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찰 수행에 대한 가르침 제1장
2013-12-29 17:59:14
제 1 장 바른 이해(정견正見)를 통한 행복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행복과 평화를 원한다.
사람들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끌어 주는 참된 길을 찾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이것을 찾으려고 생겨났다.
세상의 위대한 종교 가운데 하나가 불교인데 불교는 사람들을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해 준다.
괴로움의 원인
부처님은 괴로움(dukkha)의 원인을 발견했다.
그 분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것은 조건에 의존해서 발생한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그 어떠한 것도 원인 없이 생겨난 것은 없다.
붓다가 괴로움을 없애 버리려고 했을 때 그는 그 원인을 발견해야만 했다.
원인이 제거되었을 때 어떤 결과도 존재할 수가 없다.
일체지자(일체지자)이신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는 괴로움의 원인은 애착(애착; taṇhā)임을 발견했다.
탕하(taṇhā)라는 말의 의미는 탐욕⋅욕정⋅욕망⋅갈망 등이다.
불교 학자들은 ‘탕하’를 애착(애착; attachment)으로 번역했으며 이 말은 모든 형태의 욕망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탕하’에 대해서 영어로 ‘애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탕하 또는 애착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탕하가 있을 때 그곳에는 두카(괴로움)가 있다.
어떤 사람이 탕하를 없애 버릴 수 있을 때 그는 틀림없이 괴로움을 제거한다.
이 탕하도 또한 어떤 원인에 의존해서 생겨난다.
원인이 없다면 탕하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탕하는 하나의 정신적인 상태이며 정신의 조건 지워져 있는 한 과정이다.
일체지자이신 붓다는 애착(탕하)의 원인은 잘못된 견해(사견)임을 발견했다.
잘못된 견해란, 영혼⋅자아⋅‘나’⋅‘너’⋅인격 또는 개체 등에 대한 잘못된 견해이며
유신견(sakkāya-diṭṭhi) 또는 아견( atta-diṭṭhi)으로 알려져 있다.
유신견 또는 아견이, 괴로움을 야기시키는 탕하의 원인이다.
그러면 이 잘못된 견해(유신견 또는 아견)의 원인은 무엇인가 ?
일체지자이신 붓다는
정신(名 nāma)과 육체(色 rūpa)의 자연스런 흐름(과정)에 대한 無知(팔리어로 moha[痴] 또는 avijja[無明])가
영혼이나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의 원인임을 지적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과정을 그 진정한 본질의 측면에서 자각(realization)을 하거나 바르게 이해(正見)함으로써
우리는 무지를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게 된다.
그때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연기법)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고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무지는 원인이며 잘못된 견해(유신견 또는 아견)는 그 결과이다.
잘못된 견해는 원인이며 애착은 그 결과이다.
애착은 원인이며 괴로움은 그 결과이다.
비로소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정신과 육체의 과정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 바른 이해에 의해 무지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무지가 제거될 때, 영혼⋅자아⋅사람⋅존재에 대한 어떠한 잘못된 견해도 없어질 것이다.
이 잘못된 견해가 깨져 버렸을 때 그 어떠한 애착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애착이 없어져 버렸을 때 그 어떠한 괴로움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모든 종류의 괴로움이 존재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즉 괴로움의 소멸(滅諦 Nirodha-sacca)을 이룬 것이다.
잘못된 견해의 원인
마음과 몸의 과정에 대한 무지로 인해서 어떻게 영혼 또는 자아, 인간 또는 존재,
‘나’ 또는 ‘너’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생겨나는가,
그리고 어떻게 이 잘못된 견해 때문에 애착이 생겨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검토해 보아야 한다.
우리들이 (마음과 몸의) 두 과정을 그 참된 본질에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마음과 몸)을 어떤 사람⋅어떤 존재⋅영혼⋅자아라고 간주한다.
그때 그 사람⋅그 존재⋅그 ‘나’⋅그 ‘너’는 부자가 되거나 왕⋅여왕⋅대통령⋅수상⋅백만장자가 되려는 욕망을 지니게 된다.
