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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詩/매월당집梅月堂集

매월당 시집 제5권 3-1

매월당 시집 제53-1

3

1 작설雀舌

 

남국춘풍연욕기南國春風軟欲起 남국南國의 봄바람 가볍게 불려 할 제

다림엽저함첨자茶林葉底含尖觜 차茶나무 숲 잎새 아래 뾰족한 부리 숨겼네

간출눈아극통령揀出嫩芽極通靈 연軟한 싹 가려내면 진정 신령스레 통하고

미품증수홍점경味品曾收鴻漸經 그 맛과 풍류 홍점鴻漸의 다경茶經에 실렸네

 

자순추출기창간紫筍抽出旗槍間 자순紫筍은 창기槍旗 중中에서 가려 뽑은 것

봉병룡단도범형鳳餠龍團徒範形 봉병鳳餠과 용단龍團은 그 모양을 본뜬 걸세

벽옥구중활화팽碧玉甌中活火烹 푸른 옥병玉甁 속에 넣어 타는 불로 달이면

해안초생송풍명蟹眼初生松風鳴 게눈 같은 거품 일고 솔바람 소리도 울리네

 

산당야정객위좌山堂夜靜客圍坐 산사山寺 고요한 밤에 손님들 둘러 앉아

일철운유쌍안명一啜雲膄雙眼明 운유차雲腴茶 한 잔 마시니 두 눈이 밝아지네

당가천짐피조인黨家淺斟彼粗人 당가堂家에서 잔을 비우는 저인 촌사람인가

나식설다여허청那識雪茶如許淸 어찌 알리, 설다雪茶가 그처럼 맑은 것을.

 

남국의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오려 하니

차 숲의 잎 밑에도 뾰족한 부리 머금었네

무척 신령에 통한 어린 싹을 가려 뽑으니

맛과 품격은 일찍이 홍점경에 수록되었네

 

자순은 잎과 줄기 사이에서 뽑혀 나왔고

봉병과 용단차는 모두 모양만 흉내 냈네

불을 피워서 푸른 옥 다기로 달여 내니

물 끓는 거품이 생겨 솔바람처럼 울리네

 

산집의 고요한 밤에 손님들과 둘러앉아서

운수차 한 모금 마시니 두 눈이 밝아지네

술 잔 얕게 따르는 당가의 거친 사람들이

이처럼 맑은 설차를 어찌 알 수 있을까

 

►작설雀舌 ‘작설다雀舌茶’의 준말.

‘작설차雀舌茶’라는 이름은 차나무의 어린잎이 참새 혓바닥처럼 뾰족한 어린잎을 따서 만든 차.

이때 차를 만들면 맛 향 등 다섯 가지 맛이 동시에 풍긴다고 한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작설이란 이름을 지어 붙었고 작설차를 찬미하는 시를 지었다.

 

이미 수백 년 전부터 기후풍토가 좋고 산과 물이 기이하고 고와서

작은 강남이라고 일컫는 순천 지역에서 생산되는 작설차가 으뜸이라고 알려져 왔다.

 

조선시대 교산 허균許筠(1569-1618)이 지은 시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 작설차는

“순천산이 제일 좋고 다음이 변산이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성소부부고>는 조선의 식품과 명산지에 관하여 적은 일종의 식품전문지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순천의 작설차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또한 1618년 순천부사 이수광李睟光(1563-1628)이 지은

<승평지昇平誌 진상조>에는 작설차를 진상품으로 올린 기록이 있다.

 

작설차는 조계산 일대가 재배 적지로서 17세기 초 선암사 주변에 10주가량의

차나무를 이식·재배한 것을 시작으로 순천 지역의 차나무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디지털순천문화대전

 

►홍점경鴻漸經 당나라 시대 차의 대가인 육우陸羽(733~804)의 역작 다경茶經을 말한다.

차茶에 대해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으로 알려져 있으며

육우陸羽의 자가 홍점鴻漸이어서 홍점경鴻漸經으로도 불린다.

 

►자순紫筍 자순紫筍은 붉은색을 띤 차 싹을 말한다.

자순차紫筍茶는 육우陸羽가 안사의 난을 피해 호주에 갔을 때 자순차紫筍茶의 우수성을 인정한 名茶로

이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차를 의미하는 상징어가 되었다.

