한 신하가 나올 때마다 황제 대신 견제를 하고 중심을 잡아주는 중요한 인물.

환온桓溫의 위협도 잘 방어했고 뒤이은 사안謝安의 잠재적 위협 역시 미연에 잘 방지해내 종묘사직을 지켜냈다.

후일 환온의 아들에게 기습당해 죽었다

 

사마도자는 전쟁으로 피폐한 나라를 재건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사안의 공훈이 너무 커져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경계했다. 얼마안가 사안謝安은 중앙 정계에서 퇴출, 광릉보구広陵歩丘로 좌천됐다.

 

385년, 65세로 병사했는데 사후 태부太傅와 여릉군공廬陵郡公의 작위가 추증됐다.

아들인 사염謝琰과 손자인 사혼謝混도 계속 동진에서 벼슬을 살았다.

▪태부太傅 : 중국 周 나라 때 三公의 하나]

 

►<일화>

그는 귀족 출신이었음에도 평소 소탈해 인기가 많았다.

이런 자세는 재상 자리에 올라서도 변하지 않았는데 하루는 시골 고향에 가는 사람이 그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사안은 그에게 노자돈은 갖고 여행을 다니느냐 물었다.

 

그 사람이 수중에 포규선蒲葵扇(부들 잎으로 만든 부채) 5자루 뿐이다라고 하자 사안이 그 부채 하나를 골라 쥐고

거리를 누비니 경향의 사서士庶(선비와 서민)들이 앞 다퉈 사느라 포규선 값이 몇 배나 올랐다고 한다.

 

사상포증가謝相蒲增價 사안 정승의 포규선 값 오르고

조생죽유명曹生竹有名 인풍仁風을 드날리겠다는 원언백袁彦伯의 부채가 유명해졌네

/최선崔詵 <사문상증선謝文相贈扇>

 

조카 현玄이 호사함을 좋아하여 붉은 비단으로 된 향낭香囊을 차고 있음을 보고 이를 빼앗아 불태워버렸다.

 

시음청옥안試吟靑玉案 옛 시에 나오는 ‘청옥으로 꾸민 책상’ 구절을 어디 읊어 보아라,

막대자라낭莫帶紫羅囊 사현처럼 붉은 비단 향낭일랑 부디 차지 말고.

/두보杜甫 <우시종무又示宗武>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사안은 붓글씨도 명필이었다.

당나라 이사진李嗣眞은 <서후품書后品>에서 사안의 붓글씨를

‘자유롭고 활달하기가 용호龍虎의 기세를 갖추고 있다’고 격찬했다.

 

전진前秦과 비수에서 건곤일척의 대결로 치닫던 무렵 사안은 백만 대군을 맞아 불안해하는

조정과 병졸들을 안심시키려고 지휘 천막 안에서 태연히 바둑을 뒀다.

황제가 보낸 사신이 전황은 어떤지 묻자 역시 바둑이나 한 판 두자며 사신을 바둑판에 앉혔다.

 

전령이 급히 달려오자 그는 대국 중 전황 보고를 받으려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왔는데

돌아와서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고 바둑돌만 놓았다.

 

불안해진 사신이 전황이 어땠는가 재촉하자

뜬금없이 중들이 도적을 혼내줬다는 알 수 없는 말만 하고 태연자약했다.

 

순간 멍해진 조정 사신이 승전보냐 거듭 묻고 급히 돌아간 연후에야 사안 자신도 기뻐 날뛰었다는데

얼마나 날뛰었는지 그 와중에 흔들리던 이가 부러진 것도 몰랐다고 한다.

 

정승으로 정무의 여가에 동산東山에 올라 기생과 풍악으로 즐겁게 보냈다 하며

꿈에 흰 닭을 보았더니 그 뒤 신유년辛酉年(흰닭띠 해)에 사망했다.

이를 ‘몽계이병불기夢雞而病不起’라 한다/<진서晉書 사안전謝安傳>

 

단봉구종지상욕丹鳳久從池上浴 붉은 봉황이 오래도록 못에서 목욕 터니(中書省에서 오래 벼슬하더니)

백계쟁내몽중최白雞爭奈夢中催 사안처럼 흰 닭이 어찌 꿈속에서 다투어 재촉했던고

/이인로李仁老 <문상국극겸만사文相國克謙挽詞>

 

●사안의 동산재기謝安東山再起

383년, 전진의 부견은 97만 대군을 직접 거느리고 장안을 떠났다.

 

보병과 기병, 그 뒤를 따르는 군수 물품을 실은 수레와 말들로 장사진을 이룬 대오는

천리에 이어지고 흙먼지가 하늘을 뿌옇게 가리웠다.