여왕이나 대통령 등이 되려고 하는 이 욕망이 애착이다.
그것(애착)은 사람이나 존재, 영혼이나 자아, ‘나’와 ‘너’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생겨난다.
만일 우리가 이 욕망이나 애착을 뿌리 뽑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원인을 없애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원인이란 무엇인가 ?
욕망 또는 애착의 원인은 이미 전에 설명한 것과 같이 사람이나 존재,
영혼이나 자아, ‘나’와 ‘너’에 대한 잘못된 견해나 잘못된 개념이다.
따라서 잘못된 견해가 깨져 버렸을 때, 부자나 왕, 대통령 등이 되려고 하는 그 어떠한 애착도 생겨나지 않게 될 것이다.
무엇인가 되려고 하며 얻으려고 하고 무엇을 소유하려고 하는 욕망은
사람이나 존재, 영혼이나 자아, ‘나’와 ‘너’에 대한 잘못된 견해 또는 잘못된 개념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욕망이나 애착이 우리의 마음 속에 피어났을 때 그로 인해 온갖 괴로움이 생겨난다.
무정물無情物인 우리의 집에 집착할 때 우리는 우리의 집에 대해 걱정을 하게 된다.
집에 불이라도 나게 되면, 우리는 슬픔에 빠지게 된다.
슬픔은 주된 괴로움 가운데 하나이다.
이 괴로움은 집에 대한 우리의 애착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친척이나 친구, 아이들, 부모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을 때 이 애착 때문에도 또한 괴로움이 생기게 된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집착하고 있을 때 우리는 아이들의 건강과 교육 문제 등에 대해서 걱정을 하게 된다.
만일 우리의 아이들이 시험에 떨어졌을 때 우리는 걱정을 하게 되고, 유감스러워 하며 슬퍼하게 된다.
이러한 괴로움은 정신적인 괴로움 또는 정신적인 두카(dukkha)이며 우리의 아이들에 대한 애착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애착(taṇhā)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애착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육체적·정신적인 과정을 사람이나 존재, 영혼이나 자아, ‘나’와 ‘너’라고 간주하는 잘못된 개념에서 이 애착은 생겨난다.
인격이나 개체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개념이 파괴되어 버릴 때, 어떠한 애착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애착이 없을 때 어떠한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라
이 (마음과 몸의) 두 가지 과정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마음 챙김(알아차림 being mindful)에 의해서
그것의 내재적인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일체지자이신 붓다는 가르치셨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할 때
그것에 대해 분석함 없이
논리적으로 사고함 없이
철학적으로 생각함 없이
선입견 없이
그것이 실제로 발생하는 그대로 관찰하고 지켜보고 알아차려야(마음 챙겨야)만 한다.
우리는 매우 주의 깊어야만 하고 있는 그대로 그 대상에 대해서 마음 챙겨야 한다.
예를 들어 시계를 바라보라.
아주 주의 깊고 세심하게 시계를 관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그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가 그 시계에 대해서 아주 주의 깊게 밀착해서 관찰했을 때 우리는 그 시계의 상표, 디자인, 모양새를 본다.
(이때) 우리는 이것은 시계이며 상표 이름은 세이코이고 세계 시간표가 있다는 등등에 대해서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지 않는다면 또는 우리의 관찰이
“나는 이전에 이와 같은 시계를 본적이 있어. 상표 이름은 오메가였지”
라는 선입견적인 관념과 결합되어 있다면 시계를 보는 순간 우리는 오메가라고 간주해 버리게 될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가 그 시계를 주의 깊게 밀착해서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계를 볼 때 선입견적인 관념을 사용하곤 했다면 선입견적인 관념 때문에
우리는 그 시계에 대해서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만일 선입견적인 관념을 한 쪽에 놓아두고 단지 그것을 주의 깊게 밀착해서 관찰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즉 이것은 세이코이고 일제이며 또한 세계 시간표가 붙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시계를 관찰할 때 “오메가”라는 선입견적인 관념을 한 쪽에 놓아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마음-몸의 과정들을 그 진정한 본질에서 또는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분석해서도 그것들에 대해서 생각을 굴려서도 안 된다.
