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趙州錄 해제解題
조주진제선사어록趙州眞際禪師語錄 1권.
조주종심어록趙州從諗語錄=조주화상어록趙州和尙語錄,
조주종심선사어록趙州從諗禪師語錄, 진제대사어록眞際大師語錄, 조주록趙州錄
당대조주종심唐代趙州從諗(778-897)찬撰 당대 조주종심(778-897)이 찬(撰)했고
문원편文遠編 문원文遠이 편編했고
송대서현징시교宋代棲賢澄諟校 송대 서현징시棲賢澄諟가 교校했다.
수어만속장제118책고존숙어록13收於卍續藏第118冊古尊宿語錄13
만속장 제118책의 고존숙어록13에 수록되어 있다.
집록종심지행상輯錄從諗之行狀
상당上堂 시중示衆 문답問答 대기對機 감변勘辨 게송등偈頌等
종심의 행장ㆍ상당ㆍ시중ㆍ문답ㆍ대기對機ㆍ감변ㆍ게송 등을 집록했다.
령유조주진제선사어록지여일권另有趙州眞際禪師語錄之餘一卷
따로 조주진제선사어록지여趙州眞際禪師語錄之餘 1권이 있으며
수어고존숙어록14收於古尊宿語錄14 고존숙어록14에 수록되었다.
내용집유상당시중어요內容輯有上堂示衆語要 12時歌 게송偈頌 진찬등眞贊等
내용은 상당시중어요ㆍ12시가ㆍ게송ㆍ진찬 등을 집록해 있다.
<조주록> 3권의 판본은 다음과 같다.
1. <조주진제선사어록趙州眞際禪師語錄> 3권 <고존숙어요古尊宿語要 권1>
2. <조주진제선사어록趙州眞際禪師語錄> 3권 (함순咸淳 중간본重刊本)<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
3. <조주진제선사어록趙州眞際禪師語錄> 3권 (명장본明藏本) <고존숙어요古尊宿語要>
4. <어선원증직지진제조주심선사어록御選圓證直指眞際趙州瑪禪師語錄> 1권 <어선어록御選語錄>권5
조주선사에 대한 이해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불교의 꽃이라면 중국에서는 선불교가 불교의 꽃이다.
대승불교가 기존의 소승불교보다 한발 앞으로 나아가 부처님의 사상을 높이 선양한 것이라면
선불교는 그 대승불교에서 한 차원 더 앞으로 나아간 불교의 사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불교가 기존의 소승불교나 부처님의 기본 사상과 상당 부분 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불교는 철저히 불교의 교리체계를 기반하여 불교를 더욱 높이 이끌어 올리면서
동시에 누구에게나 적용되고 설득되는 불교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영향을 입어 신라대 선불교가 받아들여졌고
고려시대이후는 훌륭한 선승들이 많이 나와서 선불교의 뿌리가 되었다.
이에 오늘날 한국불교는 선불교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조주선사는 지금부터 1200년전 후당시대(778-897)의 인물이다.
일찍이 어릴 때 출가하여 남전스님을 법사로 수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조주선사 행장에
남전스님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면 어린 사미승이었지만 매우 똑똑하고 당찬 기백이 있었다.
남전스님 휘하에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은 시기에 대하여 일부학자들은 18세 전후라는 주장이 있는데
본 조주록에서는 남전스님과 대화 중에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언제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남전스님 밑에서 57세까지 도를 닦던 중에 스승 남전이 죽자 3년 상을 치렀으며
60세가 되어서야 천하를 다니며 행각하기 시작하였고
80세 때에 조주 동쪽 관음원의 주지가 되었으니 남들보다 늦게 정착한 셈이다.
이후 118세까지 관음원 낡은 절에 살면서 사람들이 와서 물으면 대답하고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자칭 촌 늙은이로 살았다.
일을 벌리는 것을 싫어하는 성품이었으나 머리가 명석하여 남보다 2~3단계 앞서서 말하는 고로
선사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동안 다른 선사들에게 보이지 않았던 독특함과 깊은 맛이 있었다.
조주선사는 다른 선사들과 다르게 좀처럼 방과 할을 사용하지 않고
주로 말 몇 마디로 질문자의 정곡을 찌르는 방법으로 교화에 임하였다.
그래서 조주선사의 접화방법을 구순피선口脣皮禪이라고 한다.
그러나 비록 말 몇 마디로 본질을 깨닫게 하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그 어떤 선사의
격외구보다도 더 깊고 은밀한 뜻이 있어 당대의 선사들조차도 감탄을 자아낼 뿐이었다.
여기에서 조주 무자, 뜰 앞에 잣나무, 판치생모, 조주두재초혜 등의 유명한 화두가 나왔으며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선객들이 가장 많이 참구하는 화두가 되었다.
