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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비파사나 수행

사념처 수행과 위빠사나 제1장 2. 알아차림

사념처 수행과 위빠사나 제1장 2. 알아차림

2014-01-08 18:09:51

 

2. 알아차림

 

1. 알아차림의 의미

불교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며 그 방법은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며

팔정도는 알아차림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불교 수행의 핵심은 알아차림입니다.

 

sati라는 말은 vipassanā처럼 빨리어입니다.

이 단어는 기억과 알아차림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기억이라고 하면 지나간 과거를 기억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현재 이 순간에 대한 기억, 즉 마음이 깨어있는 상태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사띠를 알아차림, 마음챙김, 주시 등으로 혼용하고 있지만

한국 명상원에서는 알아차림으로 통일하여 사용합니다.

 

즉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서 보는 것,

즉 현재에 마음을 두고 지켜보는 것, 그래서 현재를 놓치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84000법문을 간추리면 37조도품으로 축약되며 이는 다시 8정도로 축약되고

8정도는 계. 정. 혜 3학으로 축약되며 계정혜 3학은 다시 알아차림 하나로 귀결 됩니다.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은 알아차림입니다.

매 순간을 알아차림으로 깨어있으면 번뇌거리가 들어와도 번뇌를 따라가지 않으므로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의 원인이 될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실천하면 이것이 바로 괴로움을 소멸하는 8정도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2. 알아차림의 대상

위빠사나 수행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알아차림이라는 마음의 힘을 계발하는 것인데

이때 알아차림의 대상은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이며

수행자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객관적으로 어떤 작용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알아차림은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마음을 두고 주시하는 것이며

또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알아차림이란 ‘할 때 하는 것을 아는 것’으로

지금 여기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몸과 마음을 깨어서 보는 것이지,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때 대상은 실재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 즉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이 대상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실재實在는 인식론입니다.

육근과 육경이 부딪쳐 지금 인식하는 것만 실재하는 것입니다.

 

세간에서는 존재하는 것을 모두 실재하는 것으로 알지만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실재로 취급합니다.

 

우리에게 항상 손이 있지만 지금 마음이 어떤 생각을 골몰히 하고 있다면

그 순간 손은 없고 생각이라는 정신적 현상이 있습니다.

이때는 지금 일어난 생각이 실재하는 것으로 알아차릴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다시 마음이 손을 느낀다면 이때 손의 느낌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실재가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것,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수행의 대상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것만이 알아차릴 대상이며, 법이며, 이 법에서만 찰나 생멸하며 흐르는 무상, 고, 무아의 법을 통찰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실재에서만 궁극적 성품인 무상, 고, 무아를 확인할 수 있지 실재가 아닌 관념에는 무상, 고, 무아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닦는 수행은 지금 일어난 물질적 현상이나 정신적 현상을 대상으로 합니다.

 

3. 알아차리는 방법

위빠사나의 알아차림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 렌즈가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담아오듯이

수행자도 대상을 사실대로 객관적으로 받아들여 아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대상에 대한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붙이지 않고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또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대상을 알아차립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영화의 줄거리에 자신의 생각을 개입할 수가 없고

다만 현재의 스크린에 마음을 두고 그냥 전개 되는대로 영화를 보기만 합니다.

나중에 영화가 다 끝나고 나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이처럼 수행자도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영화 보듯이

어떤 개입도 하지 않고 지금 나타나는 현상을 그냥 구경하기만 합니다.

이 말은 현재 자신이 경험하는 현상에 대해 좋고 싫고 하는 분별을 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여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매순간 나타나는 실재하는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 알아차리는 행위가 사띠,

알아차림이며 이것이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빠사나 수행의 시작입니다.

 

또한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항상 현재로 돌아와 알아차리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즉 알아차려야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길들여온 탐진치의 습성에서 벗어나

마음이 현재에 깨어있는 일을 하는 깨끗한 마음의 작용으로 오온 중에서 행온行蘊에 속합니다.

 

만일 마음이 알아차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마음은 항상 밖으로 나가서 지금 부딪히는 대상에 대하여

좋아하거나 싫어하며 탐진치의 습성에 힘을 실어줍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하면 대상을 알아차리느라 대상에 대하여 좋아하거니 싫어할 틈이 없습니다.

