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經/비파사나 수행

사념처 수행과 위빠사나 제1장 3. 관념과 실재

사념처 수행과 위빠사나

2014-01-08 18:12:08

3. 관념과 실재

 

1. 관념觀念과 실재實在

지금까지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아주 객관적으로 마치 남의 일처럼 또 관객이 영화 보듯이 대상에 개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데도 관념과 실재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관념은 몸과 마음을 형상, 모양, 이름 등으로 관념화한 것이며

실재는 몸과 마음에서 지금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관념은 선정수행의 대상이 되고 실재하는 느낌은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 됩니다.

둘 다 알아차릴 수 있는 법이기는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실재하는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관념은 세간법이고 실재하는 느낌은 출세간법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릴 대상은 법이며 이들은 물질의 법과 마음의 법과 마음작용의 법이 있습니다.

법은 모두 81가지로 81가지 각각의 법은

그 법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 있고 조건적 특성이 있고 무상, 고, 무아라는 보편적 특성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무상, 고, 무아라는 보편적 특성을 통찰한 결과로 깨달음에 도달하기 때문에

이 법을 궁극적 진리, 빠라마타 담마, 진제라고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관념과 실재의 구분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행자가 관념과 실재의 구분하지 못하면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고 앉아서 실재가 아닌 관념을 붙잡고 망상을 하면서도 그것을 수행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는 것은 이론을 듣고 사유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점차 구분이 확연해지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알아차릴 대상으로서 관념과 실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생활 속에서 관념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았기 때문에 관념과 실재를 구별할 필요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하려면 반드시 관념과 실재에 대하여 개념적으로라도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수행자가 한 대상에 몰입해서 근본 집중 상태로 들어가는 사마타 수행은 관념을 수행 대상으로 하지만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경험하는 느낌을 대상으로 그 느낌을 분리해서

느낌의 성품을 보는 위빠사나 수행은 실재가 수행의 대상이 됩니다.

 

실제로 수행을 할 때는 일차적으로 관념인 모양에 마음을 기울여서 마음이 안정되면

다시 실재인 느낌에 마음을 기울여서 성품을 보는 위빠사나 수행을 합니다.

그런 결과로 몸과 마음의 고유한 특성, 조건적 특성, 보편적 특성을 볼 수 있게 됩니다.

 

2. 관념

빨리어 빤냐띠는 관념입니다.

관념은 실재를 표현하기 위해 붙여진 세속적 개념이며 想. 相입니다.

그래서 빤냐띠는 세속의 진리, 속제俗諦입니다.

즉 실재하는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세간에서 사용하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 명칭, 숫자, 나이, 여성, 남성, 사람, 동물, 아름다움, 추함 등등으로

언어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은 모두 빤냐띠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의 실재實在는 그 순간의 물질과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지만 지금 말하고 행동하는

그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 아무개, 사람, 남자, 여자, 아름답다, 추하다, 옳다, 그르다 등으로 명칭을 붙입니다.

그러므로 시비 판단 분별하는 것이 모두 다 빤냐띠, 관념입니다.

 

이렇게 관념은 실재를 표현하기 위해 시설된 방편이라서 고정된 것이고 인위적인 것인데

우리는 실재를 보지 못하고 그 관념 자체를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시비분별을 일으키며 괴로움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소멸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위빠사나 수행은 관념 속에서 그 관념이 의미하는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념을 관념이라고 알 뿐 그 관념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실재한다는 것은 그 법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지금 여기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은 느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관념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관념은 이미 박제된 것으로 인식할 고유한 특성이 없는 것입니다.

 

또 관념은 한 번 생기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세간은 관념의 지배를 받습니다.

관념은 변화가 없기 때문에 관념을 대상으로 보는 사마타수행은

몰입이 가능하여 근접 삼매를 거쳐 근본삼매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몰입은 대상과 하나가 되어 다섯 가지 장애가 일어나지 못하게 막아서

초선에서 4선까지의 선정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청정도론에는 사마타 수행의 주제 40가지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표상인 이미지. 相, 想, 관념 즉 빤냐띠를 대상으로 하여

근본 집중을 한 결과 색계나 무색계 선정을 얻는 수행 주제입니다.

 

3. 실재

빠라마타는 자연적인 것, 근본법, 최승의법입니다.

불교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만 실재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만 실재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직접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법이라고 하며 빠라마타 담마, 궁극적 진리, 진제眞諦라고 합니다.

 

논장에서는 법을 4위 82법으로 분류합니다.

빠라마타 담마의 법은 마음識, 마음의 작용受, 想, 行, 물질色, 열반이 있습니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과 물질의 법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유위법이며 열반은 원인 결과가 없는 무위법입니다.

 

위빠사나가 빠라마타 담마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몸과 마음에서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실재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마음이 느낌을 통해서 직접 느끼고 아는 것입니다.

 

느낌은 매순간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느낌은 매순간 변하기 때문에 어느 한 대상에 깊게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찰나마다 올라오는 대상과 그 대상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찰나집중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대상과 아는 마음이 생멸하면서 흐르는 것을 알아차리면 번뇌가 없기 때문에

집중이 되면서 고요함이 생기고 찰나마다 변하는 느낌에서 무상과 괴로움과 무아의 법을 통찰하게 됩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처음부터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은 마음을 몸에 붙여서 몸의 움직이는 모양을 잡고 마음이 안정되면 몸의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힘이 쌓이면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이 원인과 결과로 흐르는 것을 파악하고 다시 물질과 정신의 변화에서

생멸의 법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이어서 괴로움과 무아의 법을 보게 된다고 이해해야합니다.

