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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Nikāya

통찰 수행에 대한 가르침 제 3장

통찰 수행에 대한 가르침 제 3장

2013-12-29 21:16:44

 

제 3장 마음 챙김 수행의 일곱 가지 이익

 

부처님이 가르치신 ‘마음 챙김 수행’의 일곱 가지 이익은 대념처경에 설해져 있다.

이에 대해 설명하기 앞서 먼저 불교의 4가지 측면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해 보려고 한다.

 

이 4가지 측면이란 다음과 같다.

1. 불교의 신앙적인(헌신적인) 측면

2. 불교의 윤리적인 측면

3. 불교의 도덕적인 측면

4. (체험적인 측면을 포함한) 불교의 실천적인 측면

 

신앙적인 측면

불교의 신앙적인(헌신적인) 측면은 의례와 의식, 경전이나 호주(護呪 paritta)의 독경,

음식물이나 가사(승복)를 공양하는 것과 같이 꽃이나 향을 공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이러한 좋은 행위들을 할 때 우리들은 믿음(信心 śraddha[Sanskrit], saddha[Pāli])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들을 한다.

 

삿다saddha라는 말은 영어로 번역하기 어렵다.

팔리어의 ‘삿다’라는 말에 들어맞는 영어는 없다.

우리가 삿다를 ‘믿음(faith)’으로 번역하면 믿음이라는 말은 그 진정한 의미를 전부 표현하지 못한다.

우리가 이 말을 ‘확신(confidence)’이라고 번역하더라도 또한 그 진정한 의미를 표현하지 못한다.

우리는 삿다의 완전한 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 한 단어의 영어를 찾을 수 없다.

 

나에게는 삿다라는 말의 의미는 法(Dhamma)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한 믿음(belief)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가 종교적인 의식을 할 때 우리는 三寶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한다.

우리는 붓다(佛), 담마(法 가르침), 상가(僧 승단)를 믿는다.

 

우리는 부처님이 최상의 깨달음을 통해서 모든 번뇌를 없애 버렸으며

따라서 공양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분(아라한)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분은 스스로 노력해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붓다이었지 다른 스승으로부터 담마(法)를 배웠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붓다를 이런 입장에서 믿는다.

 

붓다는 우리에게 행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법을 가르쳤고

모든 종류의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가르쳤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가르침과 길을 따른다면

우리는 분명히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고 괴로움을 제거한다는 사실을 믿는다.

이 이유 때문에 우리는 담마를 믿는다.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상가를 믿는다.

우리가 상가라고 말할 때 이는 아리야 상가 즉 네 단계의 道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얻은 고귀한 상가(성중)를 의미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이 말은

세간 적인 상가(Sammuti-sangha 번뇌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승려들)를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삼보 - 붓다, 담마, 상가에 귀의한다.

 

우리는 또한 경전이나 호주(護呪)를 독송하는 것에 의해서

괴로움의 소멸로 이끌어 주는 공덕 있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공덕 있는 행위를 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신앙적인 측면을 이룬다.

하지만 우리가 불교의 핵심을 맛보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이러한 신앙적인 측면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보다 높은 측면을 실천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윤리적인 측면

불교의 두 번째 측면은 윤리적인 측면이다.

이것은 행동과 말과 마음의 정화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다.

불교의 윤리적인 측면에 관한 가르침은 많이 있다.

 

이러한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는 다음 생에서뿐만 아니라

현생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지만 괴로움을 완전하게 제거할 수는 없다.

 

불교의 윤리적인 측면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종류의 악한 행위를 삼가는 것,

2. 공덕 있거나 선한 행위를 실행하는 것,

3. 모든 번뇌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

 

이 3가지 부분의 윤리적인 측면은 일체지자이신 붓다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며 모든 붓다의 가르침이다.

