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집해論語集解
<論語>를 주석註釋한 가장 오래 된 책冊으로 현재現在 송宋의 형병邢昺의 소疏를 덧붙였음. 20권.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하안何晏(193?~249)이 저술하였다.
정확하게는 하안과 순의荀顗 ·조희曹羲 ·정충鄭沖 ·손옹孫邕의 공저共著이다.
한漢 ·위魏의 공안국孔安國 ·포함包咸 ·주씨周氏 ·마융馬融 ·정현鄭玄 ·진군陳群 ·왕숙王肅 ·주생렬周生烈 등
여러 학자의 <논어> 주석註釋 중에서 정량精良한 것을 모아 여기에 독자적인 견해를 덧붙여 만든 것이다.
그 독자성은 논어의 해석에 老莊思想을 도입하였다는 점, 방언方言 속어俗語로써 해석하는 점 등이다.
그러나 전체로서는 한 ·위의 고주古註를 충실하게 보존하였고 논어의 고훈古訓을 아는 데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책은 중국에서는 남송南宋 이후 흩어져 없어졌고 일본에만 전해졌는데
淸朝時代에 역수입逆輸入되어 번각翻刻되었다.
►하안何晏(193?-249?)
위진魏晉의 현학玄學(老壯學)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관료 겸 사상가.
삼국 시대 위魏나라 남양南陽 완현宛縣 사람. 자는 평숙平叔이고 후한後漢의 대장군 하진何進의 손자이다.
어머니 윤尹씨가 후에 조조曹操의 부인이 된 탓으로 위나라 궁정 안에서 자랐고 위나라 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젊어서부터 수재秀才로 명성을 얻었다.
용모가 아름다운 데다 얼굴이 희어서 사람들이 ‘부분하랑傅粉何郞’이라 불렀다.
제왕齊王 조방曹芳 정시正始 중에 조상曹爽이 권력을 잡자 산기상시散騎常侍와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승진하였다.
선거選擧를 맡았는데 진眞나라 사람 부함傅咸이 그가 기용한 사람이 모두 직분을 제대로 수행했다면서 칭찬했다.
열후列侯의 작위에 올랐다.
조상과 한 무리라 하여 사마의司馬懿에 의해 조상 일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그가 왕필王弼과 주고받은 청담淸談은 일세를 풍미하였고
그 뒤 언제까지나 '정시正始의 음音'으로 일컬어져 청담의 모범이 되었다.
왕필과 더불어 위진魏晉의 현학玄學老壯學의 시조로 받들어지며 <논어論語><역경易經><노자老子>를 상통相通하게 하여 유교의 道·성인관聖人觀을 노장풍老壯風으로 해석하였다. <논어집해論語集解>의 대표 편집자이다.
►순의荀顗(?-274?)
서진西晉 영천潁川 사람. 자는 경천景倩이고 시호는 강康이다. 순욱荀彧의 아들이다.
박학하고 견문에 넓어 어린 나이에 명성을 얻었다.
위나라 때 아버지의 공훈으로 중랑中郞에 임명되었고 사마의司馬懿의 인정을 받아 시중侍中으로 옮겼다.
관구검毌丘儉을 토벌할 때 공을 세워 만세정후萬歲亭侯에 봉해졌다.
상서복야尙書僕射가 되어 이부吏部를 관장하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해 사직했다
촉蜀을 평정하자 양호羊祜 등과 함께 진례晉禮를 제정했다.
진나라가 세워지자 임회공臨淮公에 봉해졌다.
시중과 태위太尉를 역임했다.
<三禮>에 밝아 조정 의례儀禮를 잘 알았지만
질박하고 강직한 절조가 없어 순욱荀勖이나 가충賈充)게 아부하여 세상의 비난을 샀다.
왕침王沈, 완적阮籍 등과 <위서魏書>를 편찬했으며 정충鄭冲, 하안何晏 등과 <論語集注>를 편찬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충鄭沖(?-274)
서진西晉 형양滎陽 개봉開封 사람. 자는 문화文和고 시호는 성成이다.
박학했고 견문이 넓었으며 유술儒術과 百家의 학문에 정통했다.
처음에 위魏나라에서 벼슬하여 조비曹丕가 불러 太子文學이 되었다.
거듭 승진하여 진류태수陳留太守와 사공司空, 태보太保 등을 지냈다.
