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념처 수행과 위빠사나
2014-01-08 19:32:29
제5장 법념처法念處
25. 사성제四聖諦
1. 사성제四聖諦
사성제는 빨리어로 아리야사짜ariya-sacca입니다.
아리야ariya는 성스럽다는 뜻이며 사짜sacca는 진리, 진실, 제諦라는 뜻으로 ‘있는 그대로의 진리’입니다.
네 가지 성스런 진리란 괴로움의 진리,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 닦음의 진리입니다.
사성제의 성聖자는 첫째 네 가지 진리는 매우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에서
둘째 성자聖者에 의해 발견된 진리라는 뜻에서
셋째 성자가 되어야 바르게 아는 진리라는 뜻에서 성聖자가 들어갑니다.
그래서 사성제는 수다원 이상의 성자들만이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사성제에 대해 어느 정도 알지만 그것은 관념적인 앎입니다.
수행자가 사성제에 대하여 듣고 실제 도 닦음인 수행을 해서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법으로 보는 안목이 생기고
그만큼 괴로움이 소멸할 때 사성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집니다.
이것이 관념이 아닌 수행으로 아는 지혜, 수혜修慧입니다.
수행자가 드디어 모든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을 경험하면 사성제를 바르게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법을 펴신 초전법륜경은 바로 사성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과 극단적 고행이라는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실천하여 괴로움을 바르게 이해하고괴로움이 원인을 버리고, 괴로움을 소멸하여 완전한 깨달음, 정등각자가 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괴로움에 대한 바른 이해로 시작하여
중도라는 실천적 수행을 통하여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것만을 가르칩니다.
부처님은 대념처경에서 사성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것은 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있는 그대로 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성제는 불교의 궁극의 진리이며 오직 있는 그대로 아는 통찰지에 의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중도中道인 팔정도 즉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고성제苦聖諦 : 괴로움의 성스런 진리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에서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란 무엇인가?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늙음은 괴로움이다. 죽음은 괴로움이다.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은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은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은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요약하면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가 괴로움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초전법륜경에서는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는 바르게 잘 이해되어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라고 고성제를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수행자는 항상 경험하는 괴로움을 법이라고 알아차릴 대상이라고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 괴로움은 일어날만한 조건이 있어서 일어난 법이며 와서 보라고 나타난 법이며
그 법 안에는 반드시 무상, 고, 무아의 법이 들어있습니다.
괴로움은 빨리어로 둑카Dukkha입니다.
둑카를 괴로움, 고통, 고뇌, 불편, 불행, 고苦 등으로 부르지만 가장 적당한 우리말은 불만족입니다.
빨리어 둑카Dukkha의 두Du는 ‘하찮은’이란 뜻이며 카Kha는 ‘비어있음’이란 뜻입니다.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괴로움은 하찮고 비어있는 것입니다.
어떤 괴로움도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 것이라 붙잡고 피하거나 없애려고 하기 때문에 괴로움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실 범부는 항상 바라기 때문에 계속 불만족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5개, 5온, 12처, 7각지를 법으로 알아차리면 괴로움도 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 한 현실적으로 괴로움은
상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괴로움을 법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괴로움을 없애려 하기보다 알아차릴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면 괴로움에 휩쓸리지 않고 괴로움에서 오히려 지혜를 얻어 괴로움을 극복하는 힘이 생깁니다.
이때 수행자에게 괴로움은 단지 법일 뿐입니다.
괴로움은 실제로 생生, 노老, 병病, 사死,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취온고五取蘊苦입니다.
수행은 상존하는 괴로움을 '괴로움은 항상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며 법으로 받아들이면 그 순간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원래 그럴 수밖에 없도록 이미 조건 지어진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하고 인정하면 그때부터 괴로움을 하나의 현상으로
알아차릴 대상으로, ‘와서 보라’고 나타난 법으로 보게 되어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을 가게 됩니다.
이것이 괴로움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법념처입니다.
이와 같이 괴로움을 법으로 알아차림으로써 거기서 괴로움의 생멸을 보고 괴로움의 실체 없음을 보아 괴로움을 소멸할 때 그때 괴로움은 수행자에게 성스런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3. 집성제集聖諦 :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런 진리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직 괴로움이 있다는 것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인데
집성제는 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 즉 괴로움의 원인을 가르칩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에서
“다시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런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새롭게 태어남을 일으키는 갈애이다.