조주록 본문에 보면 조주선사는 먼저 이치를 탐구하고
20년 30년을 좌선하여 시간을 보내라 하였고
110세의 노년에도 아직 수행한다 하였으니
선문의 정통 수행법인 깨닫고 수행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사상을 보였다.
조주선사는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였는데
탁자가 부러지자 타다 남은 장작으로 대고 새끼줄로 감아서 썼다.
이것을 보고 누가 새로 만들어 준다고 하여도 극구 사양하였다.
또 법당에 병풍이 하나 있었는데 오래되어서 찢어지고 낡아 골격만 서있는 것 같았다.
나이가 들어서는 이빨이 다 빠지고 한 개만 남게 되었고 120세까지 살았으니 장수 상이었고
관음원에 주한지 30년만인 110세경 전후로
시자가 조주선사와 래방객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하여 본 조주록이 탄생되었다.
관음원에서 38년을 거주하면서 차차 명성이 나기 시작하였고
하루는 조왕과 연왕이 설법을 들으려고 방문하였는데도
문밖까지 영접하지 않았던 일화가 유명하고
그날 임금의 집은 대대로 백성들의 원수의 집이라는 법문을 하여 조. 연왕을 감동하게 하였다.
118세 되던 해 선사는 조왕의 초빙으로 진부(당시 서울)로 옮기게 되는데
이때도 조왕이 큰 선원을 건립하여 주겠다고 하였으나
'풀 한 포기라도 건드리면 조주로 돌아가겠다'고 하여
할 수 없이 두씨가 기증한 과수원집에서 기거하였다.
이때 조주스님은 이미 사방에 이름이 나있던 차라 나라에서 가장 나이 많은 노인이자
살아있는 생불을 보기 위하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그러기를 2년만인 120세에 앉아서 열반에 들었는데
사전에 죽은 후에 절대 사리를 줍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사대육신이 허망한 것인데 사리인들 어찌 허깨비가 아니겠냐,
그런 것으로 사람들을 유혹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왕과 제자들은 유골만은 수습하여 훌륭한 탑을 세워
조주진제선사광조지탑이라 이름 지었고 뒷사람들의 모범이 되게 하였다.
한편 조주선사에게는 문원이라는 시봉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사미였다가
점차 제자 문원으로 기록되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조주선사를 모셨던 것 같으며,
조주선사와 수준 높은 문답이 오고 갔던 것으로 보아 그 정도의 수준이라면 본 조주록에서
조주선사의 살림을 내보이는 데에 진실과 일점의 오차도 없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이것으로 보아 스승도 중요하지만 훌륭한 제자 만나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무불선원 석우스님 글
조주의 면목
'스님은 백스무 살이나(778∼897) 살았다.
무종의 폐불 법란(불교 박해)이 있자 산 속으로 몸을 피해 나무 열매를 먹고
풀 옷을 걸치면서도 수행자의 몸가짐이나 차림새를 바꾸지 않았다.'
조주는 구족계具足戒(비구계)를 받고 난 다음 은사 스님이
조주성의 서쪽 한 절에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은사 스님을 찾아뵈었다.
조주가 도착하자 은사 스님은 사람을 시켜
조주의 고향집에 귀댁의 자제가 행각길에 돌아왔다고 알려 주었다.
고향집 일가친척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몹시 기뻐하며 다음날 함께 찾아가기로 하였다.
조주는 이런 사실을 알고 말했다.
"속세의 티끌과 애정의 그물은 다할 날이 없다.
이미 부모형제를 하직하고 출가 수행자가 되었는데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
그날 밤으로 짐을 꾸려 행각의 길에 나섰다.
그 후 물병과 지팡이를 지니고 여러 곳으로 두루 다니면서 자신에게 다짐했다.
'일곱 살 먹은 어린 아이라도 나보다 나은 이는 내가 그에게 물을 것이요,
백 살 먹은 노인이라도 나보다 못한 이는 내가 그를 가르치리라.'
조주는 나이 80이 되어서야 조주성의 동쪽 관음원에 머물렀다.
말하자면 이때 비로소 한 절의 주지가 된 셈이다.
그 절은 예전부터 몹시 가난하여 좌선이라는 선방도 후원도 없었고 겨우 끼니를 이어갈 정도였다.
좌선할 때 앉는 선상은 다리 하나가 부러져 타다 남은 장작 쪽을 노끈으로 묶어서 썼다.
누가 새로 만들어 드리려고 하면 그때마다 허락하지 않았다.
40년 동안 가난한 그 절의 주지를 살면서도
불사를 빙자한 편지 한 통 시주에게 보내는 일이 없었다.
한번은 그 나라의 왕이 조주의 덕을 사모하여
금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가사를 한 벌 지어 시종을 시켜 조주에게 바쳤다.
선사는 굳이 사양하면서 받지 않으니 함께 있는 사람들이
가사가 든 상자를 조주 앞에 옮겨 놓으면서 말했다.
