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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비파사나 수행

사념처 수행과 위빠사나 제4장 19. 마음의 특성

사념처 수행과 위빠사나 

2014-01-08 19:15:23

 

제4장 심념처心念處

 

19. 마음의 특성

‘나’는 관념이며 매 순간 실재하는 것은 색수상행식의 다섯 무더기, 오온입니다.

오온은 물질과 정신이며 정신을 세분하면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나눕니다.

마음은 반드시 수상행의 도움을 받아 대상을 알고 매 순간 오온을 이끕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오온 가운데 하나이며 식은 단지 대상을 아는 것이지 마음이 내가 아닙니다.

 

1. 마음의 일반적 특성

 

1) 마음은 무상無常합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항상 변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마음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감각기관과 대상이 촉할 때 일어난 마음은 다시 다른 대상과 촉하면 사라집니다.

이렇게 생멸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지 못하면 마음을 내 것이라고 집착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것을 알아차림으로 보면 내 마음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마음이 나의 주체라는 고정관념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습니다.

 

2) 마음은 찰나생 찰나멸 합니다.

마음뿐 아니라 마음과 함께 일어나는 수상행과 물질이라는 법들도 찰나 생멸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입니다.

어떤 마음도 두 순간을 머물지 못하며 또 마음이 한 순간에 두개의 대상을 동시에 알지 못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와 같이 실재하는 법에서 법의 변화와 생멸을 알아차려 찰나를 만나고

이렇게 찰나에 생멸하는 법을 직관하여 붙잡을 것이 없음을 알아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는 수행입니다.

 

3) 마음은 흐름입니다.

마음은 찰나 생멸하면서도 쉬지 않고 계속 상속되며 흐릅니다.

이런 마음의 흐름은 완전한 열반에 들 때까지 지속됩니다.

 

예를 들면 소에서 우유가 나오고 우유에서 생 버터가 나오고 생 버터에서 정제된 버터가 나오고

정제된 버터에서 최상의 버터인 제호가 나옵니다.

우유가 조건에 의해 생 버터가 되면 우유는 사라지고 생 버터가 있습니다.

이때 생 버터를, 정제된 버터를, 최상의 버터를 우유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도 전 찰나의 마음이 원인이 되어 후 찰나의 마음이 생깁니다.

이때 전 찰나의 마음은 사라졌고 지금은 새로 일어난 현재의 마음만 실재하는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우유에서 조건에 따라 생버터, 정제된 버터, 최상의 버터가 나오듯이

마음도 조건에 의해 계속 새로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과거의 마음이나 지금 마음이나 모두 내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견해, 유신견입니다.

마음은 무명과 갈애를 조건으로 행이 있는 한 계속 생멸하면서 흘러갈 뿐입니다.

 

4) 마음은 마음의 대상을 조건으로 일어납니다.

대상이 없으면 마음은 일어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형색이라는 대상이 없으면 안식은 일어날 수 없고 소리라는 대상이 없으면 이식은 일어날 수 없고

마음의 대상인 법이 없으면 의식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근과 경이라는 물질을 대상으로 식이라는 알음알이가 일어날 뿐 마음을 일으키는 나는 없습니다.

 

이때 어떤 대상을 만나는가가 중요합니다.

해로움을 일으키는 대상은 피하고 이로움을 일으키는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지혜이며

설사 해로움을 일으키는 대상을 만나더라도 거기에서 해로운 업을 일으키지 않고

이로운 업을 일으키도록 마음을 지혜롭게 숙고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이런 이치에 맞는 숙고를 여리작의如理作意, yoniso manasikāra라고 합니다.

 

5) 마음은 연이생緣而生으로 조건 발생입니다.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안식이 일어나며 이런 세 가지 근 경 식의 화합이 촉이며 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어

대상을 인식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을 퍼져나가게 하는 희론戲論을 거쳐 어떤 헤아림이 일어납니다.