쾌락과 탐욕을 동반하고 항상 새로운 기쁨을 지금 여기저기서 찾으니
이른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그리고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이런 갈애는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서 자리 잡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귀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
코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
혀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
몸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
마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
이와 같이 6根, 6境, 6識, 6觸(접촉), 6受(느낌), 6想(지각), 6思(의지), 6愛(갈망), 6尋(겨냥), 6伺(고찰)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일어나서 여기서 자리 잡는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라고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초전법륜경의 집성제에서는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는 버려져야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라고
집성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渴愛입니다.
갈애로 인한 집착이 업을 생성하고 그 업의 과보가 괴로움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갈애가 없으면 집착이 없고 업의 생성이 없고 업의 과보도 없기 때문에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갈애는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아다니듯이 감각적 즐거움을 애타게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이런 갈애의 바탕에는 반드시 유신견有身見, 상견常見, 단견斷見이라는 사견이 있습니다.
대념처경에서 보면 갈애가 일어나는 곳이 60군데입니다.
다시 말하면 몸과 마음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갈애가 일어납니다.
이 말은 몸과 마음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는 모두 세 종류입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입니다.
1)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는 여섯 감각기관이 즐겁고 재미있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을 원하는 갈애입니다.
세간에서 중요시하는 재물욕, 성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도
바로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입니다.
여기에는 감각적 즐거움을 경험하는 내가 있다고 아는 유신견이 그 바탕에 있습니다.
이 갈애가 생사윤회를 만드는 원인이며 범부는 자신이 일으킨 갈애의 노예입니다.
갈애가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분명하게 아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그는 감각기관이 추구하는 갈애의 명령을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갈애가 일어날 때 알아차려서
갈애는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갈애는 조건에 의해 일어났다 사라지는 법이라고 갈애는 실체 없다고
지혜로 통찰하면 갈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갈애가 일어날 때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또 알아차림을 이어가면,괴로움의 원인인 갈애를 당연히 버리게 됩니다.
2) 존재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는 마음이 나의 실체이며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곳에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 존재에 대한 갈애입니다.
이 갈애는 죽으면 몸은 이생으로 끝나지만 마음은 영원하다는 견해로 상견常見이 바탕에 있습니다.
상견은 또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지금 어떤 고행도 마다하지 않는 고행주의로 흐르며
윤회를 끊는 것이 지고의 행복이라는 해탈 열반을 결코 이해하지 못합니다.
존재에 대한 갈애는 모든 생명의 깊은 잠재의식 속에서 삶을 집착하게 하는 거대한 힘입니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갈애는 새로운 태어남을 일으키는 원동력입니다.
지혜로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여 오온에 대한 집착이 소멸할 때까지 존재에 대한 갈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3) 비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갈애입니다.
몸과 마음 중에 몸이 ‘나’라는 유물론적 사고방식으로
몸의 소멸과 함께 마음도 끝나므로 죽음과 함께 받아야할 과보가 없다는 견해입니다.
이 갈애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끊어진다는 단견斷見이 바탕에 있습니다.
단견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생을 즐기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쾌락주의로 흐르며 삶이 힘들고 괴로우면 쉽게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보시, 지계, 수행이라는 바른 삶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4) 이런 세 가지 갈애는 사견을 바탕으로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갈애는 그 바탕에 유신견有身見, 상견常見, 단견斷見 이라는 사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인과의 법칙을 알지 못하는 무명입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원인은 무명과 갈애입니다.
수행자는 알아차림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직접 원인과 결과를 통찰하고
업은 짓는 자의 것이라는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의 지혜를 얻습니다.
업자성 정견은 자아가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업의 과보로 몸과 마음이 생기며
업이 없으면 몸과 마음이 생기지 않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업자성 정견은 모든 갈애의 원인인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유신견,
나는 영원히 존재한다는 상견, 죽으면 끝이라는 단견을 모두 제거합니다.
그러므로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끊어집니다.
이와 같이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가 소멸되면 당연히 괴로움이 소멸합니다.
4. 멸성제滅聖諦 :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1)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인 멸성제
멸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에 관한 성스런 진리입니다.
상윳따니까야에 ‘벗이여, 탐욕의 소진, 성냄의 소진, 어리석음의 소진,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념처경에서는
‘다시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인가?
그것은 갈애가 남김없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다시 비구들이여,
그럼 이 갈애는 어디서 없어지고 어디서 소멸하는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 있으면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그러면 세상에서 어떤 것이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인가?
