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哲學/中國哲學

논어論語

논어論語

유교儒敎의 根本文獻

 

논어는 유가儒家의 聖典이라고도 할 수 있다.

四書의 하나로 중국 최초의 어록語錄이기도 하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 孔子의 가르침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옛 문헌이다.

공자와 그 제자와의 문답을 주로 하고 공자의 발언과 행적 그리고 高弟의 발언 등 인생의 교훈이 되는 말들이 간결하고도 함축성 있게 기재되었다.

 

<논어>라는 書名은 공자의 말을 모아 간추려서 일정한 순서로 편집한 것이라는 뜻인데 누가 지은 이름인지는 분명치 않다.

편자에 관해서는 숭작참崇爵讖의 子夏 등 64弟子說,

정현鄭玄의 중궁仲弓 ·자유子游· 자하子夏설,

정자程子의 증자曾子 ·유자有子의 제자설,

그 밖에 많은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현존본은 <학이편學而篇>에서 <요왈편堯曰篇>에 이르는 20편으로 이루어졌으며

각기 편 중의 말을 따서 그 편명篇名을 붙였다.

 

<학이편>은 인간의 終身의 業인 학문과 덕행을,

<요왈편>은 역대 성인의 정치 이상을 주제로 하였다.

 

이처럼 각 편마다 주제가 있기는 하나 용어가 통일되지 않았고 같은 문장의 중복도 있다.

특히 前半 10편을 上論, 후반을 下論이라고 하는데 그 사이에는 문체나 내용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성립

 

<孟子> <荀子> 등 옛 문헌에는 공자의 말이 ‘공자왈’ ‘중니왈仲尼曰’ ‘전왈傳曰’이라고 인용되었으나

그것이 논어에 기재된 것과 반드시 같은 것도 아니며 또 논어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제시하는 기술記述도 없다.

 

그러나 한漢나라 때에는 제齊나라 학자의 <제론齊論> 22편,

노魯나라 학자의 <노론魯論> 20편이 전해졌고

따로 공자의 옛집의 벽 속에서 <고론古論> 21편이 나왔다.

 

한漢의 장우張禹는 제 ·노 양론을 교합校合하여 <장후론張侯論> 20편을 만들었고

이어 후한後漢의 정현鄭玄(127-200)은 이 3가지와 고론을 교합하였다.

 

이 정현본鄭玄本을 바탕으로 위魏의 하안何晏이

<논어집해論語集解>라는 주석서註釋書를 저술함에 이르러 현존본의 원문이 결정되었다.

 

근대에 와서 내외의 학자들이 공자의 가르침의 근본을 추구하여

여러 각도로 논어의 문헌을 비판하고 논어성립까지의 傳承系統을 탐색하였다.

한편 한漢나라까지의 증보增補의 경과를 더듬는 등 많은 가설假說을 내세우고 있으나 아직 정설定說은 수립되지 않았다.

 

<논어>가 공자 자신의 손으로 기록 정리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런 사실은 <논어>라는 책 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양梁나라의 황간皇侃은

“이 책은 공자의 문인에게서 나온 것이다.

먼저 자세히 따진 뒤에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한 뒤에야 기록했으므로 ‘論’이라 하였다.

‘어語’란 논란에 대해 대답하고 설명한다는 말이다.”라고 말하였다.

 

원元나라의 하이손何異孫은 ‘논어’가 “글 뜻을 토론한 데서 생긴 이름”이라 했고

청淸나라의 원매遠枚는 “논이란 의논이란 뜻이며 어란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라고 풀이해서 의견이 다양하다.

 

►내용

 

엄밀히 말하면 어느 정도로 공자 본래의 가르침을 전하는가가 문제다.

하지만 이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논어가 불가결한 문헌임에는 틀림없다.

논어의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수사修辭의 묘를 얻어 함축성이 깊다.

또한 문장 간의 연계가 없는 듯 하면서도 깊이 생각해보면 공자의 인격으로 귀일歸一되어 있다.