우리는 이리 저리 따져 보아서도(reason) 안되며 어떠한 지적인 지식도 어떤 선입견 적인 관념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한 쪽에 놓아두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몸에서 현재 무엇이 발생하고 있는가에 대해 단지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몸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
몸에서 뜨거움을 느낄 때, 우리는 뜨거움을 뜨거운 느낌으로 알아차려야(note) 한다.
몸에서 차가움을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을 차가운 느낌으로 알아차려야 한다.
통증을 느낄 때, 그것을 통증이라고 알아차려야 한다.
행복을 느낄 때, 그것을 행복이라고 알아차려야 한다.
분노를 느낄 때, 그것을 분노라고 알아차려야 한다.
비탄을 느낄 때, 그것을 비탄이라고 마음 챙겨야(알아차려야) 한다.
슬픔이나 실망을 느낄 때, 우리는 슬픔과 실망이라는 감정의 상태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be aware) 한다.
하나하나의 그리고 모든 정신적·육체적인 과정들을 그것들이 실제로 발생하는 대로 관찰해야만 하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그것들의 참된 본질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바른 이해에 의해 무지는 사라지게 된다.
무지가 제거되면 우리는 마음-몸의 과정을 사람, 존재, 영혼 또는 자아라고 간주하지 않게 된다.
만일 이러한 마음-몸의 과정을 단순한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파악(take)하게 된다면 어떠한 애착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애착이 깨져 버릴 때 우리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며 괴로움의 소멸(열반)을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 참된 본질에서의 마음-몸에 대한 마음 챙김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이 바로 일체지자이신 붓다가 “네 가지 마음 챙김(사념처)”에 대한 가르침(대념처경:장부) 또는 (염처경:중부))에서 설하신 길이다.
이 경전에서 일체지자이신 붓다는 정신과 육체의 현상에 대해 실제로 있는 그대로 마음을 챙기라고 가르쳤다.
마음-몸의 과정에 대해 마음 챙겨야 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다음의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육체적인 과정에 대한 마음 챙김(kāyānupassanā Satipaṭṭhāna)
2. 느낌 또는 감각에 대한 마음 챙김(Vedanānupassanā Satipaṭṭhāna)
3. 마음(의식)에 대한 마음 챙김(Cittānupassanā Satipaṭṭhāna)
4. 마음의 대상들에 대한 마음 챙김(Dhammānupassanā Satipaṭṭhāna)
선택 없는 알아차림
우리의 마음-몸의 과정에 대해서 마음 챙길 때
우리는 수행(명상)의 대상으로 어떤 특정한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과정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마음이 스스로 (마음 챙김의) 대상을 고르게 될 것이다.
만일 수행(명상)의 대상으로 어떤 특정한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과정을 선택한다면
이는 우리가 그 대상에 애착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명상)하고 있는 동안에
‘알아차리는 마음(noting mind)’이나 ‘관찰하는 마음(observing mind)’은 스스로 대상을 선택할 것이다.
(그 대상들은) 아마도 성공에 대한 행복감이나 고통스런 감각이나 또는 (호흡에 따라 일어나는) 복부의 움직임이 될 것이다.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의 초점을 맞추려고 하더라도 (육체의 어떤 부위의) 통증이 보다 뚜렷하고
보다 두드러지다면 마음은 그곳(복부의 움직임)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
‘알아차리는 마음(noting mind)’은 통증으로 달려가서 그것을 관찰하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보다 뚜렷한 느낌에 마음은 아주 강하게 쏠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상을 선택할 필요가 없고 단지 마음이 선택한 대상을 관찰해야만 한다.
주의 깊고 밀착된 알아차림을 통해서 통증이 사라졌다면 그때 마음은 가장 두드러진 다른 대상을 선택할 것이다.