 

이런 헤아림에서 무엇이라는 알음알이가 생깁니다.

이런 조건들 중 하나라도 없으면 무엇이라고 아는 알음알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른 풀과 나뭇가지라는 연료를 조건으로 불이 붙는다.

만일 불이 꺼진다면 그 불은 어디로 갔다고 설명할 수 있는가?’하고 물으시고서

‘그 불은 어디로 간 것이 아니라 연료가 없어서 꺼졌다는 이름을 얻게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도 원인에 따른 조건 발생이며 그 원인이 사라지면 그 마음도 소멸될 뿐 마음이 어디로 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이 어디로 옮겨갔지 소멸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6) 고정 불변하는 내 마음은 없습니다.

마음은 조건에 의해 일어나므로 무상하고 실체가 없이 계속 상속하며 흘러갈 뿐입니다.

 

해탈이란 통찰 지혜로 오온의 무상, 고, 무아, 연이생緣而生을 보고

오온에 대한 염오 이욕 소멸을 실현하여 최상의 깨달음인 열반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2. 물질을 생성하는 네 가지 조건

 

① 마음 (선심, 불선심, 과보심, 무인작용심)

② 업 (선업, 불선업)

③ 자양분 (물질적 영양소)

④ 열기 (적절한 온도, 화대火大)

 

물질이 생길 때는 반드시 이런 네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이 조건 중에서 한 가지라도 빠지면 물질이 생길 수 없습니다.

 

즉 지금까지 쌓아놓은 업에 따라 현재 어떤 대상과 부딪치면 과보의 마음이 일어나고

그 과보에 다시 반응하는 마음이 업을 생성하는데 이와 같이 마음과 업의 질에 따라

거기에 걸맞은 자양분과 열기가 모여서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물질은 누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런 조건에 의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은 이생에서 행한 업의 에너지입니다.

이생에서 얼마나 깨끗한 마음작용을 일으켜 보시, 지계, 수행의 선업을 행하였는가,

아니면 얼마나 불선한 마음작용으로 탐진치의 불선업을 행하였는가에 따라

그 과보에 맞는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며 이 마음이 한 생을 시작하는 새로운 물질과 정신을 만듭니다.

 

1) 식을 원인으로 명색을 만듭니다.

12연기에서 보면 식을 원인으로 명색이 일어납니다.

명색의 명은 수상행이며 색은 물질인 몸입니다.

이전의 무명과 행을 원인으로 마음[識]이 생기며 이 마음은 같은 파장의 물질과 정신[名色]을 만듭니다.

 

한 생을 시작하는 재생연결식에는 한 생의 질을 결정하는 정보가 들어있습니다.

이 정보에 의해 이생의 몸과 마음의 형태나 질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식을 원인으로 명색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또 선행先行하는 마음에서도 매 순간 일어나는 마음에 따라

몸과 마음이 영향을 받고 그 마음에 맞는 새로운 몸과 마음이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예를 들면 짜증이 일어나면 즉시 몸에서는 혈압을 올리는 물질을 생성하고 거친 말이나 행동을 합니다.

또 보시 지계 수행 등의 선한 일을 하면 즉시 몸과 마음이 가볍고 평온해집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것은 바로 마음과 업과 자양분과 열기라는 조건이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만 네 가지 좋은 조건을 만드는 노력을 할 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매순간 알아차림으로 관용과 자애가 있는

선한 마음을 내서 선한 물질과 정신으로 자신을 정화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선업의 에너지는 점차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길로 이끌어줍니다.

 

2) 우리 아이는 과연 내 아이일까요?

우리 아이가 정말 내 아이인가, 나의 소유인가, 내가 책임져야 하는가.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쉬지 않고 찰나 생멸하면서 흐르다가

죽는 순간에 사몰심이 일어났다 사라지면서 재생연결식을 일으키고 소멸합니다.