만일 우리가 이 가르침을 따른다면 우리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악한 행위를 삼간다면 어떠한 나쁜 과보에 의해서도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번뇌로부터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비파사나 수행뿐만 아니라 사마타 수행을 닦아야 한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 선정에 들어 있는 동안에만 마음은 정화되지만

선정에 들어 있지 않을 때에는 번뇌가 다시 우리들을 공격해 온다.

 

만일 마음-몸의 과정을 그 참된 본질에서 자각함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정화했다면 번뇌는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정신적·육체적인 현상에 대한 자각이나 지혜를 ‘꿰뚫어 보는 앎 (vipassanā-ñāṇa; Insight-Knowledge)’이라 한다.

이 앎에 의해서 어떤 측면의 번뇌는 극복되고 탐욕(탐)⋅성냄(진)⋅어리석음(치) 등과 같은 번뇌는 줄어든다.

 

‘꿰뚫어 보는 앎 (vipassanā-ñāṇa; Insight-Knowledge)’에 의해 제거된 번뇌들은 다시는 우리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꿰뚫어 보는 앎을 체험을 통해 얻게 되면 그 체험은 사라지거나 우리에게서 달아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얻은 그 체험을 다시 회상할 때 우리가 얻은 꿰뚫어 보는 앎은 다시 생겨나고

꿰뚫어 보는 앎과 함께 이 앎에 의해 제거된 어떤 번뇌들은 다시는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어떤 번뇌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청정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들이 충분한 삿다(saddha 믿음 또는 확신)를 지니고 있다면

수행에 보다 더 큰 노력을 가해서 네 번째의 道인 아라한도를 얻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는 모든 번뇌를 없애 버릴 수 있다.

 

번뇌가 전부 제거되고 마음이 완전히 정화되었을 때 어떠한 두카 또는 괴로움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괴로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번뇌로부터 마음의 이러한 정화는 불교의 실천적인 측면에 관한 것이다.

이에 비해 앞의 두 가지 점은 불교의 윤리적인 측면에 관한 것이다.

 

길상경(Mangala Sutta ; Suttanipāta 258-269 게)에도 38가지의 행복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이 경에는 우리가 그것에 따르면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많은 윤리들이 설해져 있다.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과거에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풍요로운 안락한 곳에서 살게 될 것이다.

또한 현재에도 가능한 한 많은 공덕을 쌓아야 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행동과 말과 마음을 제대로 살펴야 한다.

이 말들은 우리들의 행동과 말과 생각에 번뇌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따라야 할 많은 윤리적인 측면이 있으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

 

여러분들에게 친숙할지 모르는 암발라티카 라훌로와다경(중부 61경)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 경에서 붓다는 7살된 사미인 당신의 아들 라훌라에게 바르고 행복하고, 평온하게 살라고 격려한다.

붓다는 라훌라에게 무엇을 해야겠다는 의도가 생겨날 때마다 잠시 행동을 멈추고 재고하라고 가르쳤다.

 

라훌라야,

너는 네가 하려고 하는 행동에 대해서 마음 챙겨야 하며

이 행동이 너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잘 생각한 후 이 행동이 너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행동은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행동이 너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 행동은 해도 좋다.

 

이러한 방식으로 붓다는 해야 할 일을 잘 생각할 것,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알아차릴 것,

이미 한 일을 회상할 것에 대하여 라훌라에게 가르쳤다.

 

이러한 윤리는 우리들이 하루하루를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한 최상의 방법이기도 하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데에는 무수히 많은 윤리적인 측면이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윤리를 이해하고 그것들을 따른다면

비록 우리가 모든 괴로움을 없애 버릴 수는 없다 할지라도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도덕적인 측면

이러한 윤리에 의해서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불교의 두 번째 측면으로 우리는 단순하게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보다 높은 불교의 측면인 3번째의 도덕적인 측면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도덕적인 측면에서 여러분은 5계, 8계 또는 10계를 지켜야 한다.

227계가 비구들을 위한 계임에 대하여 10계는 견습 중인 사미를 위한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우리는 최소한 5계를 지켜야 한다.