 

탐진치는 깨어있지 못하고 자기만의 정보인 느낌과 생각에 휘둘릴 때 일어나는 해로운 마음의 작용이며

알아차림은 깨어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유익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4.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가짐

알아차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가짐입니다.

수행자에게 원하는 마음, 성냄, 슬픔, 근심, 걱정이 있다면 그런 마음으로는 알아차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또 억제하지 않고

무엇이든 나타나는 대로 다 받아들여 차분하게 지켜보는 마음일 때 알아차림을 제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림과 노력과 집중의 균형으로 발전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력이란 힘을 주어 대상을 강하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현재를 알아차리려고 마음을 새로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을 하면 그만큼 집중이 생깁니다.

 

이런 바른 마음가짐을 갖기 위해,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몸과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립니다.

우선 몸이 긴장했는지 알아차려서 몸의 긴장을 풀어주고 마음에도 바라는 것이 있는지 알아차려서

마음의 긴장을 풀고 그래서 편안해진 몸과 마음으로 알아차림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현재 나타나는 대상을 가볍게 부드럽게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편안하게 이어지면 수행자는 몸과 마음이 안정되면서 계속 알아차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초보 수행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수행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수행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내 안에 잠재해 있는 탐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힘을 줄이려고 하는 것인데

오히려 수행을 하면서 수행이 잘 되길 바라고, 수행이 안 되면 싫어하고, 또한 수행이 잘 되면 아만심을 키웁니다.

 

수행을 하면서 오히려 탐진치의 성향을 키웁니다.

이것이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수행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입니다.

 

알아차림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대상을 만나면 그 순간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에 따라 좋은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은 버리는 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속에 있는 탐진치가 시키는 대로 행위를 했다면

수행은 이 탐진치의 거센 물살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알아차림이라는 새로운 마음의 습관을 만들어가는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탐진치를 벗어나는 수행은 처음에는 잘 안되게 되어있습니다.

이때는 잘 안 되는 것을 알아차려야하는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잘 안 되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바로 어리석은 마음이 시키는 탐욕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통증이나 망상 졸음 등을 없애려고도 하지 않고 집중이 잘 되기를 바라지도 않고

그냥 나타나는 대로 모두 알아차리고 지켜보기만 합니다.

 

수행자는 나타난 현상을 구경할 의무가 있지 어떤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현재 나타난 대상은 그것이 좋은 것이나 싫은 것이나 간에 다 알아차릴 대상으로 할 뿐입니다.

 

비록 망상이나 통증이나 졸음이라도 나타나는 대로 알아차려주면

이 과정에서 인내하는 힘과 알아차리는 힘이 쌓여갑니다.

그래서 이런 원하지 않는 현상이 바로 수행을 도와주는 친구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시비, 선악, 좋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이런 판단 분별은 관념이며 망상입니다.

그것의 실재는 시비 분별하는 마음이 한 순간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만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현상들은 수행자에게는 오직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5. 수행에서 알아차림이 하는 역할과 이익

첫째, 알아차림은 "안이비설신의" 의 6군데 감각기관을 지키는 문지기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보통 육문에 부딪치는 대상을 받아들일 때 좋은 것은 탐심으로 싫은 것은 성냄으로 반응합니다.

그런데 알아차림은 육문에서 대상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마음의 작용이므로

당연히 육문으로 들어오는 탐욕과 성냄을 막아줍니다.

 

만일 이때 육문에 알아차림이 없다면

그 순간 탐진치가 주인이 되어 계율과 마음의 고요함을 도둑맞고 번뇌에 빠지고 맙니다.

 

둘째, 알아차림은 불선업을 선업으로 바꾸어줍니다.

당연히 지금 탐진치가 일어날 때 그것을 알아차리면

즉시 탐진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알아차리는 마음이 일어나서 관용 자애로 선한 말과 행위를 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없으면 그냥 탐진치가 시키는 대로 불선업이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하는 순간이 바로 선업을 행하는 순간이 됩니다.

 

셋째, 알아차림이 있으면 계율을 지키게 되고 그 결과 마음이 안정되어 정定을 만듭니다.

이 상태에서 바른 견해인 지혜가 생기고, 이런 작은 지혜들이 모여서 궁극에는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이 계정혜 3학의 시작이며 결국 해탈열반으로 향하는 첫걸음입니다.