 

►기창旗槍 옛날 누런빛이나 붉은빛의 작은 기를 단 창槍 모양의 의장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차나무의 줄기를 창槍에 잎을 깃발에 비유하였다.

 

►봉병용단鳳餠龍團 당대唐代의 차는 찻잎을 쪄서 절구로 찧어 건조시킨 떡차[餠茶]중심이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용단봉병차龍團鳳餠茶이다. 그 중 용단차는 황제를 비롯해 왕자 왕손의 전용이 되고

봉병차는 그 밖의 왕족 중신 학사 장수들에게 하사되었다 한다.

 

►해안蟹眼 물이 끓을 때 생기는 거품.

►운수雲膄 운수차雲膄茶. 구름처럼 파리하다는 뜻으로 작설차雀舌茶의 깊은 맛을 에둘러 표현한 것.

 

►당가천짐피조인黨家淺斟彼粗人

송宋나라 때 도곡陶穀의 첩妾은 원래 당진黨進의 시희侍姬였는데 어느 눈 내리는 날 도곡陶穀이 첩을 시켜

눈 녹인 물로 차를 끓이게 하면서 당진黨進의 집에도 이런 풍류가 있는지 물었다.

첩이 대답하기를 ‘그 예를 모르는 사람들이 어찌 이 같은 풍류를 알겠습니까.

단지 화려한 장막아래서 술 조금 따라놓고 양고주 마시며 노래할 뿐이지요.’라고 했다는 고사를 말한다.

‘조인粗人’은 거칠고 예절을 모르는 사람이란 듯이다.

 

●<우리나라 차의 역사>

차는 7세기 전반인 신라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다.

그것이 성행한 것은 828년(흥덕왕 3) 대렴大廉이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가져다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은 이후의 일이다.

 

이때부터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과 호남 지방이 우리나라 차의 본고장이 되었다.

이 지방의 기후 및 입지조건이 차나무 재배에 적합한 때문이기도 하였다.

한편 가야시대에 인도에서 차가 전래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사료는 불충분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일부 승려 및 화랑도들이 차를 마셨다.

사복蛇福이 원효元曉에게 차를 공양했다는 설화,

8세기의 보천寶川·효명孝明 두 왕자가 오대산에서 수도할 때 문수보살에게 차를 공양했다는 기록,

경덕왕 때의 승려 충담忠談이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삼화령三花嶺의 미륵불에게 차를 공양했다는 기록,

경덕왕이 승려 월명月明에게 차를 예물로 주었다는 기록,

진감국사眞鑑國師·무염국사無染國師 등이 차를 마셨다는 기록 등은

이 시대 승려사회에 음다飮茶의 풍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또한 화랑이었던 4仙(永郎·述郎·安詳·南石)들이 경포대·한송정 등지에서 차를 마실 때 사용한

석조·石井·석지石池 등의 유물이 조선 초기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석정은 현존하고 있다.

 

이 시대의 승려나 화랑도 사이에 음다의 풍이 있었던 것은 이들이 이 시대의 선량選良이었고

정신을 맑게 해 주는 차의 효능은 이들의 수행에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음다의 풍이 보다 넓게 퍼져 있었다.

왕실·귀족·사원 등에 차가 유행했기 때문이다.

 

차는 주과酒果와 더불어 고려 궁중의 주요한 음식물 가운데 하나였다.

궁중에서는 연등회·팔관회 등의 국가적인 대제전이나

왕자·왕비 등의 책봉의식에 진다의식進茶儀式이 행해졌다.

 

또 차가 국제외교상 중요한 예물 중의 하나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송나라의 예물 중에는 용봉차龍鳳茶가 끼어 있었고 고려에서는 거란에 뇌원차腦原茶를 보내기도 하였다.

국왕은 신하나 승려, 혹은 노인에게 차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궁중의 차에 관한 일은 다방茶房이라는 관부에서 맡아보았다.

 

귀족들 또한 차를 즐겼다.

귀족들은 송나라 상인으로부터 중국 차를 구입하거나 좋은 다구茶具와 정원을 꾸미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귀족계층에 속하는 승려들도 차를 즐겨 사원에 차를 진공進供하는 다촌茶村까지 생겨났다.