 

한 달 후,

부견의 주력부대는 항성項城에 이르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익주의 수군은 장강을 따라 동으로 내려왔고 황하 이북의 군대들은 팽성에 당도했다.

 

전진의 군대는 동서 만리나 넘는 구간에 전선을 펼치고 수륙이 함께 남으로 내려갔다.

이 소식이 건강에 전해지자 효무제와 문무백관들은 대경실색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강남이 전진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는 동진의 국민들은 재상 사안謝安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그가 적을 물리칠 묘안을 생각해 내길 바라고 있었다.

 

사안은 진군陳郡 양하陽夏 사람으로 사족 출신이다.

젊었을 때 왕희지와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으며 함께 회계 동산에 올라 산천 경계를 보면서 시를 읊조렸다.

 

그는 당시 사대부계층에서 명망이 아주 높았고 모두들 그를 매우 뛰어난 인재로 여겼다.

그러나 그는 동산에 은거해 있는 것을 즐겼으며 다시 벼슬길에 오르기를 싫어했다.

 

그러다가 마흔 살이 되는 해에 동산에서 나와 다시 벼슬을 하였는데 사안이 오랫동안 동산에 숨어 있다가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고 하여 이를 가리켜 ‘동산재기東山再起’라고 했다.

 

사안은 강대해진 전진이 동진의 북부 변경을 자주 침범하자

이를 막기 위해 자신의 조카 사현謝玄을 효무제에게 천거했다.

 

효무제는 사현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광릉廣陵(강소성 양주)을 지키게 하고

겸하여 장강 이북의 각 군을 통솔해 변경을 지키게 했다.

 

사현은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광릉으로 부임한 그는 군대를 모집하고 정비했다.

 

그때 동진으로 피난해 온 북방 사람들이 그의 수하로 많이 들어왔는데

그 중에 유뢰지劉牢之라는 팽성 사람이 있었다.

 

무예가 뛰어난 그는 싸움에 임할 때 매우 용맹했다.

사현은 그를 참군으로 등용하고 정예부대 한 갈래를 지휘하게 했다.

 

후에 이 군대는 사현과 유뢰지의 엄격한 훈련 덕분에 백전백승의 강병으로 성장했다.

이 군대는 늘 경구京口(강소성 진강시)에 주둔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북부병’이라고 불렀다

(경구를 ‘북부’라고도 했다).

 

그러던 차에 부견의 1백만 대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사안은

자신은 건강에서 군대를 총지휘하기로 하고

동생 사석謝石에게 전선 총지휘를 맡기고

사현을 선봉 도독으로 삼아 8만 대군을 거느리고

강북으로 건너가 전진의 군대를 막게 했다.

 

그리고 장군 호빈胡彬에게 수군 5천을 주어 수양壽陽(안휘성 수현)으로 가게 했다.

사현의 북부병이 용맹하다고는 하지만 전진의 병력은 동진보다 열 배나 더 많았다.

 

양군의 역량 차이가 너무나도 현저해서 사현은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출발 직전 사현은 작별인사를 올리러 사안의 집으로 갔다.

 

그는 사안이 무슨 계책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전쟁터로 떠나가는 조카 사현의 인사를 받고도 사안은 별 말이 없었다.

계책은커녕 당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사현은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그는 친구 장현을 사안의 집으로 보내어 자신 대신 말을 듣게 했다.

 

그런데 사안은 장현을 보고도 군사에 관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산 속 별장으로 데리고 가서 하루 종일 바둑을 두었다.

 

장현도 아무것도 탐문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저녁이 되자 사안은 사석과 사현 그리고 다른 장령들을 갑자기 자기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사람마다 일일이 임무를 맡기는데 빈틈이 하나도 없었다.

사안의 침착성과 태연자약한 태도에 신심을 얻은 장령들은 모두 사기 백배해서 군영으로 돌아갔다.

 

그때 형주를 지키던 환충桓充이 정세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성을 보위하라며 정예군 3천을 건강으로 보냈다.

그러나 사안은 “여기는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 너희들은 돌아가서 서부 전선을 잘 지키거라.”

하면서 그들을 되돌려 보냈다.

 

형주로 돌아간 장령이 그 말을 전하니 환충은 근심이 태산 같아서 이렇게 말했다.

“재상의 기개는 탄복할 만하지만 전쟁을 잘 모른단 말이야.

어쩌면 1백만 적군을 앞에 두고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는 병력도 매우 적은데다가 경험도 없는 젊은 사람들이 지휘를 맡고 있으니

장차 큰 화가 머리 위에 떨어질 거야. 어디 두고 보라고.”/중국상하오천년사

 

●비수전투淝水戰鬪

비수대전淝水大戰은 중국 五胡十六國時代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383년 동진東晉을 공격했다가 비수淝水에서

동진의 사현謝玄에게 패배한 전투이다. 비수는 현재 안후이성安徽省에 있는 화이허 강(淮河)의 지류이다.