만일 등 쪽의 가려운 감각이 복부의 움직임보다도 더욱 뚜렷하거나 더욱 분명하다면
마음은 가려운 감각으로 달려가서 그것을 ‘가려움’, 가려움, 가려움’ 하고 관찰하게 될 것이다.
강한 마음 챙김(strong mindfulness)과 깊은 마음 집중(deep concentration)에 의해서
가려운 감각이 사라졌을 때 마음은 (예컨대) 복부의 움직임을 그 대상으로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른 대상들보다도 더욱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만일 행복감이 복부의 움직임보다도 더욱 두드러지다면
마음은 행복감을 그 대상으로 선택해서 그것을 ‘행복, 행복, 행복’하고 관찰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비파사나 수행 또는 마음 챙김 수행의 핵심(principle)은
모든 정신적·육체적인 현상들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지켜보고, 알아차리는(마음 챙기는) 것이다.
이 마음 챙김 수행은 아주 단순하고 쉬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적인 괴로움의 소멸을 이루는데 있어서도 아주 효과적이다.
음식을 먹을 때, 먹는 행동에 수반되는 모든 행동, 모든 동작에 대해 알아차려야 한다.
팔을 뻗을 때, 우리는 팔을 뻗는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손이 숟가락이나 밥에 닿을 때, 닿는 감각을 관찰해야만 한다.
숟가락을 집을 때, 집는 감각을 관찰해야만 한다.
숟가락이 카레 속으로 들어갈 때, 들어가는 움직임을 관찰해야 한다.
숟가락으로 카레를 떴을 때, 그 동작을 관찰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먹는 행동에 수반되는 하나하나의 그리고 모든 동작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육체적인 과정이 완전히 자각되어야만 잘못된 견해의 원인인 무지가 제거되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목욕을 하는 동안에도 사무실이나 집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그에 수반되는 모든 동작이나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집중 수련기간(retreat) 동안 걷는 수행을 할 때,
발을 드는 움직임,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 내려놓는 움직임과 같은 발의 움직임을
밀착해서 정확하게, 실제로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
이름 붙이기
어떤 대상에 대해서 마음 챙길 때, 명칭이나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걷기 위해서 발을 들어 올릴 때, 우리는 그 동작에 ‘들어 올림’이라고 명칭을 붙여야 한다.
발을 앞으로 밀 때에는 우리는 ‘나아감’이라고 명칭을 붙여야 한다.
발을 내려놓을 때는, ‘내려놓음’하고 명칭을 붙여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들어 올림, 나아감, 내려 놓음’(또는 ‘듦, 나아감, 놓음’)
‘들어 올림, 나아감, 내려 놓음’(하고 명칭을 붙여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린다.)
명칭을 붙이거나 이름을 붙임에 의해서 마음은 (마음 챙김) 수행의 대상에 밀착해서 정확하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명칭을 붙이는 일은)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을 수행의 대상에 집중하는(focus) 데에도 또한 아주 도움이 된다.
하지만 수행의 대상에 명칭이나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는 수행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명칭을 붙이는) 대신에 그들은 단지 대상을 관찰하기만 한다.
그들은 단지 발의 움직임을 발을 들어올리는 동작의 바로 처음 순간부터 발을 내려놓는 동작의 마지막 순간까지 단지 관찰하기만 한다.
마음은 생각하거나 분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아주 밀착해서 발의 움직임을 따라잡아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하면 마음 집중을 이전보다 더욱 깊게 향상시킬 수 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때에는 마음은 아주 자주 헤메이곤 한다.
마음이 헤맬 때마다 여러분은 그 마음을 따라 잡아 관찰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집안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면 그 생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마음 속으로 ‘생각함, 생각함, 생각함’ 하고 알아차려야 한다.
(이렇게 알아차림에 의해서) 처음의 (집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게 되면
다시 걷는 동작으로 돌아와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고 보통 때처럼 알아차리기를 재개해야 한다.
