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論語> 해제解題
1. 논어 성립
後漢의 반고班固는 <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
“<논어>란 공자가 제자들과 당시 사람들에게 응답한 것과
제자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되 공자에게서 들은 것에 관한 말들이다.
당시 제자들이 제각기 기록해놓은 것이 있었는데 공자께서 돌아가신 뒤에
門人들이 서로 모아 논찬論纂하였으므로 그것을 ‘논어’라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논어>란 공자와 관계가 있는 말[語]을 후대에 문인들이 모아 논찬[論]하여 이룩한 책이라는 뜻이다.
<논어>라는 서명이 기록된 가장 오래된 전적은 <예기禮記>이다.
<예기 방기坊記>에
“<논어>에 이르기를 ‘3년 동안 아버지의 道를 바꾸지 않는다면 효도라 할 것이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논어란 공자의 생전 말씀과 잡다한 유자와 증자의 말이 약간 포함된 유교 경전이다.
흔히 공자의 저작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모아 책으로 펴낸 것이다.
▮논어는 공자의 제자에서부터 그 제자 대에 이르기까지 2대에 걸쳐서
혹은 그 이상의 시간동안 수 차례에 걸쳐서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개중에서도 유자를 거쳐 증자의 계열에서 현재의 논어가 완성될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는 논어에서 공자를 제외하고 子가 붙는 이가 둘이 더 나오기 때문인데 그게 바로 유자와 증자다.
한편으로 공자 생전의 생생한 이야기들이 많이 담겨져 있고 안회나 자공 등에게는 子를 안 붙이는 것을 보아
초기 버전은 공자의 제자 대에 만들어졌고 개정버전이 유자→증자계열에서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자왈파편(공자의 생전 말씀)을 달리 모아둔 공자 제자 대에
이미 완성된 논어의 원형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올 김용옥은 자공이 6년 상을 할 때 논어의 초기버전을 만들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공자孔子는 <춘추春秋>를 지었고 <詩經>을 산삭刪削하였으며 <書經>의 편찬 및 정리에 관여하였다고 전해진다.
또 <주역>의 십익十翼을 지었다고 하나 지금의 학자들은 <시경>과 함께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정작 공자 본인은 단 한 권의 저술도 쓴 적이 없다.
잘 알려진 춘추나 시경 등도 술이부작(그대로 서술하되 창작하지는 않는다)의 원칙 하에 편집하기만 했을 뿐이다.
혹자는 공자가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편집 즉 술이는 술이인데
완전히 부작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공자 본인의 편집 철학은 술이부작이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웬만한 사상가나 종교의 교조는 스스로 책을 쓰는 일이 없다.
꾸란도 무하마드가 한 말을 후세에 정리한 것이고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담은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석가모니의 불경도 그렇다.
하다못해 공자와 비견될만한 소크라테스도 <변명> 등에서 플라톤에 의해 그 사상이 쓰였다.
거꾸로 말하면 그렇기에 후세의 제자들에 의해 스승의 주장이 재단당할 확률도 없지 않게 있고
그래서 욕도 먹는 게 사실이다.
초대형 규모의 사상집단의 교조급이 직접 자료를 남기는 경우는 기껏해야 도가의 노자가 남긴 노자(도덕경) 정도이다.
그마저도 사후에 도가가 다른 형태로 흘러가면서 종교화된 것이라 이마저도 얘기가 조금 다르긴 하다.
(노자 당대의 죽간본과 현대에 전해진 도덕경을 비교해보면 그 사상의 차이가 적지 않게 난다▮
2 논어의 여러 버전
<논어>는
① 공자의 말
② 공자와 제자 사이의 대화
③ 공자가 당시 위정자들 혹은 은자隱者들과 나눈 대화
④ 제자들의 말
⑤ 제자들끼리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인데
이 중에서도 공자의 말씀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제자들끼리의 대화나 제자들의 말도 대개는 공자의 말씀을 부연 설명하는 내용이다.
논어의 최종버전은 공자 학파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한 증삼의 제자들이 완성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전 20편, 482장, 600여 문장으로 내려오고 있는 본래 버전은
제논어, 노논어, 고문논어 세 종류였지만 현재 전해지는 것은 노논어의 교정본이다.
<논어>의 편찬자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다.
① 자하子夏를 비롯한 70제자라는 설,
② 자하·중궁仲弓·자유子游 등이라는 설,
③ 증자曾子의 문인인 악정자춘樂正子春과 자사子思의 무리라는 설,
④ 증자와 유자有子의 문인이라는 설,
⑤ 민자건閔子騫의 문인이라는 설 등이 그것이다.