 

<배경>

화북華北의 패권을 장악했던 후조後趙가 멸망한 후

저족氐族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전진前秦이 점차 성장하여 화북의 패권을 차지했다.

 

357년 제위를 빼앗아 3대 황제가 된 부견符堅은 한인漢人출신의 재상宰相 왕맹王猛을 중용重用하여

부국강병富國強兵을 실행하여 국력을 크게 성장시켰다.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짧은 기간 내에 동쪽의 전연前燕, 남쪽의 양梁, 북쪽의 대代, 서쪽의 전량前凉

거기에 서역까지 원정하는데 국세를 떨쳐 376년 화북을 통일하였다. 이제 남은 건 남쪽의 동진밖에는 없었다.

 

부견은 상당한 理想主義者로써 민족적 대융합을 고려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관중關中의 동쪽에

선비족(鮮卑)를 이동시키고 반대로 자신의 민족인 저족을 서쪽으로 이동시켰다.

또한 재상 왕맹의 조언에 따라 저족외 다른 민족의 인재를 적극적으로 등용해 중요한 지위를 내렸다.

 

부견의 이러한 조치는 영내에 여러 민족을 융화시킨 뒤 다민족국가를 세워 이상 정치를 실현시키겠다는

포부와 이후에 진행할 천하통일사업을 위한 동진 정벌의 포석이었다.

 

그러나 왕맹은 아직 민족 간의 대립이 심각하다고 생각했고 한인의 마음도

동진을 본국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동진과의 싸움이 벌어지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판단해 여러 차례 부견에게 남정南征을 취소할 것을 진언하였다.

 

화북 통일 1년 전인 375년에 왕맹은

“진을 공격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진은 내부적으로 결속이 단단하고 국력도 강합니다.

또한 동진은 장강이라는 천험의 지형을 안고 있어 쉽게 정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보다는 선비족 출신인 전연前燕에서 항복한 모용수慕容垂와 강羌족의 귀족 요장姚萇이 더 위험합니다.

투항하긴 했으나 그들은 전진의 오랜 숙적이었기에 그대로 놔두면 훗날 큰 후환이 될 것입니다.

서서히 그들의 힘을 꺾고 제거하는 것이 순서입니다.”라고 유언을 남기며 사망했다.

 

376년 동진은 북방을 통일한 전진의 침략에 대비하여 재상 사안謝安이

조카 사현謝玄을 예주자사로 임명하여 광릉廣陵에 배치했다.

 

사현은 문무를 겸비한 명장으로 사안이 관할하던 하류 장강지역

5개주(양주揚州, 예주豫州) 서주徐州, 연주兖州, 청주靑州)의 군사권을 쥐고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그의 휘하에는 유뇌지劉牢之, 하겸 등의 맹장들이 있었고 이렇게 단련된 정예병들을 북부병北府兵이라 불렀다.

 

그때 부견은 왕맹의 유언을 지키지 않고 378년 4월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부비符丕에게 명하여

보병, 기병 7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동진의 양양襄陽을 공격하게 했다.

 

부견은 그 외 10만의 병력을 더 추가하여

3방향으로 양양을 침공하게 했으니 이 공격에 투입된 병력만도 17만이었다.

 

양양을 수비하던 양주자사梁州刺史 주서朱序는 1년간 성을 지켰으나

379년 2월 성을 열고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다.

부견은 그를 용서하고 도지상서度支尙書란 지위를 내렸다.

 

전진군은 계속 동진東進하여 광릉廣陵을 압박했으나

동진의 사안謝安이 건강建康에서 방어하고 그의 명을 받은 사현이 5만의 북부병을 거느리고

반격에 나서 전진을 상대로 4戰4勝의 전승을 거두었고 패배한 전진군은 회군하고 말았다.

이 공적으로 사안은 건창현공建昌縣公, 사현은 후에 봉해졌다.

 

부견은 이번에는 대대적인 병력을 일으켜 기필코 동진을 정벌하여

천하통일을 이루려는 생각에 회의를 열어 신하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많은 대신들이 동진정벌에 반대하고 나섰다.

아직 동진정벌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한 것이다.

화가 난 부견은 제일 신임하는 동생 부융符融을 불러 그의 의견을 물었다.

 

부융도 난색을 표하며

“전진은 몇 년 동안 계속 전쟁을 벌여왔기에 병사들은 지치고 나라는 피폐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군마를 쉬게 하고 나라의 내실을 기울여야 할 시기입니다.”라고 하였다.

