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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비파사나 수행

사념처 수행과 위빠사나 제3장 12. 십이연기에 대한 이해

사념처 수행과 위빠사나 

2014-01-08 18:43:44

 

제3장 수념처受念處

 

12. 십이연기에 대한 이해

부처님께서는 12연기를 통해서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지금 왜 여기에 존재하는지

그리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설명하셨습니다.

 

12연기는 우리들의 생각처럼 '나'라는 실체가 있어 과거 현재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과거를 원인으로 해서 현재라는 결과물이 생겼으며 현재 새로 짓는 원인에 의해 미래의 어떤 결과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은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으로 흘러가는 것뿐이며 그것이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이런 조건의 흐름 속에서 살아야한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범부들은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며

행복하기 위해서 한 행위가 새로운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렇게 매순간 괴로움의 원인을 심고 괴로움을 결과로 받으면서 삶이 이어지는 것이 윤회입니다.

결국 삶은 괴로움의 흐름이며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이런 괴로움의 흐름에서 벗어나는지 그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1. 12연기 도표 보는 방법

12연기 도표는 미얀마의 큰 스승이신 모곡 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나오는 도표입니다.

우선 12연기의 열두 요소를 1. 2. 3. 4.번 칸으로 네 부분으로 나눕니다.

 

1번 칸은 시제로는 과거이며 현재의 원인입니다.

과거의 무명과 행을 원인으로 2번 칸의 현재라는 결과가 있습니다.

즉 1번 칸은 현재의 원인을 나타내는 칸입니다.

 

2번 칸은 시제로는 현재이며 과거를 원인으로 생긴 식, 명색, 육입, 촉, 수가 있습니다.

이 다섯 요소는 바로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입니다.

 

3번 칸도 시제로는 현재이며 몸과 마음을 나라고 알고

느낌에서 갈애와 집착을 일으켜 미래의 원인이 될 새로운 업을 생성하는 칸입니다.

 

4번 칸은 시제로는 미래이며 3번 칸의 애 취 유가 원인이 되어 새로운 생과 노사가 있는 칸입니다.

3번 칸에서 4번 칸으로 가는 한 생의 윤회가 있고 3번 칸인 현재에 새로 일으킨 애 취 유가 원인이 되어

바로 2번 칸의 식으로 진행하는 매순간의 윤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윤회는 한 생의 윤회가 있고 찰나생멸하면서 흐르는 매 순간의 윤회가 있는데

이는 괴로움이 원인과 결과로 윤회하는 것이며 이 도표에는 이런 괴로움의 윤회를 벗어나는 지점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2. 연기의 근본원인은 무명과 갈애

12연기 도표의 중앙에는 무명과 갈애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명과 갈애의 힘으로 살고 있습니다.

 

‘나’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부딪친 대상에 대한 갈애를 일으켜서

신구의身口意로 업을 지으며 살고 다시 업의 과보로 새로운 몸과 마음이 생깁니다.

 

즉 무명을 우두머리로 갈애를 동반자로 업을 생성하고

그 업력이 다시 무명과 갈애를 키우는 구조로 연기의 수레바퀴는 쉬지 않고 굴러갑니다.

이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무명과 갈애로 행한 업의 힘에 떠밀려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과보를 만나고 다시 갈애를 일으켜 어떤 행을 하는데

이런 연기를 돌리는 중심에는 내가 있다는 무명과 나를 위하는 욕망의 마음인 갈애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를 윤회하게 하는 주범은 무명과 갈애이며 그 심부름꾼은 업입니다.

만일 무명이 지혜로 갈애가 집착 없음으로 바뀌면 그 심부름꾼인 업이 일어나지 않아서 윤회를 벗어나 열반에 이릅니다.

 

다시 말하면 무명과 갈애의 소멸을 위해서는 지혜를 일으키는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하며

그 결과로 자연스럽게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지혜가 생기고

내가 없음을 알아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해탈 열반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사념처 수행으로 팔정도를 몸소 닦아나갈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실천이 따르지 않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상한 언어나 화려한 관념일 뿐

번뇌를 벗어나게 하는 진리가 되지 못하며 번뇌를 소멸하는 힘이 없습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오직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번뇌로부터의 해탈이며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입니다.

