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經/비파사나 수행

사념처 수행과 위빠사나 제1장 1. 위빠사나 수행의 정의

사념처 수행과 위빠사나 

2014-01-08 18:08:12

 

제1장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이해

 

1. 위빠사나 수행의 정의

위빠사나 수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괴로움이 있다는 것과 어떻게 하면 그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르침뿐입니다.

 

그럼 우리가 만나는 괴로움은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무명과 갈애라고 하셨습니다.

 

무명은 몸과 마음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실체가 없는 것인데도

몸과 마음은 영원히 존재하며 행복한 것이고 나의 것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는 몸과 마음을 내 것으로 집착하게 합니다.

즉 몸과 마음의 실상을 모르는 어리석음이 몸과 마음에 대한 갈애와 집착을 일으켜 모든 괴로움을 만듭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이와 같이 오랫동안 자신을 지배한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우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우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에 대한 무지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수행은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생긴 지혜로 지금 여기에서 다시 괴로움의 원인이 될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괴로움의 원인을 끊어 괴로움을 소멸하는 사성제의 고귀한 가르침입니다.

 

1. 위빠사나란 어떤 수행인가?

지금까지 잘 들어보지 못한 위빠사나라는 용어는 부처님 당시의 언어인 빨리어입니다.

vipassanā 에서 vi는 '분리하다'라는 뜻이며 pasanā는 '직관 통찰'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상을 분리해 놓고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을 말합니다.

 

위빠사나는 몸과 마음이라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우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나라는 관념으로부터 분리해서 그냥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알아차림’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대상을 볼 때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경험에 의한 정보를 가지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대상을 놓고 100명이 보면 100개의 견해가 나옵니다.

 

정말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이제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빠사나의 알아차림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행이란 몸身, 느낌受, 마음心, 법法이라는 네 가지 대상에 대하여

어떤 군더더기도 붙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지금까지 우리가 '나'라고 알고 있던 몸과 마음이 실제로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바르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있는 그대로 보는 ‘알아차림’이라는 마음의 작용은

오온의 수상행 중에서 행行으로 우리들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실제로 양 손바닥을 마주 대고 마음을 손으로 보내십시오.

현재 손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아차려보십시오.

이렇게 지켜보면 손에는 따뜻하거나 촉촉한 느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느낌을 지켜보는 순간에는 마음속에 다른 근심걱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근심걱정이 없는 마음은 고요하고, 이런 고요함은 몸과 마음이란 대상을 좀더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하며

몸과 마음이 가지고 있는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나’라고 알고 있던 무명을 깨고, 몸과 마음이 집착할 것이 아님을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글이나 말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닌 수행을 통해서 몸과 마음이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실체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면 점차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로 인한 갈애와 집착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와 집착이 줄어들면 그만큼 탐진치를 내는 힘이 줄어들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이 생기며 그만큼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괴로움의 원인을 심지 않게 됩니다.

 

2. 위빠사나 수행의 근거가 되는 경전

위빠사나 수행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대념처경이라는 빨리어 경전을 근거로 수행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 서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꾸루스 지방의 깜마사담마라는 마을에 머무셨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습니다.

비구들은 ‘네, 세존이시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중생을 정화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게 하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올바른 길에 도달하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길이다.

이것은 바로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

 

느낌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

 

마음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

 

그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이란 마음의 행위를 해서 자신을 정화하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마지막에 열반을 실현하게 하는데 수행의 목표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괴로움의 원인을 가르쳐 주시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로 팔정도,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팔정도를 실천하는 수행자는 모든 괴로움이 소멸한 궁극적인 행복인 열반을 얻어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 열반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은 있는 그대로 보는 알아차림을 어떻게 할 것인지입니다.

그래서 이론과 더불어 직접 수행을 하면서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가야 합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알아차림의 힘이 쌓이면 실제 생활에서 괴로움이 있을 때 알아차림을 하게 되고

어떤 괴로움도 법으로 당당히 받아들여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알아차림을 더욱 열심히 하려는 노력이 생깁니다.