 

부견은 자신의 동생마저 반대하자 크게 마음이 상했으나 다만 모용수 만이 그의 의견에 찬성하였고

그것에 힘을 얻은 부견은 자신의 의지대로 남정을 결심했다.

 

<진행 과정>

383년 5월 전진의 남정소식을 접한 동진은 먼저 행동을 일으켜

환충桓沖에게 10만의 병력으로 양양을 공격하게하고 양량楊亮에게는 촉을 공격하게 했다.

 

전진은 이 공격을 견제하기 위해 8월에 부견의 동생 부융, 장모, 부방, 양성, 모용위, 모용수 등에게

25만의 병사를 주어 선봉으로 삼고 자신은 직접 보병 60만, 기병 27만 명,

합이 100만이라 불리는 대군을 이끌고 장안長安을 출발했다.

(병력 수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대략 실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병력은 절반도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동진은 이에 대항하기 위해 사석謝石을 대도독大都督으로 임명하고

사현을 선봉으로 삼아 약 8만의 병력으로 3방향에서 전진을 견제하고자 했다.

 

10월 부융의 군은 동진의 수도 건강의 북서쪽 200km 에 위치한 수춘壽春(현재의 안휘성 수현)을 함락시키고

양성의 군은 낙안에 주둔하였다.

 

11월 사현 휘하의 장수 유뇌지가 5천 정병을 이끌고 낙안을 기습하여 전진군을 격파하고 양성을 죽였다.

그 후 동진군은 비수에 진격하자 전진군도 부견의 본진이 수춘에 도착했다.

양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자 부견은 주서를 사자로 삼아 항복권고를 권유하였다.

 

헌데 주서는 마음속으론 동진을 섬기고 있었기에 동진 진영에 와서

“전진의 100만 대군이 집결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지금 선봉을 깨뜨린다면 적에게 큰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라고 사석 등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사석도 이 계책을 받아들여 부견에게 도하한다면 싸우지 않겠다고 유혹을 하였고 부견도 이를 승낙했다.

부견은 이 시기 자신의 군을 조금 물려서 상대를 유인한 뒤에

동진군이 강을 절반쯤 건널 때 공격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전진군은 예정대로 약간 후퇴하자 이를 쫓아 동진군은 도하했다.

공격하면 승리는 장담할 수 있으나 병사들의 후퇴는 끊이지 않았다.

 

병사들에겐 부견이 생각한 작전을 설명하지 않았고

후퇴하는 것과 퇴각하는 것이 무엇이 다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주서가 진영을 돌아다니며 자신들이 졌음을 외치고 다녔기 때문에 군대를 돌리기란 쉽지 않았다.

 

마침 도하를 끝낸 동진군이 공격을 가하자 전진군은 무너지고 말았다.

병사들의 동요를 막으려던 부융은 전사하고 부견은 혈혈단신으로 도망쳤다.

 

군대는 삽시간에 흩어졌고 장안에 와보니 그 숫자는 절반에도 못 미쳤다.

부견은 도중에 모용수에 의해 보호받으며 12월에 장안으로 귀환했다.

 

<결과>

이 전투로 중국의 남북국 형태의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게 된다.

동진은 이 전투의 승리를 호기로 삼아 북벌을 감행하여 황하 이남의 옛 국토를 되찾았으나

사안의 사망과 사현의 은퇴 후에는 수세로 일관했다.

 

전진은 이 전투의 패배로 일순간 국가의 통제력을 상실하여 화북은 다시 전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모용수는 도중 부견과 헤어진 후 업鄴에서 384년 자립하여 후연後燕을 건국한다.

 

모용홍은 동생 모용충과 합세하여 전진의 요장을 격파하고 장안 함락을 목표로 했으나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그 뒤를 모용충이 계승하여 서연西燕을 건국하였다.

모용홍에게 패한 요장은 위북에서 강족을 규합하여 후진後秦을 세웠다.

 

전진의 장군 여광呂光은 서역 원정후 복귀 중에 비수의 패전을 듣고

간쑤성(甘肅)에서 자립하여 후량後凉을 건국하였다.

 

부견은 385년 7월 요장에게 붙잡혀 선양을 강요받았으나 거절하고 살해당했다.

이 소식을 듣고 부비가 뒤를 계승했으나 서연에게 대패 후 도망 중 동진군에게 죽었다.

이후에도 일족이 저항을 계속했으나 394년에 완전히 멸망한다.

 

북방의 혼란은 386년 탁발규에 의해 부활한 대나라가 북위로 이름을 바꾼 뒤에

세력을 확장해 최종적으로 화북을 통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