 

3. 십이연기 도표 1번 칸 : 과거 - 무명과 행

12연기 도표의 1번 칸은

시간상으로는 과거이며 요소는 무명과 행이며 사성제의 측면에서는 괴로움의 원인인 집성제集聖諦입니다.

 

1번 칸의 구성요소는 무명과 행이지만 그 바탕에는 갈애愛와 집착取과 업의 생성有을 깔고 있습니다.

여기서 과거는 현재를 만든 원인일 뿐 지금은 실재實在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는 문제 삼을 일이 아닙니다.

 

그럼 무명이란 무엇일까요?

무명은 어두움으로 모르는 것입니다.

즉 인과를 모르며 삼법인과 사성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업의 인과를 철저히 알았다면 감각적 욕망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며

무상을 지혜로 알았다면 언젠가 없어질 재산, 명예, 이익, 칭찬, 소유에 목숨을 걸지 않을 것입니다.

또 무아를 안다면 내 생각을 주장하고 남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삶이 苦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지금보다 더 좋은 곳에 태어나길 바랍니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갈애라고 알면서도 매순간 갈애를 일으킵니다.

괴로움을 소멸하는 멸성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열반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쯤으로 멀찌감치 두고 있기도 합니다.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인 팔정도를 닦아야 한다고 알면서도 실제로 팔정도를 닦는 일을 게을리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어리석음, 무명의 힘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이 없어 무명이 그렇게 하도록 조정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에는 무명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시작해서 무명을 소멸해야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

 

그럼 행은 무엇일까요?

행은 마음의 의도인데 무명으로 인해 이미 형성된 업입니다.

도표 1번 칸의 행은 자신이 그동안 반복했던 마음 습관입니다.

 

도표 1번 칸의 행의 질에 따라 현재 삶의 질이 결정됩니다.

공덕이 되지 않는 선하지 못한 행은 사악도의 비참한 삶을,

욕계 공덕행은 인간이나 욕계 천상의 삶을, 색계 공덕행은 색계 천상의 삶을, 부동행은 무색계 천상의 삶을 만납니다.

 

우리는 이미 과거의 불선업의 행을 캐내거나 바꿀 수 없습니다.

단지 지금 경험하는 괴로움을 자신의 행위의 결과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선한 원인을 심는 것밖에 없습니다.

 

만일 지금 경험하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화를 내거나

또는 지금 경험하는 즐거움을 좋아하고 붙잡는 것은 지금 가장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다시 미래의 괴로움의 원인을 심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지금 괴롭네!’ 또는 ‘지금 좋아하고 붙잡았네!’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혜로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바른 행입니다.

 

4) 12연기 도표 2번 칸 : 현재 - 식․명색․육입․접촉․느낌

12연기 도표의 2번 칸은 과거를 원인으로 생긴 현재 자신의 물질과 정신입니다.

사성제의 측면에서는 괴로움인 고성제苦聖諦에 해당합니다.

 

과거의 무명과 행을 원인으로 식識이 생기고 이 식을 원인으로 명색이 생기고 이 명색을 원인으로 육입이 생기고

이 육입을 원인으로 육경과 부딪치는 접촉이 생기고 접촉을 원인으로 느낌인 수受가 생깁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 순간 경험하는 것이며 이런 다섯 요소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괴로움입니다.

 

2번 칸의 시작은 식識입니다.

이 식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식의 질에 따라 몸과 마음이 새로 만들어집니다.

 

한 생을 처음 시작하는 재생 연결식의 식은 한 생의 질을 결정하고

또 매순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이끌어가는 선행하는 마음인 식은 매 순간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재생연결식이 선심善心이면 인간이나 천인의 몸과 마음을 만들고

재생연결식이 불선심이면 그 마음의 질과 같은 세계인 사악도의 몸과 마음을 만듭니다.