우리가 5계를 완전하게 지킬 수 있을 때 우리의 도덕성은 정화된다.

 

도덕적인 행위가 정화될 때 사마타 수행이나 비파사나 수행이나, 수행자는 어렵지 않게 수행을 할 수 있게 된다.

도덕적인 행위의 정화라는 기반 위에서 수행자는 어렵지 않게 수행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할 수 있으며

깊은 마음 집중을 얻을 수 있게 되어 마음은 명료해지고 고요해지며 행복해진다.

 

실천적인 측면

다음으로 네 번째 측면인 불교의 실천적인 측면이 있다.

 

우리는 수행을 해야만 하는데 그래야만 우리는 모든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교의 실천적인 측면을 이루고 있는 두 가지의 수행을 닦는다.

 

하나는 깊은 마음 집중을 얻게 해주고

다른 하나는 마음과 몸을 그 참된 본질에서 자각하게 해줌으로써 괴로움의 소멸을 얻게 해준다.

 

붓다는 두 번째의 수행 방식 즉 비파사나 수행을 강조했다.

비파사나 수행을 닦을 때 우리는 대념처경에 따라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모든 마음-몸의 과정에 대해서 마음 챙김을 지닌다면

우리는 괴로움의 소멸을 얻을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붓다는 쿠루 지역에서 대념처경을 설할 때에 네 가지 마음 챙김에 대해서 설명했다.

 

수행의 7가지 이익

이 경의 도입 부분에서 붓다는 수행자가 스스로 법을 체험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7가지 이익에 대해서 설명했다.

 

첫 번째 이익은 청정이다.

어떤 이가 마음 챙김을 닦을 때 그는 모든 번뇌에서 청정해질 수 있다.

 

여러분들에게 팔리어의 킬레사(kilesa)라는 말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킬레사’라는 말을 불교 학자들은 번뇌(defilement)라고 번역하였다.

킬레사에는 10 가지의 주요한 종류가 있다.

 

탐욕(貪 lobha), 의심(疑 vicikicchā), 성냄(瞋 dosa),

혼침과 수면(혼침-수면 thīna-middha), 어리석음(癡 moha),

들뜸과 회한(도거-회한; uddhacca-kukkhucca),

사견(見 diṭṭhi), 무참無慙(ahirika), 아만我慢(慢 māna), 무괴無愧(anottappa).

 

로바(lobha)는 탐욕뿐만 아니라 욕망⋅욕정⋅갈망⋅애착 그리고 사랑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신적인 상태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마음속에 생겨날 때 우리의 마음은 더럽혀진다(번뇌에 물든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번뇌라고 하는 것이다.

 

도사(dosa)는 증오⋅분노⋅악의 또는 혐오의 의미이다.

모하(moha)는 환각, 또는 무지의 의미이다.

디티(diṭṭhi)는 잘못된 견해 또는 틀린 견해의 의미이다.

마나(māna)는 아만(자만)의 의미이다.

위치킷차(vicikicchā)는 회의적인 의심의 의미이다.

 

티나-밋다(thīna-middha)는 혼침과 수면의 의미이다.

졸리움도 역시 혼침과 수면의 일종이다.

혼침과 수면은 수행자들과 법을 듣는 이들의 오랜 친구이기도 하다.

 

오늘 점검(interview) 시간에 ‘모든 수행자들이 ‘피곤합니다, 졸음이 옵니다’라는 경험을 보고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 아직 우리들은 마음 챙김 수행에 익숙해 있지 않기 때문에 힘을 불어넣어야만 한다.

(피곤과 졸음을 느끼는) 이 때가 수행의 고비 단계이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이 기간은 2-3일 정도 지속될는지도 모른다.

3일이 지나면 모든 수행자들은 괜찮아질 것이다.

 

비파사나 수행은 물론 사마타 수행에 있어서 향상을 방해하는 이

‘오랜 친구’들을 이겨내는데 그리 힘들지 않다는 사실을,수행자들은 알게 될 것이다.