눈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귀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
코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
혀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
몸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
마음은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
이와 같이 6근, 6경, 6식, 6觸(접촉), 6受(느낌), 6想(지각), 6思(의지), 6愛(갈망), 6(尋(겨냥), 6伺(고찰)는
세상에서 즐겁고 기분 좋은 것이다.
여기서 이 갈애가 없어지고 여기서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라고 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초전법륜경에서는 멸성제를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는 마땅히 실현되어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은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가 남김없이 소멸하여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한 것입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통해서 오온이 괴로운 것임을 통찰하여 오온을 염오하고 오온에 대한 갈애를 소멸하고
오온에 대한 집착을 소멸하는 이욕을 실천할 때 성자들이 경험하는 열반법을 체험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삶은 괴로움이지만 그 괴로움을 완전하게 소멸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셨습니다.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는 그 길이 사성제의 도성제로서 팔정도이며 그 실천 방법이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대념처경은 사념처 수행이 해탈열반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누구라도 사념처 수행을 하면 괴로움의 생사윤회를 끊는 아라한이 될 수 있음을 보증하시는 것으로 끝납니다.
수행자가 열반을 성취하려면 반드시 7청정과 위빠사나의 16단계 지혜의 성숙과정을 거칩니다.
열반을 지향하는 14단계 도의 지혜와 열반에서 나오는 15단계 과의 지혜를 경험하면 이를 수다원의 도과라고 말합니다.
수행자는 수다원에서 다시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사다함의 도과와 아나함의 도과를 거쳐 탐진치가 완전 소멸된 아라한의 도과를 경험합니다.
이때 비로소 중생을 존재 계에 묶어두는 열 가지 족쇄가 모두 끊어져 생사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성취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7청정과 16단계 지혜의 과정은 부처님께서 임의로 만드신 기준이 아닙니다.
부처님 자신도 순서대로 이 과정을 겪으면서 열반에 이르셨고
이 길을 경험한 선배로서 수행자들에게 깨달음의 과정을 밝혀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7청정과 16단계 지혜의 과정을 밟게 되며
이 과정을 벗어난 다른 어떤 경로로도 열반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도 이런 과정을 거쳐서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것이 주는 의미는
부처님이 신처럼 어떤 초월적 지위를 가지고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 아니고
우리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탐진치가 완전히 소멸한 정신적 상태를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이며 그 길을 자세하게 밝혀 놓으신
붓다의 가르침이야말로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으며 완전한 진리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위빠사나의 7청정과 16단계 지혜
A) 지계의 청정Sīla Visuddhi - 계청정戒淸淨
B) 마음의 청정Citta Visuddhi - 심청정心淸淨
(1)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 Rūpa Pariccheda Ñāṇa
C) 견해의 청정Diṭṭhi Visuddhi - 견 청정見 淸淨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Paccaya Pariggaha Ñāṇa
D) 의심에서 벗어나는 청정Kaṅkhāvitaraṇa Visuddhi - 도의청정度疑淸淨
(3)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asana Ñāṇa
(4)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ṇa
E) 바른 길을 아는 청정Maggāmaggañãṇadassana Visuddhi -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
F) 수행과정의 지혜와 통찰에 의한 청정Paṭipadāñāṇadassana Visuddhi - 행도지견청정行道智見淸淨
(5) 소멸의 지혜Bhanga Ñāṇa, Bhaṅga Ñāṇa
(6) 두려움에 대한 지혜Bhaya Ñāṇa
(7) 고난의 지혜Ādīnava Ñāṇa
(8) 혐오감에 대한 지혜Nibbidā Ñāṇa
(9) 해탈을 원하는 지혜Muñcitukamayatā Ñāṇa
(10) 다시 살펴보는 지혜Paṭisankha Ñāṇa, Paṭisaṅkha Ñāṇa
(11)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Sankhārupekkhā Ñāṇa
(12) 적응의 지혜Anuloma Ñāṇa
(13) 성숙의 지혜Gotrabhū Ñāṇa
(14) 도의 지혜Magga Ñāṇa
(15) 과의 지혜Phala Ñāṇa
G) 지혜통찰의 청정Ñāṇadassana Visuddhi -지견 청정智見淸淨
(16) 회광반조廻光返照의 지혜Paccavekkhana Ñāṇa
3) 순수 위빠사나의 열 가지 번뇌[十觀隨染]
위빠사나 수행 중 네 번째 생멸의 지혜 단계에서 열 가지 특이한 현상을 경험합니다.