재생연결식은 바로 전생의 마지막 마음인 사몰심이 사라지면서 그 마음의 과보로 일어난 현생의 최초의 마음입니다.

 

새로운 한 생生을 결정하는 중요한 인자는 전생의 사몰심인데

이 전생의 사몰심도 그 생生 동안 지은 업을 원인으로 일어납니다.

 

한 생의 시작을 일으킨 재생연결식도 그 찰나에 소멸하고 즉시 존재지속심인 바왕가 찌따가 일어납니다.

이 바왕가의 마음도 찰나 생멸하면서 흐릅니다.

바왕가가 흐르는 중에 육입과 육경이 촉하면 바왕가의 마음은 끊기고 현재의 대상을 아는 마음인 육식이 일어납니다.

 

이때 이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수상행受想行의 질에 따라 그 순간의 마음의 질이 결정되고

그 다음 순간에 일어나는 명색名色의 질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이 식識은 현생에서는 매 순간의 새로운 몸과 마음을 만드는 선행하는 마음이 됩니다.

 

이와 같이 윤회를 거듭하는 삶은 끝없이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면서 흐르는 것일 뿐

그 안에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습니다.

 

윤회할 조건이 남아있어서 태어난 것이지 내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또 윤회할 조건이 소멸되면 윤회가 끝나는 것이지 내 의지로 윤회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론은 부처님의 아비담마 논장에 근거한 것입니다.

아비담마는 물질과 정신에 대한 완벽한 분석입니다.

부처님은 오직 중생들이 스스로 괴로움을 치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물질과 정신을 철저히 분석하신 것입니다.

 

① 식識을 원인으로 명색名色이 있습니다.

명은 수상행이며 색은 물질입니다.

 

한 생을 시작하는 최초의 마음인 재생연결식이나

매순간을 선행하는 마음이나 모두 그 마음에 의해 즉시 새로운 물질과 정신을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면 지금 어떤 대상에 대하여 화가 나면 즉시 몸에서는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얼굴은 붉어지고 혈압은 올라갑니다.

이것은 화를 낸 마음이 즉시 화에 물든 새로운 몸을 만든 것입니다.

또 선한 마음으로 남을 도와주면 즉시 자신의 몸과 마음이 가볍고 상쾌해집니다.

이것도 선한 마음에 의해서 선한 물질과 정신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또 죽을 때 무언가를 집착하면 그 집착하는 마음으로 인한 욕계의 물질과 정신이 생깁니다.

 

또 평소에 색계 선정 수행을 해서 죽을 때

색계 선정의 마음이 되면 재생연결식도 색계 선정상태가 되어 색계 천인의 몸과 마음을 만듭니다.

이렇게 식識은 현생이나 내생의 윤회의 흐름에서 몸과 마음을 만드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도 매 순간 알아차림으로 선심을 일으키고

그 선심을 원인으로 선한 몸과 마음을 만들어 다시 선한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이생에서도 계속 선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고 죽을 때

선한 사몰심 상태에서 선한 재생연결식을 가질 수 있는 힘을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생에서 수행을 한 힘은 이생을 행복하게 하고 또 미래의 생을 이생보다 더 좋은 생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금생과 내생에서 수행으로 얻는 이익이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괴로움을 소멸하는 해탈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② 도표 2번 칸에 명색名色을 원인으로 육입六入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긴 명색에는 당연히 眼耳鼻舌身意라는 여섯 감각기관이 있습니다.

이 여섯 감각기관은 외부의 대상을 받아들이는 門이지만 보통의 경우 이 여섯 문을 통해서 번뇌가 들어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육문을 상처로 비유하시고

육문을 통해 들어온 번뇌는 상처를 덧나게 하는 세균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알아차림으로 육문을 지키는 것은 상처가 덧나지 않게 막는 것이며

몸과 마음을 괴로움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바로 괴로움의 소멸을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③ 육입六入을 원인으로 접촉[觸]이 있습니다.

우리는 육문이 있는 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항상 육경과 촉할 수밖에 없으며 이때 아는 마음인 육식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근根·경境·식識이 부딪히는 것을 접촉이라고 합니다.