선가禪家의 다도茶道는 취미생활에 그치지 않고 수행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 시대 문인들은 차를 주제로 한 시를 많이 남겼고 차나 다구를 선물하는 풍속이 있었다.

사원에서는 차 끓이기를 서로 겨루는 명선茗禪이라는 풍속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대 음다풍의 성행은 고려청자의 발달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의천義天·천책天頙·충지冲止 등의 고승과

이인로李仁老·임춘林椿·이규보李圭報·홍간洪侃·한수韓脩·홍약洪瀹·이연종李衍宗·이색李穡·이제현李齊賢·

이숭인李崇仁·정몽주鄭夢周·원천석元天錫 등의 지식인이 차를 즐겼다. 이들은 차시茶詩를 남겼다.

 

불교와 인연이 깊었던 음다의 유풍遺風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교와 더불어 쇠퇴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시대에는 차가 고려 때만큼 유행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왕실에서는 차례茶禮가 행해졌고 사원을 중심으로 다도의 전통이 이어졌다.

 

조선 초기에는 이행李行·서거정徐居正·김시습金時習·김종직金宗直 등에 의해 고려의 음다 유풍이 계승되었다.

궁중에서도 외국 사신을 맞이할 때 차례가 행해졌다.

 

그리고 중기까지도 차를 아는 문인들이 가끔 있었지만 임진왜란을 전후한 16세기경에는 음다의 풍이 쇠퇴하고

차에 대한 이해가 적어져 궁중에서까지도 차를 제대로 마시지 않은 것 같다.

 

명나라의 장수 양호楊鎬가 선조에게 “귀국에서는 왜 차를 마시지 아니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우리나라 습속에는 본래 차를 마시지 않는다.”고 대답할 정도였다.

 

조선 초기는 물론 중기 이후에도 승려들 중에는 차를 마시는 예가 있었고

남쪽지방의 사원에서는 적은 양이지만 차가 법제法製되면서 그 명맥이 이어졌다.

이 시대 선가의 다도는 조주다풍趙州茶風을 계승한 것이었다.

 

이처럼 사원을 중심으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던 음다풍은 19세기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성행하게 되었다.

대흥사의 혜장惠藏·초의草衣·범해梵海 등의 다승茶僧과

정약용丁若鏞·신위申偉·김정희金正喜·홍현주洪顯周·이상적李尙迪 등 차를 즐기는 문인들이 있었다.

 

초의는 <동다송東茶頌>을 짓고 차를 재배하는 등 다도의 이론이나

실질적인 면에서 정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다도를 크게 일으켰다.

다도라는 용어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정약용은 강진康津에서 18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하는 중에 차를 즐겨 <걸명소乞茗疏> 등의 시를 남겼고

강진을 떠나면서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또 화엄사華嚴寺·쌍계사雙磎寺·대흥사大興寺 등의 사원에서는 차가 생산되었는데 그 양은 적었다.

고려시대 이후로 차를 생산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 거의 없었고

토공土貢을 강요한 관인들의 주구誅求는 오히려 차의 생산을 저해하는 결과를 빚기도 하였다.

 

19세기 말에는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다업진흥茶業進興을 건의하곤 하였다.

1883년( 고종 20)부터 농상사農商司에서는 차의 재배를 관장하고 차 재배를 위한 조사를 지시했으며

1885년에는 청나라에서 차나무 모종 6,000주를 수입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인 1885년에 안종수安宗洙가 쓴 <농정신편農政新篇>에서는 차의 재배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한말에는 고관들 사이에 다화회茶話會라는 모임이 자주 열렸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차의 생산과 보급 그리고 한국 차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물론 그 목적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한 방편이었다.

 

광주에 무등다원無等茶園, 정읍에 소천다원小川茶園,

보성에 보성다원寶城茶園 등이 조성된 것도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1930년대부터 고등여학교와 여자전문학교에서 다도가 교육되었는데

1940년대에는 47개 여자고등학교와 상당수의 여자전문학교에서 교습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다도교육은 일본의 다도를 우리나라에 옮기려는 식민지교육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1960년대 이후 새로이 일기 시작했던 차에 대한 관심이 1970년대 후반부터 활기를 띠면서 발전하고 있다.