① 마음속에서 강한 빛을 경험한다[光明 ochāsa]
② 예리한 이해력이 생겨 경전이나 교리의 깊은 의미를 꿰뚫어 이해가 된다[知 ñāṇa]
③ 몸의 전율을 느끼는 희열이 생긴다[喜 pīiti]
④ 몸과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 진다[輕安 passaddhi]
⑤ 마음에서 강렬한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樂 sukha]
⑥ 강한 신심이 생긴다[勝解 adhimokkha]
⑦ 더욱 더 수행에 전념하여 정진을 한다[努力 paggaho]
⑧ 흔들림이 없는 알아차림이 뚜렷하게 항상 자리잡고 있다[現起 upaṭṭāna]
⑨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마음이 평등한 상태가 된다[捨 upekkhā]
⑩ 이러한 모든 현상들에 대해 미세한 집착과 욕망이 일어난다[欲求 nikanti]
수행 중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대부분의 수행자는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착각하고 붙잡기 때문에
수행자에게는 이 열 가지 현상이 수행을 방해하는 천박한 번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이 열 가지 현상을 집착하지 않고 법으로 알아차리면
다섯 번째 청정인 도비도지견청정이 생기며 이어서 6번째 청정인 행도지견청정이 익어갑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특징은 수행 중에 경험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 다 알아차릴 대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즉 최고라고 하는 열반까지도 회광반조에 의해 다시 알아차릴 대상이지 수행자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행 중에 나타나는 어떤 현상도 붙잡지 않고 그냥 다 알아차리기만 하는 것입니다.
4) 위빠사나의 16단계 지혜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실재하는 현상을 알아차리면
정신과 물질이 한 덩어리가 아니고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수행자가 정신과 물질은 서로 다른 영역으로 각자 자기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
그 동안 몸과 마음을 하나로 뭉쳐서 나라고 알았던 고정관념에서 조금 벗어납니다.
이제 몸과 마음은 단지 물질과 정신이고 나라는 것은 관념일 뿐 실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2단계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조건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지금 일어난 물질적 현상이 원인이고 그것을 아는 정신적 현상은 결과일 뿐
그것을 아는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이렇게 물질과 정신은 원인에 따른 결과로 매순간 조건에 의해 생멸하는 흐름이 있다는 견해가 생깁니다.
►3단계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하다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무상, 고 무아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는 지혜입니다.
수행자는 이 단계에서 고통과 비탄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로 몸에서 통증, 쑤심, 경련, 나른함, 가려움, 혐오, 메스꺼움, 흔들림, 머리의 무거움, 무거운 발걸음 등의
온갖 종류의 불쾌한 느낌을 경험합니다.
표상으로는 장례식, 군대, 귀신 등 무섭고 두려운 것들이 나타납니다.
이때 수행자는 지금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현상을 그냥 사실대로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표상이 보이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마음이 두려우면 그것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온갖 종류의 괴로운 느낌과 끔찍한 표상을 보며 몸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조금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이 매순간 다르게 나타나는 것도 알게 되어 괴로움 자체가 영원하지 않다는 무상을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사실 수행자가 원하는 것은 괴로움이 없는 편안함을 경험하고 싶은데
이 몸은 내가 다스릴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것으로 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무아도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현상을 바르게 안다는 것은
‘이 몸은 무상하며, 괴로움이며 무아라는 것을 수행을 통해서 조금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괴로운 현상은 알아차릴 대상이며 수행자가 이들을 대상으로 계속 알아차리면
이런 괴로운 느낌을 극복하고 다음 단계의 지혜로 나가게 됩니다.
►4단계 생멸의 지혜
통증 등의 괴로운 느낌들을 알아차려 그들의 일어남 사라짐의 성품을 보는 지혜입니다.
수행자가 분명하게 현재의 통증, 쑤심, 욱신거림에 초점을 맞추고 정확히 알아차릴 때
이 통증이 일어나자마자 사라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때부터 수행자는 괴로운 느낌을 알아차림으로 극복하기 시작합니다.