한대漢代의 유향劉向은 그의 <별록別錄>에서 공자의 제자들이 훌륭한 말씀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남조 양梁나라 오군吳郡 사람 황간皇侃은 <논어의소論語義疏>에서
공자 사후 70제자가 함께 찬록撰錄한 것이라고 하였다.
후한後漢 말기의 정현鄭玄은 <논어서論語序>에서 <논어>가 자하·중궁·자유 등의 찬정撰定이라고 하였으며
진대晉代 부휴傅休의 <부자傅子>에서는 ‘중궁仲弓의 무리가 공자의 말을 추론追論한 것’이라고 하였고
당대唐代 유종원柳宗元은 <논어변論語辨>에서 공자와 증자의 나이 차이와 논어에서
증자와 유자만이 존칭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악정자춘과 자사의 무리라는 설을 제시하였다.
한편 주희朱熹는 <논어서설論語序說>에서 정자程子의 말이라 하면서
“<논어>는 유자와 증자의 문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니
이 두 사람만이 <논어>에서 공자와 함께 자子를 붙여 부르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민자건의 문인이 편찬자라는 설은 남송南宋의 홍매洪邁이다.
그는 <용재수필容齋隨筆>에서 공자가 제자들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모두 그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오직 민손閔損만은 자건이라는 자字로 부르고 있으므로 <논어>는 민씨閔氏에게서 나온 책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이 밖에 청淸나라 말엽 장학성章學誠은 <문사통의文史通義 시교詩敎 上>에서
<논어>는 戰國時代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밖에도 많은 이설異說이 있는데 어쨌거나 <논어>는 대략 전국시대 중기에 공자의 제자들이나
제자의 제자(再傳弟子)들이 편찬했다는 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천년 이상 된 고전들이 대개 그렇듯 오랜 세월에 걸친 수많은 짜깁기를 통해 완성되어 왔다.
논어가 형성된 건 최소 세 차례 수백년간으로 보인다.
1세대는 중궁, 자유, 자하 등의 직계 제자,
2세대는 유자, 민자 등의 직계 제자,
3세대는 전국시대 맹자나 동시대, 혹은 맹자 사후의 제자들이다.
대표적인 예로 당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던 관중에 대한 평가가
상론의 <팔일>과 하론의 <헌문>에서 다른 서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추측할 수 있다.
이는 노나라와 제나라의 평가가 서로 나뉘었던 것이 통합되었다는 점에서 노논어와 제논어를 모두 담게 되었다는 의미다.
<논어>는 한나라 때 이미 판본이 세 가지였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의하면 한漢나라 때에는
<제논어齊論語><노논어魯論語><고논어古論語> 등 세 가지 논어가 전해오고 있었다고 한다.
<노논어>(노론魯論)를 보면
<노魯> 20편, <전傳> 19편과 <노하후설魯夏侯說> 21편,
<노안창후설魯安昌侯說> 21편, <노왕준설魯王駿說> 20편의
4家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것은 노나라 사람들이 전해온 <논어>이다.
이 <노론> 20편은 현전하는 논어의 편수와 합치된다.
제齊나라 사람들이 전해온 <논어>를 <제론齊論>이라고 하는데 이 <제론>에 대하여는 <한서 예문지>에
<제齊> 22편, <제설齊說> 29편의 2家가 있었다고 한다.
<제논어>는 22편인데 그 22편 중의 장구章句도 <노론>보다 많다고 한다.
또 <제론>에는 <문왕問王>과 <지도知道>라는 두 편이 <노론>보다 더 있는데 <고논어>에도 이 두 편은 없다고 한다.
<고논어>는 공자의 옛 집 벽 속에서 나온 고문古文의 <논어>이다.
<고논어>는 <자장子張>편이 2개이므로 21편이며 <제논어>·<노논어>와 비교하면 서로 편차編次가 다르다.
이와 같이 <논어>는 3종류의 형태로 달리 전해오다가 서한西漢 말에 장우張禹(?-BC5)라는 사람이
<노논어>를 중심으로 최초의 교정본을 만들었는데 지금 전해지는 <논어>는 이것을 기본으로 한 것이다.
송나라 때 사람 형병邢昺(932-1012)은 <논어집해論語集解>에 주석을 단 그의 책 <논어정의論語正義> 서문에서
한나라 때 <논어>를 전한 학파가 셋이 있다고 썼다.