 

공자의 불요불굴不撓不屈의 구도求道의 태도, 관용寬容 중에서도 사람을 이상선理想善인 ‘인仁’으로 이끌고야 마는 교육,

그리고 공자를 중심으로 하여 겸허謙虛한 안연顔淵, 직정直情의 자로子路, 현명賢明한 자공子貢,

그 밖의 제자들의 각기 개성에 따른 상호간의 독려 등 중국에서는 처음으로 人道主義 사상과

자각자율自覺自律의 道德說을 제시한 孔子學團의 활동이 잘 묘사되었다.

모든 내용이 인생 경험의 깊은 영지英智의 結晶으로 음미할수록 가치가 있는 교훈들이다.

 

►원전 요약

 

<논어>는 공자의 말을 어록의 형식으로 기록한 유학의 경전으로 <四書>의 하나이다.

공자는 천하를 경영하려는 꿈이 어긋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 교육에 전념하였는데

<논어>에는 제자들과의 대화 속에 나타난 공자의 사상과 풍모가 잘 그려져 있다.

 

그는 인력으로 어찌 해 볼 수 없는 거대한 시세의 흐름을 마주하고 좌절하여 그저 한숨만 쉬지 않았다.

공자는 항상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반문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깨달아 아는 일이 곧 “知命”이다.

그래서 공자는 “命을 모르면 군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공자는 많은 공부를 하여

“夏의 예를 내가 직접 설명할 수 있지만 기나라(하나라 후손국)에 충분한 증거가 남아있지 않고

은의 예를 내가 직접 설명할 수 있지만 송나라(은나라 후손국)에 충분한 증거가 남아있지 않다.

만약 문헌만 충분하다면 나는 그것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자부심을 가질 정도였다.

그러면서 하와 은의 예[문화]에서 감손 증익된 내용[損益]을 고찰하면

“앞으로 백 세대 후의 문화라도 알 수가 있다”고 말하였다.

 

공자는 향당에서는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인양 공손했고 종묘나 조정에서는 분명한 말을 하되 어디까지나 삼갔다.

조정에서 상대부들과 이야기할 때는 중용을 지켜 치우치지 않았으며 하대부들과 이야기할 때는 화기애애하였다.

공문을 들어갈 때는 몸을 움츠렸으며 빠른 걸음으로 나아갈 때도 새가 날개를 펴듯 단아하였다.

 

임금이 불러 외빈 접대를 맡기면 낯빛을 장중히 했고

재직 시에 임금이 命으로 부르면 수레가 채비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달려갔다.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

 

또 상喪을 당한 사람 옆에서 식사할 때는 포식한 적이 없었고 곡을 한 그 날에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상복 입은 사람이나 소경을 보면 비록 어린아이이더라도 낯빛을 고쳤다.

 

이와 같이 스스로 하늘 아래 부끄러움이 없기를 스스로 찾아 행하는 삶을 보임으로써

제자와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남긴 사람이 곧 공자였고 그 내용이 곧 <논어>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원전 해설

 

<논어>에서 ‘學’이라는 글자를 중심으로 논해지는 사상은 바로 오늘날 ‘학문’의 의미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

공자는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志於學)”고 말하였다.

 

또 <논어>에는

박학이독지博學而篤志 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

‘널리 배워 뜻을 돈독하게 하며, 절실하게 질문한다.’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

‘배움만 있고 생각이 없으면 망령되고 생각만 있고 배움이 없으면 위태롭다’는 말이 있다.

 

이때 질문과 생각은 학문의 ‘問'에 대응된다.

즉 <논어>는 어떤 지식이든 항상 의문과 의심을 가지고 비판적으로 접근할 때에만 참된 나의 지식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학문이란 세상의 道에 대해 배우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통해서 도를 배우지만 세상에는 아직 그 도가 온전히 실현되어 있지 못하다.

도가 실현되어 있는 사회상은 우리의 이상 속의 유토피아일 뿐이다.

현실 속의 인간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직 “도가 실현되어 있지 않다.”

공자의 시대에는 특히 무도無道의 상태가 심했다.

 

그런데 세상에 도가 없기 때문에 도를 세우려는 노력이 유의미하게 된다.

즉 혼란한 세상을 개혁하여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도를 세우는(有道)” 일이다.

 

요즘 말로 설명하면 법이 공평하게 제정되고 제정된 법은 공평하게 집행되어서

원칙과 상식이 통하고 편법과 반칙이 통하지 않는 그런 사회가 “도가 서 있는 사회”이다.