점차 통증의 일어남보다 사라짐이 더 분명하여 통증의 괴로운 느낌에 휘둘리지 않고 알아차릴 수 있으며
이 통증을 아는 마음도 통증과 함께 일어났다 사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빠르게 진행되는 현상의 사라짐을 좇아가는 것이 괴롭고 이런 괴로움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
수행자는 무상함, 괴로움, 무아를 경험을 통해 조금 더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이 단계는 3단계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의 단계에서
느꼈던 괴로운 느낌은 모두 사라지고 몸과 마음의 가벼움, 부드러움, 적합함이 나타납니다.
이제는 그냥 편안하게 대상을 능숙하게 알아차릴 수 있으며
몸과 마음은 편안함과 바름이 생겨 모든 일을 바르게 잘 할 수 있습니다.
또 수행자의 표정이 항상 온화하며, 부드럽고 예의 바르며, 행동이 조용하고, 은은하며, 깨끗합니다.
그러므로 이 지혜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느낌은 즐거운 느낌입니다.
이 단계에서 생긴 희열과 즐거움은 범부가 갈애를 추구해서 얻는 즐거움과는 비교될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즐거운 느낌을 집착하면 더 이상 수행이 진전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는 즐거움에 머물려는 탐욕을 버리고
이 편안하고 즐거운 희열의 느낌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해서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가야합니다.
생멸의 지혜에 이른 수행자는 이 희열의 느낌도 꿰뚫어보듯이 분명히 알아차리면 즉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이 너무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다보면 즐거운 느낌이 무상하고
바로 괴로움이고 붙잡을 수 없는 것임을 경험으로 아는 지혜가 다시 생깁니다.
이제 수행자는 즐거움에 머물려는 탐욕을 버리고 알아차림을 통해
즐거운 느낌이 바로 괴로움이라는 것을 꿰뚫어 알고 현재의 즐거운 느낌을 붙잡지 않습니다.
►5단계 소멸의 지혜
이 단계는 대상의 일어남보다 사라짐이 더 분명해져, 일어남은 분명하지 않고 사라짐만 느끼는 지혜입니다.
점점 알아차리는 대상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는 마음도 함께 사라지는 것을 보고
대상과 아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수행자는 정신적요소나 물질적요소가 영원하지 않고 무상하며
소멸의 속도가 너무 빨라 심한 고통을 느끼고 이것은 비참한 일이며 괴로움이라고 압니다.
이런 사라짐과 이런 심한 고통에서 자신을 보호할 아무런 방법이 없음을 알고
오온을 통제할 수 없는 무아를 좀 더 깊게 알게 됩니다.
소멸의 지혜에서 수행자는 무상, 고, 무아의 법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6단계 두려움에 대한 지혜
이제 무상 고 무아를 보는 수행자의 마음에 공포감이 일어나 두려움을 느끼는 단계입니다.
언제나 바로바로 사라지는 오온에서 오온이 좋은 것이 아니며, 오온은 두려운 것이라고 아는 지혜입니다.
►7단계 고난의 지혜
이제 이런 두려움 덩어리인 오온이 잘못된 것이며
오온은 좋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영원한 것도 없다는 사실을 좀 더 확실하게 아는 지혜입니다.
이때는 표상으로 썩은 것, 피가 흐르는 것이 나타나며 이것을 대상으로 고난을 아는 지혜가 성숙합니다.
►8단계 혐오감에 대한 지혜
점차 수행자는 오온이 진저리쳐질 만큼 싫어져서 오온을 혐오하는 지혜입니다.
오온에는 어느 것도 안정적인 것이 없으므로 이제는 오온을 정말 혐오하며 오온에 대한 집착을 줄여갑니다.
►9단계 해탈을 원하는 지혜
이제 수행자는 오온에서 벗어나야한다는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천상 세계라도 다시 오온을 가지고 존재로 태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오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뿐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조차도 그냥 놓아버리지만 알아차림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10단계 다시 살펴보는 지혜
그러나 여기서 이래서는 진정한 평온, 진정한 재산인 열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 알아차림을 시작하여 오온을 다시 살펴보는 지혜입니다.
수행자는 그동안 오온을 어부가 잡아 올린 맛있는 물고기처럼 알았는데
이제 오온이 무상, 고, 무아라는 세 가지 줄을 가진 독뱀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독뱀을 낚은 어부는 이 독뱀을 그냥 놓아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독뱀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어부가 독뱀을 그냥 놓아버리면 다시 독뱀에게 물릴 것 같아
손에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독뱀의 목을 꽉 잡고 아주 멀리 던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지혜 수준에서 수행자는 매우 심한 괴로운 느낌을 경험합니다.