사마타와 비파사나(마음의 고요[止]와 통찰 지혜[觀])
이제 우리는 사마타 수행과 비파사나 수행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사마타란, 마음 집중, 평온, 고요함을 의미한다.
마음이 수행의 대상에 깊게 집중되었을 때, 마음은 평온해지고 고요해진다.
사마타 수행의 목적은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깊은 마음의 집중을 얻는데 있다.
따라서 사마타 수행의 결과는 안지정(안지정; appanā-samādhi, jhāna)
또는 근접정(근접정; upacārā-samādhi)과 같은 깊은 마음 집중(삼매 또는 정)을 얻는 것이다.
마음이 수행의 대상에 깊게 집중되어 있을 때,
욕정, 탐욕, 분노, 욕망, 자만, 무지 등과 같은 모든 번뇌들은, 대상에 몰입해 있는 마음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된다.
마음이 모든 번뇌나 덮개에서 벗어나게 될 때, 우리는 평온함, 고요함, 행복, 평화로움을 느낀다.
따라서 사마타 수행의 결과는 안지정(안지정) 또는 근접정(근접정)과 같은
깊은 마음 집중(삼매 또는 정)을 얻음을 통한 어느 정도의 행복감이다.
하지만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정신적·육체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할 수는 없다.
사마타를 닦는 수행자는 수행의 대상으로서 어떤 장치 또는 카시나(kasina)를 만들어야만 한다.
예를 들면 청정도론의 주석서에 따르면 어떤 색깔의 카시나를 만들기 위해서
그는 방바닥에서 60cm 정도의 높이의 벽에, 붉은 색 원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접시 크기만한 붉은 원을 만들되 색깔은 전체가 고르고 부드러운 순수한 붉은 색이어야만 한다.
이러한 장치가 만들어지면 그는 벽에서 60cm 정도 떨어진 방바닥에 앉아서 붉은 원을 보면서 마음을 그곳에 집중해야 한다.
마음이 헤매이게 되면 헤매이는 마음을 따라가서는 안 되며 마음을 수행의 대상 즉 붉은 원으로 가져가야 한다.
붉은 원에 마음을 집중시켜 ‘붉음, 붉음, 붉음’ 하면서 그것을 관찰해야 한다.
이것이 간략한 사마타 수행의 방법이다.
비파사나 수행의 경우에 그 목적은
정신과 육체의 과정을 그 참된 본질에서 올바르게 이해함을 통해서 괴로움의 소멸을 얻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마음 집중을 필요로 한다.
이 마음 집중은 마음-몸에 대한 지속적이며, 끊어짐 없는 마음 챙김을 통해서 얻어진다.
따라서 (비파사나) 수행에는 다양한 대상이 있다.
행복감도 수행의 대상이며 분노, 슬픔, 고통스런 감각, 뻣뻣함, 저림 등도 수행의 대상이다.
어떤 정신적 또는 육체적인 과정도 수행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사마타 수행과 비파사나 수행의 목적과 결과는 그 방법들이 다르듯이 서로 다르다.
앞에서 설명했던 내용으로 되돌아 가 보자.
걸을 때, 우리는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의 발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수행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우리의 마음은 다리(의 움직임)에 제대로 집중되어 있지 않다.
마음이 (이런 저런 생각으로) 헤맬 때
우리는 그 마음을 따라잡아서 헤매는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
헤매는 마음이 사라지고 난 후에라야 우리는 평상시처럼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려 나간다.
마음이 발의 움직임에 잘 집중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알아차려야 할 것은 들고, 나아가고, 내려놓는 발의 움직임이지,
발의 겉모양이나 걷는 동안의 몸의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
발을 들어 올릴 때, 마음은 그 동작을 들어올림이라고 알아차려야 한다.
발이 앞으로 나아갈 때, 마음은 그 동작을 나아감이라고 알아차려야 한다.
발을 내려놓을 때, 마음은 그 동작을 내려놓음이라고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가 이 동작들을 자연스런 움직임의 과정이라고 자각하게 될 때,
우리는 또한 마음이 그 동작들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게 된다.