이런 노력은 알아차림을 계속 이어가게 하며 알아차림이 이어지면 마음은 집중되고 고요해져 안정됩니다.

 

이런 안정된 마음에서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가 뒤따릅니다.

즉 수행은 믿음과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과 지혜라는 다섯 요소가 알맞게 균형을 갖출 때 발전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으로 생긴 지혜는 먼저 자신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고

또 함께 사는 가족과 이웃에게도 그 평온과 행복의 향기가 퍼져나가 나와 남이 모두 함께 행복해집니다.

 

3. 알아차림을 하는 순간에는 번뇌가 없다

그러면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이 욕망과 고뇌를 버리게 하여

괴로움을 소멸하는 유일한 길인데 어떻게 알아차림을 해야 하는가 알아봅니다.

 

알아차림이란 몸 느낌 마음 법의 네 가지 알아차릴 대상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반응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행위입니다.

 

즉 현재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좋아하거나 싫어함 없이, 선입견이나 고정 관념 없이,

붙잡거나 없애려하지 않고 사실대로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가짐입니다.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이 편안하고 바른 마음가짐일 때 알아차림이 가능해집니다.

 

만일 수행자가 어떤 현상을 바라거나, 싫은 대상을 없애려고 알아차림을 하면

그것은 바라는 것이 있는 마음가짐이라서 수행자를 들뜨게 하고 불안하게 하여 알아차림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제 알아차림을 어떻게 하는지 실제로 한 번 해 봅시다.

먼저 양 손바닥을 마주 대고. 눈을 살며시 감고 마음을 손바닥에 보냅니다.

그리고 마음을 계속 손바닥에 머물러 있게 합니다.

그리고 지금 마음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알아차립니다.

어떤 느낌을 알게 됩니까? 따뜻함, 축축함, 단단함, 부드러움, 점차 더워지는 열기, 열기의 변화 등등을 마음이 경험합니다.

 

이처럼 위빠사나 수행은 단지 몸이라는 대상에 마음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하여

마음이 저절로 알게 되는 느낌들을 그냥 단순하게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러나 지금 경험하는 느낌에 대하여 자신의 고정관념으로

어떤 개념이나 생각들로 사족을 붙이면 알아차림이 아니고 망상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 ! 다시 한 번 손바닥에 마음을 보내고 지금 알고 있는 느낌에 마음을 기울여 봅시다.

지금 경험하는 느낌들이 그대로 있는지 또는 느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얼마동안 그냥 지켜보십시오.

 

자, 이제 합장을 푸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이 손바닥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느낌에 마음을 집중하여 알아차리는 동안

마음속에 어떤 욕망이나, 괴로움, 불만족이 있었습니까?

무엇을 바라거나 근심 걱정을 했습니까?

사실 그런 생각들이 들어올 틈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오직 알아차림을 하고 있는 순간에는 마음에 근심 걱정이 없는 평화로운 순간이며

마음에 번뇌가 끼어들지 않는 깨끗한 상태가 됩니다.

 

저절로 계율이 지켜지며,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마음이 들뜨지 않고 고요해집니다.

그래서 더욱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집중과 지혜가 생깁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들은 현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동안 괴로움이 없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알아차리는 순간을 만들고 이어가고 늘려가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알아차림이 이어지는 동안 번뇌가 없기 때문에 괴롭지 않으며

또한 마음이 안정되니까 바르게 말하고 행동하여 선업을 행할 수 있고

이런 바른 말과 행동은 좋은 과보를 예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알아차림을 하는 순간이 행복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을, 그리고 궁극에는 완전한 행복인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번뇌를 완전하게 소멸하는 붓다의 수행법을 만난 이 인연을 잘 가꾸어서

나와 남이 모두 함께 행복하고 평온하며 궁극에는 열반을 성취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