‘노논어魯論語’ ‘제논어齊論語’ ‘고논어古論語’가 그것이다.
‘노논어’는 노나라에서 전승된 학파로 추정할 수 있는데 현재 우리가 보는 <논어>의 편차編次는 ‘노논어’를 따르는 것이다.
‘제논어’는 제나라에서 전해지던 것으로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과 관계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논어’는 공자의 고택古宅에서 집을 확장하면서 벽을 헐다가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책을 숨겼다가 나중에 발견된 것이라는 등 추론이 나왔다.
‘노논어’가 20편인데 비해 ‘제논어’는 22편에 장구章句도 ‘노논어’보다 많다.
‘고논어’는 21편에다 편차가 ‘노논어와 다르다.
’고논어‘에서 눈에 띄는 점은 글자가 다르다는 것과 前漢의 공안국孔安國과 後漢의 마융馬融이 주를 달았다는 사실이다.
한편 주희의 <論語集註>는
형병邢昺의 <논어주소>의 경문을 바탕으로 古人들의 여러 해설을 참고하여 지은 것인데
이로부터 <논어>의 해설은 이 <논어집주>가 단연 권위를 지니게 되었고
五經을 중심으로 하던 유학이 四書를 더 중시하게 되었다.
또한 사서집주가 나온 뒤로 <논어>는 더욱 존중되고 널리 읽혀 <四庫全書總目>을 통해 보면
그 뒤로 宋代에 나온 <논어>의 주해서가 10여 종이며
元代에도 다시 10여 종이 나왔고 明代에는 30여 종이 넘고 있다.
淸代에는 더욱 많아 100종이 넘는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은 주희 이후로 유가의 경전이 오경에서 사서 중심으로 옮겨갔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논어>가 존중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원대 이후로는 科擧에 있어서도 필수과목으로 채택되어 <논어>의 권위는 더욱 높아졌다.
특히 청대에는 고증학考證學이 발달함에 따라
진전陳鱣의 <논어고훈論語古訓> 반유성潘維城의 <논어고주집전論語古注集箋>
유보남劉寶楠의 <논어정의論語正義> 등 많은 연구서가 나왔다.
한나라는 예서체를 썼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의 필체를 이어받은 것이다.
진시황이 문자를 통일[同文[했다는 사실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진시황 통일 이전에는 남방과 북방이 다른 글자를 썼다.
언어만 다른 게 아니라 글자도 달랐던 것이다.
진시황의 통일은 문자와 도량형의 통일을 가져왔고
이는 제국통치의 기초를 놓았다는 정치적 의미에서 뿐 아니라 중국의 정체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공자의 옛집에서 발견된 <논어> 판본이 낯선 글자라는 사실은 진시황 통일 이전 문자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하지만 분서갱유 때 당연히 논어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논어의 원본이 뭔지는 알기가 힘들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분서갱유의 진짜 모습을 고려하면 그 때문에 원본을 알 수 없다는 말은 근거가 희박하다.
▮<논어>의 성립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은 대부분 <춘추좌씨전(좌전)>에서 근거를 찾는데
최근의 연구 성과에 따르면 <논어>가 <좌전>보다 앞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어찌되었든 한대에 이르러 논어 같은 고전이
원래 담고 있는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연구하는 학풍이 훈고학이란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이미 한나라 대에 세 가지 버전의 논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지라 분서갱유 설은 설득력이 적다.
먼저 공자가 일생의 시작과 끝을 보낸 고국 노나라 옛 땅에 전해지던 텍스트(노논어)
제나라 땅에서 별도로 전해지던 텍스트(제논어),
그리고 한 경제 때 곡부의 공자 생가를 허물다 벽에서 나온 텍스트(고논어)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논어>는 현행과 같은 텍스트의 형태로 언제 완성됐는가.
前漢에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노논어’를 중심으로 그 편차를 따르면서 ‘제논어’와 ‘고논어’의 장점을 택해<논어>를 완성한다(장후론張侯論)
이 텍스트가 현행 <논어>의 모본母本이다.
<논어> 본문이 텍스트로 완성된 시기는 한나라 경제, 무제 연간이라고 하며
후한에 이르러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추정되며
3-4세기 경 한성백제시대 목간에 5편인 공야장公冶長 편의 주요 내용이 기록되어 남아있다▮
►주注와 소疎
논어에 대한 주석도 이때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져 장후론張侯論에 주석을 다는 사람들이 생긴다.
우리가 통상 주注라고 일컫는 말은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다.