 

또 <논어>의 중요한 사상이 正名論이다.

공자는 “모난 술잔(名)이 모나지 않으면 그것이 모난 술잔인가! 모난 술잔인가!”라고 말하였다.

 

이 말은 “털 공에 털이 없으면 그것이 털 공인가?”라는 의미이다.

털이 있는 공이 ‘털 공(名)'이듯이 그 ‘명'에는 그에 부합한 ‘實'이 있어야 그 ‘명'은 성립한다.

 

공자의 정명 해석에서 名은 군·신·부·자 등 신분질서를 지칭하는 이름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결국 명은 모든 개념을 포함하게 된다.

 

왜냐하면 신하가 신하답게 되기 위해서는 “忠” 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자식이 자식답게 되기 위해서는 “孝” 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자는 <논어>에서 “君君, 臣臣, 父父, 子子” 뿐 아니라

孝孝, 仁仁, 直直, 義義, 禮禮 ··· 등도 논하고 있다.

 

즉 모든 ‘명(개념)'에는 그 ‘명'에 어울리는 ‘실'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예컨대 不義를 저지르고 그에 대해 “정의”라고 이름을 붙인 경우가 不正名이다.

 

정치를 맡기면 무엇부터 하겠느냐는 질문에 공자는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正名)”고 하였다.

당시 불의한 일에 대해 “정의”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공자는 그것을 “불의”라고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논어>는 군자 개념에 대한 많은 분석을 하고 있다.

공자는 말하기를

“바탕(質 진실한 감정)이 형식(文 예의범절)을 압도하면 거칠고 형식이 바탕을 압도하면 태깔만 난다.

문질빈빈文質彬彬(형식과 바탕을 잘 어울러야) 비로소 군자다”라고 하였다.

즉 진실된 마음(質)을 바탕으로 예(文)를 행할 수 있어야 군자이다.

 

<논어>에서 “군자”는 대체로 “소인”과 대비되어 논해지고 있다.

군자와 소인은 우선 다음 두 맥락에서 나누어진다.

 

첫째, 정치적 사회적 계급적 의미에서 ‘군자'는 통치자(귀인)이고 ‘소인'은 피통치자(천인)이다.

둘째, 도덕적인 의미에서 ‘군자'는 국가·사회의 이익에 우선 관심을 갖는 도덕적인 인물을 지칭하고

‘소인'은 자기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 갖는 부도덕한 사람을 지칭한다.

 

공자는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잇속에 밝다”고 하였다.

이 말을 정명론으로 이해하면

“어떤 개인의 명목상의 위치가 어떻든 의리를 추구하면 군자이고 잇속에 탐닉하면 소인이다”는 뜻이 된다.

 

“군자”에 대한 공자의 논의의 특징은

군자가 우선 그에 어울리는 도덕적 품성을 갖추어야 비로소 정치적 사회적으로 진정한 군자가 된다는 주장에 있다.

 

공자는 군자의 덕성으로 仁을 논했다.

“殺身成仁한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인은 쉽게 이룰 수 없는 최고의 덕목이다.

또한 인은 효孝, 충忠, 지혜(智), 용기(勇), 예禮, 공恭 등 모든 덕목을 포괄하는 완전한 덕(全德)에 대한 이름이다.

 

공자는 당시 사람들이 예에 따라 행하지 않는 까닭을

모두가 그들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자신의 욕구에 따라 행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예를 실천(復禮)'하려면 반드시 ‘극기克己'해야 한다.

‘극克'이란 싸워 이긴다는 뜻이므로 ‘극기'는 ‘예'로써 자기의 욕구와 싸워 이기려는 것으로서

‘극기'할 수 있다면 자연히 ‘예를 실천'하게 된다.

 

인이란 우리 마음이 진실하면서도 예에 맞는 발로이니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을 헤아리는 것(推己及人)을 말한다.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을 헤아리고”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인을 실천하는 방법은 이처럼 간단하다.

그래서 공자는 “인이 멀리 있다고 여기는가? 내가 인을 바라기만 하면 인은 바로 곁에 있다”고 말했다.

