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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Nikāya

통찰 수행에 대한 가르침 제 5장

통찰 수행에 대한 가르침 제 5장

2013-12-29 22:07:32

 

제 5장 청정의 일곱 단계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청정의 일곱 단계를 거처야만 한다.

 

도덕적 행위의 청정

첫 번째는 戒淸淨(sīla-visuddhi) 도덕적 행위의 청정이다.

 

수행자는 8계가 아니라면 최소한 5계를 지켜야 한다.

5계의 세 번째가 잘못된 성행위를 삼가는 것임에 반하여 8계의 세 번째는 모든 성행위를 삼가는 것이다.

 

만일 수행자가 성행위를 삼가지 않는다면

그의 마음은 감각적 욕망(kāmacchanda-nīvaraṇa)의 덮개의 의해서 더렵혀질 것이다.

오직 마음이 모든 덮개에서 청정하게 되었을 때에만 수행자는 정신적·육체적 과정을 그 본질에서 자각할 수 있다.

 

물론 수행자가 8계를 지킨다면 더욱 좋다.

만일 계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맛, 음식, 보이는 대상, 들리는 대상, 냄새 그리고 감촉의 대상에 대한 욕망

- 5가지 감각적 욕망이 그들의 마음 속에 생겨날 것이다.

 

8戒를 지킴에 의해서 자신의 행위와 말을 정화해서 도덕적 행위의 청정을 이루게 된다.

도덕적인 행위가 청정해지면 마음도 또한 어느 정도 청정해진다.

 

마음이 청정해지면 마음은 고요해지고, 맑아지며, 평온해지고 행복해지며 수행의 대상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때 수행자는 두 번째의 청정인 마음의 청정 즉 心淸淨(Citta-visuddhi)을 얻게 된다.

 

부처님의 제자였던 우띠야(Uttiya) 존자가 병에 걸려 누워있을 때 부처님이 문병 와서 병의 차도를 묻는다.

우띠야 존자는 부처님에게 자신의 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존이시여,

제 병은 회복되지는 않고 점점 악화되고 있습니다.

오늘을 넘길지 내일을 넘길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저는 죽기 전에 네 번째의 깨달음인 아라한과를 얻어 모든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한 수행을 하고 싶습니다.

부디 제가 아라한과를 얻기 위한 수행을 향상시킬 수 있는 짧은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부처님이 말씀했다.

 

우띠야여,

너는 시작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시작이 청정해지면 너는 그때 아라한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체지자이신 부처님은 다음의 물음을 던졌다.

“시작이란 무엇인가?”

 

그리고는 스스로 답하였다.

“여기에서 시작이란 정화된 도덕적인 행위(戒)와 바른 견해(正見)를 말한다.

바른 견해란 인과의 법칙 또는 업의 법칙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일체지자이신 부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우띠야여, 너는 너의 도덕적인 행위와 바른 견해를 청정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는 정화된 도덕적인 행위를 바탕으로 해서 네 가지 마음 챙김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수행하면 너는 괴로움의 소멸을 얻게 될 것이다.

 

일체지자이신 부처님은 戒 즉 도덕적 행위의 청정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파사나 뿐 만 아니라 마음 집중에서도 향상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이었다.

도덕적 행위가 청정해질 때 마음은 고요하고, 맑아지며, 행복해진다.

 

(도덕적 행위의 청정을 이룬 후에) 마음 챙김을 닦는다면

정신적·육체적 과정의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쉽게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다.

따라서 도덕적 행위의 청정은 수행자가 향상을 이루기 위해 갖추어야 할 선결 조건이다.

 

마음의 청정

두 번째 청정은 마음의 청정(心淸淨 Citta-visuddhi)이다.

만일 우리가 꿰뚫어 보는 앎을 얻기를 원한다면 마음은 모든 번뇌로부터 청정해져야 한다.

 

마음이 어떠한 정신적 또는 육체적인 대상에 대해서도 잘 집중되어 있을 때 이러한 모든 덮개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을 마음의 청정이라고 한다.

 

이 청정을 얻고서야 마음은 정신적·육체적 과정을 그 참된 본질에서 꿰뚫고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제일 먼저 수행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정신적 과정과 육체적 과정(名色 nāma-rūpa) 사이를 구별하게 된다.

이 앎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구별에 대한 앎(名色區別知 nāmarūpapariccheda-ñāṇa)이라고 한다.