텍스트가 고정되어야 하고 일정하게 의미 단위로 분절한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작업이 한나라 때 와서야 완성이 되었으니 <논어>의 (成書 연대는 공자의 사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성서 연대가 <논어> 텍스트의 부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행 형태는 아니더라도 <논어>가 파편 형태로 통행되었음은 전술했으므로 재론하지 않겠다.
다만 주석을 다는 문제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한나라 때 공자의 생전 시기와 멀어지면서 <논어> 읽기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에 책을 독해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했다.
여기에 한나라의 석학과 대가들이 달려들었다는 사실은 학문방법으로서 주注가 탄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한나라 때 주석이라는 학문양식이 탄생했다.
한나라 때 주석가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
한나라를 대표하는 大儒 정현鄭玄(127-200)이다.
그는 ‘노논어’의 편장篇章을 따르고 ‘제논어’와 ‘고논어’를 참고해 주석을 냈다.
<논어정주論語鄭注>라 한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주석은 망실되어 전승되지 못했다.
정현의 주는 주희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놀라운 일은 1907년에 돈황에서 대규모 문헌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정현의 <논어>주 필사본이 끼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전체는 아니고 대략 반 정도가 복원되었는데
옛 중국과 조선의 학자들도 보지 못했던 정현의 주를 지금 현대학자들은 구해 볼 수 있다.
정현의 주를 이어 공안국, 마융이 주석을 다는 작업을 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논어> 해석 작업을
일차적으로 완성한 사람이 위魏의 하안何晏(193-249)으로 <논어집해論語集解>를 펴냈다.
조조의 양아들이자 사위로 유명한 하안은 한 시대를 풍미한 지식인으로 ‘老子注’로 유명한 王弼을 알린 사람이기도 하다.
하안의 <論語集解>는 중요한 책이다.
그는 위진시대의 풍조에 걸맞게 <周易>에 밝았던 사람으로 <논어>에
철학적 무게를 더했다는 점에서도 기억할 가치가 충분하다.
하안의 <논어집해>를 두고 道家의 玄學이
<논어>에 들어왔다고 판단하는 견해가 있는데 그런 정통/이단의 잣대는 보류해 둘 필요가 있다.
‘집해’라는 제목에서 보듯 이전 시대 주석을 모은 것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세상에 널리 유포되어 지금도 <十三經注疏>의 하나로 필수적인 텍스트가 되었다.
정현과 하안의 주를 합쳐 통상 古注라고 한다.
이 말은 주희의 <論語集註>를 新注라고 하는 것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주注라는 해석 작업과 학문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소疎라는 해석방식이 따라 붙는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한다.
주는 경문 본문을 직접 해설하는 방식이어서 간결하다.
소疎는 소통한다는 뜻으로 주의 간결한 설명에 상세한 해석을 가한 방식이다.
위진 시기에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해석 양식이지만
소疎라고 불리는 상세한 해석방식은 종이의 보급이라는 물적 토대의 변화도 큰 몫을 했다.
죽간에 써서 작업을 했던 한나라 때는 죽간의 물질성이 간결함을 강제할 수밖에 없었음에 비해
서진西晉 이후 보편화된 종이 보급은 좀 더 긴 의견 진술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논어집해>를 저본으로 南朝 양梁나라 무제 때 황간皇侃(488-545)이
소를 단 <논어집해의소論語集解義疏=논어의소論語義疏>를 남겼다.
하안의 주에 한위漢魏 이래 여러 해설을 붙여 가치가 높은 책이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이후 자취를 감춰 볼 수 없게 된 책이었으나
일본에서 온전한 판본이 발견돼 청나라 건륭연간(1736-1795)에 중국으로 역수입되어 사고전서에 수록되었다.
또 북송 때 형병邢昺(932-1012)의 <논어주소論語注疏>로 성리학이 집대성되기 이전 가장 많이 읽히던 주석이었다.
<논어주소論語注疏>는 황간의 소를 기초로 자신의 의견을 포괄적으로 담아 하안의 집해와 합본한 책이다.
우리가 보는 <십삼경주소>의 <논어>는 바로 형병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중 <논어의소>의 경우에는 당대 현학적 경향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특색이 있다 하겠으며
형병의 <논어주소>의 경우에는 훈고를 중심으로 하는
주석학의 경향에서 의리를 밝히려는 경향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이후 남송 때 주자(주희)가 그동안 축적된 연구 성과를 집약해 <논어집주論語集註>를 편찬하였다.
주희의 논어집주는 ‘新注’라고 불리는 획기적인 책이 되어 현대까지 내려오는 가장 보편화된 주석서가 되었다.