"왕께서는 큰스님의 불법의 불법을 위해 이 가사를 보내온 것이니 입으시기 바랍니다."
조주는 이 말을 단호하게 물리친다.
"노승은 불법을 위하기 때문에 이런 가사는 입지 않습니다."
어느 날 조주는 법좌에 올라 말했다.
"형제들이여, 오래 서 있지 말라.(예전에는 법문을 들을 때 앉지 않고 서서 들었다)
일이 있거든 말해 볼 것이요.
일이 없거든 각자 자기 자리에 앉아 도리를 참구參究하는 것이 좋다.
노승은 일찍이 행각하면서 죽 먹고 밥 먹는
두 때만 잡된 마음에 팔렸을 뿐 별달리 마음을 쓸 곳이 없었다.
만약 이와 같지 못하다면 출가란 매우 먼 일이 될 것이다."
한 승려가 조주에게 물었다.
"무엇이 한 마디(一句)입니까?"
"그 한 마디만 붙들고 있으면 그대는 늙어빠지고 만다."
조주는 이어서 말했다.
"만약 한평생 총림(수도 도량)을 떠나지 않고 5년이고 10년이고 말을 하지 않아도
그대를 보고 벙어리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부처님도 그대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 목을 베어라."
조주는 임종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세상을 뜨고 나면 태워 버리되 사리 같은 걸 주우려고 하지 말라.
선승의 제자는 세속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
더군다나 이 몸뚱이는 헛것인데 무슨 사리를 챙긴단 말인가. 이런 짓은 당치 않다."
이래서 '청정한 승가에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라고 우리는 절을 한다.
/2015-10-08 05:28:41
조주의 행적
스님이 행각하면서 문답했던 선지식으로서 이 어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스님들은
마조, 백장, 약산, 도오, 위산, 임제, 대자, 동관, 운거, 투자, 수유, 보화, 동산,
낙포, 설봉, 한산, 습득, 풍간 등 대략 20여 명이나 된다.
이 가운데 임제스님과의 인연은 특이하다.
즉 두 분 스님은 출생한 곳도 같은 조주이면서 훗날 교화를 펴신 지역도 같은 진주이다.
스님은 나이 80이 되어 행각을 그만두고 고향 근방의 조주 관음원에서 청빈하게 살았다.
어록에 의하면 스님께서 처음 세속에 나왔을 때에 두행군이라는 신도가 스님께 절을 지어드리고서
진제선원 또는 두씨네 동산[寶家園]이라고 하였다 한다.
스님께서는 관음원에 주석하신 이후 오랫동안 이곳에 살면서
납자들을 지도하다가 120살에 입적하셨다.
스님의 입적 연대에 대하여 어록의 행장에서는
무자년(868 또는 928) 11월 10일에 단엄히 앉은 채로 입적하셨다고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전등록>의 기록에 따라서 당 건녕 4년(897) 11월 2일,
세수 120에 오른쪽으로 누워서 입적하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주스님의 행장이나 어록 등을 전하는 것으로는 <고존숙어록>제13권, 제14권 이외도
<조당집>제18권, <전등록>제10권, <연등회요>제6권,
<오등회원>제4권, <송고승전>제11권 등이 있다.
그런데 <고존숙어록> 속의 기록에 의하면
조주스님의 어록이 처음 정리된 것은 후당 보대 11년(953)이다.
또한 <고존숙어록>에서 물물대관이 쓴 重刊 序에 의하면 위색장주가 이것을 중간하면서
조주스님 등 20여 스님에 대한 기연을 따로 수집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모두 48권 중에서 조주 스님에 관한 것은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13권은 ‘조주진제선사어록 및 행장 권상’이라 제목 하였고
제14권은 ‘조주진제선사어록지여’라 하여 그 나머지를 싣고 있다.
제 14권의 끝에 있는 게송 중 십이시가 이외의 4수는 조주스님이 지은 것이지만 나머지 2수는
그 내용으로 볼 때 스님이 지은 것이 아니지만 스님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중간하면서 실은 것 같다.
이 어록에는 약 520여 가지의 기연들을 싣고 있는데
거의가 일상의 간결한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임제스님의 할이나 덕산스님의 방에 비견하여 조주스님의 선은 구순피선이라 평하기도 한다.
이 중에서도 유명한 조주스님의 무자공안은 종문의 제1공안처럼 보편화되어 있다.
또 ‘뜰 앞의 잣나무’ ‘청주의 베옷’ ‘진주의 큰 무’ 등의 공안도 조주스님의 인연에서 채택되었다.
<벽암록>100칙 가운데 조주스님의 인연에 관한 공안이 12칙이나 된다.
설봉스님이 조주스님을 가리켜 “고불 고불”이라 한 면목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다.
<선림고경총서>18. 조주록 상. 장경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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