비록 관직은 태보台輔에 있었지만 世事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가충賈充과 양호羊祜 등이 예의禮儀와 율령을 제정할 때 항상 먼저 그에게 자문을 구한 뒤에 시행했다.
진나라 때는 태부太傅를 지냈고 수광공壽光公에 봉해졌다.
치사致仕한 뒤 죽었다.
저서에 <논어>에 대한 학자들의 훈주訓注를 선별하여 만든<論語集解>가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손옹孫邕(?-?)
후한 말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
청주 제남군 사람으로 어렸을 때 왕화평을 따르면서 경사에 이르렀는데
왕화평이 죽자 그를 장사지내고 책 백여 권과 약 수 포대를 장송하는 것에 사용했으며
손옹은 하영에게서 시해에 대해 듣고 보서와 선약을 얻지 못했음을 한스러워했다.
시랑을 지내고 환계가 죽자 문제가 환계의 부인 복씨를 손옹의 후처로 삼으려 했지만
싫어하면서도 명을 거부하지 못하다가 둘째 딸인 손씨의 권유로 환계가 동료라는 이유로
거절하자 문제는 칭찬하는 상소를 올렸다.
황초 연간에는 발해태수가 되었고 225년에 진류태수를 지내면서 문제가 오나라를 정벌하려다가 실패하고
수춘에서 돌아와 진류군의 경계 지역에 주둔하자 손옹은 문제를 보고 나가서 포훈을 방문했으며
군영의 보루가 완성되지 않아 표지만 세우고 정식으로 된 길로 가지 않았다.
유요가 심문하려 하자 포훈은 보루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해서 용서하고 문제 삼지 않도록 했으며
군사가 낙양으로 돌아가자 유요가 죄를 지어 포훈이 면직시킬 것을 상주했다가
유요가 손옹의 일을 불문에 붙인 것을 상주했고 이 일로 포훈이 처형되었다.
237년에 노육이 시중에서 이부상서로 옮기면서 명제가 후임을 추천하도록 하자 손옹이 추천되어 시중이 되었다.
241년에 도구일, 맹관, 왕기와 함께 관녕을 추천하는 상소를 올렸다.
노육의 후임으로 이부상서가 되고 오래 지나지 않아서 광록대부, 태사령이 되었고 관내후에 봉해졌으며
정충, 조희, 순의와 함께 논어의 주석 중 훌륭한 것을 모아 <논어집해>를 저술했다.
후에는 건덕정후에 봉해졌다./나무위키
►공안국孔安國(?-?)
山東省 曲阜 출생. 孔子의 11대손. 前漢 무제 때의 학자. 字는 子國. <상서尙書> 고문학의 시조,
西漢시대에 관리이자 경학자로 활동했는데 武帝 때에 간대부諫大夫,임회태수臨淮太守가 되었다.
신공申公(전한시대의 문신)에게서 <詩>를 전수받고 복생伏生에게서 <尚書>를 전수받았다고 한다.
노魯나라의 공왕共王이 공자의 옛 집을 헐었을 때
과두문자蝌蚪文字로 된 <古文尙書><禮記><論語><孝經>이 나왔다.
당시 아무도 이 글을 읽지 못한 것을 공안국이 今文과 대조 ·고증, 해독하여 주석을 붙였다.
이것에서 古文學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저서로 <고문효경전古文孝經傳><논어훈해論語訓解> 등이 있다.
►정현鄭玄(127-200)
자 강성康成. 북해北海(山東省) 고밀高密 출생.
시종 재야在野의 학자로 지냈고 제자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서도 훈고학訓詁學 ·경학의 시조로 깊은 존경을 받았다.
젊었을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경학의 今文과 古文 외에 天文 ·曆數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식욕의 소유자였다.
처음에 향색부鄕嗇夫라는 지방의 말단관리가 되었으나 그만두고 洛陽에 올라가 太學에 입학하였다.
第五元先을 스승으로 <경씨역京氏易><공양춘추公羊春秋>에 정통했다.
다시 장공조張恭祖에게 <주례>와 <좌씨춘추><고문상서>를 배웠다.
그 후 마융馬融 등에게 사사하여 <주역>과 <상서><春秋> 등의 고전을 배운 뒤 40살이 넘어서 귀향했다.
돌아와서 학생을 모아 강학했는데 제자가 천 명에 이르렀다.
가난한 생활에도 시종 재야의 학자로 지냈고
제자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서도 훈고학과 경학의 시조로 깊은 존경을 받았다.