 

④ 접촉을 원인으로 느낌受이 있습니다.

이렇게 육입과 육경이 육식이 부딪히면 느낌이 일어나는데

이때 느낌은 좋은 느낌, 싫은 느낌, 덤덤한 느낌, 정신적 즐거운 느낌, 정신적 괴로운 느낌들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한 순간에는 하나의 느낌만 있습니다.

이런 느낌은 바로 괴로움입니다.

 

항상 좋은 느낌을 추구하지만 느낌은 만족이 없기 때문에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느낌은 괴로움입니다.

또 느낌은 일어났다 사라지기 때문에 붙잡을 수 없어서 괴로움이며

느낌을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움입니다.

 

그러나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육입과 육경과 육식의 접촉으로 일어나는 느낌을 붙잡지 않고 조건에 의해 생긴 감각기관의 느낌으로 분리해서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느낌에서 느낌의 변화와 생멸을 봅니다.

그러나 이렇게 느낌을 객관화해서 그냥 느낌으로 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미 느낌에 넘어갔을 때라도 바로 그것을 다시 알아차리기를 수없이 반복해야합니다.

그 결과로 느낌을 법으로 볼 수 있게 되며 느낌의 생멸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때 무상을 아는 지혜가 싹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2번 칸은 누구나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현재 우리의 모습입니다.

 

매순간 일어나는 식識에 의해 몸과 마음이 영향을 받고

다시 감각기관이 작용하여 새로운 번뇌거리를 받아들이는 일은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생에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여기까지는 바꿀 수 없는 멍에입니다.

그러나 느낌에서 알아차림을 하면 갈애로 넘어가지 않고 12연기 도표에서 보듯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로 표시된 화살표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5) 12연기 도표 3번 칸 : 현재 - 갈애․집착․업의 생성

12연기 도표의 3번 칸은 시제로는 현재이며 사성제로는 집성제입니다.

 

2번 칸의 느낌에 휘둘려 다시 새로운 괴로움의 원인을 일으키는 칸입니다.

3번 칸의 요소는, 겉으로는 갈애, 집착 업의 생성으로 세 가지지만 그 바탕에는 무명과 행이 받쳐주고 있습니다.

 

2번 칸의 느낌은 자동적으로 갈애와 집착과 업을 생성하도록 밀어줍니다.

그래서 집착으로 행위를 하는 업을 지어 미래의 원인을 만듭니다.

 

갈애는 현재의 대상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으로 대상을 따라가는 마음입니다.

또 집착은 현재의 대상을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못하도록 꽉 묶어두는 것입니다.

 

마치 뱀이 파리를 채가듯이 그 대상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집착은 어느새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며 신업과 구업을 짓게 됩니다.

 

일단 이렇게 업을 지으면 그 업을 일으킨 물질과 정신은 사라졌지만 그 업력은 잠재의식에 저장됩니다.

저장된 업력은 자신의 물질과 정신을 따라다니며 과보로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조건이 성숙되면 어느 날 좋거나 싫은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을 때 몸은 버리고 마음을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생의 몸은 물론 마음도 함께 버리고 다만 3번 칸의 업력이 4번 칸의 새로운 몸과 마음을 만들도록 밀어줍니다.

그래서 다음 생까지 따라오는 것은 이생동안 쌓아놓은 선업과 불선업의 업력입니다.

죽을 때 가져가는 진정한 재산은 이번 생에서 행한 보시 지계 수행의 선한 업력입니다.

죽을 때 가져가는 선한 업력의 양이 많으면 그만큼 다음 생은 풍요롭고 행복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알아차림을 하면 이미 그 순간 계율을 지키는 것이며

관용과 자애로 보시를 하는 것이며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 자체가 다음 생에 가져갈 수 있는 최고의 재산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런 알아차림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계발하느냐, 잠자게 두느냐의 차이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생의 업력에 의해 그 과보로 다음 생을 받게 되는데

여기에는 어떤 다른 절대자의 힘도 미칠 수 없으며 오직 업의 원인과 결과라는 자연 법칙만이 존재합니다.