 

웃닷차-쿡쿠차(uddhacca-kukkhucca)는 들뜸(restlessness 불안함)과 후회에 빠진다는 의미이다.

아히리카(ahirika)는 도덕적인 부끄러움이 없음(무참無慚)을 의미한다.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지은 악한 행위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함이 없음을 말한다.

 

안오타파(anottappa)는 도덕적으로 두려워함이 없음(무괴無愧)을 의미한다.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지은 악한 행위에 대해서 (남들에 대하여) 두려워함이 없음을 말한다.

이 도덕적으로 두려워함이 없는 것도 번뇌의 하나이다.

 

이것들이 비파사나 수행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서 버리고 제거해야 할 10 가지 번뇌들이다.

 

붓다는 말한다.

만일 어떤 이가 마음 챙김 수행을 닦는다면 그는 모든 번뇌로부터 청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모든 종류의 번뇌로부터 완전하게 청정해졌을 때 그는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첫 번째 이익이다.

 

마음 챙김 수행의 두 번째 이익은 슬픔과 근심을 극복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만일 이 마음 챙김 수행을 닦는다면 여러분은 실패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게 될 것이며

친척의 죽음 때문에 그리고 일자리를 잃어서 슬픔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며

그 어떠한 일이 닥쳐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아무런 道(magga)와 果(phala)를 얻지 못했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슬픔과 근심을 극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슬픔과 근심이 생길 때 여러분은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이 마음 챙김 수행을 완전하게 향상시켰을 때

여러분은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을 것임에 틀림없으며 근심과 슬픔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근심과 슬픔은 마음 챙김 수행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

 

세 번째 이익은 비탄을 극복하는 것이다.

비록 여러분의 부모나 자식이나 친척이 죽는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어떠한 비탄에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른바 ‘자식’이나 ‘부모’라고 불리던 존재를 이루고 있는

정신과 육체의 과정들을 완전하게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비탄은 마음 챙김 수행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

 

세 번째의 이익과 관련해서 대념처경의 주석서에서는 한 이야기를 들고 있다.

파타차라라는 한 여인이 있었는데 하루 이틀 사이에 남편과 두 아들,

부모와 형제들이 모두 죽어서 슬픔과 근심과 비탄으로 미칠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사랑하던 사람들의 죽음 때문에 슬픔에 휩싸여 있었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사위성 가까이 있는 죽림정사에서 대중들에게 법을 설하고 있었다.

그때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던 이 미친 여인은 정사로 들어가서 설법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대중들을 보았다.

 

그녀가 대중에게 다가가자 이 가난한 사람에게 아주 친절한 한 노인이 자신의 상의를 벗어서 그 여인에게 건네주며

“여보시오, 내 옷으로 당신 몸을 좀 가리시구려” 하고 말을 건넸다.

 

이와 동시에 부처님께서 그녀에게 “자매여, 마음을 챙기시오” 하고 말씀했다.

부처님의 달래는 듯한 목소리에 그 미친 여인은 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대중의 한 쪽에 앉아서 법문을 들었다.

 

부처님은 그 여인이 정신을 차린 것을 아시고 법문의 방향을 그녀에게 맞추었다.

그녀의 마음은 점차로 법문의 핵심으로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법을 깨닫기에 충분할 만큼 그녀의 마음이 준비되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를 설했다.

 

괴로움의 진리(苦諦)

괴로움의 발생의 진리(集諦),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道諦).

 

네 가지 고귀한 진리에는 우리의 마음과 몸에서 생겨나는 모든 현상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

 

제 정신을 차린 파차타라는 마음 챙김의 기법을 바르게 이해했으며

그 방법을 마음과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귀로 들리는 모든 소리에 대해 적용시켰다.

 

그녀의 마음 챙김이 찰나삼매(momentum)를 이루었을 때 그녀의 마음 집중은 더욱 깊어지고 더욱 강해졌다.