쑤심, 통증, 경련, 압박, 무거움, 동요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머리부터 무거운 것이 찍어 내려누르는 것 같은 느낌으로
허리가 꺾여서 바닥에 닿을 것처럼 무겁기도 합니다.
수행자의 이런 고통과 아픔의 느낌도 알아차리면 사라지고
다시 다른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고통과 아픔의 느낌이 다시 나타납니다.
이런 현상은 3단계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알아차리는 것이 즐거웠지만 이 단계에서는 수행이 즐겁지 않습니다.
알아차리는 것이 너무 어렵고 잘 이어지지 않아서 자기 생각에는 수행이 퇴보한 것처럼 느껴져서 절망을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기가 정상이 아니고 미쳐간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포기하고 집으로 가버립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다시 돌아와 수행을 새로 시작하기를 몇 번이고 반복합니다.
이 단계는 매우 극복하기 어려운 단계입니다.
몸도 안정적이지 않아 자주 자세를 바꾸고 싶어 하고 마음도 들떠서 좌선을 하면
조금 있다가 경행이 하고 싶어지고 그래서 일어나 경행을 하면 그것도 오래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매우 낮은 지혜로 떨어졌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런 정신적 현상을 독뱀을 다시 한 번 꽉 쥐는 것과 같은 노력으로 이겨내도록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겨내면 다음 단계의 지혜가 나타납니다.
►11단계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
이 단계에서는 앞에 다시 살펴보는 지혜와 상반되는 경험을 합니다.
대상과 아는 마음이 거의 동시에 자동으로 일어나서 알아차림이 대단히 좋아집니다.
이제는 두려운 마음도, 집착하는 마음도, 놀라는 일도 없습니다.
또한 부딪히는 즐거운 것이나 참을 수 없는 것이나 모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평온하여 집중이 잘 됩니다.
그래서 대상과 알아차리는 마음이 저절로 알아서 작용하며
수행자는 마치 구경꾼이 되어 바라보는 것과 같이 모든 긴장에서 벗어나 있어 매우 편안합니다.
이때 자칫 잘못하면 수행자는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꿰뚫어보는 알아차림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평등심에 머물고 싶은 어리석음이 일어납니다.
이때 수행자는 이것이 평등심에 안주하고 있는 어리석은 느낌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서
그 다음 단계의 지혜를 성숙시켜야합니다.
수행자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이 평등심의 덤덤한 느낌을 꿰뚫어보듯이 지켜보면 이 평등심의 덤덤한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알고 이제 평등심의 덤덤한 느낌에 머물러 있는 어리석음을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의 발전과정은 수행자가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괴롭고, 즐겁고,
평온한 느낌을 모두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느낌에서 갈애를 제거하는 과정입니다.
위빠사나의 지혜 중 11단계의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까지는 수행자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인 12단계에서 16단계의 지혜는 수행자가 쌓은 선한 바라밀공덕의 과보가 받쳐주어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14단계 열반을 지향하는 도의 지혜와 15단계 열반에서 나오는 과의 지혜에서
열반을 경험하고 16단계 회광반조의 지혜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보시와 지계로 바라밀 공덕을 쌓으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보시와 지계는 알아차림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바로 알아차림을 하는 마음습관을 들여서 일상에서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 하는 것이 최고의 바라밀 공덕입니다.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해탈열반을 향해 나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정신적 현상들을
우리에게 밝혀주신 내용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과정은 해탈열반을 향해서 가는 수행자는 누구나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 스스로 여기에 비춰보면 지금 자신이 바르게 가고 있는지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5. 도성제道聖諦 : 도 닦음의 성스러운 진리
1) 도성제는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의 성스러운 진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초전법륜경에서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의지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극단이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그것은 저열하고 통속적이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닉에 몰두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 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따르지 않고 중도를 완전하게 깨달았으니
이 중도는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을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어떤 것이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팔정도로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중도를 통하여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을 얻었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를 마땅히 닦아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성제 중 도성제는 중도中道이고, 중도는 팔정도이고 팔정도는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이며 팔정도를 닦을 때만이 괴로움을 소멸하는 지혜가 생기며 모든 괴로움이 소멸한 열반에 도달합니다.
팔정도는 열반에 이르는 단 하나의 유일한 길이며 그 시작은 알아차림입니다.