들어 올리는 움직임은 하나의 과정이며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또 다른 하나의 과정이다.
나아가는 움직임은 하나의 과정이며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또 다른 하나의 과정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정신적 현상과 육체적 현상의 두 과정을 완전하게 자각한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과정을 단지 정신적·육체적 현상의 자연스런 과정이라고 올바르게 이해한다.
우리는 그 과정들을 사람이니 존재니, ‘나’니, ‘너’니 하고 간주하지 않는다.
그때 인격⋅개체⋅영혼 또는 자아라고 하는 그 어떠한 잘못된 개념도 생겨나지 않는다.
이러한 잘못된 개념이 깨져 버릴 때,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어떠한 애착이나 욕망도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애착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애착의 결과인 어떠한 괴로움도 생기지 않는다.
발을 들어 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는 움직임의 과정을 단지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괴로움의 소멸을 얻는다.
우리가 정진해 나아가면 우리의 마음 챙김은 더욱 순일해지고 끊어지지 않고 강해진다.
마음 챙김이 순일해지고 강해지면 마음 집중은 더욱 깊어지고 강력해진다.
마음 집중이 깊어지고 강력해질 때 정신적 과정과 육체적 과정에 대한 우리의 자각 또는 꿰뚫어 보는 지혜는 한층 명료해 진다.
이때가 되면 들어 올리는 움직임의 많은 단계들(series)이 순차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자각하게 되며
나아가는 움직임의 많은 단계들이 순차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자각하게 되며
내려놓는 움직임의 많은 단계들이 순차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을 하는 동안에(움직이는) 과정의 그 어떠한 부분들도 지속적이거나 영속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움직임의 모든 과정은 변하기(anicca 無常) 쉽다.
즉 아주 빠르게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 것들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좋은 과정이 아니라 그리 달갑지 않은(bad) 과정들이다.
이때 우리는 정신적·육체적 과정의 세 가지 특성 가운데 하나인 괴로움(dukkha 苦)을 자각하게 된다.
우리가 이러한 육체적인 움직임의 과정의 無常하고 苦인 본질을 자각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영속적인 실체 즉 사람, 존재, 영혼 또는 자아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육체적·정신적 과정의 본질로 아나타(anatta 無我)이며 영혼이 없음(no-soul)이며 무아(no-self)이며 에고가 없음(no-ego)이다.
이렇게 우리는 정신적·육체적 현상의 세 가지 특성인
無常(anicca), 苦(dukkha), 무영혼 또는 無我(anatta)를 깨닫는다.
고귀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자각
이러한 방식으로 수행자는 정신적·육체적 과정에 대한 꿰뚫어 보는 앎(vipassanā ñāna ; insight knowledge)의 모든 단계들을 순차적으로 밟아 나아간다.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고 난 후 그는 첫 번째 道인 수다원도(sotāpatti-Magga)의 깨달음을 얻는다.
첫 번째 도를 얻은 순간 수행자는 4가지 고귀한 진리를 깨닫는다.
즉 괴로움의 진리(苦諦 Dukkha-sacca)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集諦 Samudaya-sacca)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諦 Nirodha-sacca)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道諦 Magga-sacca)
수행자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정신적·육체적 현상을 깨달을 때 이는 곧 그가 괴로움의 진리를 깨달았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괴로움의 원인인 애착이 제거되어 수행자는 괴로움이 소멸해 버린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고귀한 여덟 가지 길(八正道)
(깨달음을 얻은) 그 순간 그는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을 완전하게 갖추게 된다.