 

견해의 청정

세 번째는 견해의 청정(見淸淨 Diṭṭhi-visuddhi)이다.

 

수행자가 정신적·육체적 과정의 참된 본질을 꿰뚫어 알게 될 때

그는 그 과정들을 사람, 존재, 영혼 또는 자아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때 그의 견해는 청정하게 되어 견해의 청정을 얻게 된다.

 

의심을 극복하는 청정

네 번째는 의심을 극복하는 청정(도의청정 Kankhāvitaraṇa-visuddhi)이다.

 

캉카(kankha)는 의심을 뜻하고 위숫디(visuddhi)는 청정을 뜻한다.

따라서 전체의 의미는 의심을 극복하는 청정이다.

 

수행자가 두 번째 단계의 꿰뚫어 보는 앎- 원인과 결과에 대한 앎(연파악청정 Paccayapariggaha-visuddhi)을 얻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전생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게 된다.

 

즉 의심을 극복한 것이다.

이것을 의심을 극복하는 청정이라고 한다.

이 앎을 얻기 위해서 수행자는 모든 행동과 동작을 하기 전에 각각의 의도, 바람 또는 원하는 것을 관찰해야 한다.

 

모든 행동에는 의도, 바람, 원함이 앞선다.

이것이 우리들이 모든 행동과 동작을 하기 전에 각각의 의도에 대해서 마음 챙겨야 하는 이유이다.

 

발을 들어 올리려는 의도가 있을 때 우리는 그 의도를 ‘의도함, 의도함’ 하고 알아차려야 하며

그리고 난 후 ‘올림, 올림’ 하고 동작을 알아차린다.

 

팔을 구부리려는 의도가 있을 때는 그 의도를 ‘의도함, 의도함’ 하고 알아차려야 하며

그리고 나서 ‘구부림, 구부림’ 하고 알아차린다.

 

음식을 먹을 때에는 우리는 입을 벌리고 음식을 먹으려는 의도를 지닌다.

그때 맨 먼저 ‘의도함, 의도함’ 하고 알아차려야 하며 다음에 ‘벌림, 벌림’ 하고 알아차린다.

입을 벌리는 동작에 있어서 의도는 원인이고 입을 벌리는 것은 그 결과이다.

 

여기에 오려고 하는 바램이나 원함이 없었다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여기에 올 수 있었겠는가?

온 행동은 결과이고 의도는 원인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왜 지금 의자에 앉아 있는가?

그렇다,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분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다.

 

앉아 있는 주체(sitter)가 어디 따로 있는가?

만일 여러분이 의자에 한 사람이 앉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병원에서 시신을 가져와서 의자에 앉혀 놓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시체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앉아 있을 수 없다.

정신적 과정인 의도만이 행동이나 동작을 일으킨다.

 

그러면 앉아 있는 자태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사미인가, 비구인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앉아 있는 자태에는 바람의 요소(風界 vayo-dhātu 내적·외적인 바람의 요소)에 의해서

지탱되어 있는 육체적인 과정이 있다.

 

앉아 있음은 육체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우리가 앉고자 할 때 먼저 우리는 ‘의도, 의도’ 하고 알아차려야 하며 그 후에 ‘앉음, 앉음, 앉음’ 하고 알아차린다.

모든 앉는 동작들도 의도를 알아차린 후에 관찰되어야 한다.

 

팔을 구부릴 때 그 의도를 알아차려야 하며 그리고 나서 팔을 구부리는 동작을 관찰해야 한다.

팔을 뻗을 때 먼저 그 의도를 알아차려야 하며 그리고 나서 뻗는 동작을 ‘뻗음, 뻗음, 뻗음’ 하고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의 마음 집중이 충분히 깊어졌을 때 의도와 그에 따른 행동을 알아차림에 의해서

우리는 어떤 것도 원인 없이는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모든 것은 원인에 의존해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이른바 사람, 남자, 여자라고 불리는 것은 단지 원인과 결과의 과정일 뿐이다.

 

(불변하는) 행동의 주체(doer)는 없다.

아무도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다.

 

만일 앉아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을 有身見 또는 我見 -행위자에 대한 잘못된 견해- 이라고 한다.

만일 우리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완전하게 자각한다면 우리가 자각한 것은 단지 자연스런 과정일 뿐이다.

 

그러면 거기에는 대통령이 된 어떤 사람도 없고 왕이 된 어떤 사람도 없다.

있는 것은 오직 원인과 결과의 과정뿐이다.