 

논장의 설명에 따르면 아이는 전생의 사몰심에서 자신의 업과 마음을 가지고

그 마음과 같은 파장의 부모를 선택해서 입태한 것입니다.

 

이때 부모는 입태된 재생연결식에 자양분과 열기를 제공해서 아이를 키우고 태어나게 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자식은 서로 파장이 맞아 서로 끌어당겨서 만나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부모가 아이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아이는 자신의 축적된 성향과 업을 가지고 왔으므로 부모가 원하는 대로 아이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부모는 다만 아이의 성향을 존중해주며 좋은 자양분과 열기로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만 할 수 있습니다.

 

3) 현재 자신의 모습은 자신의 작품입니다.

물질은 매 순간에 일어나는 마음과 업에 의하여 그에 맞는 자양분과 열기가 모여서 새로운 물질을 만들기 때문에

현재 자신의 모습은 자신이 선택한 네 가지 조건 즉 마음과 업과 자양분과 열기로 인해 생긴 자신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현재의 모든 상황을 자신의 작품이라고 알고 받아들이며

지금부터 다시 바람직한 방향으로 자신을 바꾸어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선한 마음으로 선한 업을 행하며 적절한 음식과 좋은 환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즉 알아차림으로 깨어있는 상태에서만 바람직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4) 우리는 정말 죽을 수 있는가?

우리가 이생에서 죽는다고 정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윤회의 세계에 머물러야하는 업이 남아있고

그 업력으로 마음이 생멸하며 흘러가는 과정에 있다면 지금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생의 사몰심 뒤에 그 사몰심의 질과 같은 재생 연결식이 반드시 일어나 새로운 몸과 마음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선하고 위대한 것이라도 삶에 대한 기대나 소망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즉 존재에 대한 욕구가 남아있다면 진정으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31개의 윤회하는 세계 어딘가에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진정한 죽음은 다시 새로운 생을 만들지 않을 만큼 모든 욕구가 소멸한 경우에 이루어집니다.

즉 모든 선업과 불선업이 완전 소멸하여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씨앗이 전혀 없을 때 온전히 죽는 것이 가능합니다.

 

다시 태어날 업이 없으므로 그에 따른 마음이 없으며 업과 마음이 없으므로

물질을 만드는 자양분과 열기를 끌어오지 못하여 새로운 생이 없고 생이 없으니 노사 우비고뇌가 없게 됩니다.

이것이 윤회를 완전하게 벗어나는 열반입니다.

 

수행자는 이렇게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생사윤회가 없는 완전한 소멸을 향해서 가는 자이며

오직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인 팔정도를 묵묵히 실천할 뿐입니다.

그것이 바로 몸과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3. 한 찰라에 하나뿐인 마음

 

마음은 한 찰나에 반드시 하나의 대상만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유익한 마음이 일어날 때는 동시에 해로운 마음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또 해로운 마음이 일어날 때는 불선업을 행함과 동시에 선업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1) 마음은 항상 알아차림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업을 짓는 마음은 항상 선심 아니면 불선심입니다.

욕계에 사는 우리들은 탐진치의 힘이 강해서 마음을 비워둘 수가 없습니다.

만일 ‘마음을 비우자’해서 마음을 비워둔다면 그 자리에는 반드시 불선심이 먼저 들어옵니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선한 마음작용인 알아차림으로 꽉 채우고 있어야 불선한 마음 작용인 탐진치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또 매 순간 마음을 알아차림으로 채우면

그와 동시에 19가지 선한 마음의 작용이 함께 일어나 그 순간 마음의 질은 선심이 됩니다.

그러면 그 선심과 같은 파장의 자양분과 열기가 모여 선한 물질을 새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물질과 정신을 청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알아차림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2) 알아차림은 과거에 행한 불선업의 업장을 소멸합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과거에 지어 놓은 선업의 주머니와 불선업의 주머니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행했던 불선업의 에너지가 잠재의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그 힘이 익으면 지금 어떤 대상과 부딪힐 때 괴로움을 경험하는 불선 과보심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지금 경험하는 괴로움은 이미 결정된 사항으로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경험하는 괴로움을 과보심이라고 알아차려 새로운 탐심과 성냄을 일으키지 않고

현재의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 그 불선업의 씨앗은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소멸됩니다.