낙양을 떠날 때 마융이
“나의 학문이 정현과 함께 동쪽으로 떠나는구나.”하고 탄식했을 만큼 학문에 힘을 쏟았다.
44세 환제桓帝 때에 환관들이 학자 등 반대당을 금고한
‘당고黨錮의 화’를 입고 집안에 칩거하여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북해상北海相 공융孔融이 깊이 존경하여
고밀현에 특별히 정공향鄭公鄕을 세우고 문을 넓게 열고 通德門이라 했다.
14년 뒤에 금고가 풀리자 하진何進 ·공융孔融 ·동탁董卓 ·원소袁紹 등의 초빙과
만년에는 황제가 대사농大司農의 관직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연구와 교육에 한평생을 바쳐
수천 명의 제자를 거느리는 일대 학파를 형성하였다.
建安 중에 大司農에 올랐는데 얼마 뒤 죽었다.
그는 고문 ·금문에 다 정통하였으며 가장 옳다고 믿는 설을 취하여
<周易><尙書><毛詩><周禮><儀禮><禮記><論語><孝經> 등 경서의 주석을 하였고
<의례><논어> 교과서의 定本을 만들었다.
또 하휴何休가 <공양묵수公羊墨守><좌씨고황左氏膏肓><곡량폐질穀梁廢疾>의 3부작을 펴내자
그는 <발묵수發墨守><침고황鍼膏肓><기폐질起廢疾>의 3부작을 지어 반박함으로써 하휴를 경복시켰다.
그의 저서 중 완전하게 현존하는 것은 <모시>의 전箋과 <주례><의례><예기>의 주해 뿐이고
그 밖의 것은 단편적으로 남아 있다.
그 잔여 부분은 청나라 원균袁鈞의 <정씨일서鄭氏佚書>에 실렸다.
古文經學을 위주로 하면서 今文經說도 채용하여 일가를 이루었는데 이를 일러 정학鄭學이라 부른다.
또 그의 <논어> 주석의 일부가 근래 신강유오이新疆維吾爾 자치구의 당나라 시대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왕숙王肅(195?-256?)
3국 시대 위魏의 학자. 字는 자옹子雍. 동해東海(山東省) 출생. 왕랑王郞의 아들.
時事와 제도에 대한 의견을 건의하여 정치활동을 하고 중령군中領軍, 散騎常侍의 벼슬에 승진하였다.
그의 딸은 司馬文王에게 시집을 가서 진晉나라 武帝를 낳았다.
아버지에게 今文學을 배웠으며 후한後漢 훈고訓誥의 학풍을 배척하고
老莊의 사상으로 경서經書의 주역註譯에 힘써 청담淸談의 선구를 이루었다.
당시 학계의 일부에는 양웅楊雄의 反神秘主義를 계승하는 경향이 있었거니와
왕숙도 그 영향을 받아 18세에 송충에게서 <태현경太玄經>을 배우고 그 주석서를 지었다.
사상적으로는 가규賈逵(30-101), 마융馬融(79-166)의 현실주의적 해석을 좋아했고
정현의 참위설에 의거한 논리주의적 통일해석을 피했다.
많은 경서에 주석하여 신비적인 색채를 실용적인 해석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특히 정현의 예학체계禮學體系에 반대하여 <성증론聖正論>을 저술하였다.
다만 <孔子家語>를 위작하여 자신의 비판의 근거로 삼은 것은
도리어 정현의 학설의 강력하고 확고함을 증명한 것이 되었다.
이 정鄭·왕王 양 학의 논쟁은 六朝를 통하여 학술계에 있어 남북의 대립을 야기 시켰다.
<尚書><論語><禮><左傳> 등의 많은 경서에 주석을 달아 대유大儒라고 존경받았다.
그의 학설은 모두 위나라의 官學으로서 공인받았다.
►주생렬周生烈(?-?)
삼국 시대 위魏나라 돈황敦煌 사람. 본성은 당唐씨고 자는 문일文逸이다.
위나라 초에 인재들을 부를 때 양주자사凉州刺史 장기례張旣禮의 부름을 받아 낭중郞中을 지냈다.
하안何晏의 <論語集解>에 그가 지은 의례義例가 들어있다.
저서에 <周生烈子>가 있었지만 없어졌고 현존하는 판본은
청나라 장주張澍가 <태평어람太平御覽>에서 뽑아 만든 것이다/네이버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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