 

넷째, 알아차림은 몸과 마음의 자연적인 성품을 보게 합니다.

마치 관객이 영화를 그냥 열심히 보면 영화가 끝날 때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처럼

수행자가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계속 지켜보면, 몸과 마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게 됩니다.

 

즉 몸과 마음은 매순간 변하는 무상한 것이고 집착의 대상으로 괴로움이고

이것을 조종할 수 있는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는 성품을 통찰하게 됩니다.

이런 통찰지혜는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그만큼 괴로움도 줄어듭니다.

 

6. 알아차림이 잘 안 되는 이유

첫째, 몸과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며 감각적 쾌락을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알아차리려는 의도를 내지 않습니다. 그 바탕에는 알아차리면 무엇이 좋을까 라는 의심이 깔려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알아차림을 해보면 알아차림 없이 행위를 할 때는 반드시 괴로움이 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하는 일이 결코 시시하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둘째, 그동안 살아오면서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 본적이 없어서 알아차려야 하는 것을 자꾸 잊어버리고

또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보지 못하고 바로 나의 몸과 마음으로 집착해서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그러나 놓친 것을 다시 알아차리면 그만큼 알아차리는 힘이 쌓여서 알아차림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셋째, 아직 알아차리는 힘은 약하고 탐진치를 일으키는 힘은 강해서 알아차림을 하다가도

대상에 휩쓸려서 알아차림을 놓쳐버립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좌선 한 시간 동안에 '한 호흡'만이라도 제대로 알아차려 보아야 합니다.

제대로 알아차린 한 호흡이 두 호흡 세 호흡으로 늘어나면서 알아차리는 힘이 차츰 쌓입니다.

 

7. 알아차림을 잘하려면

첫째, 알아차림을 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 방법으로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 "지금 자세는 바른가?"

"지금 내 몸이 무엇을 하는가?" 하고

항상 현재의 몸과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여서 현재의 몸과 마음을 직접 알아차려야합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마음을 몸에 붙여서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알아차리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일어나고, 세수하고, 식사하고, 이야기하며, 걸으며, 앉으며, 운전하며,

집안 일 등등을 하면서, 현재의 상황을 자주자주 지켜봅니다.

 

그러다가 이 과정에서 불쑥 일어나는 마음이나 생각이나 느낌이 있으면 그것을 다시 알아차립니다.

이런 과정을 착실하게 닦을 때 알아차리는 힘이 길러지며

점차 알아차리는 것이 능숙해지면 나중에는 저절로 알아차림이 따라 다니게 됩니다.

 

둘째, 알아차림을 한 뒤에는 알아차린 대상에 대해서는 "그랬구나"하고 시비是非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알아차린 뒤에 알아차렸다고 좋아하거나, 알아차림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등등을 생각하며 시비하고 판단 분별하면 이미 그 순간 알아차림을 놓치고 망상에 빠진 것입니다.

 

이미 지나간 현상을 붙잡고 시비를 하면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사실대로 '그랬네!' 라고 알고 놓아버리고

바로 지금 새롭게 나타난 대상을 다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몸과 마음은 계속 조건에 의해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알아차릴 새로운 대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것은 놓아버리고 현재의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하고

그 원인을 알려고 하는 것도 그 순간 망상에 빠진 것으로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셋째, 알아차림에는 마침표가 없습니다.

알아차림은 항상 이어져야합니다.

알아차릴 대상은 현재라는 시제 속에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현재의 대상을 다시 알아차려서 알아차림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대상이라도 마음이 과거의 대상에 머물러 있으면 그 대상을 집착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마침표를 찍고 알아차림을 놓쳤다면 다시 그 상황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현재를 다시 알아차린 순간 이미 알아차림을 놓친 과거는 사라지고, 알아차림을 하는 현재가 있습니다.

 

아무리 늦은 알아차림이라도 알아차리면 그만입니다.

이미 알아차림을 놓친 과거는 실재하는 것이 아닌데 다시 그것을 붙잡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항상 알아차림이란 티켓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이 티켓은 지고의 행복인 열반, 깨달음, 윤회의 종식, 불사不死의 문으로 들어가는 티켓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