 

그때 우리는 자신의 과거 전생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도 가지지 않게 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전생에 대한 의심을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을 의심을 극복하는 청정이라고 한다.

 

어떤 수행자들은 모든 행동을 하기 전에 의도를 관찰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들에게는 충분한 인내심이 없기 때문이다.

 

(의도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행동하고 동작을 취할 때 성급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끈기를 지니고 행동하면 우리는 모든 행동과 동작을 하기 전에 의도를 관찰할 수 있다.

 

발을 들어올리기 전에 의도를 관찰할 때

우리는 의도가 어떻게 발을 들어 올리는 동작과 관련되어 있는가를 자각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발을 앞으로 내밀기 전에 의도를 관찰한다면

우리는 의도가 어떻게 발을 내미는 동작과 관련되어 있는가를 자각하게 된다.

 

발을 내려놓기 전에 의도를 관찰한다면

우리는 의도가 어떻게 발을 내려놓는 동작과 관련되어 있는가를 자각하게 된다.

 

우리가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자각하게 될 때

우리는 거의 완전하게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 내부에 영속적인 어떤 한 인간이나 실체가 있지는 않은가라는 의심을 극복하게 된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단지 원인과 결과의 과정일 뿐이다.

 

도와 도가 아닌 것에 대한 앎과 봄의 청정

다섯 번째 청정은 도와 도가 아닌 것에 대한 앎과 봄의 청정(道非道知見淸淨 Maggāmagga-ñāṇadassaṇa-visuddhi)이다.

 

이 단계의 꿰뚫어 보는 앎에서는 여러분은 아주 좋은 경험들을 하게 된다.

경쾌함, 행복, 고요함, 평온함 등등 어떤 때는 여러분의 몸이 빛이 된 듯이 느끼면서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고 공중을 날아다니는 듯한 느낌도 들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 챙김(情念)은 아주 예민해져 있다.

여러분의 정진력(正精進)은 굳게 자리 잡고 있다.

 

느슨하지도 않고, 너무 강하지도 않으며, 너무 경직되어 있지도 않다.

여러분의 정진력은 조화롭고, 굳건하며, 확고하다.

여러분의 마음 집중(正定)은 깊어서 여러분은 평화로움, 평온, 맑음, 고요함, 행복, 희열 등등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들은 수행자들이 통과해 지나가야 하는 아주 좋은 상태이다.

만일 수행자가 꾸준히 수행한다면 이러한 상태는 약 2주일 정도 경험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수행자들은 1주일 안에 이 상태를 통과해 가 버린다.

 

이러한 좋은 경험을 하게 되면 수행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열반임에 틀림없다.

 

이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전에 이러한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

백만 달러보다 더 좋다.

 

이제 나는 열반을 얻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더 이상 나가 지지 않는다.

이 경험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한다.

이 이상 더 나아가게 되면 나는 열반을 넘어가 버린다고.

 

만일 수행자가 이 상태를 열반이라고 붙들고 있는 다면 이것은 잘못된 길(非道 amagga)이다.

그러므로 그는 계속해서 수행하고 꾸준히 닦아 나가야 한다.

이것은 단지 사소하고 부수적인 경험에 불과하고 수행자는 이에 만족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수행을 계속해 나아가야 한다.

 

수행도에 대한 앎과 봄의 청정

여섯 번째 청정은 수행도에 대한 앎과 봄의 청정(行道知見淸淨 paṭipadā-ñāṇa dassaṇa-visuddhi)이다.

 

‘파티파다(paṭipadā)’는 수행의 과정이란 뜻이며 ‘냐나(ñāṇa)’는 앎, ‘다싸나(dassaṇa)’는 본다는 뜻이다.

냐나와 다싸나는 여기에서는 대략 같은 의미이다.

 

꿰뚫어 봄에 중점을 두기 위해서 경전에서는 앎과 봄이라는 두 말을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따라서 행도지견청정(paṭipadā-ñāṇadassaṇa-visuddhi)은 수행의 과정에 대한 앎과 봄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道非道知見淸淨을 지나왔을 때

우리는 아라한과 또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바른 길에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잘못된 길 위에 있다면 道非道知見淸淨에서 멈추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른 길에 서 있기 때문에 꿰뚫어 보는 앎의 아홉 번째 단계를 통과해서 나아가야 하며

목적지로 다가가고 있는 도중이므로 우리의 수행 과정이 올바르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수행 과정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을 품을 필요가 없다.