보통 논어 번역서를 내는 경우에도 이를 저본으로 삼는다.
‘新注’라고 부르는 것은 편의적인 구분이 아니다.
이전의 주석이 사전적 해석(훈고訓詁)이었다면 주희의 해석은 철학적으로 접근(義理)한 것이어서
<논어>를 읽고 해석하는 방식에 다른 차원을 연 것이었다.
인식론적 전회라고 말하는 작업을 여기서 볼 수 있다.
파급력이 대단히 큰 책이었다.
중국왕조는 청나라 때까지 주희의 책을 기본 텍스트로 읽었고 조선은 주희의 이념 아래
국가가 운영되고 문명이 완성되었으니 어떤 책이 그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주희의 책이 의리학義理學(宋學)으로 접근해 훈고학과는 다르다 했으나 주희의 주석은
한대의 훈고학 전통을 완전히 흡수한 뒤에 송대 유학자들의 의리학을 결합해 집대성한 견고한 성채이다.
字句 해설에서 章의 의미를 밝히고 전체적인 통일성까지를 아우르는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사유의 결정이기에 높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가 재해석한 <논어>는 전혀 다른 텍스트로 읽히게 된다.
이후 청나라에 이르러 한나라의 훈고학(漢學)을 계승한
고증학考證學(=고거학考據學)이 등장하면서 주석사에 전환기가 온다.
대표작이 유보남劉寶楠(1791-1855)의 <논어정의論語正義>다.
고증학은 문헌을 가져와 증명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문헌학과 연계될 수밖에 없고
방대한 서책을 상대로 하기 때문에 정밀한 읽기가 가능했다.
의미를 따지기 이전에 증거에 준해서 철저한 읽기를 지향하기에 주희의 주석에 대해서도
문헌증거에 의한 재검토와 일정한 비판/다시 읽기가 가능하게 되었다.
유보남의 책은 하안의 <논어집해>를 계승한 것이다.
청대 고증학의 성과를 받아들여 문자의 훈고에 힘을 기울이면서도 典章制度와 역사고증, 인명과 지명에 고증이 세밀해
주희의 <논어집주>가 놓친 부분을 보충하고 합리적인 추론으로 이전 주석의 부실한 부분을 많이 바로 잡았다.
청나라가 멸망하고 20세기에 들어서는 근대의 학자 정수덕程樹德(1877-1944)의 <논어집석論語集釋>이 있다.
<논어>연구에 평생을 바친 역작으로 중국의 전쟁 시기에도 <논어> 원고를 안고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제목 그대로 중국의 다양한 <논어> 주석을 제시해 비교 검토할 수 있게 하였다.
양이 적지 않아 읽는 작업조차 만만치 않은 거작이다.
후학들에게 학문하는 자극을 주는 가치 높은 책이다.
양수달의 <논어소증論語疏證>도 중국에서의 주요한 <논어> 연구저작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조선시대 주희의 책은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조선조 내내 그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반대로 독창적인 연구나 객관적인 주석이 나오기 어려웠다.
‘주자’라 부르며 존숭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주자와 의견이 다를 경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목숨까지 빼앗을 지경이었으니 주자학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일본 에도 막부 초기(17세기 말)의 이토 진사이(伊藤 仁斎),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같은 인물까지 참고하여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를 썼다.
일상어를 잘 살린 명 번역으로 꼽히는 이을호의 한글 논어가 이를 저본으로 삼았다.
<논어고금주>는 고금의 주를 모아놓은 것이지만 今에는 다산 당대의 청나라 학자까지를 포괄하고
일본의 유명 유학자들의 서적도 그의 시야 안에 들어와 있다.
이 책의 넓은 스펙트럼은 박학의 과시가 아니다.
다양하고 폭넓게 제설諸說을 제시함으로써
가장 어려운 관문인 주자학을 성공적으로 객관화했다는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다산의 의도 여부를 떠나서 주자의 설이 여러 주장과 병치되면서
의리학이 상대화되는 효과는 학문의 진화가 무엇인지 느끼게 한다.
고금의 여러 학설을 검토하다 보니 자신의 목소리가 확고할 수밖에 없다.
이외에 근현대에 나온 주석으로 널리 쓰이는 것으로는 양백준의 <논어역주論語譯柱>가 있다.
3 내용과 특징
<논어> 난해함은 공자의 말씀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있으니 난해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공자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고 한 마디 하셨는데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어떤 식으로
그 말씀을 하셨는지는 없고 그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한 마디만 남아있다.