1. 바른 이해 (정견正見 Sammā-diṭṭhi)
2. 바른 사유 (정사正思 Sammā-sankappa)
3. 바른 말 (정어正語 Sammā-vācā)
4. 바른 행위 (정업正業 Sammā-kammanta)
5. 바른 생계 (정명正命 Sammā-ājīva)
6. 바른 노력 (정정진正精進 Sammā-vāyāma)
7. 바른 마음 챙김 (정념正念 Sammā-sati)
8. 바른 마음 집중 (정정正定 Sammā-samādhi)
수행자가 정신적·육체적 과정이라는 수행의 대상에 대해서 폭넓게(large extent)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을 때부터
(비록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이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을 닦아 가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
마음을 발의 움직임에 집중시킬 때 그는 마음으로 노력을 기우려야만 한다.
이 마음의 노력이 ‘바른 노력(正精進 Sammā-vāyāma)’이다.
이 마음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그는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게 되고
따라서 그는 발의 움직임에 제대로 마음을 챙길 수 있게 된다.
이 마음 챙김이 ‘바른 마음 챙김 (正念 Sammā-sati)’이다.
왜냐하면 이 마음 챙김에 의해서 정신적·육체적 과정에 대한 바른 이해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이 발의 움직임에 집중해 있을 때 마음은 한 순간 동안 그 대상에 집중하게 된다(찰나삼매).
하지만 마음 집중이 지속되어 끊어짐 없고, 더욱 강해지고, 더욱 깊어지게 되면
그 마음 집중이 ‘바른 마음 집중(正定 Sammā-samādhi)’이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 마음이 헤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수행자가 많은 노력을 기우리더라도 처음에는 마음이 발의 움직임과 함께 하지 않는다.
그때 발의 움직임에 대한 마음 챙김과 함께 생겨나는 하나의 마음 상태가 있어서 마음을 수행의 대상인 발의 움직임으로 인도한다.
수행의 대상으로 마음을 인도하는 이 마음 상태가 ‘바른 사유(正思 Sammā-sankappa)’이다.
‘바른 사유’의 기능은 수행의 대상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수행의 대상인 발의 움직임에 마음은 잘 집중하게 된다.
그때 마음은 육체적인 움직임의 과정인 참된 본질로 꿰뚫고 들어가게 되어 자연스런 과정으로 그 움직임을 알게 된다.
자연스런 과정으로서 (발의) 움직임에 대한 이 앎 또는 이 이해가 ‘바른 이해(正見 Sammā-diṭṭhi)’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발의 움직임에 마음을 챙길 때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의 5가지 정신적인 요소를 닦아 온 것이 된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1. 바른 노력 (정정진正精進 Sammā-vāyāma)
2. 바른 마음 챙김 (정념正念 Sammā-sati)
3. 바른 마음 집중 (정정正定 Sammā-samādhi)
4. 바른 사유 (정사正思 Sammā-saṅkappa)
5. 바른 이해 (정견正見 Sammā-diṭṭhi)
이 다섯 가지 정신적인 요소들은 마음-몸의 과정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마음을 챙기는 일로 모두 귀결된다.
‘마음 챙김’ 수행을 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잘못된 말, 잘못된 행동, 잘못된 생각을 삼가게 된다.
잘못된 말을 삼가는 것은 바로 ‘바른 말(正語 Sammā-vācā)’을 뜻한다.
잘못된 행동을 삼가는 것은 바로 ‘바른 행위(正業 Sammā-kammanta)’를 뜻한다.
잘못된 생각을 삼가는 것은 ‘바른 생각(正命 Sammā-ājīva)’을 뜻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모든 정신적 또는 육체적인 과정에 대해서 마음 챙기고 있는 동안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의 여덟 가지 정신적인 요소가 모두 갖추게 된다.
우리가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을 닦아 나갈 때 우리는 바른 이해(正見)라는 고귀한 여덟 가지 길 가운데 하나인 요소의 힘으로
잘못된 견해(유신견 또는 아견)를 없애 버릴 수 있다.
따라서 수행자가 첫 번째 道인 수타원도에 들어갈 때 그는 고귀한 여덟 가지 길 즉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게 하는 도의 진리(道諦 Magga-sacca)를 완전하게 갖추게 된다.
이것이 정신적·육체적 과정에 대해 그 참된 본질에서 마음 챙김을 닦는 것에 의해서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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