허백련許百鍊과 최범술崔凡述은 최근 우리나라의 다도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한국민족대백과사전

 

●'다도茶道'란 말이 처음 생긴 문헌文獻

►다경茶經의 내용

현존하는 “다경茶經”은 상・중・하 총3권으로 나누어져있다.

 

상권 : 1지원一之源, 2지구二之具, 3지조三之造 등 3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중권 : 4지기四之器 1편만 있다.

하권 : 5지자五之煮 6지음六之飮 7지사七之事 8지출八之出 9지략九之略, 십지도十之圖 등의 6편이 있다.

총 3권 10편으로 구성되었다.

 

다경茶經의 내용만 다루어도 엄청난 분량의 독립된 한권의 전서專書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다경茶經이 어떤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책인지에 대해서만 개략적槪略的 설명만 하고자 한다.

 

►1之源 차의 근원에서는

첫째. 먼저 차의 식물학적 설명을 하였다.

둘째. 차의 문자적 표시를 설명하였다.

셋째. 차가 생장하는 토양을 설명하였다

넷째. 차를 기르는 방법을 설명하였다.

다섯째. 차의 효능을 설명하였다.

여섯째. 차와 고려인삼을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2之具 차 만드는 도구 또는 연장에서는

찻잎을 딸 때 사용하는 대나무 바구니(다루茶簍)와

차를 찌는 부뚜막(조竈)과 시루(증甑) 차를 빻는 절구와 공이

끝으로 차의 본(모형)을 뜨는 거푸집(속칭 모자模子)등 차茶를 만드는 도구에 대해 설명하였다.

 

►3之造 차 만들기에서는

찻잎 따기에서부터 고형차固形茶의 제조법에 이르기까지 설명하고 그 다음은 이미 제품화되어 출시된

차茶의 종류와 또 차茶의 좋고 나쁨에 대한 감별법鑑別法에 대해 설명하였다.

 

‘고형固形’ 바탕이 단단하며 一定한 꼴을 지닌 형체形體

‘고형차固形茶’ 고형차는 분말하여 고형으로 굳게 한 것과 잎의 형상을 유지하면서 그대로 굳게 한 것이 있다

 

►4之器 차 마시는 그릇에서는

물을 끓이고 차를 다릴 각가지 준비도구에서부터 차를 마시고

다기茶器를 정리함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풍로風爐> 거筥(숯 광주리)

<탄과(炭檛> 숯 가르게

<화협火筴> 부젓가락

<교상交床> 솥 걸치게

<협夾> 차를 구울 때 쓰는 집게

 

<지낭紙囊> 차를 보관하는 종이 주머니

<연碾 불말弗末> 연 가루 털게

<나합羅合> 가루차를 거르는 체와 보관하는 합

<칙則> 차의 양을 조절하여 떠서 넣는 도구

<녹수낭漉水囊> 물 거르는 자루

 

<표瓢> 표주박

<죽협竹筴>

<차궤鹺簋> 소금단지

<숙우熟盂> 익은 물 사발

<완盌> 주발

 

<분畚> 차 사발을 담아놓는 일종의 삼태기 같은 바구니

<찰札> 큰 붓 모양의 대나무솔

<척방滌方> 찻그릇을 씻고 남은 더러운 물을 담아두는 8되짜리 개수통

<재방滓方> 차 찌꺼기를 담아두는 5되짜리 찌꺼기통

<건巾> 행주

 

<구열具列> 모든 차 도구를 수납하여 진열하는 대나무로 만든 평상이나 선반

<도자都煮> 다기를 수납하여 정리하는 대나무 광주리로 도람都籃이라고도 한다

등에 대해 그 쓰임새와 모양 그리고 재료에 대해 상세히 전하고 있다.

 

►5之煮 차 달이기에서는 자다煮茶하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설명하는 자다법煮茶法은 제1장에서 거론한 당대이전의 자다법과는 사뭇 다르다.

'자다煮茶' 차를 끓이는 것

 

육우陸羽의 “자다법煮茶法”은 당시 보편화된 일반음료로써의 자다법을 한층 넘어선

茶道로써의 의미를 지닌 차茶를 달이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 하였다.

 

육우陸羽의 자다법煮茶法은 결코 쉽지 않다.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더욱 아리송하고 까다롭기만 하다.