말 그대로 상황은 하나도 없고 말씀만 남아 있으니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인, 예, 충 등의 의미가 후대 유교에서 변화, 각색된 경우가 있어 공자가 말하는 인, 예, 충 등의 의미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인, 예, 충의 의미가 상충되는 경우가 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명확하게 와 닿지를 않는다.
2천년도 더 전의 책을 글자만 보고 바로 이해가 간다면
2천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니 이해하기 쉬울리가 있을까.
더구나 한자 특유의 중의적인 의미까지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학이편>에 나오는 증자의 말 중 '전불습호傳不習乎'라는 문장 같은 경우는
크게 아래와 같은 4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전해 받은 것을 익히지 못했는가?
2. 남에게 전하고도 스스로 익히지 못했는가?
3. 고전古傳을 익히지 못했는가?
4. 스스로 익히지 못한 것을 남에게 전하고 있는가?
또 <위정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 중 '색난色難'이라는 말도 나온다.
그대로 해석하면 '안색이 어렵다'. 뭐 어쩌라고! 이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 해석이 있다.
1. 자식이 늘 부드러운 얼굴빛으로 부모를 섬기기는 어렵다.
2. 자식이 부모의 얼굴빛을 살피고 그에 맞게 대처하기 어렵다.
저 긴 문장을 두 글자로 확 줄여버리니 해석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러한 중의성은 고전 한문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성과 함께 글의 해석순서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두점이라도 좀 찍지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와 다를 게 없다.
또한 고대에는 책을 만드는 것이 지극히 어려웠다.
간독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책을 만드는 일은 굉장히 많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를 사용해서 내용을 극도로 축약하여 '꼭 필요한 공자 어록'만이 기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은 일단 이를 '암기'한 다음 이에 대한 '해석'을 강론 받는 방식으로 가르침을 전수했을 테지만 문자는
간독으로 남아도 해석은 말이기 때문에 흩어져 없어지므로 후대에 주석으로 남은 부분을 제외하면 해석부분이 소멸하게 된 것이다.
그 외에도 플라톤의 <대화편>처럼 산문 혹은 대화 형식으로 연속된 하나의 글이 아니라 잡다한 짧은 글귀들의 모음집이라 여기저기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른 제자가 똑같은 개념에 대해 물었는데 다르게 답하기도 한다.
이는 그 제자의 성향에 맞게 설명해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생전에 하신 말씀을 제자들이 모아 편찬한 논어의 몇몇 구절은 배경지식이 없으면 곡해하거나 아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만큼 하나의 일관된 사상 하에 전개된 노자나 장자, 중용, 맹자보다 훨씬 어려운 책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책 자체만 파고들어도 이해하는 게 가능하지만 어떤 획일화된 사상이 직접 드러나지 않고 공자 생전의 말씀들을 모아 편찬한 논어는 어떻게 보면 명언집을 읽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문 해석면에서는 맹자가 더 쉽고 주제의식도 명확하다.
그렇기 때문에 읽기는 쉬워도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찾기는 대단히 어려운 경전이다.
당장 번역된 논어의 아무 페이지만 펼쳐도 쉽게 읽히긴 한다.
책 자체가 '공자 명언집' '공자와 제자의 일상' 같은 느낌이다보니까 마음이 정화되는 소소한 에피소드와 구절도 많다.
때문에 마치 일상물 마냥 접근성도 강력하다.
▮한문으로 접근한다면 접근성 따위 가볍게 안드로메다로 날라 간다.
아니 애초에 이걸 처음부터 한문으로 접근했던 사람은 이게 한글로 읽으면 접근성이 좋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아마도 중의적 의미가 아예 한가지로 고정되기 때문에 한글로 접근하기 쉽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잡아내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일상물에 진지한 주제의식을 넣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을 해보자 이것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논어를 읽으면
"그냥 착하게 살라는 말 아니야?"로 오해하기가 매우 쉽다.
물론 논어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일정한 사상 아래서 쓰여진 책이지만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라는 말이 튀어나오게 된다.
어렵기는 해도 책 속의 말이 워낙 자주 인용되다보니 유명한 구절도 많지만 역시 가장 유명한 구절이라 하면
논어를 펼쳐보면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말인 바로 이것.
흔히 아래와 같이 번역되지만 논어 번역본은 다양해서 이 구절 하나에도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불역락호不亦樂乎 멀리서 벗이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이에 대하여 時를 sometimes가 아닌 opportunely, 즉 때에 맞추어 적절하게로 번역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習은 실천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 사실 습의 구성이 새가 날개 짓을 하는 모양에서 따왔다.