 

또 3번 칸의 애, 취, 유는 2번 칸의 식에도 영향을 줍니다.

2번 칸과 3번 칸에는 양방향 화살표가 있습니다.

지금 일으킨 갈애, 집착, 업의 생성이 즉시 다음 순간 새로운 몸과 마음이 일어나도록 밀어줍니다.

 

예를 들면 좋은 대상을 보고 욕심이 났는데 그것을 갖지 못해서 화가 났다면

화를 낸 물질과 정신은 사라졌지만 그 과보로 2번 칸의 식은 성내는 마음이 됩니다.

 

성내는 마음은 즉시 화로 물든 새로운 몸과 마음을 만듭니다.

그래서 화로 물든 몸과 마음은 다시 부딪치는 대상을 짜증으로 반응하여 3번 칸에서 불선업을 생성합니다.

 

이와 같이 2번 칸의 다섯 요소는 다시 3번 칸을 활성화 시켜 업을 생성하고

그 업의 힘은 즉시 2번 칸의 다섯 요소가 생기도록 부추깁니다.

 

이렇게 보면 2번 칸은 등잔불의 심지이며 3번 칸은 등잔불의 기름입니다.

심지와 기름은 서로를 활성화해서 계속 괴로움의 불이 꺼지지 못하게 합니다.

만일 3번 칸의 기름이 떨어지면 2번 칸의 심지만으로는 불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2번 칸과 3번 칸이 양 방향으로 연결되어 서로에게 영양을 공급하며 윤회를 이어갑니다.

 

하지만 반대로 2번 칸과 3번 칸 사이에서 윤회를 끊을 수도 있습니다.

만일 수행자가 2번 칸의 느낌에서 알아차림을 하여 갈애로 넘어가지 않으면

집착과 업의 생성이 없고 그 결과로 미래인 생 노사도 소멸합니다.

바로 느낌을 알아차림으로서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느낌을 알아차려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이미 알아차림을 놓치고 갈애로 넘어갔더라도 그것을 다시 알아차려 집착으로 가지 않아야 하고

이미 집착을 했더라도 행위를 하기 전에 다시 알아차려서 불선업을 제어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불선업보다 선업을 키워서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알아차림의 힘은 불선심을 빨리 알아차리게 하여 불선업을 막아주며 동시에 선심으로 행위를 하여 선업을 증장시킵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그 선업조차도 알아차리면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 됩니다.

작용만 하는 마음은 업을 생성하지 않는 마음으로 윤회를 끝내는 마음입니다.

 

선심도 불선심도 선업도 불선업도 찰나 생멸하는 한 순간의 법입니다.

이렇게 법으로 볼 때 그 무엇도 붙잡지 않는 지혜가 생겨 ‘나’라는 유신견으로 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이런 과정을 말로 풀어서 쓰니까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 최고의 선업을 행하는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하고 그 알아차림을 계속 이어가면 그 순간은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는 상태로

이미 업이 되지 않는 작용만 하는 마음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행이라는 것은 알아차림이라는 마음의 작용으로 2번 칸의 느낌을 알아차려서 3번 칸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최소한 3번 칸에서 갈애, 집착, 업의 생성이라는 불선업을 알아차리기만 해도

그 다음에 일어나는 4번 칸의 생生이나 2번 칸의 식識은 선한 마음이 되어 선한 명색名色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6) 12연기 도표의 4번 칸 : 미래 - 생․노사

12연기 도표의 4번 칸은 시제로는 미래이며 성제로는 고성제입니다.

3번 칸에서 업을 생성하면 반드시 그 과보로 미래의 생이 생깁니다.

그래서 4번 칸은 식, 명색, 육입, 촉, 수가 생 노사와 함께 들어있습니다.

즉 생은 오온을 가지는 것이며 이것 자체가 우비고뇌憂悲苦惱와 함께 하는 괴로움입니다.