팔정도의 정正은 ‘알아차림이 있는’ 이라는 뜻입니다.
2)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
(1) 바른 견해[正見 Sammā diṭṭhi 慧]
① 세간의 바른 견해는 업자성정견으로 선과 불선에 대한 앎입니다.
우리 모두는 ‘업의 소유자. 업의 상속자. 업을 모태로 하는 자. 업을 친지로 하는 자. 업을 의지 처로 하는 자’라는
업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있을 때 스스로 불선한 행위를 제어하고 선한 행위를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업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견해가 세간적인 정견입니다.
② 출세간의 바른 견해는 사성제에 대한 앎입니다.
괴로움을 법으로 정확하게 이해하여, 괴로움의 원인을 끊어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팔정도를 마땅히 닦아
괴로움의 소멸을 증득하여 사성제에 대한 앎이 생기면 출세간의 정견입니다.
(2) 바른 사유[正思惟 Sammā saṅkappa 慧]
정사유는 지혜로서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이나 분노나 악의를 제거하고 대상으로 마음을 보내는 것입니다.
① 출리사유出離思惟는 감각적 욕망에 의한 탐심을 극복하는 사유이며 관용과 보시의 마음가짐입니다.
② 무에사유無恚思惟는 분노를 극복하고 자애의 마음을 일으키는 사유이며 자비의 마음가짐입니다.
③ 무해사유無害思惟는 해치려는 마음을 극복하고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는 사유이며 연민의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사유란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지혜를 바탕으로 탐욕을 멀리하고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정견은 치심을, 정사유는 탐심과 성냄을 제거하는 지혜입니다.
정견과 정사유는 삼학 중 혜慧의 항목입니다.
(3) 바른 말[正語 Sammā vaca 戒]
정어는 말을 할 때 알아차림으로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 이간질, 거친 말, 쓸모없는 말을 삼가는 것이며
적극적으로 진실한 말, 화합하는 말, 부드러운 말, 유용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① 거짓말을 삼가고 적극적으로 진실을 말합니다.
② 이간질을 삼가고 적극적으로 화해시키고 화합하는 말을 합니다.
③ 거친 말을 삼가고 적극적으로 부드럽고 귀에 거슬리지 않는 포근한 말을 합니다.
④ 쓸모없는 말을 삼가고 적극적으로 의미 있는 말을 합니다. 부처님 의 가르침과 계율에 근거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어 수행은 정말 자신을 이롭게 하고 평온하게 하기 때문에 실천해야 합니다.
알아차림으로 말하는 습관을 들이면 가장 적절하고 조리 있는 말을 하게 되며 자신의 口業을 청정하게 합니다.
(4) 바른 행동[正業. Sammā kammanta. 戒]
몸으로 행동을 할 때 알아차림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身業을 청정하게 하는 것으로 바로 자신을 보호하는 계율입니다.
① 살생을 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냄의 성향을 제어합니다.
②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는 탐욕의 성향을 제어합니다.
③ 삿된 성행위를 하지 않는다.
불사음은 미성년자, 범죄자, 다른 사람의 약혼자나 배우자 등과 성관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어리석음의 성향을 제어합니다.
(5) 바른 생계[正命 Sammā ajīva 戒]
정명은 바른 직업입니다.
잘못된 생계를 버리고 바른 생계에 의지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생계란 출가자의 경우 사기행위, 배신, 점, 예언, 속임수, 고리대금업에 의한 생계를 말하며
재가자의 경우는 무기거래. 살아있는 동물거래, 고기나 술 독극물 등의 상거래, 직업 군인, 어부, 사냥꾼 등도 잘못된 생계에 속합니다.
정명은 자신의 생계 수단이 정어와 정업에 어긋나지 않는 것입니다.
재가자는 어차피 생계 수단이 있어야 하는데 직업 자체가 계율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없고 그래서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의 직업은 나와 남에게 이로운 직업,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해야 합니다.
정어, 정업, 정명은 삼학 중 계戒에 속하며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자는 자연스럽게 계율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6) 바른 노력[正精進 Sammā Vāyāma 定]
정정진은 알아차림과 함께하는 인내와 노력으로 사정근四精勤입니다.
① 막으려는 노력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선법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노력을 합니다.
육문을 알아차림으로 지키는 것이 막으려는 노력입니다.
② 끊어내려는 노력
-이미 생긴 불선법들을 부지런히 끊어내려는 노력을 합니다.