새는 날개 짓을 실천으로 배우므로 결론적으로 배웠으면 적절한 시기에 실천하란 뜻으로 해석이 된다.
배워서 띄엄띄엄 써먹는 것은 올바른 학문의 자세가 아니다.
덧붙여 한대에는 "때에 맞추어"의 해석이 대세였고 주희의 논어집주에서는 "때때로"라는 해석이 대세였다.
여기서 "때때로"는 수시로, 시간 날 때 마다라는 뜻이다.
즉 sometimes가 아닌 often을 말한다▮
4 편제
<논어>는 일정한 체계가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을 요약하기가 매우 어렵다.
<논어>의 전승이 몇 가지가 되고 章句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두고
<논어> 본문에 後人의 첨가가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견해가 있다.
<논어>를 읽다 보면 문체와 서술양식이 상이한 지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오랜 기간을 두고 전승되면서 변화는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논어> 본문을 이상하다고 의심한 사람들의 견해에는 귀 기울일 만한 게 있다.
현행 <논어>를 상편과 하편으로 각각 열편씩 나누는 것도 본문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반증한다.
대표적인 책이 청나라 최술崔述(1740-1816)의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이다
<논어> 전반의 내용을 굳이 분류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개인의 인격 수양에 관련되는 교훈
② 정치론
③ 사회적 윤리에 관련되는 교훈
④ 제자 또는 당시 인물들과 질문에 따라 가르침을 달리한 문답,
⑤ 제자들 간의 대화와 문답
⑥ 고인이나 문인 혹은 당시 인물들에 대한 비평
⑦ 은자隱者들의 공자에 대한 평
⑧ 철학론
⑨ 공자 자신의 술회 및 일상생활과 공자에 대한 제자들의 존숭과 찬미 등이다.
현전하는 <논어>는 총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의 편명篇名은
그 편의 처음 두 글자를 딴 것이지 별다른 뜻이 있지는 않다.
각 편의 제목은 무슨 거창한 뜻을 담고 있는 게 아니라
각 편의 맨 첫 단락 중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기를子曰'을 제외한 구절을 따서 붙인 것이다.
예를 들어 <이인里仁>이라고 해서 마을 풍속의 인후함에 대해 다룬 편이 아니며
<술이述而>이라고 해서 전통에 대한 계승을 주제로 다룬 편이 아니다.
상론 10편과 하론 10편은 문체와 호칭 및 술어 면에서 분명히 차이가 나는데
상론은 문장이 간략하고 글자 수가 짧고 하론은 문장이 길고 글자 수가 많다.
또한 상론의 마지막 10편 향당은 공자의 일상생활을 담아 결말을 내는 셈이어서 하론 10편의 사실성에 대한 의문이 있다.
여하간 상론이 먼저 쓰여진 것은 거의 확실하다.
우리나라에 <논어>가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였다.
682년 국학이 체계를 갖추었을 때 <논어>를 가르쳤으며
그 뒤 讀書三品科로 인재를 선발할 때도 <논어>는 필수 과목이었다.
설총이 “방언方言으로 九經을 풀이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말의 정몽주鄭夢周와 권근權近이 <논어>에 토를 달았다.
조선시대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다음 전문기관을 설치해 경전의 음해音解를 찬하게 하였다.
세조 때에는 구결을 정했고 성종 때에 유숭조柳崇祖가 <언해구두諺解口讀>를 찬집하였다.
선조는 이것이 미비하다 하여 1581년(선조14) 이이李珥에게 명해 사서와 오경의 언해를 상정詳定하게 하였다.
사서는 1593년에 이이의 손으로 완성되었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졌다.
이들 언해는 불완전한 번역이었으나 순한문본과 함께 널리 이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논어의 첫 간행은 문종文宗 10년(1056)의 일로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있다.
<논어>를 포함한 비각소장祕閣所藏의 제경전을 여러 학원學院에 나누어두게 하고 각각 한권씩 찍어냈다고 한다.
이어 인종仁宗 12년(1134)에는 이것을 지방의 여러 학관에 나누어주었다.
조선 후기에는 대체로 주희의 해석이 절대적인 권위를 구축한 가운데
주희의 해석에만 매몰되지 않은 주석들도 저술되었다.
이황李滉은 <논어>의 훈석訓釋을 모으고 제자들과의 문답을 채록해 <논어석의論語釋義>를 지었고
이익李瀷이 <논어질서論語疾書>
박세당朴世堂이 <논어사변록論語思辨錄>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를 지었다.