 

이것이 바로 다도의 행다법行茶法의 효TL嚆矢이며 많은 다도를 하는 다인들이 흠모欽慕하여

배우고자 하지만 또한 제대로 이해하고 습득한 사람은 매우 드물 정도이다.

 

'행다법行茶法' 차를 달이거나 마시는 방법.

'효시嚆矢' 전쟁터에서 화살을 쏘아 개전開戰의 신호로 삼다라는 뜻으로 모든 일의 시초始初를 말함.

 

내용은 “차 굽기[灸茶]”를 시작으로 하여 찻잎을 쪄서 빻고 가루내기, 목탄(숯)의 품질,

최상급의 물 선택하기, 물의 끓는 정도에 따른 구분과 차를 끓이는 등의 복잡한 절차가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구다灸茶' 차를 솥에 볶는 것

 

►6之飮 차 마시기에는 음차飮茶(차를 마시는)의 역사적 기원과 차茶를 마시며 주의해야 할 방법인

“음차의 9難(9가지 어려움)”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다도茶道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거쳐야할 일종의 “육우陸羽식 점다법點茶法”이라 할 수 있다.

 

'점다법點茶法' 차완茶碗(차그릇)에 매우 고운 차.

가루차를 넣은 후 적당한 양의 끓인 물을 부어 교반攪拌(섞음)하여 마시는 것이다.

 

►차茶 생활문화

육우陸羽가 주장한 “차를 마시는[飮茶] 아홉 가지 어려움”은 다음과 같다.

첫째-차 만들기. 둘째-분별하기. 셋째-차 그릇. 넷째-불. 다섯째-물

여섯째-굽기. 일곱째-가루내기. 여덟째-달이기. 아홉째-마시기.

 

►7之事 차에 관한 일에서는 역사에 기록된 차茶에 얽힌 이야기들을 풍부한 문헌을 통해 고증하고 있다.

차의 효능에서부터 차의 명칭, 차의 습속習俗, 차 판매, 차에 얽힌 갖가지 역사적 사실과

전설 등등 차에 얽힌 이야기와 사실들이 수록되어 있다.

 

►8之出 차의 생산과 출고에서는 육우陸羽가 살았던 당唐나라 때의 각종 차茶의 생산지에 대해

지역별로 분류하여 상세히 밝히고 있다.

 

►9之略 차의 생략에서는 차茶 마시는 때와 장소, 그리고 마시는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생략해도 무방한 몇 가지 다기茶器와 절차를 상황에 따라 설명해 놓았다.

이어서 맨 끝 부분에서 “그러나 城邑 안에 사는 王公의 귀족들은 24가지 다기 중,

어느 한 가지만 없어도 차를 마시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十之圖 차의 그림에서는 위에서 설명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시 열거하면서 모두 차茶에 관한 일임을

다시 설명하고 이로써 “다경茶經”의 시작과 끝이 모두 완성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육우陸羽의 다도茶道 정신

검지덕儉之德 소박하고 검소한 진정한 육우陸羽의 다도정신

 

육우陸羽의 다도정신茶道精神을 살피기 전에 우선 “다도茶道”란 말의 어원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순서다.

여러 가지 茶에 관한 책을 보면 “茶道”에 대하여 많이 언급되어 있다.

그 내용들은 대부분 “茶道”의 추상적抽象的이고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어 현실적으로 누가 언제부터

“다도茶道”란 용어를 사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설명되어 있지 않다.

 

중국에서 “다도茶道”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문헌은 대체로

당대唐代 봉연封演의 저서 “봉씨문견기封氏聞見記”로 추정된다.

 

“봉씨문견기封氏聞見記”는 당唐나라 천보天寶 연간(742~756년)에 진사 봉연封演이 저술한 것이다.

그는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을 가리켜 “다론茶論”이라 말하고

차 마시는 행위에 대해서 “다도茶道”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 내용에 “초楚지방의 사람인 육홍점陸鴻點이 다론茶論을 짓고 차茶의 효능과 함께 차 달이기,

차 굽는 법을 말하고 다구茶具 24종을 만들어서 이를 수납受納 바구니에 소중히 담으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마음을 기울여 사모하고 호사가好事家는 한 벌을 집에 간직하였다.