이미 생긴 불선법을 알아차림으로 끊는 것이 끊어내려는 노력입니다.
③ 계발하려는 노력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한 법들이 생겨나도록 마음을 쏟으며 노력하는 것이 계발하려는 노력입니다.
알아차림을 새로 시작하는 것이 계발하려는 노력입니다.
④ 유지하려는 노력
-이미 생겨난 온전한 법을 지속시키려고 마음을 쏟으며 노력하는 것이 유지하려는 노력입니다.
이미 일어난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선법은 막고, 끊고 선법은 계발하고 유지하는 것이 사정근四精勤 바른 노력입니다.
다음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직전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마지막 정진에 들어갈 때
“비록 피부와 뼈가 말라 비틀어져도, 살과 피가 다 말라 없어져도, 불굴의 인내와 정진의 힘과 끈기에 의해서
내가 얻어야 할 것을 얻기 전에는 나는 노력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정진하셨답니다.
수행자는 이런 인내와 노력이 원인이 되어 깨달음이라는 결과를 성취하게 됩니다.
(7) 바른 알아차림[正念 Sammā sati 定]
정념이란 신수심법 네 곳을 법으로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비 작용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① 몸에 대한 알아차림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 행주좌와에 대한 알아차림, 일상생활에서 세세한 동작에 대한 분명한 앎,
몸의 32가지 에 대한 알아차림, 몸의 4대 요소에 대한 알아차림을 합니다.
②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6근 6경 6식이 촉할 때 일어나는 좋고, 싫고, 덤덤한 느낌에 대하여 알아차림을 합니다.
③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
-8쌍의 16가지 마음, 즉 탐심, 관용, 성냄, 자애, 어리석음, 지혜, 침체된 마음, 산란한 마음, 커진 마음, 위축 된 마음, 향상된 마음, 향상이 안 된 마음, 집중된 마음, 집중이 안 된 마음, 해탈한 마음, 해탈이 안 된 마음 등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을 합니다. 그러나 수행에서는 주로 탐심, 관용, 성냄, 자애, 어리석음, 지혜의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④ 법에 대한 알아차림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정신적 현 상을 법으로 알아차립니다.
다섯 장애, 오취온, 12처의 족쇄,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성제를 법으로 알아차립니다.
수행은 먼저 정견과 정정진이 바탕에 있어야 바른 알아차림을 할 수 있습니다.
팔정도의 어느 항목이든 정정진과 정견과 정념의 3가지가 있어야 실천할 수 있습니다.
(8) 바른 집중[正定 Sammā samādhi 定]
팔정도의 정정은 알아차림이 계속 유지됨으로써 마음이 대상에 잘 집중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집중에는 근본 집중과 근접 집중과 찰나 집중이라는 세 종류의 집중이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에서는 근접집중과 근본집중을 하여 마음이 고요해지는 선정을 얻습니다.
선정은 색계 4선정과 무색계 4선정이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나타나는 대로 알아차려 단지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는 찰나 집중을 합니다.
찰나 집중에서 법의 특성인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통찰하는 지혜를 얻습니다.
집중도 바른 집중과 삿된 집중이 있습니다.
수행자가 탐진치의 소멸을 위한 수행 주제에 집중할 때는 바른 집중이며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집중을 할 때는 삿된 집중입니다.
정정진, 정념, 정정은 계정혜 삼학 중 정定의 요소입니다.
이것으로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가 모두 끝났습니다.
3) 부처님의 유훈
부처님께서 완전한 열반에 드실 때
제자들이 부처님이 안 계시면 수행자가 무엇을 의지해서 수행을 해야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자등명 자귀의 법등명 법귀의를 할 것이며 알아차림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유훈으로 남기셨습니다.
그 말씀을 빨리어로 옮깁니다.
vayadhamma sankhara(와야담마 상카라) 모든 구성된 것은 변하게 되어있다.
appamadena sampadetha(아빠마데나 삼빠데타) 잊지 말고 완전하게 알아차려라(유교경, 대반열반경)
이것으로 기초 과정을 모두 마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념처수행 기초과정 회향
1. 참회
내가 만일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잘못을 행했다면 내가 안락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누군가가 나에게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잘못을 행했다면 그가 안락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용서합니다.
2. 회향
우리는 우리가 닦은 보시 지계 수행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과 이 공덕을 나누어 안락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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