 

그리고 괴로움에 반응하지 않고 알아차린 마음의 힘은 선업의 과보주머니에 저장되어 그만큼 커집니다.

이것이 불선업의 과보를 당당하게 받아서 새로운 선업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며

잠재의식에 쌓아놓은 불선업의 힘을 가장 바르게 소멸해 가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자신의 축적된 성향의 힘으로

자신의 마음 습관이 시키는 대로 즉 잠재의식에 저장된 에너지의 힘에 떠밀려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이런 자신의 성향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여 그 힘을 없애려 하거나 붙잡지 않고 법으로 알아차려줍니다.

이때 알아차림과 함께 일어난 중립의 마음 작용이 균형을 잡아 점차 불선업의 힘에 떠밀려가지 않는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과거에 행한 불선업의 업장을 소멸하는 방법을 다시 정리해 보면

첫째, 괴로움을 법으로 알아차려 지금 경험하는 불선과보심에 새로운 탐진치로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이렇게 괴로움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여 생긴 관용과 자애의 마음으로 새로운 선업을 행합니다.

 

셋째, 이 과정에서 행한 알아차림은 자연히 계율을 지키게 해주므로

지금 불선업을 행하지 않아서 불선업의 힘은 줄어들고 그만큼 선업의 힘은 커집니다.

 

그러므로 바른 업장 소멸은 모두 알아차림이 있어야 가능한데

그 바탕에 보시와 지계를 닦은 선업의 공덕이 있어야 알아차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善하다는 것은 보시를 하고,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보시, 지계, 수행뿐이며 이런 행위는 바로 현재를 행복하게 하며

현생의 지은 업의 과보로 맞이하는 내생도 행복하며 궁극에는 윤회를 벗어나게 하는 해탈 열반의 원인이 됩니다.

 

3) 선업의 과보와 불선업의 과보는 섞이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삶에는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착한 사람이라도 커다란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선업과 불선업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고 있다가 불선업의 과보가 익으면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선업과 불선업을 함께 지었기 때문에 좋은 일과 괴로운 일을 다 만납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그것은 과거의 불선업의 과보주머니가 열린 것이며

자신이 뿌린 씨앗이 열매로 나타난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또한 지금 행복하다면 과거에 만들어놓은 선업의 주머니가 열린 것이며 저축한 것을 꺼내온 것이라고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거기에 빠져서 괴로워하지 않고 현재의 어려움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선택한다면 이것은 다시 그전에 행한 선업의 과보주머니가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에서 지혜의 길로 갑니다.

 

대부분 불선업의 과보로 현재 어려운 일이 생기면 거기에 반응하며 새로운 불선업을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괴로움을 회피하기 위해 다른 즐길 거리를 찾거나 현재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화를 내고 자살을 선택한다면

다시 불선업의 과보주머니가 열려서 괴로움에서 더욱 괴로움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대다가 익사하는 경우가 있고

또는 물에 빠졌지만 물속에서 정신을 차려 진주를 건져 올라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힘든 상황에서 선업주머니를 열 것인가, 불선업 주머니를 열 것인가 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 순간 자신의 알아차리는 힘, 지혜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림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며 지혜가 있고 없음의 차이이며

현재를 수용하는가, 현재를 피하려 하는가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평소에 현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얼마나 했느냐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평소에 해두었던 알아차림의 힘이 선업으로 저장되었다가 어려울 때 선업의 주머니를 여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4) 만일 과거 선업이 바닥나서 계속 힘든 상황이 계속 될 때

‘나는 지지리도 복이 없어 이렇게 사는가 보다’라고 투정합니다.