마음 집중이 깊어지게 되자, 마음과 몸에 대한 그녀의 지혜와 꿰뚫어 보는 앎은 더욱 강력해져서

그녀는 점차로 정신적·육체적 현상의 독특한 특성과 일반적인 특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법문을 듣는 동안에 꿰뚫어 보는 앎의 모든 단계를 차례로 경험해서

첫 번째 도인 수타원도(sotāpatti-magga)를 얻었다.

 

마음 챙김 수행에 의해, 법에 대한 그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슬픔과 근심과 비탄은 그녀의 마음에서 완전히 없어져 버려 그녀는 ‘새로운 여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그녀는 마음 챙김 수행에 의해 그녀의 슬픔, 근심, 비탄을 극복하였다.

 

이렇게 대념처경의 주석서는 말해 주고 있다.

붓다 당시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도 또한 슬픔과 근심을 극복할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이 마음 챙김 수행을 닦아서 어느 정도의 높은 단계의 꿰뚫어 보는 앎을 얻게 된다면

여러분들도 마음 챙김 수행에 의해 슬픔과 걱정을 극복할 수 있는 이러한 사람들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다.

 

네 번째의 이익은 육체적인 괴로움의 소멸이다.

다섯 번째의 이익은 정신적인 괴로움의 소멸이다.

 

통증⋅뻣뻣함⋅가려움⋅저림 등등의 육체적인 통증은, 일상 활에서 뿐만 아니라

집중 수련기간 동안에도 이 마음 챙김 수행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

 

수행이 진전되어 어느 정도의 체험을 하게 될 때

여러분들은 정신적·육체적인 괴로움을 상당히 극복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여러분이 충분한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다면 여러분이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을 때

정신적·육체적인 괴로움 둘 다를 영원히 없애 버릴 수 있다.

 

수행을 하는 동안에 여러분은 통증, 뻣뻣함, 가려움, 저림 그리고 모든 종류의 불쾌한 육체적인 감각들을

아주 적극적으로 그리고 밀착해서 관찰함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여러분은 통증, 뻣뻣함, 또는 저림 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여러분들이 괴로움의 소멸을 얻게끔 도와주는 ‘좋은 벗’이기 때문이다.

만일 여러분이 통증을 강하고, 정확하게, 밀착해서 관찰한다면

더욱 명료하게 알게 되기 때문에 통증이 더욱 심해질 수도 있다.

 

여러분이 이 고통스러운 감각의 불쾌함을 완전히 알게 될 때

여러분은 그 불쾌함을 여러분 자신이라고 간주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감각이란 정신적인 현상의 자연스런 과정이라는 점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고통스런 감각에 대해서 ‘나’니 ‘나의 것’이니 ‘사람’이니 ‘존재’니 하면서 애착을 가지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여러분들은 영혼, 자아, 사람, 존재, ‘나’ 또는 ‘너’라고 하는 잘못된 견해를 없앨 수 있다.

 

모든 번뇌의 뿌리인 유신견有身見 또는 아견我見을 부수어 버렸을 때 여러분은 첫 번째 도인 수타원도를 틀림없이 얻는다.

그런 후 여러분은 세 가지의 보다 높은 道와 果를 얻기 위해서 수행을 계속해 나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통증, 뻣뻣함, 가려움, 저림 등의 불쾌한 육체적인 감각들이

괴로움의 소멸을 얻게끔 도와주는 ‘좋은 벗’이라고 말한 이유이다.

 

달리 말하면 이 저림 또는 다른 고통스런 감각이 바로 열반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말이다.

여러분이 통증을 느낄 때 여러분은 운이 좋은 것이다.

 

통증은 가장 가치 있는 수행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통증이 있으면 ‘알아차리는 마음’은 아주 오랫동안 그 통증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알아차리는 마음’은 그 통증에 깊이 집중할 수 있게 되고 그 속에 몰입해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마음이 고통스런 감각에 완전히 몰입했을 때

여러분은 더 이상 자신의 육체 모양이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지각이 없게 되어 버린다.