그 의심은 수행도에 대한 앎과 봄의 청정(行道知見淸淨)에 의해서 제거된 것이다.

그때 바른 수행도에 대한 앎과 봄의 청정이 갖추어진 것이다.

 

이 상태에 이르렀을 때 여러분은 수순지(Anuloma-ñāṇa)를 얻은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경험은

낮은 단계의 꿰뚫어 보는 앎과 보다 높은 단계의 꿰뚫어 보는 앎에 따라 순차적으로 얻어졌기 때문이다.

 

성숙에 대한 앎

우리가 수행을 계속해 나간다면 우리는 곧 경계선에 다가갈 것이다.

두 세 찰나 사이에 우리는 그 경계선에 도착해서 그 위에 서 있는다.

 

여기에서 말하는 경계선은 凡夫(puthujjana)와 聖人(ariya) 사이의 경계를 말한다.

여러분이 경계선에 서 있다면 앞으로 나아가겠는가, 뒤 돌아가겠는가?

 

만일 뒤돌아 가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의 주의력은 과거를 향할 것이며,

만일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주의력도 앞으로 향할 것이다.

 

앞이란 형성된 것들(諸行)의 소멸 즉 모든 정신적인 현상(名 nāma)과 육체적인 현상(色 rūpa)의 소멸을 말한다.

경계선 또는 접경에 서 있을 때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뒤뿐만 아니라 앞도 바라보게 된다.

 

그때 여러분은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앞으로 나아가면 모든 괴로움이 소멸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가?”

 

그리고는 여러분은 이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대답은 ‘그렇다’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수많은 劫 동안에 괴로움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劫’이라는 말은 헤아릴 수 없는 존재의 수이다.

 

여러분이 경계선에 있을 때

“괴로움의 굴레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존재 양식으로 괴로움을 받아 왔구나.

이 정도로 이제 괴로움은 충분히 겪었어. 이제 괴로움에 종지부를 찍어야겠다.”

하고 여러분의 과거 경험을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바로 그때 여러분의 주의력은 괴로움의 소멸로 향한다.

이 경계선의 앎을 종성지(Gotrabhū-ñāṇa)라고 한다.

‘종성(gotra)’이란 범부 또는 전래된 것을 말한다.

 

이 접경에서 범부의 전래물은 완전하게 끊어져 버리게 된다.

그때,더 이상 범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이 경계선을 한번 통과하기만 하면, 여러분은 성인이 된다.

범부의 家系를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냐나포니카(Nyanaponika) 스님이 이 말을 成熟知또는 성숙에 대한 앎으로 번역했다.

왜냐하면 수행자의 앎이 道(magga)를 얻을 만큼 충분히 무르익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 말을 우리는 범부의 가계를 끊어 버린 앎이라고 문자 그대로 번역할 수 있다.

범부의 가계가 끊어져 버릴 때 수행자는 수타원도의 앎(sotāpatti-magga-ñāṇa)을 얻어서 고귀한 사람, 성인이 된다.

성숙에 대한 경계선의 앎을 얻고 난 직후 사성제를 완전하게 자각하는 道知(Magga-ñāṇa)를 얻는다.

 

괴로움의 진리(苦諦),

괴로움 발생의 진리(集諦),

괴로움 소멸의 진리(滅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道諦).

 

앎과 봄의 청정

사성제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의 진리에 대한 앎과 봄이 청정해진다.

이 꿰뚫어 보는 앎을 知見淸淨(Ñāṇadassaṇa-visuddhi) 즉 앎과 봄의 청정이라고 한다.

 

일곱 번째 청정을 첫 번째 도인 수타원의 앎, 또는 지견청정이라고 한다.

냐나(ñāṇa)는 앎, 다싸나(dassaṇa)는 봄, 위숫디(visuddhi)는 청정을 말한다.

 

여러분이 일곱 번째 청정을 얻었을 때 여러분은 수타원(sotāppana)이 된 것이다.

소타(sotā)란 흐름을 뜻하고 아판나(appana)는 들어감을 뜻한다.

따라서 ‘수타원(소타판나)’은 흐름에 들어간 자(예류預流=入流)라는 의미이다.

즉 고귀한 八正道(팔지성도)의 흐름 속에 들어갔다는 의미이다.

오직 이때에만 여러분은 지견청정(Ñāṇadassaṇa-visuddhi) - 앎과 봄의 청정을 이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