 

또한 상백웅常伯雄이라는 자는 “홍점鴻漸”의 이론을 널리 윤색潤色하였고 이에 茶道가 크게 성행되어

고관대작들과 조정의 관리들은 차를 마시지 않는 자가 없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윤색潤色’ 사실을 과장하거나 미화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를 근거로 당대唐代에서부터 시작된 “다도茶道”의 창시자는 육우陸羽이지만

“茶道”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자는“봉연封演”임을 알 수 있다.

 

육우陸羽는 자신의 저술인 다경茶經에서

“차는 맛이 지극히 차서 행실이 정련되고 검소한 덕망 있는 사람이 마시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했다.

 

또한 “차의 성질은 검소하다.”고 말하고 있다.

“검儉”자에 대해서 상고上考해보면 공자 <論語 학이>편에서 공자가 주장한 사람의 인격형성의

다섯 가지 德性이 되는 “온溫・양良・공恭・검儉・양讓”에서 볼 수가 있다.

 

또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검은 약約이다.”라 하였고

일반적으로 “약約”은 예절에 밝고 공손하며 근면하다는 뜻이다.

 

<論語> 제1편 학이學而 10장

자금문子禽問 어자공왈於子貢曰 공자의 제자 자금子禽이 같은 제자인 자공子貢에게 물었다

부자夫子 지어시방야至於是邦也 “선생께서 이 나라에 이르시자

필문기정必聞其政 반드시 나라의 정치를 물으시는데

구지여求之與 이것은 스스로 찾아 물으시는 것입니까?

억여지여抑與之與 아니면 요긴한 부탁을 받아 하시는 것입니까?”

 

자공왈子貢曰 자공子貢이 대답했다.

부자온̖량̖공̖검̖양이득지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 부자지구지야夫子之求之也

기제이호인지구지여其諸異乎人之求之與

 

“선생께서는 따뜻하고 화목하고 착하고 삼가서 공손히 섬기며

검소하고 겸허한 덕망을 겸비하심으로써 나라의 일을 들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지위를 욕심내어 벼슬을 스스로 원한 것과는 틀립니다.”

 

단옥재段玉裁(1735-1815)의 주해註解에는 “약約은 함부로 사치하지 않는다.”라고 풀이했다.

‘단옥재段玉裁’ 청나라 때의 학자.

고증학자인 대동원戴東原 제자로서 왕염손王念孫과 더불어 대씨戴氏의 “단왕이가段王二家”라고 불린다.

설문학說文學의 시조始祖이며 한나라의 허신許愼이 지은 자서 <說文解字>의 주서注書 30권을 저술했다

‘설문학說文學’ 한자의 구조, 조직, 뜻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

 

이상에서 보듯 육우陸羽의 茶道정신은 “사치奢侈”를 완강히 거부하는 “검소한 德”이다.

육우陸羽의 검소한 茶道精神은 그가 어린 시절을 사찰에서 보냈던 성장배경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고 “육우의 茶道”가 무조건 검소하기만을 강조하고 형식과 예절에서 완전히 무시해 버린 것은 아니다.

앞서 거론한 “茶經” “9之略”에서 그는 “24器”를 모두 응용應用하고 사용했을 때 비로소 완전하게

정식의 차茶를 마시는 것임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최소한의 茶道의 형식과 예절을 강조한 것이다.

반면에 또 茶器를 다 갖출 수없는 산이나 들에서 거친 차를 마실 경우에는

굳이 규정된 “24器”를 다 사용하지 않아도 됨을 함께 말하였다.

즉 차를 마시는 사람이 처해진 환경과 상황에 따라 몇 가지를 생략할 수도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이는 형식에만 너무 얽매여서 茶의 내면적 정신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茶經의 곳곳에서 나타나는 “검지덕儉之德”이야말로 진정한 陸羽의 茶道 정신이라 할 수 있다.

물질과 정신이 둘이 아닌 하나 그러면서도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中庸의 도리다.

 

형식形式을 따라 예절禮節을 익히고 정신을 수양하면서도 굳이 그 형식에만 얽매이지 않는 걸림 없고

자유로운 검소한 덕성, 이것이야 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참된 茶道精神이 아닐까 생각한다.

‘검지덕儉之德’ 검소한고 겸손한 행위. 진정한 陸羽의 다도정신

/박영환 중국 사천대학 객좌교수, 중국항주차엽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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