 

사실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과거에 복이 될 원인을 심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잘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 현재를 원망하고 누가 도와주기만을 바란다면 결코 더 나은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고 싶다면 복이 생길 원인을 심어야합니다.

 

그 시작이 알아차림입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지금부터 알아차림으로 계율을 지키고 없는 가운데서도 형편에 맞는 보시를 하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새로운 탐진치를 내지 않고 현재를 받아들이는 수행을 하며

매순간 관용과 자애로 새로운 선업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현재는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지금 가장 손쉽게 선업을 쌓을 수 있는 방법은 알아차림으로 말하고 행동하여 자신의 선업을 증장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의 업의 지배를 받지 않고 현재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수행자의 지혜로운 삶입니다.

 

마음은 한 순간 하나이므로 이렇게 보시, 지계, 수행으로 선업을 짓는 순간에는 어떤 불선업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점차 저장된 업의 힘이 선한 방향으로 바꿔집니다.

그 결과로 덜 괴로운 과보들을 만나고 마음에 평온함이 생깁니다.

 

이런 평온함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 지혜가 성숙하여

궁극에는 지고의 행복인 모든 탐진치가 소멸한 열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현재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속에는 최고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은 각자의 몫일 뿐 누가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각자의 바라밀 공덕과 알아차림으로 생긴 지혜가 결정합니다.

 

4. 각자의 축적된 성향은 바꿀 수 없습니다

 

부처님도 다른 사람의 축적된 성향을 바꾸지 못하셨습니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업력 즉 자신의 축적된 성향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상대의 축적된 성향을 자기 마음에 맞게 바꾸려고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작용에 대한 반작용을 불러와 서로를 더욱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상대의 못마땅한 성향을 고치려 하지 말고

"몰라서 그랬구나.”

“그의 탓이 아니고 무지의 탓이다”

"이것이 그의 축적된 성향이구나" 하고 상대를 수용해주는 알아차림을 해야 합니다.

 

상대의 모습이 어떠하든 상대는 그럴 만해서 그런 것입니다.

먼저 상대를 고치려는 자신의 욕망을 알아차리고 그냥 상대를 관용으로 받아들이면

우선 자신이 덜 괴롭고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편안해지면

그 편안한 파장이 상대에게도 전달되어 어쩌면 조금씩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축적된 성향뿐만 아니라 자신의 좋지 않은 성향도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내가 당장 고쳐지기를 바라지 말고 그냥 ‘내가 또 그랬구나!’ 하고 자꾸 알아차려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꾸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주면 알아차림에는

중립이란 마음작용이 함께 일어나므로 자신도 조금씩 균형을 갖춘 바른 방향으로 바뀝니다.

 

자신이나 남을 알아차려 수용한다는 것은 자신이나 남에 대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반응을 멈추고

더 이상 시비 분별하지 않고 어떤 모습이든 '그랬구나'하는 마음으로 그냥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우 힘든 알아차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말할 때의 알아차림

 

수행자는 말을 할 때 물론 알아차림으로 해야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얀마 쉐우민의 큰 스승께서는 수행자의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첫째, 상대가 말하면 그냥 들어야합니다.

만일 상대가 틀린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을 막지 말고 거기에 반응하는

자신의 몸의 느낌이나 자신의 생각, 감정 등을 알아차립니다.

 

둘째, 상대가 물을 때 대답합니다.

상대가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야 합니다.

상대가 내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을 때는 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서로 자기 말만 하게 됩니다.

그러나 상대가 물을 때는 관용과 자애의 마음으로 알아차림을 가지고 말을 해야 합니다.

 

셋째, 상대가 좋은 말이나 바른 말을 하면 흔쾌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상대의 말이 옳은 말인 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신의 무지이며 아상입니다.

이것이 쉐우민의 큰 스승의 가르침입니다.

 

이상으로 마음의 특성에 대해서 다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법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법념처를 공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