 

당시 통치계층의 기초를 구성하며 장차 그 영향력을 사회전체로 확대해 나갈 수 있는 계층이 바로 당시 선비 계층이었다.

공자가 보기에 세상의 비극은 대체로 윗사람들 특히 최고 통치자의 잘못에서 비롯된다.

윗사람들이 예의도 염치도 없이 사리사욕에 따라 불의를 일삼음으로써 민생을 파탄에 빠뜨린 결과이다.

즉 비극의 원인은 통치계층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한 데 있었다.

그러므로 통치계층의 기초를 형성하는 선비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증자는 말하기를

“선비는 의로운 기상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仁의 실현을 자기 임무로 삼으니 무겁지 않은가?

죽은 다음에야 그만 두나니 멀지 않은가?” 하였고

 

공자는 말하기를 “선비로서 가정(안락한 생활)을 동경한다면 선비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선비란 결코 “놀고먹는” 사람들이 아니고

국가적 대사에 몸을 바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공자 문하에서 자로가 그 대표였다.

 

‘자로'라는 인물은 <논어>에 나오는 ‘은자'처럼 순수하고 순정한 그 마음을 가지고

세상으로부터 도피한 것이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로 뛰어든 인물이었다.

 

또 중국 전통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일찍부터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인간 위주의 안목을 견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鬼神에 휘둘리지 않는 태도는 공자 이전부터 정립되기 시작했다.

 

춘추 시대 정자산은

“天道는 멀고 人道는 가까운 것이어서 양자는 서로 상관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어떻게 천도로 말미암아 인도를 알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천도는 누구도 쉽게 추측할 수 없는 일이나 인도는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되는 내용이다.

그런데 추측하기 어려운 영역의 어떤 일을 누가 임의로 해석한 다음

그런 해석을 바탕으로 人道를 제약하려는 발상은 그 자체로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을 기반으로 공자는 비록 말로는 하늘에 관해

“죄를 짓고” “증오하고” “속이고” “버리고” “알아주고” “말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지만

인격적인 기능을 가진 존재로는 여기지 않았다.

 

공자는 천명을 두려워했고 천명을 따랐다.

그런데 ‘천명'의 구체적 내용은 고대 문헌 어디에도 규정된 바가 없다.

그러므로 결국 인간 스스로 모색한 어떤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체적 환경 속에 처한 구체적 인간이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것이 천명일 따름이다.

 

따라서 자기 스스로 모색한 어떤 것을 자기 자신이 어겼다면 다시 또 어디 가서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공자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고 말했다.

 

공자가 말한 천명은 큰 뜻을 품은 사람이 작은 시련에 좌절하지 않고

의연히 앞길을 개척하려는 스스로의 다짐의 반영인 셈이다.

 

“천명(운명)을 아는 사람은 위태로운 담장 아래 서지 않는다”는

맹자의 말은 바로 공자의 사상을 정확하게 대변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전래

 

유교의 경서는 많지만 그 중에서 논어는 효경孝經과 더불어 한漢나라 이후에 지식인의 필수 서책이 되고 있다.

그 해석의 전거典據가 된 것은 <논어집해論語集解>(古註라고도 한다)이다.

송宋나라 때에는 유교의 孔孟思想에 의한 집주集註 統一化가 이루어졌다.

 

특히 주희朱熹(주자 1130-1200)가 <四書>로 추존推尊하고 이를 통일하여

<논어집주論語集註>(新註라고도 한다)를 저술한 후에는 이것이 고주에 대체되었다.

중화민국 초기에는 舊文化 개조를 위하여 孔敎 ·논어 비판이 행하여졌다.

 

그 후에도 계속되고 있으나 연구가 지속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한국에도 일찍부터 도래渡來되어 한학漢學의 성행으로 널리 보급되고 국민의 도덕사상 형성의 기본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 유교가 전해진 것은

중국과의 접촉이 활발해지고 통치질서와 정치윤리에 대한 요구가 드높아가던 삼국시대였다.

<논어>도 이 무렵에 전래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삼국사기>에는 642년에 竹竹이라는 화랑이 인용한 <논어>의 구절이 보인다.