 

이 말은 여러분이 고통의 고유한 특성(sabhava-lakkhana) 또는

고통스런 감각(苦受 dukkha-vedana)의 개별적인 특성을 자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여러분은 정신적·육체적 현상의 무상하고 고이며

무영혼 또는 무아인 일반적인 특성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그때 여러분은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 여러분이 통증을 느낀다면 여러분은 운이 좋은 것이다.

 

미얀마에서 꿰뚫어 보는 앎의 세 번째 단계(sammasana-ñāṇa)를 통과한 어떤 수행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모든 고통스런 감각을 완전하게 극복했지만

알아차려야 할 통증이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수행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 다리에 체중의 압력을 주어 통증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그들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끌어 주는 ‘좋은 벗’을 찾았던 것이었다.

 

여러분이 불쾌함을 느낄 때 그 불쾌함을 강하고, 주의 깊고, 아주 밀착해서 ‘불쾌함, 불쾌함’ 하고 관찰해 보기 바란다.

만일에 우울함을 느꼈다면 그 우울함을 아주 주의 깊고 인내력 있게 관찰해야 한다.

여러분의 마음 챙김이 강해지면 불쾌함이나 우울함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렇게 정신적인 괴로움을 극복하는 것이 마음 챙김 수행의 다섯 번째 이익이다,

 

여섯 번째 이익은 깨달음 즉 道와 果의 성취이다.

여러분이 마음 챙김 수행에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을 때 여러분들은 최소한 첫 번째 도인 수타원도를 얻을 것이다.

이것이 마음 챙김 수행의 여섯 번째 이익이다.

 

일곱 번째 이익은 마음 챙김 수행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열반, 해탈, 자유를 틀림없이 얻는다는 것이다.

마음 챙김 수행의 일곱 가지 이익은 비파사나 수행자가 법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1. 모든 종류의 번뇌로부터 청정.

2. 슬픔과 근심의 극복.

3. 비탄의 극복.

4. 모든 육체적인 통증의 극복.

5. 모든 정신적인 괴로움의 극복.

6. 깨달음의 성취.

7. 열반의 성취.

 

붓다는 맨 처음에 이 일곱 가지 마음 챙김 수행의 이익을 제시하면서 대념처경을 설했다.

따라서 불굴의 정진력으로 수행한다면 여러분들이 이 일곱 가지 이익을 얻을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깨달음을 얻으시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바른 길을 가르쳐 주신 부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들은 운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만족감에 빠져서는 안 된다.

팔리 경전에 다음과 같은 비유가 나온다.

 

어느 곳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물은 맑고 많은 연꽃이 피어 있었다.

손이 더러운 한 여행자가 있었다.

연못에 손을 씻으면 손이 깨끗해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손을 씻으러 연못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손은 여전히 더러운 채였다.

이렇게 그는 연못을 지나쳐서 여행을 계속했다.

 

이 비유가 설해진 다음에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졌다.

“만일 그 사람이 더러운 채로 있다면 누가 비난 받아야 하는가. 연못인가, 여행자 자신인가?”

 

말할 것도 없이 여행자이다.

그는 연못에서 더러움을 씻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니 여행자가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붓다는 우리에게 마음 챙김이라는 (마음의 때와 번뇌를 씻어 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만일 우리가 그 길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 챙김 수행을 닦지 않는다면 우리는 괴로움을 없앨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괴로움을 없애지 못한다면 누가 비난받아야 하겠는가?

붓다인가, 마음 챙김 수행법인가, 아니면 우리 자신인가?

그렇다, 우리 자신이 비난 받아야 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불굴의 정진력으로 이 마음 챙김 수행법을 닦는다면

이 마음 챙김 수행의 일곱 가지 이익을 얻음으로써 여러분은 모든 번뇌에서 청정해지고 괴로움을 제거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