유럽에 <논어>가 처음 알려진 것은 16세기 말엽 스페인 J.G.de Mendoca가
<중국대제국사(Historia del Gran Reyno dela Chinas)>에서 공자와 <논어>를 소개하면서부터이다.
최초의 완전한 번역은 1687년 Philipp Couplee와 Prospero Intorcetta, Christiani Herdricht, Francisci Rougemont 네 사람이 <대학><중용><논어>의 라틴어역譯에다 <孔子傳>까지 붙여 <중국의 철인 공자(Confucius Sinarum Philosophus)>란 책을 낸 것이 그것이었다.
1885년에는 프랑스인 선교사 꾸브뢰르(S. Couvreur)가 사서를 번역했는데
이것은 중국고전의 뛰어난 유럽어 번역 중 하나라고 일컬어진다.
근세에 들어와서는 1938년 영국인 아더 웰리(Arthur Waley)의
<논어> 번역이 심화된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서구적인 번역으로서 알려졌다.
<논어>는 한문 초심자가 접하는 텍스트 중 하나이다..
논어와 맹자 어느 쪽을 먼저 읽는 것이 좋은 지는 일단 맹자가 문장이 매끄럽다는 이유로 선호도가 조금 높기는 하지만 개인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어차피 초심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고 그러면 단문 위주로 구성되고 중의적 해석이 많아 한문 읽는 맛이 있는 논어를 먼저 읽어도 된다는 쪽도 있다.
논어에는 공자의 숱한 제자들이 등장하는데 유독 디스 당하는 제자가 있다.
그는 바로 재여宰予.
3년 상을 하지 않아도 제 맘은 편안한뎁쇼? 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책 안 보고 자다가 욕을 먹기도 하고(···)
자로의 경우처럼 부족한 제자라도 나름의 장점을 인정하고 꾸짖으면서 이끌어주려는 공자가 유독 독한(···)
모습을 보이는 제자.
사실 등록금이 밀려서 그런 거라 카더라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재여가 사상적으로
공자와는 다른 견해를 가진 것이 아닌가라는 말도 있고
훗날 재여가 제나라에서 반역 사건에 참가했다가 삼족이 몰살당한 뒤
공문십철이라고까지 불린 그와의 연관성을 최대한 부정하고자
유가 계열에서 재여를 디스 하는 말을 많이 퍼뜨렸다는 말도 있다.
이래저래 흥미로운 인물이다.
공자님이 사람을 구타한 기록도 있다.
<예기단궁 하>를 보면 공자의 어린 시절 같은 마을 사람인 원양原壤은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슬퍼하지 않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등 얽매이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기에 도교 사상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으나 공자 입장에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논어 헌문>에 이르기를 어느 날 원양이 공자를 찾아갔을 때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거만하게 굴자 공자가
"어려서는 공손하지 않았고, 나이들어서는 일컬을 바도 없으면서 늙어서는 죽지도 않으니 네놈이 바로 도적놈이다!" 라고 대노하여 원양의 정강이를 지팡이로 때렸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공자가 대노했다는 기록은 없고 위의 언행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때문에 김용옥은 이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여 사실 이것은 공자의 소탈한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의 하나로
못난 불알 친구를 디스하며 투닥 대는 흐뭇한 모습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기사가 고전 한문으로 기록되고 공자가 이제껏 기계적인 성인으로만 해석되어서
다만 준엄한 꾸짖음으로 여겨져 왔지만 실제로는 "짜식, 왜 사냐?"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
사실 원양은 단순한 공자의 동향인이 아니라 정말로 공자의 죽마고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노래를 불렀다는 기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다.
원양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공자가 그 겉 널 짜는 일을 도왔다.
헌데 원양이 목재위로 올라가 말하기를
"내 어머니의 상을 당한지도 오래되었고 감정을 음률에 맡기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다" 하며 노래하기를
"너구리 머리 털 반드러움이여, 여인 손잡은 듯 보드랍네!(나뭇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 하였다.
공자가 그냥 못 들은 체 하였는데 눈치 없는 제자들이
"선생님께서는 사귐을 그만두지 않으시려는지요?" 하였다.
이에 공자가 답하기를 "구丘는 들었노라.
친우親友, 그 친親을 잃지 말 것이며 고우故友, 그 고故를 잃지 말 것이라!" 하였다.
이 기사를 감안할 때 김용옥의 주장은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성균관대에서 졸업하기 위해선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과목이다/우만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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