설총薛聰이 九經을 이두로 읽었으며

강수强首가 불교보다 유교의 도리를 배우겠다하여 뒤에 외교문서 작성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사실은

유교적 교양의 바탕인 <논어>가 당시에 이미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증거 한다.

 

682년(신문왕 2) 국학이 체계를 갖추었을 때 <논어>를 가르쳤으며

그 뒤 讀書三品科로 인재를 선발할 때도 <논어>는 필수 과목이었다.

 

고려조에 들어와 文廟와 석전의 의례를 갖추는 한편 사회적·정치적 제도를 정비한 성종은

990년(성종 9) 서경에 修書院을 설치해 전적과 문헌을 수집하게 했는데 물론 <논어>도 여기에 收藏되었다.

이 무렵 서적의 인쇄와 역사서 편찬 그리고 궁중의 경연이 성했는데 <논어>는 경연에서 자주 거론된 경전이었다.

 

조선시대는 五經보다 四書를 중요시하는 주자학이 사상·문화 전반의 이념으로 등장하였다.

따라서 사서의 중심인 <논어>는 시골 벽촌의 어린 학동들까지 배우게 되었다.

 

이황李滉은 논어의 훈석訓釋을 모으고 제자들과의 문답을 채록해 <논어석의論語釋義>를 지었다.

이 책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그의 문인 이덕홍李德弘의 <사서질의四書質疑>가 그 면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 뒤 학자들의 주석이 수없이 많지만

대개는 단편적인 글귀에 대한 나름의 의문과 해석 아니면 공자의 인격에 대한 찬탄에 그치고 있다.

 

漢·唐의 훈고와 宋·明의 義理에 매이지 않고 문헌 비판적·해석학적 방법론에 입각해

<논어>를 해석한 저작이 정약용丁若鏞의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이다.

 

한대에서 청대에 이르는 중국의 거의 모든 학자들과

우리나라 선비 그리고 일본의 연구 성과까지 검토, 비판해 독자적인 주장을 폈다.

 

논어의 첫 간행은 1056년(문종 10)으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논어>를 포함한 비각소장祕閣所藏의 제 경전을 여러 學院에 나누어 두게 하고 각각 한권씩 찍어냈다 한다.

이어 1134년(인종 12)에는 이것을 지방의 여러 학관에 나누어주었다.

 

조선시대에 세종은 주자소를 건립하고 <논어>를 포함한 다량의 서적을 간행해서 각 지방에 보급하였다.

한문으로 된 경전을 우리말로 풀어 이해하기 쉽게 하려는 노력은 전래 초기부터 있어 왔다.

 

설총이 “方言으로 九經을 풀이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말의 정몽주鄭夢周와 권근權近은 각각 <논어>에 토를 달았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다음 전문기관을 설치해 경전의 음해音解를 찬하게 하였다.

세조 때에는 口訣을 정했고 성종 때에 유숭조柳崇祖가 <언해구두諺解口讀>를 찬집하였다.

 

선조는 이것이 미비하다 하여 1581년(선조 14) 이이李珥에게 명해 사서와 오경의 언해를 상정詳定하게 하였다.

사서는 1593년에 이이의 손으로 완성되었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졌다.

이들 언해는 불완전한 번역이었으나 순한문본과 함께 널리 이용되었다.

 

구미歐美 각국에도 연구서나 번역서가 많으며 최근에는 미국에 특히 많다.

 

►<논어> 목차

 

제1편 학이學而

제2편 위정爲政

제3편 팔일八佾

제4편 이인里仁

제5편 공야장公冶長

제6편 옹야雍也

제7편 술이述而

제8편 태백泰伯

제9편 자한子罕

제10편 향당鄕黨

 

제11편 선진先進

제12편 안연顔淵

제13편 자로子路

제14편 헌문憲問

제15편 위령공衛靈公

제16편 계씨季氏

제17편 양화陽貨

제18편 미자微子

제19편 자장子張

제20편 요왈堯曰

'哲學 > 中國哲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어論語 제2篇 위정爲政  (0) 2023.06.25
논어論語 제1篇 학이學而  (0) 2023.06.25
공자 생애 해설  (0) 2023.06.24
공자의 생애와 사상  (0) 2023.06.24
공자의 그 밖의 제자들  (0) 2023.06.23