 

12연기를 공부하는 것은 이런 윤회의 원리를 알아 좀 더 좋은 윤회의 조건을 만들고 점차 윤회를 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할 때

이런 조건의 속박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길을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원인과 결과의 원리를 알지 못하면 초월적 존재를 설정하여 그곳에서 행복을 얻으려는 욕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연기를 이해한 수행자는 현재에 알아차림을 두고 항상 깨어있음을 유지합니다.

오직 현재의 실재하는 법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서 바른 원인을 심고 그 결과로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게 됩니다.

 

7) 세 군데 양방향 화살표

1번 칸과 2번 칸 사이, 2번 칸과 3번 칸 사이, 3번 칸과 4번 칸 사이에는 양방향 화살표가 있습니다.

양방향 화살표는 개체의 동일성이 유지되면서 찰나의 간격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합니다.

 

그러나 4번 칸과 1번 칸 사이에는 양방향 화살표가 없습니다.

4번 칸의 노사에서 이생의 마지막 마음인 사몰심이 사라지면 완전히 새로운 몸과 마음이 일어납니다.

개체의 동일성이 유지될 수 없는 새로운 몸과 마음입니다.

 

재생연결식으로 한 생이 시작하여 사몰심으로 그 생이 끝날 때까지는 한 개체의 동일성이 유지되지만

다시 새로운 생이 시작할 때는 그 개체의 동일성은 파괴됩니다.

그래서 3번과 4번 칸에 양방향 화살표가 없습니다.

이것이 무아의 윤회이며 환생還生이 아닌 재생再生입니다.

 

8) 12연기의 세 가지 굴레

12연기 도표를 보면 윤회를 돌리는 원리를 굴레의 측면에서도 보여줍니다.

그것이 번뇌의 굴레, 업의 굴레, 과보의 굴레로 세 가지의 굴레입니다.

 

도표에 번뇌의 굴레와 연결된 화살표를 따라가 보면

1번 칸의 무명과 3번 칸의 갈애愛와 집착取이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번뇌의 굴레라는 것은 과거의 무명을 바탕으로 현재 갈애와 집착을 일으켜서 번뇌가 생기는 굴레입니다.

 

도표에서 보면 업의 굴레는 1번 칸의 행과 3번 칸의 업의 생성입니다.

이것은 번뇌의 굴레가 원인이 되어 과거에도 업을 형성하고 현재에도 업을 생성하는 것으로 업의 굴레입니다.

 

도표에서 과보의 굴레는 4번의 미래의 결과 칸에 있는 8가지입니다.

번뇌의 굴레로 인해 업을 생성하고 그 업의 굴레가 익어서

다시 과보로 생, 노사. 생유. 식, 명색, 육입, 촉, 수가 나타나는 것이 과보의 굴레입니다.

이들 세 가지 굴레는 삼각형의 세 꼭지점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어 깨지지 않고 계속 굴레를 돌립니다.

 

9) 12연기가 주는 의미

12연기 도표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2번 칸과 3번 칸 사이에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을 표시한 화살표입니다.

 

부처님께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곳은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나무 아래라고 하지만

법의 측면에서 보면 바로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이 자리입니다.

 

이런 12연기의 열두 요소는 불교 서적이나 도표 안에만 있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매순간 직접 경험하여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만 자신을 알아차리면 번뇌가 일어나고

번뇌로 업을 행하고 다시 업의 과보로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덕이 없는 행위를 하면 그 과보로 사악도에 재생하고

공덕이 있는 선업을 행하면서 바라면 인간계나 욕계 천상으로 재생하고

색계선정이나 무색계 선정을 닦으면 색계천상이나 무색계 천상으로 재생합니다.

물론 천상이 좋지만 이것도 윤회를 끊지 못하여 생노병사 우비고뇌의 괴로움을 경험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바라는 것이 없는 공덕행으로 알아차림을 닦으면

12연기의 중심축인 무명과 갈애를 통찰지혜와 집착 없음으로 바꾸어서

윤회를 돌리는 수레의 중심축을 부수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멈추게 합니다.

 

이상으로 12연기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드렸습니다.

 

위의 글은 모곡 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우 소바나 사야도의 법문집 “12연기와 위빠사나”를 바탕으로 정리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