 

수행자가 몸과 마음이 무상, 고, 무아라고 자주 생각하는 것은

위빠사나의 지혜가 아니고 사유이며 이 사유는 탐진치라는 번뇌를 끊는 힘이 없습니다.

 

알아차림으로 직접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보고 이해할 때 탐진치를 끊어서 괴로움을 소멸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결과로 열반을 성취하기 때문에 빠라마타 담마는 궁극적 진리, 최승의법입니다.

 

4. 실제 수행에서는 관념으로 시작하여 실재를 알아차립니다.

관념과 실재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념 안에는 실재가 들어있습니다.

 

처음 수행을 시작 하는 단계에서는 모양이 분명하여 잘 잡힙니다.

수행자가 계속 빤냐띠인 모양을 알아차리다보면 마음이 안정되어 점차 느낌인 빠라마타가 인식됩니다.

이때 모양은 작아지고 느낌이 커집니다.

 

그래서 좌선이나 경행을 할 때

먼저 대상을 잘 잡을 수 있도록 모양에 마음을 기울이다가 집중이 되면 점차 모양에서 느낌 쪽으로 마음을 기울입니다.

 

그때부터 빠라마타를 대상으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빠라마타에 집중하면 빤냐띠는 사라지고 오직 실재하는 성품만 남습니다.

 

신념처에서 호흡을 볼 때 배의 일어나고 꺼지는 모양을 주 대상으로 보는 것은 마음을 호흡에 집중하기 위한 도입부분이고 마음이 호흡에 잘 집중이 되면 배의 모양은 사라지고 수축 팽창하는 느낌이 커집니다.

그러면 그 느낌을 대상으로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리면 빠라마타를 대상으로 하는 위빠사나 수행이 됩니다.

 

경행에서 발을 알아차릴 때 

발이 움직이는 모양을 대상으로 하면 빤냐띠를 보는 것이며

발의 움직임에서 무겁고 가벼운 느낌을 보면 실재하는 성품인 빠라마타를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손을 합장하면서 손의 모양을 보면

그것은 빤냐띠를 본 것이지만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알아차리면 실재하는 빠라마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또 식사할 때 고추를 먹으면서 고추다, 맵다라고 생각하면 대상의 명칭, 관념을 본 것이며 지금 혀에서 느끼는

고추의 매운 맛의 변화를 알아차리면 고추라는 물질의 고유한 특성인 매운 맛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좌선 중 호흡을 볼 때도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모양을 알아차리거나

일어남, 꺼짐 하면서 명칭을 붙이면 빤냐띠를 보는 것이며

그 뒤 마음이 호흡에 잘 집중되어 호흡의 밀고 당기는 느낌을 알아차리면

호흡의 빠라마타를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염불, 절, 화두 같은 수행은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 수행이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면 실재가 대상이므로 위빠사나 수행이 됩니다.

 

이와 같이 위빠사나 수행과 사마타 수행은 하나의 대상에서 대상의 모양을 보면서 근본 집중을 하는가,

대상의 느낌을 보면서 찰나 집중을 하는가에 따라 구별됩니다.

 

세간에서는 빤냐띠와 빠라마타를 구분하지 못하고, 빤냐띠가 전부인줄 압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모양과 명칭 또는 명분에 가치를 두고 모양을 갖추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것이 계속 윤회하는 세속의 진리, 속제이며 관념적 진리입니다.

 

그러나 출세간을 향하는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모양보다는 실재를 더 중요시합니다.

모양, 관념,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단지 빤냐띠, 관념이라고 알뿐

그 모양이 의미하는 실재에 가치를 둡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모양, 명칭, 명분이라는 관념의 그물에 걸리지 않습니다.

 

모든 관념 중 가장 괴로움을 주는 관념은 오온을 ‘나’라고 알고 있는 관념입니다.

‘나’라는 이름에서 그 실재인 오온의 법을 보지 못하여 ‘나’를 실재인양 착각하고 ‘나’를 집착을 하여 괴로움을 생산합니다.

 

만약 여름에 모기에게 물렸을 때 모기가 나를 물었다고 생각하면

즉시 모기와 연결된 다른 생각들이 일어나 결국 짜증을 내거나 근심걱정을 합니다.

이것은 자기 생각에 빠져 실재를 놓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실재하는 것은 따끔거림, 가려움 등의 느낌이며 그 느낌도 매순간 변하면서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리는 동안 모기라는 이름 때문에 괴로워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현재의 따끔한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해충이라는 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모기로 인해 손해를 보았다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물린 곳의 느낌을 알아차려 느낌의 변화를 보고 느낌의 생멸하는 성품을 봅니다.

 

수행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이것이 관념인지 실재인지 구별할 수도 없고 바로 관념에 빠져 망상만 합니다.

이럴 때 자신이 관념에 빠진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실재하는 몸의 느낌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수없이 거쳐야합니다.

 

이 과정에서 점차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는 힘이 생겨서

지금 경험하는 느낌을 법으로 보며 단지 알아차릴 대상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실재를 법으로 알아차리기까지는 오랜 시간 동안 꾸준하게 알아차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수행은 수없이 알아차림을 놓치고 그것을 다시 알아차리는 노력을 할 때 그 과정에서 알아차리는 힘이 쌓입니다.

이런 시행착오의 시간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며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관념이나 모양에 휘둘릴 때마다 ‘그랬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다시 그 순간의 몸으로 돌아와 실재하는 분명한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고정 관념의 그물에 걸리면 바로 자기 생각의 노예가 되어 고정관념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빤냐띠를 중요시하고 빠라마타를 가볍게 여기는데 이것을 무지라고 합니다.

 

우리의 괴로움은 대부분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하고 관념을 실재로 착각하여 관념의 그물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뿌리는 무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